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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자유는 내가 찾는다

[사람 사는 이야기] 조윤경 장애인 푸른 아우성 대표이사

본문

   
▲ ⓒ채지민 객원기자
● ● ● 우리가 가장 잘 알면서도 가장 모르고 있는 건 무엇일까? ‘가장 잘 아는 것’과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이 전혀 다른 대상일 때가 많지만, 동일한 한 가지를 의미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말장난 같지만, 그게 현실이고 인생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자아(自我)’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 삶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대상도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가장 잘 아는 것’과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이 동일할 경우, 우리는 손쉽게 자신감을 표출하면서도 제일 먼저 그 대상을 감추려 하는 양면성을 동시에 지닌다. 더 많이 드러내려 애를 쓰면서도, 그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도록 꽁꽁 감싸두는 자기모순을 반복하는 것이다. 가장 많이 접하면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척하기도 한다. 그 대상에 관해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실체를 설명하라면 자신의 무지함이 드러날 만큼 정리되지 않을 때도 많다.

● ● ● 그럼 이 시점에서 문제 아닌 문제 하나를 내겠다. 다음의 문장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잘 모른다고 솔직히 고백하면, 순진한 게 아니라 어리다고 취급 받는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해야 하는데, 필요한 답을 구할 수 없기에 대강이라도 아는 척하며 지내야 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잘 아는 걸 잘 안다고 공개하면, 똑똑한 게 아니라 ‘밝힌다’는 딱지가 붙는다. 아는 만큼 그 내용을 얘기하는 게 당연한데, 주위의 시선은 오히려 따갑고 서늘해진다. 양지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눠야 하는데, 음지를 찾아 목소리 낮추며 소곤거려야 한다. 제일 알고 싶은 대상인데도, 전혀 관심이 없는 척 물러나 있어야 한다. 도대체 이건 뭔가? 무얼 얘기하는 걸까?

이미 하나의 단어를 떠올린 분들이 많으실 거라 미리 짐작해 본다. 그렇다. 답은 ‘성(性)’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고 있는, 가장 많은 관심을 품으면서도 그 관심을 해결하지 못하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가장 큰 갈증을 느끼면서도 아닌 척 무관심의 가면을 써야 하는, 그런 대상이 바로 성(性)이다. 앞에 언급했던 ‘가장 잘 아는 것’과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은, 그렇게 야누스의 얼굴을 지니고 우리와 24시간 함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성(聖)스럽고 아름다운 게 성(性)이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통해 태어났고, 그 과정을 거치며 스스로를 닮은 2세를 창조한다. 성(性)은 본능이고 생활 그 자체이며, 세상의 모든 양성(兩性)을 지배하며 밀고 끌어당기는 힘을 부여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성(異性) 때문에 모든 일이 행복해지기도 하고,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성(性)은 그런 것이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0%의 무관심이라 말할 수 없는, 인간적인 관심도 측면에서는 100% 기준에서 가감을 헤아릴 만한 분야인 게 바로 성(性)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성(性)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은 누구한테 있는가? 당연히 ‘인간’에게 있다. 여기엔 동양인과 서양인, 부유층과 중산층 따위의 구별이 존재할 수 없다. 성(性)은 인간의 기본 권리이며, 삶 그 자체의 의미를 갖는 절대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대목에서 가장 쓰기 싫은 표현인 ‘그러나(but)’라는 단서가 등장해야 한다. ‘그러나(but)’에 해당되는 대상은 누구인가? 성(性)마저도 예외로 존재해야 하는, 열외의 존재임을 강조당해야 하는 이들은 누구라는 걸까? 필요 이상 길었던 서론은 이 정도에서 접고, 속 시원한 대답을 듣기 위해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듯하다.

    ▲ ⓒ채지민 객원기자 ‘자제분’이었던 어린 시절
조윤경 - 한국 장애인 성문화 네트워크 대표, 장애인 푸른 아우성 대표이사, 그것 이외에도 몇 가지 직함이 더 있는 분.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는 그를 만나러 나섰다.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직접 만난 적이 없다면 먼 거리에서나마 바라본 적이 있었던 인물이 분명하다고 짐작됐다.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답이 나왔다. 그동안 각종 행사나 집회를 통해 몇 차례나 마주쳤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첫 인상부터 환한 웃음을 남기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약속장소인 서울 지하철 4호선 쌍문역 인근에서 만나, 그의 사무실까지 십여 분 거리를 이동했다. 골목 안쪽에 위치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정말 바빠서 열흘만에 여기에 오는 거라 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의 얼굴이 심하게 찡그려졌다. 열흘 동안 이 사무실을 대신 썼던 다른 동료들이 실내 정리를 하나도 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취재를 위한 손님이 왔는데 집 안이 엉망이니, 그의 마음이 좋을 리 없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당장 휴대전화를 통해 몇 마디의 ‘따끔한’ 지적이 전달되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 통화가 이어지는 사이에 대신 정리를 했는데, 더 정리해야 되지 않겠느냐 묻기에 괜찮다고 했다. 때로는 ‘있는 그대로’가 더 자연스러울 때가 있지 않은가. 지금이 그런 경우였다.

둥근 탁자에 마주앉아 첫 질문을 던졌다. 뇌병변장애 1급이 맞다고 했다. 이 질문부터 전한 이유는 그의 표정과 발음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불편함이 적은 부분은 목 위에 모여 있다며, 태연하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연신 미소가 피어올랐다. 엄마의 양수가 빨리 터져서 뇌에 산소 공급이 안 됐고, 그래서 두 달 정도 일찍 미숙아로 태어났단다. 태아가 양수를 먹은 게 아니라 양수가 자꾸 빠지니까 산소가 부족해졌고, 그래서 운동신경을 다치게 된 거라 한다.

“부모님이 저의 장애를 인지하신 건 두 돌이 지난 다음이래요. 그때까지는 사람들이 좀 늦다는 점만 얘기했고 병원에 가도 좀 늦다고만 하니까, 목을 못 가눠도 그런가 보다 했나 봐요. 그런데 증상이 걱정될 상황으로 변하자, 작명소에 가서 어떻게 하면 고개를 가누겠냐고 물어서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됐대요. 그래서 호적에는 조OO라고 원래 이름이 있고, 저한테는 조윤경이라는 새 이름이 생겼죠.

그런데 제가 항상 농담하듯이 말하는 게 있어요. 그때 만약에 부모님이 ‘어떻게 하면 건강해지겠냐’라고 물어보셨다면, 그래서 이름이 달라졌다면 저의 장애가 좀 낫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떻게 하면 고개를 들 수 있을까’ 하는 것만 물어보셔서, 지금 제가 고개만 딱 드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정말 제 인생으로 볼 때는 진짜 유능한 작명가이신 셈이죠. 그대로 맞았으니까요.”


윤경 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거리낄 것 없는 환한 웃음보를 터트렸다. 일반적으로 취재를 위해 처음 마주앉아 몇 마디를 나눠 보면, 그날의 대화 수위가 어디까지 가능한가를 파악하게 된다. 원론적인 내용만 나눠야 하는지, 아니면 무제한의 자유토론이 가능한지 여부는 금방 헤아리게 된다. 이 사람은 ‘후자’에 속했다. 그래서 본인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를 물었더니, 대답은 말 그대로 ‘술술’ 나왔다.

“저의 어린 시절은 그때로는 좀 특이하게 아버지가 저를 보시고, 어머니가 직장생활을 하셨어요. 그리고 할아버지 때부터 유복한 환경으로 살아오셔서 그런지, 집안의 형편은 아주 좋았어요. 3층짜리 집에서 살았거든요. 저의 가족이 오빠를 포함해서 네 식구인데, 집 안에 있으면서도 못 만나고 못 볼 정도로 집이 넓었어요. 그리고 일찍 태어났으니까 학교도 일찍 들어갔죠. 일반학교가 아니라, ○○○○병원 내에 있는 ○○재활원에 다녔어요. 거기는 부유층 애들만 다니는 특별한 데였거든요.”

여기에서 재미있는 표현 한 가지가 나왔다. 그 재활원에 다니는 애들을 부르는 호칭은 ‘자제분’이었단다. 보통 누구의 ‘자녀’ 또는 ‘자식’이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인 표현인데, 아이 하나에 기사 몇 명이 딸릴 정도의 애들만 모인 재활원이기에 ‘자제분’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물론 윤경 씨한테도 자신만 돌봐 주는 언니 하나가 항상 곁에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이 언급되기에, 윤경 씨의 꿈이 왜 아나운서였는지를 물었다. 그의 홈페이지에는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이 다양하고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장래희망이었고, 거기에는 아나운서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특별하게 아나운서라고 인지를 한 것은… 보통 뇌병변장애는 대체로 언어장애가 동반이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언어장애가 별로 없으니까, 친구 어머니들이 항상 ‘야, 너는 아나운서 해도 되겠다’ 하셨어요. 그리고 친구 생일이라든지 회의라든지, 그럴 때는 제가 거의 다 사회를 주도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아나운서를 해도 되겠다, 되겠다, 되겠다’ 하면서, 장래의 꿈이 굳어져 버린 거고요. 저는 사람들한테 이목을 끄는 직업을 하고 싶었어요. 방송 쪽의 일 같은 거요. 초등학교 때는 그런 미래를 꿈꿨어요.”

그런데 6학년 때 어머니의 당뇨가 갑자기 심해져서 경제활동을 못하시게 됐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집안의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게 됐고, 재활학교에 진학하긴 했는데 어릴 때의 환경과 너무 달라져서 충격을 받게 됐단다. ‘자제분’들만 다니던 학교가 아닌 일반 특수학교였는데, 같은 반에는 부모님들한테 학대를 받는 애들도 있었고 지금까지 접하지 못한 상황과 환경에 처한 애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엄청난 괴리감과 문화적인 충격을 입어서, 결국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이후로 5년 동안 집에만 있게 됐다고 한다.

    ▲ ⓒ채지민 객원기자 ‘과잉’과 ‘보호’의 차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애의 다른  세계를 목격하게 됐다는 건, 어린 마음에 큰 그림자로 다가왔을 게 분명한 일이다. 집안 형편이 급격히 안 좋아지니까 자신을 데리고 다닐 ‘언니’ 같은 사람도 없고, 항상 입원과 함께 재활을 받아야 하는데 새 환경에선 견디지 못하니까 집에만 있었단다.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단칸방에서, TV와 책만 보면서 5년을 지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청소년 시기라면 사춘기를 동반할 텐데, 5년 동안의 단절생활이 과연 가능한지가 궁금해졌다.

윤경 씨는 당시의 자신이 부모님하고만 있다 보니까, 유아 단계에서 그냥 머물러 있게 됐던 것 같다고 한다. 다른 애들을 접해야 사춘기 같은 것도 있을 텐데, 혼자만 지내다 보니까 그냥 어린이 그대로 정지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때는 굉장히 활동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었는데, 그래서 남자들도 휘어잡고 학생회장도 하는 모범생이자 좌충우돌의 삶을 살았었는데, 사춘기를 그렇게 보냈다는 건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를 낳았는지가 궁금해졌다. 사회와 격리되어 혼자 지내는 결핍의 체험 같은 게, 지금의 사회 활동에는 어떤 영향으로 남게 됐을까?

“도움이 됐어요. 물론 결정적인 이유는 되지 않겠지만, 재가(在家)장애인들이나 그런 비슷한 상황에 있는 분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죠. 저는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집안 형편이 어렵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장애가 있기 때문에 소통이 막혀 있었다고 생각을 해요. 장애가 없는 저의 오빠는 학교를 다 다녔거든요.

그 당시 만약에 사회적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면, 예를 들어 활동보조인이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학교를 다닐 수 있었겠죠. 그런데 가정형편의 붕괴로 인해 제가 사회와 차단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대신… 당시의 그런 상황들이 지금도 인지가 된다는 게, 저한테는 현재의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다시 청소년기로 대화를 돌렸다. 윤경 씨는 그때 이런 일이 있었다며 말을 이었다. 어느 날 윤경 씨의 오빠가 갑자기 아버지한테 이런 말을 불쑥 꺼냈다고 한다. ‘꼭 윤경이를 사육하는 것 같다. 방 안에 가둬놓고 먹이기만 하고.’ 열여섯 살 전후일 때 일어났던 일인데, 오빠의 이 한마디로 아버지가 엄청난 충격을 받으셨단다.

아버지가 윤경 씨를 과잉보호하다시피 기르셨던 건 맞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과잉’이 아니라 순전한 ‘보호’에 집중하셨던 거라 한다. 그런데 딸의 입장에서는 ‘보호’ 차원을 넘어서는 ‘과잉’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마침 오빠가 그걸 대놓고 공론화를 하게 되자마자, 아버지가 받은 충격은 생각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일부러 가둬놓은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방에 있게 했던 건데, ‘아, 그게 그런 거구나!’ 하며 그때야 깨달으신 거죠. 그 이전에는 ‘너는 한국의 헬렌 켈러가 될 거다’ 하시며, 어릴 때부터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어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여섯 살 때 글을 알았어요. 지금이야 보편적으로 교육을 다 하지만, 당시로는 뇌병변장애가 여섯 살에 글을 익혔다는 게 좀 파격적이었죠. 그럴 정도로 저를 키우셨는데, 어머니가 편찮으신 와중에 정신이 없으시니까 저를 정신적으로 잠깐 놓치셨던 것 같아요. 저를 아주 어린 딸로 계속 머물게 생각하셨던 거죠.”

어머니는 2001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당뇨로 고통을 받으셨단다. 그런데 5년 동안 감금 아닌 감금의 생활을 했는데, 게다가 활발한 성격이었다고 했는데, 집 안에 있는 게 답답해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떠올리지 못했느냐고 물으니까, 한 3년 정도 지나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단다. 그렇다면 3년 동안은 그런 걸 못 느꼈다는 의미인지를 다시 물으니까, 가족끼리 얼굴도 못 보며 지내다가 같이 있게 된 게 오히려 좋았다고 한다. 특히 사업에 바빴던 어머니는 얼굴도 거의 못 보며 지낸 셈이란다. 가세가 기울었다는 점보다는, 네 식구가 같이 있으니까 그게 좋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중학교에 올라가자마자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자기 곁에 아버지가 항상 계시다는 생각에 마음으로 안도를 하며 지냈단다. 그러한 3년 정도가 지나가자 그때부터 답답하다는 점을 느끼기 시작했고, 오빠의 얘기를 들은 아버지가 검정고시 책을 사다 주시는 등 분위기를 바꾸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휠체어를 타고 외출하는 일도 그제야 조금씩 숨통이 트였던 모양이다. 대화의 내용이 너무 가족 중심으로 흐르는 것 같아, 일단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화제를 바꿀 때 제일 좋은 건 엉뚱한 내용을 난데없이 들이대는 것이다. 윤경 씨의 홈페이지에는 자신이 가장 잘 먹는 술안주까지 공개가 되어 있었다. 일반 호프집 같은 데는 자주 가고, 그런 문화를 즐기는지 여부부터 물었다.

“그런 문화도 문화지만, 장애인들이 다양하게 즐길 만한 문화가 없잖아요. 제가 당구를 치러 가겠어요. 아니면 볼링을 치러 가겠어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가벼운 술자리를 즐기게 된 거죠. 결혼하고 나서 대표직 같은 걸 맡다 보니까, 대인관계에 있어서 어긋나는 일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니까 그걸 풀 겸, 또 경직이 심한 장애이다 보니까 하루 종일 일하고 나면 술 한 잔을 해야 좀 풀어지고 편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홈페이지에 건배를 나누는 사진이 많다고 하자, 윤경 씨는 아주 큰 소리로 한참동안 웃었다. 무거운 집안 분위기의 테마에서 웃음이 터지는 화제로 바뀌자, 홈페이지 자기소개 글에서 궁금하게 읽었던 내용 하나를 더 풀어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의 별명이 ‘푸다닥’하고 ‘조류’라고 밝혀놓았는데, 푸다닥은 무슨 뜻이고 조류는 왜 생겨난 별명인지를 물었다. 어릴 때 너무 많이 움직인다고, 푸다닥거린다고 해서 ‘푸다닥’이 됐단다. 그리고 푸다닥거리니까 그게 새라고, ‘조류’라는 호칭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깜박깜박 잘 잊어버리는 편이라서, ‘닭’이라는 별명도 추가되었다고 한다.

그게 어떤 놀림이나 장애를 안 좋게 의미하는 게 아니라, 생활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기에 자신도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다며 윤경 씨는 또 웃었다.

성(性)은 인생의 이름으로 바라봐야 한다
지금의 남편을 22살 때 만나 23살에 결혼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우리의 대화는 서서히 본론을 향해 진입하기 시작했다. ‘가장 잘 아는 것’과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을 본격적으로 언급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래서 전제를 깔며 질문을 던졌다. 굳이 남녀를 구분하는 사회적 통념을 먼저 대입한다면, 성(性)이라는 건 보통 사회에서 남자들도 대놓고 거론하기가 껄끄러운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걸 공개적인 담론으로 제시한 게 ‘조윤경’이라는 여성이다. 그걸 공론화해야겠다는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그동안 많이 했던 언론 인터뷰 같은 공식적 멘트가 아니라 사적인 심정과 의견으로 얘기해달라 했다.

“그렇다면 옛날로 얘기가 돌아가야 돼요. 제가 아버지 밑에서만 크다가 중간에 교회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있고, 이성적인 감정으로 만났던 친구들도 있기는 해요. 그런데 뭐라고 할까…, 장애가 없는 친구들과는 차이가 있어요. 제가 제때에 학교를 다녔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친구들의 문화가 저의 눈높이와 다르고 공감이 가는 게 없었어요.

이성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비장애라 해서 다 원만한 건 물론 아니겠지만, 장애와 비장애는 경험과 심정적으로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남편을 만났을 때도 시행착오가 엄청나게 많았거든요. 경험이 부족해서 겪는 시행착오이기 때문에,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요.”


그 대목에서 뜻밖의 사실 한 가지가 윤경 씨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의 첫째 아이가 다섯 살 때 돌연사를 했다는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까지 했는데… 원인을 못 찾았단다. 아이를 다른 분한테 잠시 맡겨놓았는데, 거기서 갑자기 돌연사를 했고 그걸로 끝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아이를 봐줄 데가 없는 현실, 임신과 육아 출산 과정에 원조를 받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 가족이나 친구들 이외의 국가적 지원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는 상황 앞에서 큰 혼란을 느껴야 했다고 한다.

   
▲ ⓒ채지민 객원기자
“그때까지만 해도 ‘아, 이 고비만 넘기면 되겠지. 내가 능력이 없는가 보다’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첫 아이를 떠나보내고 나서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됐어요. 더불어 모임 같은 데를 다시 나가면서 다른 여성 장애인들의 얘기를 들어봐도, 결혼하기까지가 망설여지고 결혼해서도 갈등이 많다는 게 모두의 문제임을 알게 됐어요.

그런 문제의식을 막연하게 느껴오다가, 어느 한 모임에서 제 남편이 먼저 제안을 했어요. ‘우리가 겪어왔던 과정도 있으니까, 이즈음에서 장애인 성교육을 한번 해야 되지 않겠나.’ - 그렇게 제안을 한 남편은 그 길로 구성애 선생님을 직접 찾아갔더라고요.”

‘구성애’라는 이름이 성 문제에 관한 하나의 상징으로 막 떠오르던 시기였단다. 그렇게 찾아가 보니까, 마침 그 선생님도 장애인의 성 문화를 위한 모임을 만들고 있던 와중이었단다. 그런데 그 모임에는 장애 당사자들이 없고, 부모와 복지사나 성 전문가 등으로만 구성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 역시도 당사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의식을 가지고 계실 때였는데, 윤경 씨의 권유에 따라 일단 한번 강의를 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반응이 너무 좋았단다. 우리 장애인들도 이런 걸 얘기할 수 있다는 거, 이런 좋은 교육을 계속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폭주해서, 다시 한번 선생님의 강의를 요청하게 됐단다.

“다시 모시고 싶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자신이 성에 대해선 전문가지만, 장애에 관한 감수성이 들어가야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겠나. 자신은 그게 부족하니까 당사자가 해야 한다고 하시며, 저한테 직접 해보지 않겠냐고 역제의를 하신 거예요.

그때 저는 굉장히 많이 망설였어요. ‘성’이라는 주제라기보다는, 제가 그런 큰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 때문이었죠. 그런데 그런 기회에 자꾸 얘기하며 지내다 보니까, 그게 일처럼 되어버린 거예요. 그러던 차에 인터넷을 보니까 음담패설 같은 내용만 난무하고, 정작 장애인의 성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장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커뮤니티만 만들어놓자 해서 만들게 됐는데, 상담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오는 거예요. 꼭 누구한테 물어보는 상담이라기보다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고민들을 그냥 털어놓는, 그러다 보니까 서로가 ‘나도 그런 고민이 있다’ 하며 서로에게 문의와 답을 전해준 것이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주변 분들이 이렇게 하지 말고, 아예 체계적으로 센터를 하나 맡아서 해봐라 권하셨어요. 그것이 지금의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몇 해 전에 성적인 권리를 제시하며, ‘섹스자원봉사’라는 주제가 사회적으로 공론화가 된 적이 있었다. 장애인의 성 문제 해결책으로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지만, 또한 성적인 권리 부분을 드러내는 건 좋았지만, 그 해결책이라는 게 자꾸 장애인이 대상화 되는 것 같아서 윤경 씨는 반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연히 반대를 한다며 가만히 있다고 되는 게 아니었기에, 강력하게 목소리를 내며 왜 반대하는지를 조목조목 주장했단다. ‘조윤경’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한 걸음씩 사회 속으로 퍼져나간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올해 있었던 하나의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난 ‘제10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된 한국 영화 중에서 ‘섹스 볼런티어 : 공공연한 비밀 첫 번째 이야기’라는 작품이 논쟁의 화두로 등장한 적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한 이 영화는 ‘섹스자원봉사’ 즉, 중증장애인들의 성적 권리와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제3자가 자원봉사를 한다는 설정이, 우리 사회 현실 안에서 무엇이 문제이며 어떤 대안이 필요한가를 그려내고 있다. 영화 자체는 충격과 현실적 괴리를 담담하게 잘 담아냈는데, 문제는 다른 데서 터졌다. 모 일간지 기사에 그 의미가 잘못 전달이 되어, 황당한 후폭풍이 윤경 씨의 커뮤니티로 몰려든 것이다.

“솔직히 그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 영화를 다룬 신문 기사 때문에, 저희 카페가 완전히 난리가 났었거든요. 갑자기 남자들이 백여 명이나 몰려 들어와서, 자기가 봉사를 하겠다고 중구난방으로 도배를 했던 거예요. 장애인도 권리가 있고 욕구가 있는데, 밖에 나오지 못하고 불쌍하니까 도와주겠다고, 자기한테 연락하라는 식의 내용이었어요.

‘섹스자원봉사’라는 그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지도 않고, 진지한 고민도 없이 ‘성’ 하나만 보며 달려든 것이었죠. 반박의 글도 계속 올라왔어요. 그건 도움이나 자원봉사가 아니라, 결국 자기들의 욕구를 채우려는 불순한 의도가 아니냐는 의견이었죠. 저희가 추구하는 건 그게 아닌데, 자꾸만 그런 식으로 어긋나게 나가곤 해요.”

여기는 ‘사람사는 이야기’라서 그 주제를 깊게 들여다볼 공간은 아니다. 대신 간략하게 화두만 던진다면, ‘섹스자원봉사’의 정확한 의미를 먼저 파악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 하나는 밝혀두어야겠다.

‘섹스’는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접근이 어렵고 또 다른 해결 방식이 필요한 이들이 있다. ‘섹스’ 뒤에 ‘봉사’라는 단어가 추가되는 이유를 먼저 헤아려봐야 한다. 그리고 그 두 단어 사이에 ‘자원’이라는 단어가 위치하는 그 단계별 내용 변화를 의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종교적으로, 거기에 사회적 관념에 따르는 논의가 깊이 있게 진행돼야 한다. 그런 과정을 모두 생략한 채, ‘자원’해서 ‘섹스’를 ‘봉사’하겠다는 건 일그러진 배설욕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장애와 비장애의 감수성 차이인 것 같아요. 장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냥 뭐든지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라고만 봐요. 그게 잘못된 것이죠. 예를 들어 누구나 일시적으로 장애가 생길 수 있잖아요. 깁스를 했다든지 맹장염에 걸려 수술했다든지, 그런 경우에 성적인 욕구가 생겨서 도와준다고 하면, 그 봉사를 선뜻 받으시겠어요? 아니잖아요.

그리고 궁극적인 건 성적 단계뿐만 아니라 사람 간에 대화하고 소통하는 그런 느낌이 있어야 통하는 건데, 그런 걸 배제하고 불쌍하니까 도와주자는 것이기에 또 다른 침해를 낳을 수 있다는 거예요. 물론 그렇게 만나서 잘 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변수인 거고, 그게 궁극적인 건 아니잖아요.”


사회 속을 움직이는 만큼 자기 권리를 얻게 된다
하나의 문제가 계속 발생한다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겠지만, 그래도 밝고 건설적인 의미가 존재하기에 더 나은 방향을 찾게 되는 일 아닌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윤경 씨한테 물었다. 이 단체, 이 모임, 이 커뮤니티를 운영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건 언제였는지를. 그리고 스스로 이걸 하기를 참 잘했다고 마음 들어 좋았던 점이 있었는지를 말이다.

‘푸른 아우성’을 무슨 만남 주선 중계기관처럼 잘못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카페 자체가 뭔가를 드러내놓고 활동은 하지 않는단다. 보통 다른 카페처럼 모임에 많이 나와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자기 고민을 익명으로 올리며 그 자체로 속 시원하게 풀어놨다는 사실에 일단 위안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 공간을 만들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윤경 씨는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여기서 만나서 결혼을 하고, 이렇지는 않아요. 그냥 성적 고민을 풀어놓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여성 장애인들이 어디에 가서도 할 방법이 없던 얘기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걸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일반적으로 성폭행·성폭력과 관련해서 기사가 뜨면, 그 아래로 이런 댓글들이 중간마다 걸려 있죠. ‘너도 즐기지 않았냐?’ 이런 반응들이 있는데, 이런 마음과 생각들이 바로 진지한 고민의 흔적이 없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해요. 우리는 그걸 고쳐나가자는 거예요.”

어른들의 성이 아닌, 자녀들의 성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장애를 가진 2세를 키우는 엄마들한테 어떤 조언을 전하고 싶은지 물으니까, 윤경 씨는 태어날 때부터 뇌병변장애 1급이었던 자신의 경우가 가장 확실한 체험이었다는 듯 자세한 대답을 이었다.

사실 장애인 당사자 교육도 중요하고 복지사 교육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부모가 깨어 있어야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단다. 윤경 씨의 경우 부모님이 자신한테 굉장히 애정 있는 교육을 시켜 주셨고 지금도 뒷바라지를 해주고 계시지만, 성이라든지 장애 부분에 있어서는 무척이나 보수적인 면이 있으셨다 한다. 그게 바로 부모의 양면적인 입장이란다. 예를 들어 비가 오면 못 나가게 하는 것, 윤경 씨는 그런 걸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단다.

“한번은 아버지가 진짜 화가 나셔서, 장애인들이 비올 때 밖에 다니면 청승맞다며 나가지 못하게 하시는 거예요. 전동휠체어가 아닌 수동휠체어 시절이었는데, 저는 무조건 휠체어만 태워달라고 했어요. 제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타고 나가서 사람들한테 조금씩 조금씩 밀어달라고 했고, 공중전화에 가서 친구를 불러서 함께 다니다가 돌아왔어요.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가 비옷을 사다 주시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그냥 또 집 안에 갇히게 된다는 거예요. 장애인 자신도 의지가 있어야 되겠지만, 부모님들은 보통 자기 자식이 상처 받게 될 부분에 대해서 무조건 보호를 하시려고 하잖아요. 내 딸이 상처 받으면 안 되고, 내 아들이 괜히 여자 만났다가 힘들어하는 건 아닌가. 더욱이 비장애 이성을 만났다가 버림을 받지 않을까. 그렇게 앞서나가는 걱정을 항상 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외출을 금지시키고 이성을 못 만나게 한다는 건, 장애인들의 자기결정권을 부모들이 다 박탈하는 것이란다. 실제로 같이 일하는 활동가들 중에서도 월급이 좀 늦는다고, 누가 야단 좀 쳤다고, 누구랑 사이가 안 좋다는 걸 전부 다 엄마한테 가서 얘기를 한단다.

비장애 부모님들한테도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장애 부모님들은 그런 게 특히 더 심하다고 한다. 그 다음날 부모가 와서 왜 우리 자식을 그랬느냐, 이렇게 아픈 자식인데 왜 그렇게 대했냐 하며 항의를 하시는데, 가만히 보면 윤경 씨보다 훨씬 경증인 장애를 가진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저는 이렇게 말만 잘하지, 나머지는 전부 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해줘야 해요. 그런데 저보다 훨씬 경증인 사람들을 그렇게 나약하게 키우시더라고요. 그렇게 되면 밖에 나와서도 자기만 봐달라고 하게 되고, 무조건 응석 비슷하게 고집을 부리면서 사회성이 없어지게 돼요. 그러면 이성을 만나게 됐을 때도 자꾸 그 사람한테 책임을 전가하게 되고, 결국 관계형성이 미숙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건데, 그게 다 연관성 있는 인과관계 같은 것이에요.”

   
▲ ⓒ채지민 객원기자

그래서 부모님들한테 부탁하고 싶단다. 애가 상처를 받든 자존심이 꺾이든 간에, 밖에 나갈 수 있도록 내보내달라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분은 자기가 그냥 자식의 자위행위를 도와주면 되니까 못 나가게 한다 하고, 어떤 여성 장애인의 부모는 아예 지갑을 못 가지고 다니게 한다고 한다. 네가 나가서 돈 쓸 일이 뭐가 있느냐는 주장이 항상 뒤따른다는 것이다.

“어제도 저는 성남시에서 있던 강의를 혼자 다녀왔거든요. 물론 어쩔 수 없었죠. 남편이 때로는 같이 가주는데, 그 시간이 항상 딱 맞을 순 없잖아요. 그런데 저의 남편이나 아버지는 저를 크게 걱정하시진 않아요. 그만큼 제가 강해졌으니까요. 모르는 사람한테도 부탁을 하고, 그렇게 혼자 사는 거죠, 뭐.

그러니까 사회적인 여건을 개선해가려고 노력하면서도, 개인이 헤치며 나가야 할 부분 또한 분명히 있다는 거예요. 뭐든지 사회 탓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냥 무조건 아무것도 안 하려는 사람들도 있죠. 장애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건 부모님의 영향이 큰 거예요.”


● ● ● 만약 방송 화면에 윤경 씨가 얼굴 위주로 나왔다면, 그래서 무언가를 얘기했다면, 시청자들은 그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거의 모를 것이다. 자신이 언급했던 대로 말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1급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대외적 활동은 장애와 비장애의 벽을 간단하게 허물어버리고 있다. 이건 누가 만든 것일까? 누가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일까? ‘가장 잘 모르는 존재’로 파묻힐 수도 있었던 걸, ‘가장 잘 아는 존재’로 스스로를 이끌어 낸 건 바로 윤경 씨 자신이다.

자기결정권이 없는 장애인의 삶에 대해 반기를 든 것도, 의식주를 간신히 해결하는 장애인에게 성을 얘기하는 건 배부른 생각이라는 편견을 깨고 있는 것도 윤경 씨이다. 성(性)과 사랑은 원천적인 인간의 기본 감정이자 욕구인데도, 유독 장애인들에게는 참고 견디며 드러내지 말아야 할 2차적인 종속변수처럼 무시하기만 한다.

왜 그럴까? 사회가 만들어놓은 색안경이 갈수록 짙어지기 때문이다. 자기 밥그릇만 소중하다고 믿는 사회로 굳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가 그렇게 만들고 있고, 경제가 그 틀에 석고를 들이붓고 있다. 사회는 갈수록 메말라가고, 문화는 그 눈높이만 높여가며 자기들만의 리그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

그 틀은 어떻게 깨야 가장 확실한 대안을 만들 수가 있을까? 막연한 생각보다는 확실한 고민을, 멈춰 선 채 바라보는 게 아닌 행동을, 그리고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존재할 때만 그 답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윤경 씨의 전동휠체어 바퀴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음성이 누군가에게 전해질 때마다 원하던 세상은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함께 응원하고 함께 고민하며 나아가는 우리의 내일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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