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이야기 ] “기술을 배워 자립하는게 꿈이예요”
본문
한 소아마비장애우가 부모님의 말류에도 불구하고 기술을 배워 40여 년 전부터 장애우들에게 무상으로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있다. 서울시 중랑구 신내동에 위치한 지체장애우 기술교육원 ‘사랑의 집’이 바로 그 곳이다. 그동안 배출한 졸업생만 해도 7백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법인체가 아닌 순수 민간이 어떻게 40여 년 동안 무상으로 장애우들에게 기술을 가르칠 수 있었는지 사랑의 집을 직접 찾아가 들어 보았다.
자립, 창의 성실로 무장한 사랑의 집 사람들
아침부터 햇살이 따가 왔는데 사랑의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의 집 마당에 드리운 큰 나무 그늘 때문인가 하는 순간 세 명의 남자분이 물 호스를 들고 마당을 청소하는 것이 보였다. 상쾌한 수증기가 더운 공기를 시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또 이른 아침부터 청소하는 모습이 활력 있어 보이기도 했다.
마당을 가로 질러 현관에 들어가니 바로 교실이 보인다. 책상배치가 꼭 옛날 서당을 연상케 했다. 아직 수업이 시작되지 않았는지 사람이 다 차지 않은 채 목재로 된 앉은뱅이 책상들만이 두 줄로 나란히 앉아서 중앙에 있는 선생님 책상을 바라보고 있다.
교실에 가면 꼭 살피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급훈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반 분위기도 달라지기 마련인데 사랑의 집의 급훈은 ‘자립, 창의, 성실’이었다.
현재 사랑의 집에는 지체장애우 24명이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그 중 11명은 이미 기술을 다 배우고 취직을 했으나 특별히 거주지가 없어 사랑의 집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13명이 기술을 배우는 훈련생이다.
훈련생들의 나이는 24세에서 50세까지 다양하다. 전에는 소아마비장애우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교통장애나 산업재해 등으로 인한 중도장애우가 많이 찾아와 연령도 다양해졌다고 한다.
사랑의 집에서 가장 연장자인 양명식 씨가 바로 중도장애우다. 왕년에 테니스 선수로도 활동하던 양명식 씨는 은행원이었다고 한다. 부인이 해산하러 친정에 간 사이 가스가 방안으로 새 장애를 갖게 됐는데 그 후 아내와 이혼을 하고 사랑의 집에 들어와 기술을 배우 고 있다. 과거의 활동적인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무척 조용하고 말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중도장애우일 경우 기술교육이 더 어렵다고 기술지도교사 정재훈 씨는 말한다. “중도에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 중에는 직장을 잃고 아내와 이혼을 해 가정마저 파탄 나는 경우가 있죠. 갑자기 몰아닥친 슬픔을 이기지 못해 하루하루를 술과 담배로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한 사람은 자살기도까지 하게 되는데 그런 중도장애우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적 안정이 중요하죠.”
그래서 사랑의 집에서는 장애우들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 신앙을 갖도록 하고 있다. 수업료와 생활비도 받지 않는 사랑의 집에 입소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겠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이러한 약속이 없었다면 자포자기한 장애우들에게 결코 자립의 의지를 심어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박영해 원장은 말한다.
신앙 이외에는 사랑의 집에서 훈련생들을 특별히 규제하는 것은 없다. 모두 자율에 맡긴다.
하루 일과는 아침 8시에 가정예배를 보고 나서 12시까지 오전 공부를 하고 12시부터 1시까지 식사를 하고 2시부터는 낮잠을 잔다. 대부분 허리가 약하기 때문에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건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2시부터 5시까지 오후 공부를 하고 그 이후부터는 자율시간이다. 이 때는 복습을 하거나 취미생활을 하거나 스스로 알아서 한다. 주로 바둑이나 장기를 두거나 TV시청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토요일은 12시까지만 공부를 하고 그 이후에 외출이 허용된다. 주일엔 교회에 갔다 오는 것 이외에는 하루 종일 마음껏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취업나간 동료들도 돌아오기 때문에 모처럼만에 영화 관람이나 야구경기를 보러 외출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의 집 식구들은 주말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고 한다.
장애우가 이 땅에서 대접받고 살 길은 오직 자립뿐
사랑의 집의 설립자는 현 원장 박영해 씨의 남편 신동욱 씨다. 신 씨가 10년 전 과로로 돌아가셔서 아내 박영해 씨가 그의 뒤를 이어 현재 사랑의 집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신동욱 씨는 3세때 소아마비를 앓은 후 다리를 잘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지나가다 장애우들이 보이면 유심히 쳐다보곤 했는데 주로 구걸하는 장애우들이 많았다. 어느 날 신 씨가 그들에게 왜 구걸을 하며 사냐고 물어보니 그들도 다른 일을 하고 싶지만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먹고 살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걸을 해도 그 수입을 그이 혼자 다 갖는 게 아니기 때문에 구걸을 해서 생활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신 씨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뛰어난 기술만 있으면 장애가 있어도 어디에서든 먹고 사는 일만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신 씨 집안이 ‘장사는 쌍놈이나 하는 천한 일’로만 여겼던 고루한 교육자 집안이어서 학교수업이 끝나면 식구들 모르게 시계기술학원에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그이 나이 15세 되던 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아버지와 큰 형은 징집돼 나가서 남은 어머니와 막내 동생과 함께 피난을 떠나게 됐다. 그 때가 1.4후퇴 때였는데 날이 어두워져 어느 산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 때 신동욱 씨는 잠시 꿈을 꾸었는데 “지금 당장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놀라 잠에서 깬 신 씨는 꿈이 이상해 당장 어머니와 막내를 깨워 한밤중에 다시 피난을 떠났다. 한겨울인데다 다리가 불편해 거의 기어가다시피해서 그 산을 빠져나왔는데 얼마 후 그 곳은 폭격을 맞아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다들 막막해 했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신 씨 가족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다행히 신 씨가 전에 배워둔 시계수리기술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신 씨는 인천에 정오당이라는 시계방을 차렸는데 기술이 좋았던지 장사가 제법 잘 돼서 그이가 평소 꿈꿔왔던 일도 시작할 수 있었다. 신 씨처럼 지체장애가 있는 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양정기술학원을 개원한 것이다. 그 때가 1960년 11월이다. 본인은 일찍이 기술을 익혀 자립을 할 수 있었지만 기술이 없는 장애우들은 거리에서 구걸을 하거나 집에서 천덕꾸러기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당시 직업학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신 씨가 기술학원을 다녀보니 몇 가지 제약이 있었다. 우선 정부에서 운영하는 직업학교에서는 18세 미만인 사람만을 받으라고 권고하고 있어 교통사고나 산업재해로 인해 중도에 장애를 입은 사람들을 받아줄만한 곳이 없었다. 또 직업학교에서 가르치는 기술 중에는 사회에 나가서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실용적인 것이 드물었다. 즉 양복은 사람들이 항상 입는 옷이 아니고 치수를 재야하는데 몸이 불편한 장애우가 배우기에는 제약이 따른다. 또 조각품은 판로가 적어 그 또한 생계를 이어가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몸이 불편한 장애우가 쉽게 할 수 있고 졸업을 하고도 자립이 가능한 기술로 시계수리만한 것이 없었다. 여기에 도장을 파는 기술과 보석감정까지 할 수 있으면 웬만한 비장애우와 경쟁을 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양정기술원에서는 장애우들에게 1인 3기를 가르쳤다.
보통 기술학교에서는 훈련기간이 3개월에서 6개월이다. 이 기간이 지나면 기술을 다 배우지 못해도 졸업을 시킨다. 재입학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양정원에서는 훈련생이 기술을 다 배울 때까지 1년이고 3년이고 계속 가르쳤다.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성심 성의껏 가르치는 양정원의 소문이 널리 퍼져 기술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또 양정원을 졸업한 기술자를 고용한 가게 주인들마다 ‘기술이 야무지다’고 인정을 해주자 다른 가게에서도 양정원에 구인요청을 해와 훈련생이 모자랄 정도였다.
이에 힘을 얻은 신 원장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법인 등록을 하지 않은 채 자립을 위해 책임지는 교육을 고수하고 있다.
최규하 대통령 영부인이 지금의 사랑의 집 건물 하사
인천에서 양정기술원을 시작한지 1년 만에 신 원장의 건강이 급작스레 나빠지게 됐다. 한국전쟁 당시 1월 추운 날씨에 피난을 가느라 몸을 무리한 후유증에다 양정원을 운영하면서 과로한 탓에 몸이 많이 상한 것이다. 신 원장은 당시 교육을 받고 있던 훈련생들을 모두 수료시킨 후 부산으로 요양을 떠나게 됐다. 몸이 좀 회복되자 신 원장은 그곳에서 다시 기술원을 시작해 5년 동안 160명의 수료생을 배출하고 1966년 7월 다시 상경했다. 그 이후 1979년까지 동대문구에서 260명의 수료생을 배출하면서 이름도 양정기술원에서 사랑의 집으로 개원했다.
그러나 형편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훈련생으로부터 교육비를 받는 것도,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돈이 나올 구석이 없었다. 오직 신 원장이 운영하는 시계방 수입과 가끔씩 출연하는 방송출연료와 간증집회에 나가 받는 사례금이 전부였다. 박영해 씨도 어떡하든 사랑의 집을 살려보기 위해 평생 안 해 본 남의 집 파출부로도 나가고 시장에 버려진 배춧잎을 주워다 국을 끓이는 등 많은 애를 썼다.
그러나 적자가 계속 누적돼 사람의 집은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런데도 신 원장은 방 한 칸에서 3교대를 해가며 계속 학생들을 가르쳤다. 부인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신원장의 말이라면 뭐든지 믿고 도왔던 박영해 씨마저도 “우리 이제 그만 합시다”라고 말을 했다고 하니 그 때 경제적 어려움이 어느 정도였을지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그 때 KBS 방송의 인간승리라는 프로그램에서 신동욱 원장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섭외가 들어왔다. 당시 푼돈이라도 궁했던 신 원장은 방송출연을 허락했다. 그런데 그 방송을 최규하 대통령의 영부인이 우연히 보게 됐다. 너무나 어렵게 사랑의 집을 운영하는 신 원장의 사연을 본 영부인은 그 진위를 조사하게 한 후 사랑의 집을 위해 무엇을 도와줄지 신 원장과 의논을 했다. 신 원장은 훈련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집을 하나 지어 달라고 해 신내동에 지금의 사랑의 집이 세워졌다. 이로써 사랑의 집은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사랑의 집에 대한 소문이 알려져 신동욱 원장은 1981년엔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런가 하면 그 뒤를 이은 박영해 원장이 1990년엔 서울시 공로상을 1993년엔 신한국인 선정, 1994년엔 서울 600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상은 받을 때 뿐 실질적으론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사랑의 집이 방송을 타고 큰 상을 여러 차례 받게 되자 돈 많은 집에서 장애가 있는 자녀를 입소시키려 데려 오기도 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작은 규모에 시설도 보통 가정과 별 다를 게 없자 다들 한 번 보고는 그냥 가 버린다고 한다.
꼭 1명이 아이를 맡기겠다고 해 받아들인 적이 있는데 며칠 못가 문제가 생겼다. 돈 많은 부모가 매일같이 자기 아들에게 먹일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오자 다른 훈련생들이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박 원장은 그 부모에게 “아들에게 정 음식을 갖다 주려거든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먹을 수 있을 만큼 가지고 오고 그렇지 않으면 따로 음식을 해오지 말라”고 당부한 적도 있었다.
과로로 쓰러진 남편의 뜻을 이어가는 박영해 원장
1988년 8월 27일 신동욱 원장이 54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했다. 과로가 원인이었다. 신동욱 원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가장 불안해 한 사람은 졸업생들과 훈련생들이었다. 누가 적자를 보면서까지 사랑의 집을 맡아 운영해줄지, 기술은 누가 가르쳐줄지 불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동욱 원장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비상회의를 열었다.
의견을 모아본 결과 85년도에 졸업한 11기 수료생 정재훈 씨를 기술지도교사고 초빙하자는 결론이 나왔다. 정 씨가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서울근교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서 함께 숙식하며 기술을 가르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정재훈 씨도 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그 때부터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사랑의 집에서 무상으로 기술을 지도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의 집 동문회 회장 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신 원장님이 살아계실 때나 지금이나 사랑의 집 형편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죠. 그래도
신 원장님께서 저희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시느라 애쓰시다 돌아가시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모른 척 할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사랑의 집엔 자립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고 가족적인 분위기여서 일하기에도 편합니다.”
박영해 씨 역시 갑작스레 신 원장이 죽고서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할지 무척 고민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랑의 집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겠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20년도 넘게 신 원장이 이 일을 어떻게 해왔는지 지켜보면서 박영해 씨도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의 집을 이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이 일을 할 수 없죠. 남편이 살았을 때는 이 일 하지 말자는 얘기도 여러 번 했었어요. 아이들도 못 먹고 힘겹게 사는 것이 속상해서 그런 말을 했지만 지금은 이게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신동욱 원장이 살아 있을 때는 박영해 원장은 살림만 하면 됐었는데 이제는 사랑의 집 전체 운영을 직접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에 밤잠을 설치는 때도 여러 번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엌일을 대신 맡아줄 아주머니를 한 명 두었다. 박 원장이 부엌에 매달려 있으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침상만큼은 박원장이 손수 짓는다고 한다. 그리고 훈련생들의 생일도 꼭 챙겨준다. 아무리 바쁘고 형편이 어려워도 미역국을 끓여 아침상에 올린다고 한다. 그리고 저녁엔 훈련생들이 용돈을 모아 과자와 쵸코파이를 사서 촛불을 밝혀준다고 한다.
사랑의 집에 불어닥친 IMF
이런 가족적인 분위기 때문에 훈련생들은 졸업을 하고서도 연락을 끊지 않는다. 처음엔 개별적으로 연락을 해왔는데 신 원장이 돌아가시고 나서부터는 신원장의 기일인 8월27일 과 창립기념일인 11월1일에 졸업생들과 훈련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와 관련업에 대한 정보도 나눈다. 또 사랑의 집에 문제가 있을 때면 서로 의논하기도 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훈련생 한 명이 지나가는 아가씨가 너무 예뻐서 휘파람을 불며 야유를 했는데 얼마 후 동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장애우들이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젊은 아가씨를 희롱했다며 각별히 주의를 주라는 민원이 들어왔다는 내용이었다.
이날 사랑의 집에서는 자체회의가 열렸다. 사랑의 집 이미지를 나쁘게 하는 일은 삼가자는 이야기와 함께 그 훈련생에게도 각별히 주의를 주었다. 이후 이런 일이 절대 발생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사랑의 집 앨범엔 그동안 찍은 사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신동욱 원장이 상을 받았던 사진, 기 졸업식, 예배 보는 사진 등 그동안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는데 그 중 사랑의 집 식구들 표정이 가장 밝았던 때는 몇 년 전 속초로 간 수련회 사진이었다. 1년에 한번쯤 답답한 서울을 떠나는 수련회는 사랑의 집 식구들에게는 가장 기다려지는 행사다. 그런데 올해는 경제사정이 어려워 수련회를 갈 수 없게 됐다고 한다. 사랑의 집에서도 IMF한파가 불고 있었다. 전 같으면 후원자들이 보내준 라면이 가득 쌓여 있을 텐데 요즘은 그것마저도 끊겼다.
그런가 하면 요즘 사랑의 집에는 비장애여성들의 문의전화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기술을 가르쳐달라는 것인데 사랑의 집에서는 여성을 받지 않는다. 여성들만을 위해 따로 낼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랑의 집 식구들을 더욱 불안하게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현재 사랑의 집은 가건물로 등록돼 있다. 땅은 서울시 소유로 돼 있기 때문에 서울시에서 이 땅을 다른 용도로 쓴다고 하면 내주고 다른 곳으로 옮겨야할 형편이다. 지난해에는 마을 도로를 낸다고 해서 사랑의 집 마당이 반이나 잘려 나갔다고 한다.
얼마 전 근처에 있던 장애우시설도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 사랑의 집 식구들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들어 취업나간 동기들이 되돌아오고 있다. 가게가 문을 닫아 실직을 해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집은 요즘 대문을 항상 열어 놓는다고 한다. 취업나간 식구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랑의 집 식구들은 돌아가신 신 원장님이 많이 생각난다고 한다. 경제 한파가 아무래도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사 정재훈 씨는 이렇게 어려운 때일수록 가만히 있지만 말고 기술이라도 열심히 배워두면 곧 좋은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의 말을 던지다. 그리고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남성 지체 장애우들에게는 사랑의 집의 문이 활짝 열려있다고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다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며 우왕좌왕하는 이 때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하며 성실히 사는 사랑의 집 사람들이 참 든든해 보였다. 그리고 지난 시절 수많은 시련에도 잘 견뎌온 것처럼 이번에도 오뚜기처럼 잘 견뎌낼 것이라는 믿음 반, 바람 반을 가져본다.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