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층 문제의 해결은 사회 발전의 전제조건
[만난사람]신명호 한국도시연구소 소장
본문
흑백사진 같은 과거의 풍경은 언제나 ‘과거완료형’으로 규정시키는 게, 2008년 새 정부의 국정운영기조와 맞을 것이다. 가난은 사라졌고 극빈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소비를 통한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우리 사회를 윤택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존재하니, 국민의 삶은 ‘7·4·7공약’을 직접 체험할 날도 멀지 않았음이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은 왜 신음 차원을 넘어 절망의 절규를 내지르고 있는가? ‘경제 하나만큼은 확실하게’라는 구호를 믿었던 국민들은, 이제 ‘내 가족만이라도’라는 숨 막히는 생존 릴레이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가난은 정말 사라졌는가? 국가는 성장 기조를 약속대로 달성할 것인가?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서민 삶의 변천이 거시적(巨視的)으로 어떻게 진행됐던 건지를, 한국도시연구소 신명호 소장 의견을 통해 들어 본다.
- 한국도시연구소는 언제 설립이 된 건가
1985년에 생겼으니까 20년이 훌쩍 넘었다. 정확히 23년이 되어간다.
- 어떤 목적으로 설립된 건가. 원래의 명칭은 다른 것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도시빈민연구소’였다. 사실 맨 처음에는 그 앞에 ‘천주교’라는 관용어도 붙어 있었다. 그런데 특정 종교를 앞에 붙이는 건 적절치 않다고 해서 뗐고, 그 이후로도 도시빈민연구소라는 이름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94년 전후로 ‘공간환경연구회’라는 소장학자들의 연구 모임과 연계가 되며 변화가 있었다.
- 어떤 지향성을 가진 학자들이었나
주로 진보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는 도시 관련 연구자와 학자들이었는데, 거기 계셨던 분들이 우리 연구소에 깊은 관심을 갖고 부분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는 과정 중에 합치자는 얘기가 있어서 연구소 규모가 일정 부분 확대되기도 했다.
법인화를 계기로 해서 명칭을 바꾸고 구성원들도 늘어났다. 그래서 법인을 만들면서 ‘한국도시연구소’가 새롭게 재탄생되었다.
- 도시빈민, 즉 도시에 사는 취약계층을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1980년대 초반에 목동 신시가지가 개발되면서, 빈민촌의 강제철거가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그 강제철거를 기점으로 해서 빈민운동이 비로소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철거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일어나면서, 도시빈민운동이 공식화됐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사회 저변의 활동가들이 현장에 다가가게 됐고, 주민들을 만나며 조직화 작업이 진행됐다. 거의 대부분 세입자들이었다. 당시에는 세입자들에 대한 대책이라는 게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 그냥 쫓겨났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그래서 세입자 조직을 만들고 싸우면서, 정부에 요구 조건을 내걸기 시작했던 게 바로 그 시점이다.
- 연구소의 설립 시점이 그 시기였나
공식적인 연구소 설립 이전에도, 활동가들의 결집을 위한 모임이 적지 않은 규모로 있었다. 주로 현장을 지원하는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데 모여 대책과 전략을 세우는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우리 연구소의 설립자이신 고(故) 제정구 선생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서 교육을 하고, 주민들의 의식을 함양시키는 중심체 역할을 먼저 했던 거다. 그러다가 제정구 선생과 같이 활동하셨던 외국인 정일우 신부님이 도시빈민운동의 전략을 연구하는, 또한 운동의 정책을 개발하는 차원의 연구소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연구소가 현장운동을 지원하는 일종의 전략기지 형태로 열매 맺게 된 것이다.
- 그렇다면 초기부터 도시빈민 연구가 활발히 진행된 건가
그렇다고 단정하기엔 현실 자체가 다른 상황이었다. 명칭은 연구소라 정해졌지만, 실질적인 연구가 진행된 것은 미비했다. 왜냐? 당시의 현실이 너무 치열했기에, 현장 중심의 활동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 그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연구소의 정체성 같은 건 어떻게 변했는가
치열한 현장 중심의 활동으로 유지되다가, 80년대 후반과 90년대로 들어서면서 일정한 변환점이 생겼다. 즉, 우리가 나서서 조직을 만들고 교육을 진행하지 않아도, 자체적으로 운동의 활성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철거민 중심으로 구성된 조직들이 여기저기에서 생겨났다는 거다.
더불어 다른 운동단체들도 여럿 생겨났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다시 찾기로 결정했다. 현장에 직접 개입하는 활동은 이미 각지에서 자생적인 풀뿌리 운동으로 진행되고 있었기에, 우리 연구소의 원래 명칭에 맞도록 정책을 우선 연구하고 그것을 정부에 촉구하는 운영 시스템으로 재정립이 된 것이다.
-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재정립했나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식의 연구와 조사가 비로소 시작이 됐다. 그렇게 방향을 잡으면서, 90년대 들어선 이후부터 연구다운 연구를 진행하게 된 것 같다.
- 연구소 창설이 1985년이라면, 우리나라에서 도시빈민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파고든 최초의 조직이었다는 의미인가
최초는 아니다. 그 무렵에 빈민운동단체들이 막 생겨나기 시작했었다. 우리 연구소가 설립되던 와중에도 엇비슷한 움직임이 발생하고 있었던 거다. 단적인 예로, 천주교 등의 각 종교 내에서 빈민들을 연구하고 지원하는 ‘빈민선교회’ 같은 단체들이 그 무렵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우리 단체(연구소) 이름을 무엇으로 정하는 게 좋을까?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했었던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다. 도시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니까 도시빈민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런 식으로 ‘도시빈민’이라는 명칭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에, 새로운 호칭의 단어를 생각해 내려 애쓰던 시절이었다고 기억된다.
- 1970년대에 도시화가 시작되고 80년대에 빈민들의 문제가 등장했는데, 빈민 문제가 대두된 최초의 시점은 사실적으로 1960년대 말이 아니었나
60년대 말부터 70년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됐다. 농촌 인구들이 도시로 대거 유입됐던 시기가 그때이다. 그런데 도시로 몰려온 사람들이 살 수 있을 만한 기반시설이라는 게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산동네로 자리를 잡으며, 막노동 같은 일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사람들의 주거지가 ‘빈민촌’이라는 이름으로 형성이 됐던 것이다. 가난한 동네라 하면 곧장 산동네를 연상시키게 된 시점이 바로 그 무렵인 셈이다.
대한민국이 서울 중심으로 재편된 것도 그때부터이다. 전국에서 서울로 몰려와서 산동네 아니면 하천변에 판잣집을 짓고 사는 이들로 넘쳐났다.
- ‘재개발’이라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발생한 게 바로 그 시점이라고 보는 게 맞나
군사정권 시절이 아닌가. 국민의 의견 수렴 같은 과정이 배제된 채로, 일방적인 밀어내기가 시작된 게 그 시절이 맞다. 대표적인 예가 목동 신시가지라는 곳이다. 중산층을 위한 대규모 주거단지를 조성한다고 했다. 그 자리에는 누가 살고 있었는가? 바로 서울의 대표적인 빈민촌이 바로 거기였다는 거다.
그 자리를 일방적으로 모두 철거한 다음, 같은 자리에 등장한 사람들은 아파트 한 채 정도를 구입하고 살 만한 중산층이었다. 양평동도 마찬가지다. 그 이전을 지적한다면 70년대 초 청계천 일대의 대규모 철거를 빼놓을 순 없다. 빈민촌을 도심에서 제거하려는 작업은 이미 그때부터 공식화가 되어 있던 것이다.
- 그 부작용의 시작이 상계동 문제가 아닌가
꼭 상계동은 아니지만, 굳이 언급을 하자면 비운의 주인공이 바로 상계동 사람들이다. 도심에서 철거되며 약간의 외각으로 밀려났던 곳이 상계동이라는 지역이다. 그런데 그 상계동이 제2의 중산층 생활권을 만들기 위한 표적이 되면서, 80년대 들어 또다시 철거의 대상이 됐기 때문에 이슈화가 됐던 거다. 도심의 동심원에서 밖으로 밀려나기를 반복하면서, 그 일부는 강남으로 가서 비닐하우스촌(村)을 형성하게 됐다.
강남이 부자들만의 상징은 아니다. 지금도 강남과 송파와 서초 외부 지역으로 떠밀려 그 자리에서 생존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 제정구 선생과 종교적 열정을 가진 여러 활동가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뛰어든 게 빈민운동의 발화점으로 나타나는 건가
제정구 선생은 학생 시절에 청계천을 드나들면서, 야학을 하는 등의 관심을 보이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철거가 진행되니까, 아예 휴학을 하고 거기 안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청계천 인근이 완전하게 철거되니까, 사람들과 같이 양평동으로 이주를 했었다. 그런데 거기마저 또다시 철거가 되니까, 그때는 ‘우리가 마냥 쫓겨 다닐 수 없다!’ 하며 ‘집단이주’라는 시도를 계획했던 것이다.
그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이주에 따른 자금지원을 요청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추기경님 말씀이 ‘내가 돈은 없지만 보증은 서 줄 수 있다.’ 해서, 해외 지원을 담당하던 독일의 어느 천주교 단체로부터 자금을 빌려올 수 있게 됐고, 그 지원을 기반으로 시흥의 땅을 사서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게 됐던 것이다.
- 그렇다면 신명호 소장님은 어떻게 이 연구소와 결합하시게 된 건가
나는 76학번이고 대학원을 80년에 들어갔다. 1980년… 현대사에서 가장 어수선하던 시절이 아닌가. 그래서 공부를 한다고 앉아 있다는 게 맞는 건가? 하며 개인적으로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전공이 인류학이었는데, 당시 도시인류학 강의를 듣던 와중이었다.
도시인류학 강의 내용은 주로 남미의 판자촌 생활을 주제로 하며 진행이 됐었다. 그때 강의를 하시던 분이 시흥의 철거민 정착 마을과 제정구라는 인물에 대해 얘기하면서, 관심 있는 사람은 같이 만나 대화를 나눠 보자고 했다.
그래서 몇몇이 모여 제정구 선생을 만나 그 분의 강의를 들었고, 마침 석사학위를 준비하던 내 논문 주제로 시흥시 이주와 마을 형성 과정을 결정하게 되었다.
- 그 만남의 과정이 중요한 계기였던 것 같다. 이후 어떻게 진행이 됐는가
시흥으로 직접 이주를 했다. 그 마을이 형성되는 과정을 논문으로 완성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983년 1월이라고 기억된다. 시흥의 마을에 살기 시작하면서 직접 ‘당사자’가 된 것이다.
인류학에서는 탐구목표에 대해 직접 들어가 살면서 참여관찰을 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몇 달 동안 논문을 쓰기 위한 시도로 들어갔다가, 거기에서 굉장히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하게 됐다. 그래서… 아예 그 곳의 주민이 됐다. 이후 14년 동안 거기에서 살게 된 거다.
- 그렇다면 이 연구소에 23년 동안 집중적으로 관여하며 살아오신 건데, 23년의 과정을 어떻게 회고하며 평가하시는가
솔직히 어떻게 흘러왔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빠르게 지나갔다는 거다. 지금은 연구 위주의 시스템으로 바뀐 모습이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빈민지역의 산동네 같은 곳에 우리의 활동가들이 널리 퍼져서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살고 있었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빈민운동은 ‘주민들과 함께 산다.’는 원칙을 초창기부터 가지고 있었다. 즉, 이론과 실천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다는 거다. 초창기 이전의 시점에 빈민운동의 불씨를 놨던 1960년대 선배들이 줄기차게 강조했던 게 그것이었다.
‘주민들하고 같이 산다.’ ‘내가 주민이 되어야 한다.’ ‘활동가 이전에 주민이어야 한다.’ 이것을 가장 먼저 강조하셨고, 그러한 원칙을 고수했던 분들이 오래 전부터 많이 계셨다.
우리와 함께 하던 많은 활동가들이 산동네에 들어가서 공부방을 하고 유치원 같은 시스템을 운영했다. 주부들을 위한 모임도 활성화하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다양한 분야로 일을 했다. 우리 연구소를 중심으로 전략과 전술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안에 대해 월례발표회 같은 걸 하면 서울의 모든 활동가들이 한데 모였다. 모두 모여 서로의 얘기를 듣고 토론한 다음, ‘현시점에서 이 문제는 이렇게 대처하는 게 옮은 것 같다.’는 중지가 모이면,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 각자의 위치에서 실천하는 방식으로 유기적인 발전 체계를 이루어갔다.
- 연구소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집중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무엇인가
주택 문제이다. 90년대 이후 중앙 집중적인 운동이 아닌 지역 단위로 결성되는 자발적 조직이 늘어났기에, 연구소의 기능은 오히려 더 지역운동에서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축으로 변화됐다. 그 중심이 주택 문제였다.
- 2000년대 들어선 이후로는 양상이 어떻게 바뀌었나. 도시빈민이 없어지거나 사라진 게 아니기에, 과거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을 것 같다
IMF 환란을 기점으로 해서 흔히들 얘기하는 건 ‘새로운 형태의 빈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70년대까지 봤던 것은 절대빈곤이었고 그게 대다수였다. 절대빈곤이라 함은 굶고 헐벗은 생활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단계의 빈곤을 의미한다. 그 이후 경제적으로 풍족해졌다고 하지만, 경제위기를 맞고 나서 맞이하게 된 새로운 가난의 모습은 헐벗은 빈곤이 아닌 일자리의 빈곤이다.
즉, 고용의 불안정으로 겪게 되는 또 다른 형태의 빈곤이 엄습한 것이다. 외견상으로는 여유 있는 소비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 같지만, 고용의 불안정으로 인한 소득과 소비의 불안에 따라 생활의 질이 급작스럽게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일부에서는 그 현실을 ‘신빈곤’이라 부르기도 한다.
- 연구소에서 주택 문제에 중점을 둔다면, 도시의 빈곤과 관련해서 영구임대아파트 같은 지역을 특히 주목할 것 같다
빈곤층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과거에는 산동네와 하천변이었는데, 그런 데가 없어지고 나서부터는 일반 서민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나마 빈민들이 밀집된 곳이 임대아파트나 비닐하우스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지하 셋방의 숫자도 적지 않다.
요즘은 조그만 단독주택에도 지하를 만들어 세를 주는 경우가 많다. 도시의 빈곤이 사라진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집단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 그렇게 개별화가 된다면, 가난의 문제는 사회적 이슈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는 경향이 늘어날 게 아닌가
공동체가 많이 깨졌다. 산동네 시절에는 그 동네가 하나의 공동체로써의 기능을 담당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이웃이 도와주기도 하고 함께 하기도 했는데, 그게 깨지면서 사람들이 흩어지게 됐고, 각자 작은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니까 모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 같은 것만 하더라도, 산동네 시절에는 그 즉시 공론화가 됐다.
어느 집에서 술 마시다가 폭행이 벌어졌다면,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싸움을 말리고 우는 아이들을 데려가서 달래는 등의 일정한 자정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그렇지 않은가. 지하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라는 점이 큰 문제인 거다.
- 그렇다면 빈곤 상태에 놓인 개인들에게는 오히려 더 심각한 상황이 된 것인가
그런 측면이 있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과거와 같이 굶거나 헐벗을 정도의 그런 심각한 고통을 요즘은 안 겪는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빈곤 양상은 과거에 비해서 상당히 양호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
심지어 빈곤과 관련해서 우리나라 저소득층을 동남아시아의 절대빈곤층과 비교하며, 우리의 빈곤은 빈곤도 아니라고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억측이고 착각이며 오류일 뿐이다. 빈곤이라는 것은 그렇게 국제비교를 통해 당사자들을 저울질하는 게 아니다. 한 사회 속에서 상대적으로 느끼게 되는 게 빈곤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생활비가 유독 많이 들어가는 구조이다. 먹고 사는 데 쓰는 비용이 많다는 거다. 거기에서 1차적인 생활의 차이가 발생한다. 또한 국민적 필수품이 되어버린 휴대전화만 하더라도, 누구는 끊임없이 새 것을 구입하며 소비를 하고 누구는 최소한의 단순 통화만으로 유지하지 않은가.
통신·교통·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유지비용이 발생하는데,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것이 빈곤의 척도이다. 같은 사회 안에서 심리적으로 좌절하는 상황이 누구의 현실인가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 종부세·양도세를 대폭 완화해서 주택 경기를 활성화한다는 얘기가 또 나온다.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노리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도시의 틀이 또 바뀌고 과거의 시행착오가 재현될 뿐인 게 아닌가
이 정부 이전부터 서울시가 뉴타운이라는 걸 지정해서 개발하고 있다. 거기서 나타나는 문제는 가난한 세입자들한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점이다. 이 사람들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은 저렴한 임대주택인데, 그런 주택이 충분하게 공급되지 않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던 문제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다는 거다.
그 대목에서 일부 개선된 점이 있다면, 재개발을 할 때 세입자의 권리가 일정 부분 확보됐다는 점이다. 과거처럼 무조건 내쫓는 게 아니라, 임대아파트 등을 지어 입주시킨다는 대안이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뉴타운 사업의 경우에는 그게 충분치 않다는 게 문제이자 모순점이다.
집을 가지고 있는 주택소유자라 할지라도, 재개발이 들어올 때 그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액의 자금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그렇기에 그 지역 주민들 중에서 가구주라 해도, 거기에 계속 남아서 사는 사람들의 비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적지 않은 가구가 떠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결론은 간단하지 않은가. 경제적으로 더 여유가 있는 외지사람들이 들어와서, 새로 개발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 임대아파트도 주변의 인식에 따라 타의적으로 슬럼화 시키는 경향이 있다. 학교까지도 경계를 나누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새로운 슬럼화의 반복이라는 연결고리를 끊을 방법은 없는가
한편에서는 사회적 혼합이라 하면서,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아파트를 섞어 한 단지 안에 짓는 방안을 거론하기도 한다. 아이디어 차원이든 실제 추진이든 뭐든 간에, 물리적 공간을 그렇게 만든다 해서 사람간의 관계가 화합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 하드웨어적인 구상이 아닌 의식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우선시하는 것은 경제적 이익이라는 대상이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기존의 다른 가치들을 모두 다 물리치는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지난 번 국회의원 선거 때를 보자. 뉴타운 개발 공약을 이구동성으로 외쳤고, 그 공약을 앞세운 이들이 모두 당선되지 않았는가.
사람들의 의식이 가장 큰 문제가 된 거다. 과거에 어려웠다가 어느 정도 풍요로운 삶을 맛보며 지냈다. 그러다가 환란 이후로 일시에 꺾이고 꺼지게 되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불안정한 심리 상태로 확대재생산이 된 거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곤 현금, 그것도 목돈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고 거기에 몰두하려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이 팽배한 상태에서, 어느 한두 가지의 정책으로 국민적 의식과 인식을 하루아침에 돌리기는 극히 어렵다.
그런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한, 그런 틀은 계속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게 큰 문제점이다.
- 앞으로도 불안정한 일자리 문제로 인해, 빈곤의 양상이 계속 확산될 거라는 예상이 든다. 더 심화될 가능성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지금 다른 해법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전체적으로 본다면 우리 경제 전체의 문제이다. 우리 경제가 과거와 같은 높은 성장을 하지 못하고 저성장으로 돌아섰다. 더불어 산업구조 자체가 영세기업이나 노동자들한테는 굉장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우리 경제 자체의 경쟁력이 없어진 거다.
그러니까 잘 나가는 IT 업종 몇 군데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이고, 그런 몇몇 기업들이 수출을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그들만의 수입으로 끝난다는 점이 사회적으로도 크나큰 문제가 된다. 과거처럼 대기업이 수출로 번 돈이 밑으로 흘러들어가서 일반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향상시키는, 소위 ‘낙수(落水)효과’라는 게 사라졌다.
따로 노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기업의 호황이 새로운 고용을 창출하지도 못하고, 소수의 고급 기술자들만으로 생산이 이루어지는 시스템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결국 고용과 실업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IT 산업의 발전은 서민들 입장에선 굉장히 절망적인 구조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어떻게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갈지에 대한 답도 없기에, 문제의 심각성은 더 커지기만 한다. 그런데다가 소수를 위한 정책, 다시 말해 고위층과 대기업, 잘 사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만 쏟아지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서민들한테는 희망이 없어질 뿐인 구조가 된 거다.
- 빈곤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데, 사회적일자리가 빈곤층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시는가
사회적일자리 제도는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일정 기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생겨나게 하고, 스스로 자활할 수 있는 단계로 나갈 거라는 기대를 갖고 시작한 것이다. 그런 희망을 앞세운 측면이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노동부도 자꾸 축소시켜가겠다며, 궁극적으로는 폐지하는 방향으로 포기를 한 것 같다.
반면 사회적 기업에 대해서는 노동부가 목숨을 걸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의 기업이다. 기업을 만들면 모두 다 성공하는 게 아니라, 이 사회의 틀 안에서 적자생존 해야 하는 별개의 기업인 셈이다. 사회적 기업을 무조건 활성화시키려는 건, 예전 벤처기업 집중 육성 당시와 같은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 확실한 대안과 시원한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사회가 됐다는 게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질문 드린다. 한국도시연구소는 앞으로 어떤 연구를 어떻게 진행할 계획인가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문제를 기본적으로 연구해 왔고, 그런 연구 속에서 우리의 존립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 앞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일자리 문제에 관심을 높여서, 재활이라든지 사회적기업의 정착 등에 큰 관심을 갖고 나갈 것이다.
또 하나를 더한다면 빈곤의 세습, 다시 말해 빈곤의 대물림 문제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를 해나가고 싶다.
그런데 국민들은 왜 신음 차원을 넘어 절망의 절규를 내지르고 있는가? ‘경제 하나만큼은 확실하게’라는 구호를 믿었던 국민들은, 이제 ‘내 가족만이라도’라는 숨 막히는 생존 릴레이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가난은 정말 사라졌는가? 국가는 성장 기조를 약속대로 달성할 것인가?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서민 삶의 변천이 거시적(巨視的)으로 어떻게 진행됐던 건지를, 한국도시연구소 신명호 소장 의견을 통해 들어 본다.
▲한국도시연구소 신명호 소장 ⓒ채지민 객원기자 |
1985년에 생겼으니까 20년이 훌쩍 넘었다. 정확히 23년이 되어간다.
- 어떤 목적으로 설립된 건가. 원래의 명칭은 다른 것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도시빈민연구소’였다. 사실 맨 처음에는 그 앞에 ‘천주교’라는 관용어도 붙어 있었다. 그런데 특정 종교를 앞에 붙이는 건 적절치 않다고 해서 뗐고, 그 이후로도 도시빈민연구소라는 이름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94년 전후로 ‘공간환경연구회’라는 소장학자들의 연구 모임과 연계가 되며 변화가 있었다.
- 어떤 지향성을 가진 학자들이었나
주로 진보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는 도시 관련 연구자와 학자들이었는데, 거기 계셨던 분들이 우리 연구소에 깊은 관심을 갖고 부분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는 과정 중에 합치자는 얘기가 있어서 연구소 규모가 일정 부분 확대되기도 했다.
법인화를 계기로 해서 명칭을 바꾸고 구성원들도 늘어났다. 그래서 법인을 만들면서 ‘한국도시연구소’가 새롭게 재탄생되었다.
- 도시빈민, 즉 도시에 사는 취약계층을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1980년대 초반에 목동 신시가지가 개발되면서, 빈민촌의 강제철거가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그 강제철거를 기점으로 해서 빈민운동이 비로소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철거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일어나면서, 도시빈민운동이 공식화됐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사회 저변의 활동가들이 현장에 다가가게 됐고, 주민들을 만나며 조직화 작업이 진행됐다. 거의 대부분 세입자들이었다. 당시에는 세입자들에 대한 대책이라는 게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 그냥 쫓겨났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그래서 세입자 조직을 만들고 싸우면서, 정부에 요구 조건을 내걸기 시작했던 게 바로 그 시점이다.
- 연구소의 설립 시점이 그 시기였나
공식적인 연구소 설립 이전에도, 활동가들의 결집을 위한 모임이 적지 않은 규모로 있었다. 주로 현장을 지원하는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데 모여 대책과 전략을 세우는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우리 연구소의 설립자이신 고(故) 제정구 선생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서 교육을 하고, 주민들의 의식을 함양시키는 중심체 역할을 먼저 했던 거다. 그러다가 제정구 선생과 같이 활동하셨던 외국인 정일우 신부님이 도시빈민운동의 전략을 연구하는, 또한 운동의 정책을 개발하는 차원의 연구소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연구소가 현장운동을 지원하는 일종의 전략기지 형태로 열매 맺게 된 것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
그렇다고 단정하기엔 현실 자체가 다른 상황이었다. 명칭은 연구소라 정해졌지만, 실질적인 연구가 진행된 것은 미비했다. 왜냐? 당시의 현실이 너무 치열했기에, 현장 중심의 활동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 그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연구소의 정체성 같은 건 어떻게 변했는가
치열한 현장 중심의 활동으로 유지되다가, 80년대 후반과 90년대로 들어서면서 일정한 변환점이 생겼다. 즉, 우리가 나서서 조직을 만들고 교육을 진행하지 않아도, 자체적으로 운동의 활성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철거민 중심으로 구성된 조직들이 여기저기에서 생겨났다는 거다.
더불어 다른 운동단체들도 여럿 생겨났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다시 찾기로 결정했다. 현장에 직접 개입하는 활동은 이미 각지에서 자생적인 풀뿌리 운동으로 진행되고 있었기에, 우리 연구소의 원래 명칭에 맞도록 정책을 우선 연구하고 그것을 정부에 촉구하는 운영 시스템으로 재정립이 된 것이다.
-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재정립했나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식의 연구와 조사가 비로소 시작이 됐다. 그렇게 방향을 잡으면서, 90년대 들어선 이후부터 연구다운 연구를 진행하게 된 것 같다.
- 연구소 창설이 1985년이라면, 우리나라에서 도시빈민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파고든 최초의 조직이었다는 의미인가
최초는 아니다. 그 무렵에 빈민운동단체들이 막 생겨나기 시작했었다. 우리 연구소가 설립되던 와중에도 엇비슷한 움직임이 발생하고 있었던 거다. 단적인 예로, 천주교 등의 각 종교 내에서 빈민들을 연구하고 지원하는 ‘빈민선교회’ 같은 단체들이 그 무렵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우리 단체(연구소) 이름을 무엇으로 정하는 게 좋을까?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했었던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다. 도시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니까 도시빈민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런 식으로 ‘도시빈민’이라는 명칭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에, 새로운 호칭의 단어를 생각해 내려 애쓰던 시절이었다고 기억된다.
- 1970년대에 도시화가 시작되고 80년대에 빈민들의 문제가 등장했는데, 빈민 문제가 대두된 최초의 시점은 사실적으로 1960년대 말이 아니었나
60년대 말부터 70년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됐다. 농촌 인구들이 도시로 대거 유입됐던 시기가 그때이다. 그런데 도시로 몰려온 사람들이 살 수 있을 만한 기반시설이라는 게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산동네로 자리를 잡으며, 막노동 같은 일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사람들의 주거지가 ‘빈민촌’이라는 이름으로 형성이 됐던 것이다. 가난한 동네라 하면 곧장 산동네를 연상시키게 된 시점이 바로 그 무렵인 셈이다.
대한민국이 서울 중심으로 재편된 것도 그때부터이다. 전국에서 서울로 몰려와서 산동네 아니면 하천변에 판잣집을 짓고 사는 이들로 넘쳐났다.
- ‘재개발’이라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발생한 게 바로 그 시점이라고 보는 게 맞나
군사정권 시절이 아닌가. 국민의 의견 수렴 같은 과정이 배제된 채로, 일방적인 밀어내기가 시작된 게 그 시절이 맞다. 대표적인 예가 목동 신시가지라는 곳이다. 중산층을 위한 대규모 주거단지를 조성한다고 했다. 그 자리에는 누가 살고 있었는가? 바로 서울의 대표적인 빈민촌이 바로 거기였다는 거다.
그 자리를 일방적으로 모두 철거한 다음, 같은 자리에 등장한 사람들은 아파트 한 채 정도를 구입하고 살 만한 중산층이었다. 양평동도 마찬가지다. 그 이전을 지적한다면 70년대 초 청계천 일대의 대규모 철거를 빼놓을 순 없다. 빈민촌을 도심에서 제거하려는 작업은 이미 그때부터 공식화가 되어 있던 것이다.
- 그 부작용의 시작이 상계동 문제가 아닌가
꼭 상계동은 아니지만, 굳이 언급을 하자면 비운의 주인공이 바로 상계동 사람들이다. 도심에서 철거되며 약간의 외각으로 밀려났던 곳이 상계동이라는 지역이다. 그런데 그 상계동이 제2의 중산층 생활권을 만들기 위한 표적이 되면서, 80년대 들어 또다시 철거의 대상이 됐기 때문에 이슈화가 됐던 거다. 도심의 동심원에서 밖으로 밀려나기를 반복하면서, 그 일부는 강남으로 가서 비닐하우스촌(村)을 형성하게 됐다.
강남이 부자들만의 상징은 아니다. 지금도 강남과 송파와 서초 외부 지역으로 떠밀려 그 자리에서 생존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 ⓒ채지민 객원기자 |
제정구 선생은 학생 시절에 청계천을 드나들면서, 야학을 하는 등의 관심을 보이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철거가 진행되니까, 아예 휴학을 하고 거기 안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청계천 인근이 완전하게 철거되니까, 사람들과 같이 양평동으로 이주를 했었다. 그런데 거기마저 또다시 철거가 되니까, 그때는 ‘우리가 마냥 쫓겨 다닐 수 없다!’ 하며 ‘집단이주’라는 시도를 계획했던 것이다.
그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이주에 따른 자금지원을 요청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추기경님 말씀이 ‘내가 돈은 없지만 보증은 서 줄 수 있다.’ 해서, 해외 지원을 담당하던 독일의 어느 천주교 단체로부터 자금을 빌려올 수 있게 됐고, 그 지원을 기반으로 시흥의 땅을 사서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게 됐던 것이다.
- 그렇다면 신명호 소장님은 어떻게 이 연구소와 결합하시게 된 건가
나는 76학번이고 대학원을 80년에 들어갔다. 1980년… 현대사에서 가장 어수선하던 시절이 아닌가. 그래서 공부를 한다고 앉아 있다는 게 맞는 건가? 하며 개인적으로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전공이 인류학이었는데, 당시 도시인류학 강의를 듣던 와중이었다.
도시인류학 강의 내용은 주로 남미의 판자촌 생활을 주제로 하며 진행이 됐었다. 그때 강의를 하시던 분이 시흥의 철거민 정착 마을과 제정구라는 인물에 대해 얘기하면서, 관심 있는 사람은 같이 만나 대화를 나눠 보자고 했다.
그래서 몇몇이 모여 제정구 선생을 만나 그 분의 강의를 들었고, 마침 석사학위를 준비하던 내 논문 주제로 시흥시 이주와 마을 형성 과정을 결정하게 되었다.
- 그 만남의 과정이 중요한 계기였던 것 같다. 이후 어떻게 진행이 됐는가
시흥으로 직접 이주를 했다. 그 마을이 형성되는 과정을 논문으로 완성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983년 1월이라고 기억된다. 시흥의 마을에 살기 시작하면서 직접 ‘당사자’가 된 것이다.
인류학에서는 탐구목표에 대해 직접 들어가 살면서 참여관찰을 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몇 달 동안 논문을 쓰기 위한 시도로 들어갔다가, 거기에서 굉장히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하게 됐다. 그래서… 아예 그 곳의 주민이 됐다. 이후 14년 동안 거기에서 살게 된 거다.
- 그렇다면 이 연구소에 23년 동안 집중적으로 관여하며 살아오신 건데, 23년의 과정을 어떻게 회고하며 평가하시는가
솔직히 어떻게 흘러왔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빠르게 지나갔다는 거다. 지금은 연구 위주의 시스템으로 바뀐 모습이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빈민지역의 산동네 같은 곳에 우리의 활동가들이 널리 퍼져서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살고 있었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빈민운동은 ‘주민들과 함께 산다.’는 원칙을 초창기부터 가지고 있었다. 즉, 이론과 실천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다는 거다. 초창기 이전의 시점에 빈민운동의 불씨를 놨던 1960년대 선배들이 줄기차게 강조했던 게 그것이었다.
‘주민들하고 같이 산다.’ ‘내가 주민이 되어야 한다.’ ‘활동가 이전에 주민이어야 한다.’ 이것을 가장 먼저 강조하셨고, 그러한 원칙을 고수했던 분들이 오래 전부터 많이 계셨다.
우리와 함께 하던 많은 활동가들이 산동네에 들어가서 공부방을 하고 유치원 같은 시스템을 운영했다. 주부들을 위한 모임도 활성화하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다양한 분야로 일을 했다. 우리 연구소를 중심으로 전략과 전술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안에 대해 월례발표회 같은 걸 하면 서울의 모든 활동가들이 한데 모였다. 모두 모여 서로의 얘기를 듣고 토론한 다음, ‘현시점에서 이 문제는 이렇게 대처하는 게 옮은 것 같다.’는 중지가 모이면,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 각자의 위치에서 실천하는 방식으로 유기적인 발전 체계를 이루어갔다.
- 연구소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집중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무엇인가
주택 문제이다. 90년대 이후 중앙 집중적인 운동이 아닌 지역 단위로 결성되는 자발적 조직이 늘어났기에, 연구소의 기능은 오히려 더 지역운동에서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축으로 변화됐다. 그 중심이 주택 문제였다.
- 2000년대 들어선 이후로는 양상이 어떻게 바뀌었나. 도시빈민이 없어지거나 사라진 게 아니기에, 과거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을 것 같다
IMF 환란을 기점으로 해서 흔히들 얘기하는 건 ‘새로운 형태의 빈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70년대까지 봤던 것은 절대빈곤이었고 그게 대다수였다. 절대빈곤이라 함은 굶고 헐벗은 생활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단계의 빈곤을 의미한다. 그 이후 경제적으로 풍족해졌다고 하지만, 경제위기를 맞고 나서 맞이하게 된 새로운 가난의 모습은 헐벗은 빈곤이 아닌 일자리의 빈곤이다.
즉, 고용의 불안정으로 겪게 되는 또 다른 형태의 빈곤이 엄습한 것이다. 외견상으로는 여유 있는 소비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 같지만, 고용의 불안정으로 인한 소득과 소비의 불안에 따라 생활의 질이 급작스럽게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일부에서는 그 현실을 ‘신빈곤’이라 부르기도 한다.
- 연구소에서 주택 문제에 중점을 둔다면, 도시의 빈곤과 관련해서 영구임대아파트 같은 지역을 특히 주목할 것 같다
빈곤층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과거에는 산동네와 하천변이었는데, 그런 데가 없어지고 나서부터는 일반 서민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나마 빈민들이 밀집된 곳이 임대아파트나 비닐하우스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지하 셋방의 숫자도 적지 않다.
요즘은 조그만 단독주택에도 지하를 만들어 세를 주는 경우가 많다. 도시의 빈곤이 사라진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집단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 그렇게 개별화가 된다면, 가난의 문제는 사회적 이슈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는 경향이 늘어날 게 아닌가
공동체가 많이 깨졌다. 산동네 시절에는 그 동네가 하나의 공동체로써의 기능을 담당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이웃이 도와주기도 하고 함께 하기도 했는데, 그게 깨지면서 사람들이 흩어지게 됐고, 각자 작은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니까 모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 같은 것만 하더라도, 산동네 시절에는 그 즉시 공론화가 됐다.
어느 집에서 술 마시다가 폭행이 벌어졌다면,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싸움을 말리고 우는 아이들을 데려가서 달래는 등의 일정한 자정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그렇지 않은가. 지하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라는 점이 큰 문제인 거다.
- 그렇다면 빈곤 상태에 놓인 개인들에게는 오히려 더 심각한 상황이 된 것인가
그런 측면이 있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과거와 같이 굶거나 헐벗을 정도의 그런 심각한 고통을 요즘은 안 겪는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빈곤 양상은 과거에 비해서 상당히 양호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
심지어 빈곤과 관련해서 우리나라 저소득층을 동남아시아의 절대빈곤층과 비교하며, 우리의 빈곤은 빈곤도 아니라고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억측이고 착각이며 오류일 뿐이다. 빈곤이라는 것은 그렇게 국제비교를 통해 당사자들을 저울질하는 게 아니다. 한 사회 속에서 상대적으로 느끼게 되는 게 빈곤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생활비가 유독 많이 들어가는 구조이다. 먹고 사는 데 쓰는 비용이 많다는 거다. 거기에서 1차적인 생활의 차이가 발생한다. 또한 국민적 필수품이 되어버린 휴대전화만 하더라도, 누구는 끊임없이 새 것을 구입하며 소비를 하고 누구는 최소한의 단순 통화만으로 유지하지 않은가.
통신·교통·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유지비용이 발생하는데,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것이 빈곤의 척도이다. 같은 사회 안에서 심리적으로 좌절하는 상황이 누구의 현실인가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
이 정부 이전부터 서울시가 뉴타운이라는 걸 지정해서 개발하고 있다. 거기서 나타나는 문제는 가난한 세입자들한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점이다. 이 사람들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은 저렴한 임대주택인데, 그런 주택이 충분하게 공급되지 않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던 문제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다는 거다.
그 대목에서 일부 개선된 점이 있다면, 재개발을 할 때 세입자의 권리가 일정 부분 확보됐다는 점이다. 과거처럼 무조건 내쫓는 게 아니라, 임대아파트 등을 지어 입주시킨다는 대안이 제시된 것이다. 하지만 뉴타운 사업의 경우에는 그게 충분치 않다는 게 문제이자 모순점이다.
집을 가지고 있는 주택소유자라 할지라도, 재개발이 들어올 때 그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액의 자금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그렇기에 그 지역 주민들 중에서 가구주라 해도, 거기에 계속 남아서 사는 사람들의 비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적지 않은 가구가 떠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결론은 간단하지 않은가. 경제적으로 더 여유가 있는 외지사람들이 들어와서, 새로 개발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 임대아파트도 주변의 인식에 따라 타의적으로 슬럼화 시키는 경향이 있다. 학교까지도 경계를 나누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새로운 슬럼화의 반복이라는 연결고리를 끊을 방법은 없는가
한편에서는 사회적 혼합이라 하면서,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아파트를 섞어 한 단지 안에 짓는 방안을 거론하기도 한다. 아이디어 차원이든 실제 추진이든 뭐든 간에, 물리적 공간을 그렇게 만든다 해서 사람간의 관계가 화합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 하드웨어적인 구상이 아닌 의식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최우선시하는 것은 경제적 이익이라는 대상이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기존의 다른 가치들을 모두 다 물리치는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지난 번 국회의원 선거 때를 보자. 뉴타운 개발 공약을 이구동성으로 외쳤고, 그 공약을 앞세운 이들이 모두 당선되지 않았는가.
사람들의 의식이 가장 큰 문제가 된 거다. 과거에 어려웠다가 어느 정도 풍요로운 삶을 맛보며 지냈다. 그러다가 환란 이후로 일시에 꺾이고 꺼지게 되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불안정한 심리 상태로 확대재생산이 된 거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곤 현금, 그것도 목돈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고 거기에 몰두하려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이 팽배한 상태에서, 어느 한두 가지의 정책으로 국민적 의식과 인식을 하루아침에 돌리기는 극히 어렵다.
그런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한, 그런 틀은 계속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게 큰 문제점이다.
- 앞으로도 불안정한 일자리 문제로 인해, 빈곤의 양상이 계속 확산될 거라는 예상이 든다. 더 심화될 가능성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지금 다른 해법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전체적으로 본다면 우리 경제 전체의 문제이다. 우리 경제가 과거와 같은 높은 성장을 하지 못하고 저성장으로 돌아섰다. 더불어 산업구조 자체가 영세기업이나 노동자들한테는 굉장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우리 경제 자체의 경쟁력이 없어진 거다.
그러니까 잘 나가는 IT 업종 몇 군데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이고, 그런 몇몇 기업들이 수출을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그들만의 수입으로 끝난다는 점이 사회적으로도 크나큰 문제가 된다. 과거처럼 대기업이 수출로 번 돈이 밑으로 흘러들어가서 일반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향상시키는, 소위 ‘낙수(落水)효과’라는 게 사라졌다.
따로 노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기업의 호황이 새로운 고용을 창출하지도 못하고, 소수의 고급 기술자들만으로 생산이 이루어지는 시스템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결국 고용과 실업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IT 산업의 발전은 서민들 입장에선 굉장히 절망적인 구조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어떻게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갈지에 대한 답도 없기에, 문제의 심각성은 더 커지기만 한다. 그런데다가 소수를 위한 정책, 다시 말해 고위층과 대기업, 잘 사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만 쏟아지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서민들한테는 희망이 없어질 뿐인 구조가 된 거다.
- 빈곤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데, 사회적일자리가 빈곤층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시는가
사회적일자리 제도는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일정 기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생겨나게 하고, 스스로 자활할 수 있는 단계로 나갈 거라는 기대를 갖고 시작한 것이다. 그런 희망을 앞세운 측면이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노동부도 자꾸 축소시켜가겠다며, 궁극적으로는 폐지하는 방향으로 포기를 한 것 같다.
반면 사회적 기업에 대해서는 노동부가 목숨을 걸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의 기업이다. 기업을 만들면 모두 다 성공하는 게 아니라, 이 사회의 틀 안에서 적자생존 해야 하는 별개의 기업인 셈이다. 사회적 기업을 무조건 활성화시키려는 건, 예전 벤처기업 집중 육성 당시와 같은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 확실한 대안과 시원한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사회가 됐다는 게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질문 드린다. 한국도시연구소는 앞으로 어떤 연구를 어떻게 진행할 계획인가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문제를 기본적으로 연구해 왔고, 그런 연구 속에서 우리의 존립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 앞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일자리 문제에 관심을 높여서, 재활이라든지 사회적기업의 정착 등에 큰 관심을 갖고 나갈 것이다.
또 하나를 더한다면 빈곤의 세습, 다시 말해 빈곤의 대물림 문제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를 해나가고 싶다.
작성자이태곤 기자 a352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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