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우 아들과 고물 주으러 다니는 정옥희씨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양수밖에 없어요"
본문
아들이 병 분류해서 박스에 담는 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미
양수 엄마로 불리는 그이를 만났다. 정옥희씨, 57년생이니까 우리나라 나이로 쉰 살이다. 그이는 슬하에 아이 넷을 두고 있는데 첫째가 올해 스물 두 살인 양수다. 그리고 양수는 다운증후군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다.
장애를 가진 자식을 가슴에 안고 사는 부모치고 누군들 가슴 아픈 사연이 없겠나마는, 그 중에서도 그이의 아픔이 조금 더 특별하다고 생각되어 지는 것은 지금은 극복했지만 그이가 양수를 낳고 나서 한때 느껴야 했던 삶에 대한 짙은 두려움의 양상과, 또 하나 장애를 가진 자식과 함께 하기 위해 그이가 선택해서 하고 있는 일이 남다르다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전자는 그렇다 치고 후자를 언급해 보면, 지금 그이가 하고 있는 일은 웬만한 남자들도 하기 벅차하는 고물수집 일이다. 재활용품 수거, 그 중에서도 잡병을 수집해서 파는 일을 하고 있다. 하루 종일 그이를 따라다니면서 확인한 사실이지만 잡병 한 자루의 평균 무게는 20킬로가 넘는다. 이 자루를 수 십 개 트럭에 싣고 내리는 일을 가냘픈 그이 혼자, 양수가 옆에서 조금 도와주긴 하지만, 억척스럽게 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잡병 수집 일이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기자가 그이를 만날 날 그이는 강화도에 들어가 한 차 가득 잡병을 싣고 나와 인천에 있는 고물상에 넘기는 일을 했다. 소요된 시간이 거의 한나절이었다. 나중에 하루 수입을 물어보니 그이는 "4만5천 원 정도 벌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언뜻 생각해도 차 기름값을 빼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내친 김에 "돈도 안 되는데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느냐?"고 그이에게 물어보았다. 그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양수가 박카스 병을 분류해서 박스에 담는다니까요. 이건 기적 같은 일이에요. 나는 양수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너무 감격해서 양수가 처음 한 박스 담아 논 거 내보내지도 못했어요. 그 박스를 만지고, 쓰다듬고, 얼마나 감격스럽든지, 내가 그거에 녹아서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거 같아요."
자식이 박카스 병을 분류해서 박스에 담는 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미, 그 기적을 자꾸 보고 싶어 자신의 몸에 골병이 들어도 힘든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어미,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이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어미에게 자식은 뭔가 라는 한탄을 저절로 하게 된다.
그이 말에서도 알 수 있지만 애틋하다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로 그이의 자식 사랑은 유별나다. 기자가 보기에 그이는 장애를 가진 아들 양수를 철저하게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이가 양수를 몸 안에 넣지 못하고 밖으로 내놓고 다니는 것을 애석해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이는 온통 양수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장애아 낳는 거 멈추고 싶어서 장기 기증해
그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수를 낳았을 때 다운증후군이 무슨 장애인지 전혀 몰랐어요. 주위 사람들이 애기 보고 와서 조금 이상하다 그러는데 나는 애기가 뭐가 이상한지 전혀 몰랐어요. 그러다가 병원에서 퇴원하고 한 달 후쯤 예방주사 맞히러 갔다가 양수의 장애를 알게 됐어요. 그때 내가 너무 떨려서 양수 아빠에게 말을 못했어요. 양수 아빠에게 양수 장애를 얘기하는데 3년이 걸렸는데, 1년에 한 번씩 양수 아빠에게, "양수 병원에서 그러는데 조금 늦을 거 같아" 그러면 양수 아빠는 "내가 늦었어" 라고 대답했어요. 또 1년 후, "병원에서 그러는데 양수 어디가 안 좋을 것 같아" 그러면 아빠는 "나도 어렸을 때 약했어" 라고 대답하고, 마지막으로 "양수 아빠, 아무래도 양수가 말을 늦게 할 것 같아" 라고 얘기하자 아빠는 "응 나도 어릴 때 말 하는 거 늦었어" 그렇게 무심하게 대답했어요. 양수가 장애아라는 거 아빠에게 알린 건 88올림픽이 열렸던 해, 양수 네 살 때였어요. 그 정도로 저는 양수의 장애를 인정할 수 없었어요"
- 보통 부모가 장애아를 낳게 되면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장애를 가진 아이에게 전념하기 위해 아이를 더 이상 낳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 아이를 돌봐줄 다른 아이를 더 낳는 건데 양수 밑으로 셋을 더 낳은 거 보면 어머니는 후자 쪽 입장이었나 봐요?
"저는 양수 아빠와 살려면 양수 밑으로 하나를 더 낳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양수 밑 아이가 장애아로 태어나면 셋이 죽을 각오를 했어요. 그때, 지금 죽나 하나 더 데리고 죽나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독한 마음을 먹게 된 건 임신해서 병원에 갔는데 둘째도 장애아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에요. 병원에서 염색체 검사를 하고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둘째 아이를 임신 6개월 만에 사산하게 됐어요. 제가 둘째 아이에 집착한 건 억울함 때문이기도 했는데, 양수 낳고 집에서 양수 들여다보고 있는데 한 마디로 돌아버리겠는 거였어요. 정신이상 되는 사람들이 이해됐어요. 내 안에 내가 갇혀가지고 양수를 낳은 것이 도무지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내가 과거에 뭘 잘못 했나 라는 생각만 골똘히 하면서 억울해서 미치겠더라고요. 제가 결혼하기 전에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낮에 직장생활하고 밤에 야간대학 다니면서 동생 둘 다 학교 보내고, 그렇게 열심히 살고 흠 잡힐 일 한 번 한 적이 없는데, 그런데 내가 장애아를 낳다니,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자존심도 상하고, 주변사람들 시선도 부담되고, 정말 두렵고 겁나서 원래 제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신앙도 잃었어요."
- 어머니가 느꼈다는 억울함은 충분히 이해되는데 양수를 낳고 나서 두려움도 맛봤다고 하셨어요. 그 두려움의 실체는 뭔가요?
"지금도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두 딸이 결혼할 때 문제가 되지 않을까 그게 제일 걱정돼요. 실은 남동생 결혼할 때 문제가 됐었거든요. 가문을 보는 집안에서는 장애가 문제가 되더라고요. 저는 정말 장애아를 낳는 걸 내 선에서 멈추게 하고 싶어요. 그래서 간절한 바람으로 장기 기증 서약을 했어요."
그이가 지갑에서 등록카드를 꺼내 보여준다.
"사심이 있어서, 하느님 내가 이렇게 할 테니까 두 딸은 제발 건강한 아기 낳게 해달라고, 방송에서 보니까 장애가 유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던데, 두 딸이 아니더라도 내가 장애아를 낳은 조상이 될 수도 있잖아요. 너무 싫어요."
그이는 말끝에 진저리를 치면서 눈물을 훔친다. 그이 말은 이어진다. 그이는 "아이를 더 낳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꼭 아들을 하나 더 낳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단다.
"나 자신보다도 양수 아빠를 많이 생각했어요. 시집 제사 때 절하러 가면 남자들 절하고 그 다음 아들들만 절을 시키더라고요. 그런데 양수 아빠는 양수가 제사상을 건드릴까봐 절도 못하고 양수 붙잡고 뒤에 서있는데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내가 저 사람에게 결혼하자고 했으니까 죽어도 아들 하나는 낳아줘야겠다. 양수도 아들이지만 시키지 않아도 제사에 가서 넙죽 절하는 아들 하나는 꼭 낳아줘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아침마당 방송 보니까 충청도 어디 가면 만지면 아들 낳는 돌이 있대요. 그 방송을 보고 충청도 산골까지 한걸음에 달려갔어요. 봉화에서 한약 지어 먹으면 아들 낳는다고 해서 차타고 가다가 멀미해서 뻗은 적도 있었고, 아무튼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하면 별 짓을 다했죠."
그이는 막내아들을 낳는데 무려 10년이나 걸렸다고 덧붙였다. 그이의 늦둥이 막내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다.
양수와 함께 있기 위해 고물 줍기 시작
이제 그이가 고물을 주으러 다니게 된 사연을 소개할 차례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00년 양수 아빠가 운영하던 금형 관련 사업체가 부도가 났다. 집을 날리고, 아이들 교육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이도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런데 많은 일 중에 왜 하필 고물 수집일 이었을까.
"처음부터 고물을 주으러 다닌 건 아니고 한 1년 식당일을 했어요. 양수 학교 갔다 오면 오후 세 시쯤 됐는데, 그때 양수 집에다 가둬놓고 일 나가서 저녁 열 시에 집에 왔어요. 집안이 난장판인건 괜찮았는데, 그때 양수가 어려서 그랬는지 몰라도 베란다 너머로 자꾸 물건을 내던지더라고요.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집안에 놔두고 가면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데 양수를 집에 놓고 가면 꼭 가둬 놓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였어요. 지금도 그래요. 딸은 엄마 나간다 그러면 그냥 집에 있는 거고, 양수는 내가 나간다 그러면 가둬놓고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쉽게 떼놓지를 못하겠어요. 식당 일이 힘들어서 그만둔 게 아니라 결국 양수 때문에 일을 못하겠더라고요. 양수 혼자 집에 놔둘 수가 없어서요."
식당 일은 그만뒀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놀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양수를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그이,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갑갑한 가슴을 식히기 위해 혼자 옥상에 올라가서 동네 풍경을 내려다보던 그이 눈에 리어카를 끌고 파지를 줍고 있는 한 할아버지 모습이 들어왔다. 그이는 할아버지 모습을 보고 바로 저거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다른 일은 몰라도 파지 줍는 일은 양수를 데리고 다니면서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나 트럭 한 대 사서 양수와 파지 줍는 일 할 거야 그랬더니 양수 아빠가 극구 반대했어요. 그래도 제가 우겼죠. 우겨서 1톤 트럭을 한 대 할부로 샀어요. 처음에는 돈을 벌려고 한 게 아니라 차 할부금만 다 갚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시작했어요. 양수랑 둘이서 재활용품 주으러 돌아다니는데 얼마나 창피했는지 몰라요. 종이박스 하나를 아는 사람들이나 학교 엄마들 피해 두세 번 빙빙 돌아다니다가 겨우 줍기도 하고, 처음에 많이 울었죠. 그리고 양수와 아픈 사연도 많았어요. 한 번은 화장품 가게 옮겨가는 데서 박스 모아서 준다기에 갔는데 내가 지하실에서 박스를 다 주워갔고 차를 타고 나오는데 옆을 보니까 양수가 없는 거예요. 양수 아빠에게 전화해서 양수 데리고 있냐고 물었더니 네가 데리고 나갔대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양수가 지하에 박스 가지러 간 사이에 모르고 내가 차를 타고 나온 거였어요. 놀라서 박스 실었던 장소에 다시 가보니 거기 양수가 박스 들고 가게 앞에 서 있는 거였어요. 내려서 엄마가 차타고 가면 너도 타야지 왜 가만히 있느냐고 난리치면서 양수를 때리고 울었어요. 오다 보니까 양수가 옆자리에서 말없이 울고 있었어요."
그이는 오전에는 청소하고 밥 하면서 집안 살림을 하다가 오후에 양수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데리고 나가서 박스나 공병을 줍는 일을 한동안 계속했다. 그러다가 양수가 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인천 장기리에 양수자원이라는 고물상을 차리고 말뿐이지만 어엿한 사장님이 된다.
"지금도 양수가 다녔던 인혜학교에서 아이들 실습 나갈 데가 없다고 전화가 와요. 그때 정신지체 특수학교 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 실습을 나갈 데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이 아침에 고물상에 와서 박카스 병 골라내는 일을 했어요. 고물상을 시작한 건 양수와 일할 터를 마련하겠다는 생각에서 했는데, 처음에도 말했지만 양수가 병뚜껑을 따서 병을 박스에 담으니까 그게 신기해서 계속 하게 된 거죠. 그때 고물상에 아이들 많았어요. 장애를 가진 정식 직원만 아홉 명을 데리고 일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사업이 잘 된 건 아니었고, 늘 적자였어요. 하긴 돈 벌 욕심으로 시작한 게 아니어서 돈 벌 욕심도 없었지만, 내가 직원들과 부모들에게 얘기한 게 이 달 순수익이 1백만원이면 너희들 임금 주고 일단 기름 값만 빼겠다고 그랬는데 기름 값도 제대로 건지지 못했으니까 더 말해 뭐하겠어요."
- 그러면 운영이 안 돼 고물상을 접은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한 4년 했는데 몸이 많이 아파서 그만둬야 했어요. 병원에서 몸이 안 좋다 고 하는데 암이면 차라리 낫겠는데 치료도 불가능하고 음식도 못 먹고 언어장애도 올 수 있다고 겁을 주니까 더 이상 일을 계속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몇 달간 쉬자고 얘기하고 일을 접었어요. 그래도 강화 물건은 놓을 수 없어서 지금 혼자서 돌아다니면서 일 하고 있는 거예요."
왜 몸이 아프지 않겠는가, 역시 앞에서 언급했지만 그이가 하는 일은 웬만한 남정네도 하기 힘든 고된 일이다. 하루 온종일 20킬로가 넘는 병자루를 수십 수백 개 들고 내리는 일을 해야 하는데, 몸에 골병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고물상을 접은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이는 다시 사업체를 벌리려 하고 있다. 기자가 그이를 만났을 때인 8월 중순, 그이는 인천시 서구 외진 곳 야산에 고물상 터를 마련하는 일 때문에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다시 양수자원을 시작하려 하는 건 몸이 조금 나아졌기 때문이에요. 내가 이 일을 안 한다면 양수하고 나하고 무슨 일 하겠어요? 큰 수입 바라는 건 아니고 양수 같은 정신지체 장애우들과 아침에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고 저녁에 또 잘 가라고 인사하면서 웃으며 지내고 싶어요. 그것 뿐이예요. 잘 끌고 가서 2-30년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이들 일자리 제공하고 양수 거기 묻어서 가고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이 밤중에 어떻게 오셨어요" 라는 말에 가슴 무너져
다시 양수 이야기를 해보자. 기자가 내내 마음이 아팠던 건 그이의 양수에 대한 과도한 염려다. 그래서 "양수에 대한 걱정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없을 때 양수의 삶에 대한 걱정이 제일 크죠. 평소에 마음속을 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달라요. 양수의 약속할 수 없는 삶에 대해서. 내가 돌봐줘야 하는데 내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양수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엄마 아빠 없어도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하고 또 학교 졸업 못해도 사회에서 살 수 있겠지만 양수는 그런 기대가 없으니까 희망이 없는 거죠."
- 그래도 만약 부모가 없으면 형제들이 양수 씨를 돌봐줄 거 같은데요?
"저는 그런 기대 안 해요. 양수 아빠 보험 안 좋아하는데 내가 우겨서 아이들 앞으로 보험 을 하나씩 들었어요. 엄마 아빠가 만약 잘못돼도 고생하지 말라고, 흩어지지 말라고, 양수만 놓고 보면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막내도 간접적으로 느끼는 게 있어요. 양수하고 막내하고 차타고 있으면 아이들이 다가와서 막내에게 너 형이냐고 물어요. 그러면 막내가 대답 안 하고 가만있어요. 이렇게 어쨌든 양수의 존재가 나머지 아이들에게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양수는 일반 보험은 가입 안 되고 우체국 보험만 가능해서 우체국에 보험 가입이 되어있고, 나머지 세 아이는 푸르덴셜 보험에 가입되어 있어요. 내가 평소에 큰 딸에게 말해요. 오빠는 네가 데리고 끌어안으려고 생각하지 말고, 엄마가 없으면 시설로 보내라. 대신 꼭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데로 보내라고 얘기해요. 돈 없으면 어떡해요. 시설로도 못 보내고 끌어안을 수도 없을 텐데, 그래서 양수 고생 안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없는 돈이지만 보험 든 거예요."
- 양수 키우면서 제일 어려운 점은 뭔가요?
"사람들의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이죠. 모른 척 하고 지나가주는 게 봐주는 거거든요. 예전에는 양수 보고 엘리베이터 타려는 애들이 안타고 도망치는 게 서러워서 울고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애들을 잡아요. 너 어느 학교에 다니니? 너 몇 학년인데 장애우에 대해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니? 그러지 마라고 야단쳐요. 그리고 만약 어른이 그러면 이제는 쫓아가서 싸워요. 나이도 드실 만큼 드셨는데, 태어나면서 장애우도 있지만 살아가면서 장애우도 많은데 양수에게 이렇게 아프게 대하지 말라고 꼭 짚고 넘어가죠. 나이 들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난폭해 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안 되는데...."
그이는 말하면서 살짝 웃었다. 그런데 웃음에서 허허로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지금 저 성당 안 나가나요. 왜 그런지 아세요? 양수 데리고 저녁에 동네 성당 몇 번 갔었는데, 한 번은 양수가 미사 시간에 앞으로 뛰어나갔어요. 그러니까 앞줄에 앉아 있던 젊은 아저씨가 양수를 안고 왔어요. 그 아저씨는 양수에게 야 임마,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가고 싶었냐 웃으며 그랬는데, 미사가 끝난 후 수녀님이 다가오시더니 이 밤중에 애 데리고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러는 거였어요. 수녀님 표정과 말이 왜 와서 사고를 치느냐 힐난하는 투였어요. 내가 그걸 이겨내야 하는데 이겨낼 수가 없었어요. 믿음을 가진 수녀님에게 밤중에 성당을 어쩐 일로 오셨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뭘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 후로도 또 한 번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성당 나가는 거 접었어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양수를 떼놓을 수가 없는데 성당에서는 양수 데리고 오지마라고 하니 안 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거죠."
그이의 말에서 아픔이 뚝뚝 묻어난다. 장애아를 자식으로 둔 부모는 모두 이렇게 가슴이 시퍼렇게 멍든 채 가슴앓이를 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그이가 말하지 않은 아픔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래도 양수 키우면서 행복해요. 양수가 말을 못하거든요. 제가 아침에 일 나가기 전 잠깐 걸레질 할 때 나도 모르게 멍할 때가 있어요. 그걸 아는 사람이 양수밖에 없어요. 양수가 다가와서 장난 걸고 그래요. 양수와 내가 연결된 뭐가 있냐면, 가령 나는 화장실 들어갈 때 불을 안 켜요. 그러면 양수가 와서 불 켜줘요. 내가 딴 데 있고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양수는 내가 움직이는 상황을 다 염두에 두고 있는 거죠. 이게 부모자식인가 봐요."
이름대신 양수 엄마로 불리는 그이, 그이는 비록 장애를 가진 자식이지만 양수 엄마로 불리는 게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다. 단언하지만 그이가 양수 걱정에서 벗어나는 일은 생전에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기자는 무척 마음 아팠는데 그이는 그게 자신이 사는 이유라고 말했다. 기자는 그이 말에 토를 달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글 이태곤 기자
사진 전진호 기자
"양수가 박카스 병을 분류해서 박스에 담는다니까요. 이건 기적 같은 일이에요. 나는 양수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너무 감격해서 양수가 처음 한 박스 담아 논 거 내보내지도 못했어요. 그 박스를 만지고, 쓰다듬고, 얼마나 감격스럽든지, 내가 그거에 녹아서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거 같아요."
"그래도 양수 키우면서 행복해요. 양수가 말을 못하거든요. 제가 아침에 일 나가기 전 잠깐 걸레질 할 때 나도 모르게 멍할 때가 있어요. 그걸 아는 사람이 양수밖에 없어요. 양수가 다가와서 장난 걸고 그래요. 양수와 내가 연결된 뭐가 있냐면, 가령 나는 화장실 들어갈 때 불을 안 켜요. 그러면 양수가 와서 불 켜줘요. 내가 딴 데 있고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양수는 내가 움직이는 상황을 다 염두에 두고 있는 거죠. 이게 부모자식인가 봐요."
양수 엄마로 불리는 그이를 만났다. 정옥희씨, 57년생이니까 우리나라 나이로 쉰 살이다. 그이는 슬하에 아이 넷을 두고 있는데 첫째가 올해 스물 두 살인 양수다. 그리고 양수는 다운증후군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다.
장애를 가진 자식을 가슴에 안고 사는 부모치고 누군들 가슴 아픈 사연이 없겠나마는, 그 중에서도 그이의 아픔이 조금 더 특별하다고 생각되어 지는 것은 지금은 극복했지만 그이가 양수를 낳고 나서 한때 느껴야 했던 삶에 대한 짙은 두려움의 양상과, 또 하나 장애를 가진 자식과 함께 하기 위해 그이가 선택해서 하고 있는 일이 남다르다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전자는 그렇다 치고 후자를 언급해 보면, 지금 그이가 하고 있는 일은 웬만한 남자들도 하기 벅차하는 고물수집 일이다. 재활용품 수거, 그 중에서도 잡병을 수집해서 파는 일을 하고 있다. 하루 종일 그이를 따라다니면서 확인한 사실이지만 잡병 한 자루의 평균 무게는 20킬로가 넘는다. 이 자루를 수 십 개 트럭에 싣고 내리는 일을 가냘픈 그이 혼자, 양수가 옆에서 조금 도와주긴 하지만, 억척스럽게 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잡병 수집 일이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기자가 그이를 만날 날 그이는 강화도에 들어가 한 차 가득 잡병을 싣고 나와 인천에 있는 고물상에 넘기는 일을 했다. 소요된 시간이 거의 한나절이었다. 나중에 하루 수입을 물어보니 그이는 "4만5천 원 정도 벌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언뜻 생각해도 차 기름값을 빼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내친 김에 "돈도 안 되는데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느냐?"고 그이에게 물어보았다. 그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양수가 박카스 병을 분류해서 박스에 담는다니까요. 이건 기적 같은 일이에요. 나는 양수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너무 감격해서 양수가 처음 한 박스 담아 논 거 내보내지도 못했어요. 그 박스를 만지고, 쓰다듬고, 얼마나 감격스럽든지, 내가 그거에 녹아서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거 같아요."
자식이 박카스 병을 분류해서 박스에 담는 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미, 그 기적을 자꾸 보고 싶어 자신의 몸에 골병이 들어도 힘든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어미,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이 말을 듣고 있다 보면 어미에게 자식은 뭔가 라는 한탄을 저절로 하게 된다.
그이 말에서도 알 수 있지만 애틋하다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로 그이의 자식 사랑은 유별나다. 기자가 보기에 그이는 장애를 가진 아들 양수를 철저하게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이가 양수를 몸 안에 넣지 못하고 밖으로 내놓고 다니는 것을 애석해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이는 온통 양수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장애아 낳는 거 멈추고 싶어서 장기 기증해
그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수를 낳았을 때 다운증후군이 무슨 장애인지 전혀 몰랐어요. 주위 사람들이 애기 보고 와서 조금 이상하다 그러는데 나는 애기가 뭐가 이상한지 전혀 몰랐어요. 그러다가 병원에서 퇴원하고 한 달 후쯤 예방주사 맞히러 갔다가 양수의 장애를 알게 됐어요. 그때 내가 너무 떨려서 양수 아빠에게 말을 못했어요. 양수 아빠에게 양수 장애를 얘기하는데 3년이 걸렸는데, 1년에 한 번씩 양수 아빠에게, "양수 병원에서 그러는데 조금 늦을 거 같아" 그러면 양수 아빠는 "내가 늦었어" 라고 대답했어요. 또 1년 후, "병원에서 그러는데 양수 어디가 안 좋을 것 같아" 그러면 아빠는 "나도 어렸을 때 약했어" 라고 대답하고, 마지막으로 "양수 아빠, 아무래도 양수가 말을 늦게 할 것 같아" 라고 얘기하자 아빠는 "응 나도 어릴 때 말 하는 거 늦었어" 그렇게 무심하게 대답했어요. 양수가 장애아라는 거 아빠에게 알린 건 88올림픽이 열렸던 해, 양수 네 살 때였어요. 그 정도로 저는 양수의 장애를 인정할 수 없었어요"
- 보통 부모가 장애아를 낳게 되면 두 가지 양상으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장애를 가진 아이에게 전념하기 위해 아이를 더 이상 낳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 아이를 돌봐줄 다른 아이를 더 낳는 건데 양수 밑으로 셋을 더 낳은 거 보면 어머니는 후자 쪽 입장이었나 봐요?
"저는 양수 아빠와 살려면 양수 밑으로 하나를 더 낳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양수 밑 아이가 장애아로 태어나면 셋이 죽을 각오를 했어요. 그때, 지금 죽나 하나 더 데리고 죽나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독한 마음을 먹게 된 건 임신해서 병원에 갔는데 둘째도 장애아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에요. 병원에서 염색체 검사를 하고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둘째 아이를 임신 6개월 만에 사산하게 됐어요. 제가 둘째 아이에 집착한 건 억울함 때문이기도 했는데, 양수 낳고 집에서 양수 들여다보고 있는데 한 마디로 돌아버리겠는 거였어요. 정신이상 되는 사람들이 이해됐어요. 내 안에 내가 갇혀가지고 양수를 낳은 것이 도무지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내가 과거에 뭘 잘못 했나 라는 생각만 골똘히 하면서 억울해서 미치겠더라고요. 제가 결혼하기 전에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낮에 직장생활하고 밤에 야간대학 다니면서 동생 둘 다 학교 보내고, 그렇게 열심히 살고 흠 잡힐 일 한 번 한 적이 없는데, 그런데 내가 장애아를 낳다니,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자존심도 상하고, 주변사람들 시선도 부담되고, 정말 두렵고 겁나서 원래 제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신앙도 잃었어요."
- 어머니가 느꼈다는 억울함은 충분히 이해되는데 양수를 낳고 나서 두려움도 맛봤다고 하셨어요. 그 두려움의 실체는 뭔가요?
"지금도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두 딸이 결혼할 때 문제가 되지 않을까 그게 제일 걱정돼요. 실은 남동생 결혼할 때 문제가 됐었거든요. 가문을 보는 집안에서는 장애가 문제가 되더라고요. 저는 정말 장애아를 낳는 걸 내 선에서 멈추게 하고 싶어요. 그래서 간절한 바람으로 장기 기증 서약을 했어요."
그이가 지갑에서 등록카드를 꺼내 보여준다.
"사심이 있어서, 하느님 내가 이렇게 할 테니까 두 딸은 제발 건강한 아기 낳게 해달라고, 방송에서 보니까 장애가 유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던데, 두 딸이 아니더라도 내가 장애아를 낳은 조상이 될 수도 있잖아요. 너무 싫어요."
그이는 말끝에 진저리를 치면서 눈물을 훔친다. 그이 말은 이어진다. 그이는 "아이를 더 낳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꼭 아들을 하나 더 낳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단다.
"나 자신보다도 양수 아빠를 많이 생각했어요. 시집 제사 때 절하러 가면 남자들 절하고 그 다음 아들들만 절을 시키더라고요. 그런데 양수 아빠는 양수가 제사상을 건드릴까봐 절도 못하고 양수 붙잡고 뒤에 서있는데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내가 저 사람에게 결혼하자고 했으니까 죽어도 아들 하나는 낳아줘야겠다. 양수도 아들이지만 시키지 않아도 제사에 가서 넙죽 절하는 아들 하나는 꼭 낳아줘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아침마당 방송 보니까 충청도 어디 가면 만지면 아들 낳는 돌이 있대요. 그 방송을 보고 충청도 산골까지 한걸음에 달려갔어요. 봉화에서 한약 지어 먹으면 아들 낳는다고 해서 차타고 가다가 멀미해서 뻗은 적도 있었고, 아무튼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하면 별 짓을 다했죠."
그이는 막내아들을 낳는데 무려 10년이나 걸렸다고 덧붙였다. 그이의 늦둥이 막내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다.
양수와 함께 있기 위해 고물 줍기 시작
이제 그이가 고물을 주으러 다니게 된 사연을 소개할 차례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00년 양수 아빠가 운영하던 금형 관련 사업체가 부도가 났다. 집을 날리고, 아이들 교육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이도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런데 많은 일 중에 왜 하필 고물 수집일 이었을까.
"처음부터 고물을 주으러 다닌 건 아니고 한 1년 식당일을 했어요. 양수 학교 갔다 오면 오후 세 시쯤 됐는데, 그때 양수 집에다 가둬놓고 일 나가서 저녁 열 시에 집에 왔어요. 집안이 난장판인건 괜찮았는데, 그때 양수가 어려서 그랬는지 몰라도 베란다 너머로 자꾸 물건을 내던지더라고요.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집안에 놔두고 가면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데 양수를 집에 놓고 가면 꼭 가둬 놓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였어요. 지금도 그래요. 딸은 엄마 나간다 그러면 그냥 집에 있는 거고, 양수는 내가 나간다 그러면 가둬놓고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쉽게 떼놓지를 못하겠어요. 식당 일이 힘들어서 그만둔 게 아니라 결국 양수 때문에 일을 못하겠더라고요. 양수 혼자 집에 놔둘 수가 없어서요."
식당 일은 그만뒀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놀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양수를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그이,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갑갑한 가슴을 식히기 위해 혼자 옥상에 올라가서 동네 풍경을 내려다보던 그이 눈에 리어카를 끌고 파지를 줍고 있는 한 할아버지 모습이 들어왔다. 그이는 할아버지 모습을 보고 바로 저거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다른 일은 몰라도 파지 줍는 일은 양수를 데리고 다니면서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나 트럭 한 대 사서 양수와 파지 줍는 일 할 거야 그랬더니 양수 아빠가 극구 반대했어요. 그래도 제가 우겼죠. 우겨서 1톤 트럭을 한 대 할부로 샀어요. 처음에는 돈을 벌려고 한 게 아니라 차 할부금만 다 갚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시작했어요. 양수랑 둘이서 재활용품 주으러 돌아다니는데 얼마나 창피했는지 몰라요. 종이박스 하나를 아는 사람들이나 학교 엄마들 피해 두세 번 빙빙 돌아다니다가 겨우 줍기도 하고, 처음에 많이 울었죠. 그리고 양수와 아픈 사연도 많았어요. 한 번은 화장품 가게 옮겨가는 데서 박스 모아서 준다기에 갔는데 내가 지하실에서 박스를 다 주워갔고 차를 타고 나오는데 옆을 보니까 양수가 없는 거예요. 양수 아빠에게 전화해서 양수 데리고 있냐고 물었더니 네가 데리고 나갔대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양수가 지하에 박스 가지러 간 사이에 모르고 내가 차를 타고 나온 거였어요. 놀라서 박스 실었던 장소에 다시 가보니 거기 양수가 박스 들고 가게 앞에 서 있는 거였어요. 내려서 엄마가 차타고 가면 너도 타야지 왜 가만히 있느냐고 난리치면서 양수를 때리고 울었어요. 오다 보니까 양수가 옆자리에서 말없이 울고 있었어요."
그이는 오전에는 청소하고 밥 하면서 집안 살림을 하다가 오후에 양수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데리고 나가서 박스나 공병을 줍는 일을 한동안 계속했다. 그러다가 양수가 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인천 장기리에 양수자원이라는 고물상을 차리고 말뿐이지만 어엿한 사장님이 된다.
"지금도 양수가 다녔던 인혜학교에서 아이들 실습 나갈 데가 없다고 전화가 와요. 그때 정신지체 특수학교 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 실습을 나갈 데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이 아침에 고물상에 와서 박카스 병 골라내는 일을 했어요. 고물상을 시작한 건 양수와 일할 터를 마련하겠다는 생각에서 했는데, 처음에도 말했지만 양수가 병뚜껑을 따서 병을 박스에 담으니까 그게 신기해서 계속 하게 된 거죠. 그때 고물상에 아이들 많았어요. 장애를 가진 정식 직원만 아홉 명을 데리고 일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사업이 잘 된 건 아니었고, 늘 적자였어요. 하긴 돈 벌 욕심으로 시작한 게 아니어서 돈 벌 욕심도 없었지만, 내가 직원들과 부모들에게 얘기한 게 이 달 순수익이 1백만원이면 너희들 임금 주고 일단 기름 값만 빼겠다고 그랬는데 기름 값도 제대로 건지지 못했으니까 더 말해 뭐하겠어요."
- 그러면 운영이 안 돼 고물상을 접은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한 4년 했는데 몸이 많이 아파서 그만둬야 했어요. 병원에서 몸이 안 좋다 고 하는데 암이면 차라리 낫겠는데 치료도 불가능하고 음식도 못 먹고 언어장애도 올 수 있다고 겁을 주니까 더 이상 일을 계속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몇 달간 쉬자고 얘기하고 일을 접었어요. 그래도 강화 물건은 놓을 수 없어서 지금 혼자서 돌아다니면서 일 하고 있는 거예요."
왜 몸이 아프지 않겠는가, 역시 앞에서 언급했지만 그이가 하는 일은 웬만한 남정네도 하기 힘든 고된 일이다. 하루 온종일 20킬로가 넘는 병자루를 수십 수백 개 들고 내리는 일을 해야 하는데, 몸에 골병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고물상을 접은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이는 다시 사업체를 벌리려 하고 있다. 기자가 그이를 만났을 때인 8월 중순, 그이는 인천시 서구 외진 곳 야산에 고물상 터를 마련하는 일 때문에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다시 양수자원을 시작하려 하는 건 몸이 조금 나아졌기 때문이에요. 내가 이 일을 안 한다면 양수하고 나하고 무슨 일 하겠어요? 큰 수입 바라는 건 아니고 양수 같은 정신지체 장애우들과 아침에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고 저녁에 또 잘 가라고 인사하면서 웃으며 지내고 싶어요. 그것 뿐이예요. 잘 끌고 가서 2-30년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이들 일자리 제공하고 양수 거기 묻어서 가고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이 밤중에 어떻게 오셨어요" 라는 말에 가슴 무너져
다시 양수 이야기를 해보자. 기자가 내내 마음이 아팠던 건 그이의 양수에 대한 과도한 염려다. 그래서 "양수에 대한 걱정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없을 때 양수의 삶에 대한 걱정이 제일 크죠. 평소에 마음속을 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달라요. 양수의 약속할 수 없는 삶에 대해서. 내가 돌봐줘야 하는데 내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양수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엄마 아빠 없어도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하고 또 학교 졸업 못해도 사회에서 살 수 있겠지만 양수는 그런 기대가 없으니까 희망이 없는 거죠."
- 그래도 만약 부모가 없으면 형제들이 양수 씨를 돌봐줄 거 같은데요?
"저는 그런 기대 안 해요. 양수 아빠 보험 안 좋아하는데 내가 우겨서 아이들 앞으로 보험 을 하나씩 들었어요. 엄마 아빠가 만약 잘못돼도 고생하지 말라고, 흩어지지 말라고, 양수만 놓고 보면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막내도 간접적으로 느끼는 게 있어요. 양수하고 막내하고 차타고 있으면 아이들이 다가와서 막내에게 너 형이냐고 물어요. 그러면 막내가 대답 안 하고 가만있어요. 이렇게 어쨌든 양수의 존재가 나머지 아이들에게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양수는 일반 보험은 가입 안 되고 우체국 보험만 가능해서 우체국에 보험 가입이 되어있고, 나머지 세 아이는 푸르덴셜 보험에 가입되어 있어요. 내가 평소에 큰 딸에게 말해요. 오빠는 네가 데리고 끌어안으려고 생각하지 말고, 엄마가 없으면 시설로 보내라. 대신 꼭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데로 보내라고 얘기해요. 돈 없으면 어떡해요. 시설로도 못 보내고 끌어안을 수도 없을 텐데, 그래서 양수 고생 안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없는 돈이지만 보험 든 거예요."
- 양수 키우면서 제일 어려운 점은 뭔가요?
"사람들의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이죠. 모른 척 하고 지나가주는 게 봐주는 거거든요. 예전에는 양수 보고 엘리베이터 타려는 애들이 안타고 도망치는 게 서러워서 울고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애들을 잡아요. 너 어느 학교에 다니니? 너 몇 학년인데 장애우에 대해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니? 그러지 마라고 야단쳐요. 그리고 만약 어른이 그러면 이제는 쫓아가서 싸워요. 나이도 드실 만큼 드셨는데, 태어나면서 장애우도 있지만 살아가면서 장애우도 많은데 양수에게 이렇게 아프게 대하지 말라고 꼭 짚고 넘어가죠. 나이 들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난폭해 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안 되는데...."
그이는 말하면서 살짝 웃었다. 그런데 웃음에서 허허로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지금 저 성당 안 나가나요. 왜 그런지 아세요? 양수 데리고 저녁에 동네 성당 몇 번 갔었는데, 한 번은 양수가 미사 시간에 앞으로 뛰어나갔어요. 그러니까 앞줄에 앉아 있던 젊은 아저씨가 양수를 안고 왔어요. 그 아저씨는 양수에게 야 임마,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가고 싶었냐 웃으며 그랬는데, 미사가 끝난 후 수녀님이 다가오시더니 이 밤중에 애 데리고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러는 거였어요. 수녀님 표정과 말이 왜 와서 사고를 치느냐 힐난하는 투였어요. 내가 그걸 이겨내야 하는데 이겨낼 수가 없었어요. 믿음을 가진 수녀님에게 밤중에 성당을 어쩐 일로 오셨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뭘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 후로도 또 한 번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성당 나가는 거 접었어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양수를 떼놓을 수가 없는데 성당에서는 양수 데리고 오지마라고 하니 안 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거죠."
그이의 말에서 아픔이 뚝뚝 묻어난다. 장애아를 자식으로 둔 부모는 모두 이렇게 가슴이 시퍼렇게 멍든 채 가슴앓이를 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그이가 말하지 않은 아픔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래도 양수 키우면서 행복해요. 양수가 말을 못하거든요. 제가 아침에 일 나가기 전 잠깐 걸레질 할 때 나도 모르게 멍할 때가 있어요. 그걸 아는 사람이 양수밖에 없어요. 양수가 다가와서 장난 걸고 그래요. 양수와 내가 연결된 뭐가 있냐면, 가령 나는 화장실 들어갈 때 불을 안 켜요. 그러면 양수가 와서 불 켜줘요. 내가 딴 데 있고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양수는 내가 움직이는 상황을 다 염두에 두고 있는 거죠. 이게 부모자식인가 봐요."
이름대신 양수 엄마로 불리는 그이, 그이는 비록 장애를 가진 자식이지만 양수 엄마로 불리는 게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다. 단언하지만 그이가 양수 걱정에서 벗어나는 일은 생전에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기자는 무척 마음 아팠는데 그이는 그게 자신이 사는 이유라고 말했다. 기자는 그이 말에 토를 달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글 이태곤 기자
사진 전진호 기자
"양수가 박카스 병을 분류해서 박스에 담는다니까요. 이건 기적 같은 일이에요. 나는 양수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너무 감격해서 양수가 처음 한 박스 담아 논 거 내보내지도 못했어요. 그 박스를 만지고, 쓰다듬고, 얼마나 감격스럽든지, 내가 그거에 녹아서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거 같아요."
"그래도 양수 키우면서 행복해요. 양수가 말을 못하거든요. 제가 아침에 일 나가기 전 잠깐 걸레질 할 때 나도 모르게 멍할 때가 있어요. 그걸 아는 사람이 양수밖에 없어요. 양수가 다가와서 장난 걸고 그래요. 양수와 내가 연결된 뭐가 있냐면, 가령 나는 화장실 들어갈 때 불을 안 켜요. 그러면 양수가 와서 불 켜줘요. 내가 딴 데 있고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양수는 내가 움직이는 상황을 다 염두에 두고 있는 거죠. 이게 부모자식인가 봐요."
작성자이태곤 기자 a352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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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순님의 댓글
이성순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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