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은 모두를 포용하는 몸짓의 언어이다 > 함께 사는 세상


춤은 모두를 포용하는 몸짓의 언어이다

[만난 사람] 서원대학교 무용학과 교수 윤덕경

본문

예술의 장르는 다양하다. 당장 떠오르는 이름만 헤아려도 수십 가지는 넘을 것이다. 우선 ‘문학’이라는 한 분야부터 언급해 보자. 문학 자체의 장르 또한 얼마나 많은 전문분야가 존재하는가. 시·소설·동화·수필·희곡·평론 등, 파고들수록 존재이유와 무게감이 느껴지는 분야들로 가득하다. 문학만 그러한가? 미술의 세상은 얼마나 넓고 심오하며, 영화와 연극의 무대는 얼마나 광활한가. 우리 시야 안에 머무는 게 아닌, 그 활동공간을 우주 끝까지 펼쳐도 부족함만 느껴지는 게 바로 예술이라는 인생이자 그 창조의 세상인 셈이다.

여기에서 질문 한 가지가 등장한다. 모든 이들이 동등하고 공평하게 접근해야 마땅한 예술 전 분야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하지 않고 있는 장르는 무엇이고 왜 그런 것일까? 개인 작업이 가능한 문학과 미술은 장애인들에게 ‘상대적으로’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고 봐도 무난할 것이다. 물론 개인 작업 이후에 ‘발표 과정’이라는 난관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간과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상대적’이라는 단서를 굳이 붙여놓은 것이다.

사진과 음악 활동도 어느 정도 개방되어 있다 할 수 있겠지만, 영화와 연극 같은 분야로 들어가면 그 장벽은 점점 더 높고도 두터워진다. 만들기도 어렵고 출연하기도 어렵다. 만들어도 공개할 방법이 막막하고, 출연해도 사회적 성공 같은 건 관심을 닫아야 할 세상인 탓이다. 그래도 가능성 자체는 일부나마 남아 있기에, 희망과 도전을 간직할 여지는 존재한다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무용’이라는 예술 장르는 어떠할까?

그 질문과 답변에 미묘한 전제조건이 필요해진다. 스포츠 같은 운동 분야라면 자신에게 맞는 특정 종목을 특화시켜 응용할 수 있겠지만, 무용이라는 예술 장르는 그 자체로 접근이 어렵다는 선입견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장애인들에게 무용은 무엇이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장르인가? 엄연한 예술의 한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와 접목되지 않을 것 같은 무용, 그 예술의 존재를 쉽게 풀이해 줄 이가 있어서 만났다. 장애를 무용 작품의 소재와 주제로 삼아 무대에 올리는, 서원대학교 무용학과 교수이자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부이사장인 윤덕경 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를 만나 장애와 무용의 연결고리, 그리고 그 미래의 지향점을 함께 찾아본다.

   
▲ ⓒ채지민 객원기자
   
▲ ⓒ채지민 객원기자
   
▲ ⓒ채지민 객원기자
- 공연을 앞두고 마지막 연습의 열기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공연 준비하시는 데 누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전혀 그렇지 않다. 진심으로 환영한다. 대신 우리 무용수들의 얼굴 촬영은 하지 않아주시면 좋겠다. 연습에 몰두한 상태라서, 지금 화장도 하지 않은 맨 얼굴이라는 걸 다들 인식 못하는 것 같다. (웃음) 나 역시도 평소 안무를 지도하던 모습 그대로라는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 윤덕경무용단의 활동은 이제 우리 예술계에서 정점으로 향해가는 것 같다. 개인적인 내용으로 첫 질문을 드리겠다. 무용을 시작한 지는 올해로 몇 년째가 되시는가.

“무용 자체를 한 것으로 따진다면 40년이 훌쩍 넘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무용을 시작했으니까, 벌써 4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간 셈이다. 대신 공연을 하고 본격적인 무대 활동을 한 걸로 계산한다면 30년이 좀 지났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수님과 함께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순수한 한국무용의 삶은 그때부터 시작됐다고 보시면 되겠다.”

- 취재 준비를 하면서 선생님의 약력을 살펴보니까, 무용에 관해 문외한인 입장에서도 그 존재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유명한 분들한테서 사서를 받으신 것 같다.

“지금은 돌아가신 인간문화재 고(故) 한영숙 선생님으로부터 살풀이와 승무를 전수받았다. 그리고 강선영 선생님한테서 중요무형문화재인 제92호 ‘태평무’ 수석이수자로 지정을 받아, 한국전통무용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 자신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는 단체를 운영한다는 건, 사실 자신감과 모험의 양극단을 오가는 일이기도 하다. 언제 어떻게 창단하시게 됐는지, 독자 여러분께 간략한 설명을 부탁드린다.

“지난 1989년에 전문무용단체로 창단했다. ‘새로운 무용언어와 오늘의 우리 춤’ 작업을 모토로 삼아 시작했던 것이다. 한국 창작 춤의 현대화 작업에 앞장서 왔다고 자부한다. 한국창작무용의 근간이 되는 전통무용을 바탕으로, 인간존중과 자연사랑을 주제로 꾸준히 작업해 왔다. 특히 사랑과 나눔이라는 공동체 의식의 일환으로, 가장 소외된 계층의 삶을 춤으로 승화시키는 데 노력해 왔다.”

- 엉뚱한 질문을 먼저 드리겠다. 무용이라는 건 무엇인가. 이해하기 쉽게 원론적인 의미로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원론적인 얘기가 훨씬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춤’이라는 대상을 전문인들만 추는 것이라 보통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춤은 한마디로 몸짓언어이다. 연극은 언어와 함께 소통이 되고, 춤은 몸짓 하나로 전달을 해야 한다. 굉장히 추상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목이다. 일반적으로 춤이라고 하면, 우리가 가진 슬픔과 기쁨 같은 모든 것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문제는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여부이다.”

“한마디로 아름답게 표현한다는 것이 무용이고, 그것이 바로 춤이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몸으로 드러내는 데 최선을 다한다. 예를 들어 ‘슬프다’는 감정을 영화나 연극 쪽에서는 정말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은가. 춤은 말이 없다. 몸짓으로 모든 걸 드러내야 하는데, 그걸 무대 위에서 굳이 눈물로 강조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인간의 몸 자체의 아름다움, 그리고 몸짓의 형상화로 눈물과 슬픔이라는 그 감정을 미적 감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춤이자 무용이라고 보시면 되겠다.”

   
▲ ⓒ채지민 객원기자
- 전통무용을 전수받고 이수하셨으면서도, 창작에 중점을 두며 활동하신 걸로 알고 있다. 전통 그 자체를 계승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는데, 창작에 중점을 두는 이유가 있으신지 궁금하다.

“내가 하는 춤은 우리의 춤, 다시 말해 한국무용이고 그게 전통무용이다. 전통무용에 대해 일반인들이 아는 건 부채춤이라든지 장구춤, 승무나 살풀이춤 정도를 우선 떠올리실 것이다. 그런데 그 전통춤에 머무르지 않고 어떠한 주제를 갖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가는 거, 그것을 창작무용이라고 한다. 내가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했는데, 스승님이신 김매자 선생님께서 창작무용을 주로 많이 하셨다. 이화대학교 한국무용 전공 졸업생들로 구성된 ‘창무회’라는 단체가 있다. 이름 그대로 ‘창작무용’ 즉, 우리 한국의 무용을 창작하는 단체이다. 한국무용을 전공하고 졸업한 다음, 스승님과 함께 ‘창무회’를 조직해서 같이 작업을 했다. 그 단체는 아직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창작무용에 중점을 두는 게 스승의 영향이 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고 말씀드리는 게 맞을 것 같다. ‘창무회’에서 10년 정도 활동하다가, 나는 1989년에 서원대학교로 가게 됐다. 가르치는 입장이 된 그 자리에서 그동안 내가 배웠던 모든 걸 가지고 제자들을 양성하고, 나름의 창작 작품 활동을 계속해 왔다. 나의 제자들하고 그렇게 활동을 해온 지가 사실 올해로 20년이 됐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의미가 깊은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2년 전부터 올해 10월에 하는 20주년 행사를 구상해 왔다.”

- 아, 윤덕경무용단 창단이 1989년이니까, 올해가 바로 창단 20주년이 아닌가. 뒤늦게나마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해드린다.

“이렇게 함께 축하해 주시면, 오히려 우리가 더욱 더 감사드릴 일이다. 하나의 단체가 20년을 이어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개인적으로는 나름의 감회가 여러 가지로 떠오른다.”

- 지금 말씀하신 ‘여러 가지’라는 표현에 참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보람과 성취가 물론 앞서겠지만 남모르는 어려움도 많으셨을 텐데, 편하게 말씀해주실 내용이 있겠는가.

“교수가 된 이후로 창작 작업을 계속 해오다가, 그렇게 여러 해 동안 달음질을 치다 보니까, 무언가를 재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하나의 창작 작품이라는 것은 항상 이 시대의 새롭고 실험적이며 도전적인 ‘그 무엇’을 찾아가기 마련인데, 뭐라고 할까…. 매너리즘에 빠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언제나 새로운 것을 작품으로 해야 하고, 그런 화두를 전제로 하며 제자들과 어려운 작업에 돌입해야 되고, 그러다 보니까 창작 작업의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는 의미와 같다.”

- 난관이라면 난관이고, 기회라 하면 기회가 되는 시점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그 상황의 전환점은 어떻게 찾아든 것인가.

“우연히 한 사람을 소개 받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날 만한 인물을 알게 된 것이지만,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난데없는 우연이었다고 표현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내가 작품의 소재를 구하던 과정일 때, 어느 지인이 누군가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전 국회의원이고 소설가이신 이철용 선생님이라고 했다.”

- 이 대목에서 이철용 이사장이 등장하는 건 뜻밖의 일이다. <함께걸음> 독자들에게는 지난 8월호 표지의 인물로도 익숙해진 얼굴이다.

“소개를 하겠다던 지인의 의견은, ‘이 분(이철용)의 작품 원고를 가지고 창작무용을 구상하면 좋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을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분이 우리 춤과 우리 국악에 관심이 많으시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그래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그 선생님을 한번 만나 뵈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다시 받게 됐다.”

   
▲ ⓒ채지민 객원기자
- 이 대목에서 평소 궁금했던 점을 질문 드리겠다. 창작무용에 있어서 그 주제와 소재를 정하는 방식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우리가 무용을 하면서 주제를 고른다는 건, 다른 예술 분야의 방식과 거의 엇비슷할 것이다. 수많은 문학작품을 읽고 신문을 읽으며, 사회적인 이슈가 무엇인지를 꼼꼼하게 관찰하게 된다. 환경오염이 주제가 될 수 있고, 사회적 소수자의 아픔 같은 게 부각될 수도 있다. 내 작품의 대본은 직접 쓰는 편이지만, 외부에 의뢰를 하는 경우 또한 많다. 시인과 소설가에게 의뢰를 할 때가 있고, 어느 영화를 가지고 작품화할 경우도 있게 된다. 이철용 선생님(이하 ‘그 분’)을 소개 받게 됐던 시기 또한, 창작의 주제를 가지고 고민하던 그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 그럼 그 소개 내지는 추천을 받아들이셨나.

“그렇다. 만나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데, 한국무용을 바라보는 그 분의 시선이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한국무용을 전공으로 한다는 사람들이 무대 위에서, 한국적이 아닌 서양문화에 물들어 있는 모습을 너무 많이 노출한다고 지적하셨던 것이다. 그 분은 그런 흐름에 굉장히 못마땅하다는 점을 일일이 언급하셨다.”

- 진지한 대목에서 외람된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이철용 이사장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지적하셨을 것 같다. 그게 바로 그 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성향이 아닌가.

“그 분의 지적은 물론 당연히 맞는 말씀이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가야 할 우리 나름의 창작 작품의 길이 있는 법 아닌가. 그래서 어떤 작품을 어떻게 작업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 분이 자신의 작품 중 하나인 ‘땅’을 추천하셨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 하셨는데… 솔직히 난감했다. 그 작품의 소재가 철거민들의 상처를 주된 내용으로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내용이라면 어렵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무용창작이라는 건 무대 안에서 슬픔과 기쁨을 아름답게 표현해야 하는 고단위의 작업인데, ‘땅’이라는 작품 내의 ‘철거민’이라는 소재를 어떻게 다루고 승화시켜야 할지는 답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 소재가 안 된다면 그 시도를 접는 걸로 그만일 텐데, 고민을 길게 계속하셨다는 건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상태였다고도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맞는 말이다. 그래서 그 분께 말씀을 드렸다. 내가 그들의 삶을 파헤쳐서 그 안에 존재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그래서 작품에 섣불리 손을 대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주인공 안에 내가 있지 않으면, 작품을 만들어도 진지한 일체감을 이뤄낼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런데도 작업을 하셨고, 무대에 올려 큰 반응을 얻으셨다. 어떻게 성사가 이루어진 것인가.

“그때 마침 95년도에 ‘세계한민족무용제’라는 게 있었다. 우리 국내 무용팀들하고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모여, 청주예술의전당에서 서로의 작품을 공개하는 큰 행사였다. 그래서 이철용 선생님한테 우리의 작품을 한번 직접 보시고 판단해 달라 했다. 우리가 무대에 올린 건 김지하 시인의 ‘빈산’이라는 작품을 무용으로 창작한 것이었다. 우리가 표현하는 그 작품을 통해서, 그 분의 작품이 무용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 여부를 서로 함께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직접 청주로 오셔서 우리의 작품을 보셨는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하신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대본을 직접 적어주셨다. 무척 많은 분량의 내용이었다. 그 글을 전부 다 풀기가 솔직히 벅찰 정도였다. 나름대로 고민을 계속하다가, 나는 그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평소 해오던 방향의 작품이 아니라서, 준비하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시도를 했고 우리의 도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작품의 성공여부보다 더욱 더 내게 중요했던 건, 나름대로 또 다른 시선을 가지며 내 작품세계를 발전시키는 데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는 점이다.”

-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그런 시련을 안겨주는 것 같다. 그 도전이 결국 성공적이었고, 개인적으로도 큰 도움을 받았다니 정말 잘된 일이다.

“그런데 그 작업이 끝나자마자 선생님의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다. 장애인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하는 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해보지 않은 소재로 창작을 하는 데 부담이 된다는 점을 솔직히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곧장 대답이 전해졌다. ‘윤선생이 하는 작업이라면, 장애인 소재 작품도 충분히 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빈산’과 ‘땅’ 공연을 보며 그런 확신을 얻으셨던 모양이다. 게다가 작품을 하게 된다면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미리 밝히셨다.”

“작품을 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만들어 주겠다는데…, 현실적으로는 이게 또 어려운 일이다. 내가 장애인의 세계를 잘 모르는 상태가 아니었나.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시각장애인이 가진 생각이 무엇인지도 아는 게 없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한다면, 관심을 가질 기회도 없었던 게 당시의 내 입장이었다.”

- 새로 제안을 받은 게 시각장애인 테마였나?

“‘우리 함께 춤을 추어요’라는 작품인데, 시각장애인의 삶을 얘기하는 내용이었다. 선생님의 의견은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문화는 누구나 다 공유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문화예술을 왜 문화예술인들만 즐기느냐, 왜 공유의 폭을 좁게 잡고 그 안에 머물러 있느냐고 지적을 많이 하셨다. 문화예술인들은 자기네들만의 잔치가 아닌, 누구나 다 즐길 수 있고 장애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그래서 이 작업이 실제 들어가면, 최고의 무대와 최고의 음악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냥 어쩌다 한번 하는 무료공연 따위가 아니라, 장애인들의 실제 삶을 소재로 하는 무대를 제대로 만들어 보자는 제안이었다.”

- 윤덕경무용단의 작품세계에 장애인의 소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점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 공연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 준비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공연을 결정하기 전까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까지 30년을 이어온 내 춤살이의 의미가 무엇이며, 나의 춤이 이 땅의 장애인들에게 어떤 몸짓이 될 수 있는 건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반성도 했다. 사실 누군가 장애를 얻게 되면 그 순간부터 현실적인 모든 기회를 빼앗기게 되지 않는가. 고용의 기회와 교육의 기회부터 사라지고, 삶의 근본들을 하나둘씩 잃어간다는 게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내 눈앞에 가장 두드러지게 텅 빈 공간으로 남겨졌던 건, 장애인들이 춤이라는 몸짓을 멀리하게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춤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그들에게 춤을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거, 하나씩 사라져가는 춤을 되찾아주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그 작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쉬울 것 같지만 쉬운 건 아무것도 없는 도전이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주저하며 망설인 끝에, 큰 용기를 내어 결단을 내린 것이다.”

-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심적 부담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나게 전해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렇게 준비한 작품 ‘우리 함께 춤을 추어요’가 선생님께 남긴 개인적 의미는 무엇인가.

“예술은 발로 뛰면서 뜨거운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는 걸, 그 작품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생생하게 깨달았다. 혹시라도 장애가 있는 분들에게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을 내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작품의 주제를 극대화할 제반여건이 마련됐고, 음악도 1시간 분량의 순수 국악 창작곡을 받게 되어 1996년 12월에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사단법인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이 개원을 하게 돼서, 개원 기념으로 이 작품을 문예회관 대극장에 다시 올리게 됐다.”

- 당시까지는 장애인들의 현실과 아픔을 한국무용으로 승화한다는 걸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어려운 점이 분명히 존재할 텐데, 선생님의 입장에선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나.

“단순히 ‘어려움’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제일 중요한 건 우리가 장애계를, 장애인들을 잘 알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무용수 전체가 그들의 마음을 자신의 것처럼 느껴야 했다. 스스로 느껴야 감정이 생기고 몸짓으로 이어지며, 그 몸짓에 진정성이 있어야만 보는 이들에게도 감동이 전해지는 법 아닌가. 그래서 무대를 준비하면서 시각장애인과 함께 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시각장애인을 직접 모셔서, 시각장애를 갖게 되기 전후의 느낌과 감정을 듣는 체험을 같이 한 것이다. 서울 수유리에 있는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진행했던 1박 2일의 세미나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때 마로니에공원에서 장애체험 같은 공개행사가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직접 이동해 보고, 안대를 한 채로 시각장애체험을 하는 등의 일정이었는데, 거기에도 우리 무용수들이 전부 참여해서 몸과 마음으로 익히는 경험을 이어갔다.”

“또한 몸짓과 가장 가까운 언어가 바로 수화 아닌가. 그래서 새벽 6시 반에 모여 3개월 동안 수화를 배우는 과정도 거쳤다. 그래서 당시 공연 때 내가 무대 복장을 한 상태에서, 오프닝 인사를 수화로 직접 하기도 했다. 단순히 몸짓으로만 끝내는 게 아니라, 장애의 입장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만큼 준비를 해야만 진정한 춤사위가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확인한 셈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 관객이 느끼는 감동은 그런 진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함께 춤을 추어요’가 선생님의 무용세계에 장애라는 테마를 도입한 계기였다면, 아무래도 그 완성은 ‘어-엄마 우으섯다’가 아닐까 생각한다.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호평을 받은 작품이었는데, 그 작품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면 좋겠다.

“우리 무용단을 언급할 때마다, 가장 많은 분들이 떠올리시는 작품이 ‘어-엄마 우으섯다(I… I… saw you smile, Mommy)’라고 나 역시 듣고 있다. 춤이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문자답의 일환으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장애아를 자식으로 둔 어머니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춤 인생을 살아온 나 자신을 점검하며 재충전함과 동시에 거듭 태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고 자부한다.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자식의 안타까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어머니의 끝없는 자식사랑을 우리의 전통 관습과 정서에 담아 춤으로 표현했다. 너무 많은 분들이 고마운 평가를 해주셔서, 뒤늦었지만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 그동안 활동해 오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정말 좋은 작품의 탄생을 계속 기대하겠다. 지금까지는 지나간 과정을 말씀해주셨는데, 이번에는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가 무엇인지 전해주시면 좋겠다.

“내가 특별히 ‘무엇을 하겠다’ 내지는 ‘어떻게 하겠다’는 걸 내세우기보다는, 내게 주어지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받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외국의 문화를 자주 경험하면서 느꼈던 바가 아주 많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용이니까, 가장 먼저 장애인들에게 춤을 보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우리가 예술로써 무언가의 도움이 된다면, 그걸 가르치는 방법을 모든 예술인들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됐다.”

“내가 몸담고 있는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에서도 이런 기획과 행사를 많이 진행할 것이다. 나 혼자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도 적극 참여할 수 있게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장애인들을 위한 교육적 차원의 기획이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하고 있다. 일단 나를 기준으로 한다면, 교육적인 입장에서 장애인들에게 춤을 보급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 이 사안에 의문을 갖는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것 같아 대신 질문하겠다. 장애인들에게 어떻게 춤을 즐기도록 만든다는 것인가.

“장애인들은 몸을 못 움직인다는 전제 안에서 생각을 멈추면 안 된다. 장애유형별로 춤을 익힐 수 있는 분야는 많이 있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시는 분들은 상체를 움직일 수 있다. 물론 증상에 따라 움직임의 범위가 달라지겠지만, 그 증상마다 특화를 시킨다면 얼마든지 무용을 경험하는 건 가능해진다. 손목이라든지 목이라든지 상체라든지, 움직임이 가능한 부위를 이용한 무용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 말씀하시는 의미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데, 실제로 장애인들이 춤이라는 문화를 접하게 될 마당이 언제 어디서 마련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실질적인 방법을 찾으려 서로 노력한다면, 모든 과정과 실천이 충분하게 가능해질 거라 생각한다. 장애인들은 일단 육체적인 움직임을 반복하며 생활하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TV나 모니터 하나를 들고, 여기 화면을 보며 따라해 달라 하며 말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직접 가서 직접 가르쳐야 한다. 거기에다 재미있게 음악을 맞춰 진행하다 보면, 분명한 반응과 성취가 진행되고 이뤄질 거라고 본다. 한마디로 ‘찾아가는 춤교육’이라는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마무리 차원에서 그 시스템의 본질을 질문 드리고 싶다. 공연 소재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이 직접 실천할 수 있을 만한 실제 현장을 통해 그런 아이템들을 개발하시겠다는 건가? 그렇게 직접 보급을 하시겠다는 의미인지를 확인할 겸 여쭙고 싶다.

“시각장애인들도 시각에 장애가 한정되는 것이지, 몸은 움직일 수 있지 않은가. 춤과 무용과 율동이라는 의미를 어렵게 받아들이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춤은 무대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한국전통무용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리듬감을 느낄 만한, 그런 심정적 공감대를 ‘본능’ 안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각 지자체와 여러 문화센터에서 지역 차원의 강습을 많이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굳이 현대무용처럼 창작무용이 아니어도 괜찮다.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동작을 단순화시키고, 제각기 자신의 몸에 맞는 춤을 체험함으로써 모든 신체를 골고루 움직이는 건, 취미나 여가생활 이상의 건강도 얻을 수 있게 된다.”

- 지역사회의 문화운동이 장애인들까지 끌어안고 나가려면, 현역으로 활동하는 무용인들의 의식도 많이 변화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구체적인 움직임의 중심에 선생님이 서 주시기를 기대하고 싶다.

“지금 당장 획기적인 인식개선이 단번에 이뤄질 리는 없을 것이다. 대신 문화의 안쪽으로, 예술의 세상 안으로, 무용의 경험 속으로 장애인들 또한 접근 가능한 세상을 일궈간다면, 당사자뿐 아니라 예술인에게도 정말 큰 보람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단체뿐 아니라, 많은 예술인들의 지혜를 모아 이 움직임을 실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작성자이태곤 기자  a352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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