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장애인권리조약 채택, 장애현실 변화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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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5일은 국제장애인인권에 새로운 획을 그은 날이다. 전 세계 120개국이 모인 가운데 열린 제8차 유엔특별위원회에서 "국제장애인권리조약" 초안이 채택됐기 때문이다.
이 자리가 더욱 뜻 깊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 장애우 단체가 제안한 '장애여성'조항이 정식으로 채택돼 국제사회에 한국의 위상을 높였기 때문이다.
서문을 비롯해 총 34개 조항으로 구성된 국제장애인권리조약의 내용을 보면 국내 사회복지서비스 시스템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내용이 많은 게 사실. 하지만 이 조약이 국내에서 비준된다면 그동안 부족했던 서비스 전달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든다.
보름간의 뜨거운 현장 속에서 함께하고 온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의 이문희 정책연구실장을 만나 국제장애인권리조약이 갖는 의미와 이후 한국 장애우 복지 변화상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국제장애인조약 체결로
국내 사회복지서비스 개편 기대
- 건강에 이상이 생길 정도로 힘든 회의라고 들었다. 다녀온 소감은 어떤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국제장애인권리조약과 국내에서 준비 중인 장애인차별금지법(이하 장차법)의 최종 모양이 똑같은 맥락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장애인조약이 가야할 길은 장애우의 차별을 없애고 시정해서 비장애우와 함께 사회구성원으로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장차법도 같은 흐름 속에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국제장애인권리조약이 갖고 있는 의미를 설명해 달라.
"경제, 군사, 인권 등을 각국이 조약 맺는 것처럼 장애우 복지와 관련한 국제조약을 맺는 것이다. 이번 회의는 국제장애인권리조약의 초안을 마련하는 자리였고, 문구수정을 위한 회의가 한차례 더 열릴 예정이다. 이 안이 12월 유엔총회에서 정식으로 안건이 상정되는데, 현재로선 채택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후 이 조약에 대해 우리나라 국회의 비준절차를 거쳐 인준하게 되면, 법률적 효력이 국내에도 발생한다"
- 회의는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아침10~1시, 오후3~6시까지 진행됐다. 오전과 오후 사이에는 본회의에서 대립된 안을 갖고 비공식 회의를 갖는 등 빡빡하게 진행됐다.
우선은 어느 나라에서도 반대하지 않을만한 내용을 담은 의장 안을 중심으로 "아무 문제없는 조항", "조금 문제가 있는 조항", "많은 문제가 있는 조항"으로 나눠 각국의 의견을 듣고 조정하는 과정을 가졌는데, 어떤 단어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해서 진행하는 등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 가장 논란이 됐던 항목은 뭐였나.
"장애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정의 할 것인 가였다. "장애"로 할 것인가 "장애인"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지만 해답을 찾지 못했다. 무엇이 장애인가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고 정하기도 애매하지 않겠는가. 장애의 패러다임이 급속도로 바뀌는 현실도 결정을 내리기 어렵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의학적인 개념으로만 정의 내렸으나 최근에는 사회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게 추세다. 이렇게 바뀌는 데 불과 20여년의 세월도 안 걸렸는데, 자주 바꿀 수 없는 국제조약을 체결하는데 있어 미래에서도 적용하는데 문제없게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외에도 "언어", "의사소통", "차별에 대한 정의", "합리적인 편의제공 방안"등에 대해서도 논란이 됐으며 우리나라가 제시한 "장애여성" 항목도 막판까지 논란이 됐다.
유럽공동체(EU)는 굳이 남녀를 구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이견을 내놨다. 이들 주장은 법안 전체를 만들면서 성차별 없이 기술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거였다. 이뿐만 아니라 섹스(sex)와 젠더(gender)를 놓고 아랍권 국가와도 갈등이 있었다. ("gender"는 사회적, 관습적으로 쓰이는 성을 의미하고 "sex"는 생물학적인 성을 의미한다. - 편집자 주) 아랍지역의 행정관청은 종교적 이유와 상관없이 젠더라는 단어를 쓰지 않기 때문에 개념정리가 모호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받아들여 섹스라는 단어만 사용하는 것으로 정리한 결과 장애여성에 대한 항목을 별도로 제정할 수 있었다"
한국 장애우 단체, 조약 초안마련에
큰 역할 담당해 뿌듯
- 성년후견제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고 들었다.
"개인의 존엄성, 의사표현의 자유 등을 다루면서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이는 결국 자기결정권에 관한 문제에 해당하는데, 특별위원회에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장애우가 자기결정권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며, 이를 위한 다양한 보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정리했다. 성년후견제 역시 자기결정권의 침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과 적용 시스템이 약간 다를 뿐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결정권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장애우를 위한 보완시스템을 만들게 되면 이와 다를 게 뭐가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곳에서는 성년후견제 역시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수 있으니 이 제도보다는 장애우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지원제도를 활성화 시키는 게 좋다고 결정됐다"
- 우리나라로서는 이번 회의가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들었다.
"우리나라는 유엔에 가입한지 얼마 안돼 경험부족으로 우리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장애우 단체와 정부가 호흡을 맞춰 국제사회에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데 성공했다. 초안을 만들 때에는 어떤 주제를 담을 것인가, 형식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게 되는데, 국내 장애우 단체가 유엔 공식회의석상에서 "장애여성", "자립생활", "이동권"에 대해 발표했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 조약이 체결돼 시행된다 하더라도 관리체계가 허술하면 유명무실한 법률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한 감시체계는 어떻게 꾸려졌나.
"처음에는 모니터링 보고서를 제출해서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국가에 유엔 조사관을 파견하도록 했으나, 주권침해의 이유로 삭제됐다.
조약이 국내에서도 인준되면 2년 내에 정부는 유엔에 모니터링 보고서를 내야 한다. 물론 보고서의 내용이 부실하거나 법률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더라도 특별한 제재조치는 없다. 다만 보고서의 내용에 따라 국제적인 평가와 위치가 틀려지기 때문에 함부로 무시못할 영향력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제적 위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터라 시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하리라고 기대한다"
- 그렇다 하더라도 국내 상황과 괴리감이 심해 원만하게 시행될지 의문이다.
"맞는 지적이다. "이동의 자유"와 관련한 항목만 보더라도 「장애인이 그들이 선택한 방식과 시기에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비용으로 개인의 이동을 촉진」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내가 국가에서 11만원의 지원을 받는데 그중에서 이동에 쓸 수 있는 돈이 5천원 밖에 없다면 나머지 비용을 국가에서 지원해줘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국내현실을 보자. 엘피지 지원제도 마저도 빼앗는 게 현실인데 과연 이런 법률을 시행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지에 대해 고민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모니터링 보고서를 잘 작성하기 위해서라도 조금씩 변화의 움직임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이 보고서는 정부안과 함께 장애우 단체도 제출할 수 있기 때문에 속일 수 없다.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객관적 통계치가 달라지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얀 걸 검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나. 다만 국가적 차원에서 제대로 모니터링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시급히 구축되어야 한다. 장애우 단체역시 모니터링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을 능력을 향상시켜야 하고"
우리나라 복지시스템, "언제까지
개인책임으로 전가할 것인가"
- 외국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의 복지수준은 어느 정도였나.
"우선 장애우 단체가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국내에서 만들어진 문서를 보면 외국인들이 보고 놀랄 정도의 수준이니. 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의 수준은 매우 낮은 것이 현실이다. 물론 아프리카에 있는 저소득 국가와 비교하면 한참 위에 있겠지만 OECD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그리 좋은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장애우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이동권 ▲커뮤니케이션 ▲신변처리를 든다. 이 중 한 가지라도 제대로 안되면 장애우로 판단하는데, 이를 국가로 확대시켜서 생각해보면 재미있을 듯싶다.
이 3가지를 우리나라로 확대해서 생각해보자.
이동권이 확보됐다고 하려면 장애우가 타인의 도움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일부 지하철을 제외하고는 불가능하다. 커뮤니케이션도 문제다. 우리나라에서는 수화통역이 언어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유럽에서는 언어로 인정받아 모든 회의에 수화통역사가 참석한다. 이뿐만 아니라 수많은 청각장애우가 경찰서에서 수화통역사 없이 조사받다가 피해자에서 피의자로 둔갑하는 등의 인권침해 현장에 노출돼 있다. 신변처리 역시 비슷한 실정이다. 척수가 마비된 장애우의 경우 화장실 한번 다녀오는데도 무척 힘든 일이다. 이를 사회보장시스템에서 처리해 줘야 하는데,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비롯한 국내 요양제도는 전무한 실정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게 개인의 능력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점이다. 금전적인 문제를 떠나서 언제까지 국가가 떠안아야 할 책임을 개인이 떠안고 가야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 조약이 체결돼 비준되면 국내에도 상당한 이슈로 작용할 것 같다. 어떤 변화가 예상되나.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회의에 참석했던 120개 나라 중 얼마나 조약을 맺을지는 모르지만 국제장애우운동도 상당히 성숙한 상황이라 대부분 수용하리라고 본다. 특히 다른 OECD국가들에 비해 사회보장시스템이 상당히 부족한 우리나라의 경우 조약이 체결되면 제도 개선을 위해 많이 노력할 거라 생각한다. 오히려 조약의 진보성으로 인해 보건복지부가 받기 어려운 내용도 국제적인 장애우 복지의 수준을 명분으로 내세운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평가한다"
- 법률을 정비하려면 상당한 비용을 소요할 것이다. 장애우 복지에 대한 사회전반적인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많은 반대에 부딪힐 것 같은데.
"법률이 생긴다고 정책이 하루아침에 업그레이드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시간과 프로그램이 동반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법이 앞서나간다면 시민의식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 이번 회의를 참석하기위해 뉴욕에 갔을 때 벌어진 에피소드를 소개하겠다.
도착한 공항에서 숙소까지 이동하려면 기차를 타야하는데 부득이하게 시외버스를 타야했다. 그런데 일행 중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우가 5명이니 다함께 이동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처음 온 이도 있고, 영어를 못하는 사람도 있어서 부득불 한 차에 다 타야해서 버스운전기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이 기사가 탑승하고 있는 승객을 전부 내리게 한 후 우리를 숙소까지 논스톱으로 태워줬다. 그 과정에서 버스운전기사나 내려야 했던 승객 누구하나 불평의 목소리를 내뱉지 않았다. 이는 내부적인 시스템이 갖춰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돈벌이를 포기하면서까지 이동시켜줬다는 것은 내부 가이드라인이 존재하고, 이를 따라야 한다는 시민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나.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우리나라 국민은 "복지를 위해 가계부담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비전2030"을 준비하며 조사해본 결과 "당신은 복지를 위해 돈을 더 많이 낼 의향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67%가량이 동의했다. 국민들 의지도 있고, 장애우들의 욕구도 있는데 못살던 시절만 생각하며 경제정책만 우선시 하는 정부의 마인드가 문제다.
우리나라는 사회복지에 투자하면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지만 서구 경제학자들은 반대로 이야기 한다. 사견이지만 설문조사 등을 통해 의도적인 통계를 만들어 오해하도록 만든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장애우 단체, 자기반성과 존재의미 검토
필요한 시기
- 마지막으로 외국 장애우 단체와 보름동안 생활하면서 국내 장애계와 장애우 단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것 같은데.
"지금의 장애계를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유입과 현실과의 혼란 속에서 아노미 상태에 빠져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게 의미 있는가를 고민하는 등 장애우 인식은 크게 커졌는데, 현실은 아직도 생존권을 부르짖어야 하는 상황이다. 즉 정부가 해줄 수 있는 능력은 아동수준인데 장애우 인식은 성인수준에 도달한 거다. 그 간극에서 심각한 혼란에 빠져있다고 본다.
장애우 단체들도 진정으로 장애우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짚어봐야 한다. 진보하고 있는 패러다임에 발맞춰 그에 걸맞은 옷을 입고, 장애 대중이 필요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이데올로기에만 집착하거나 단체만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각 장애우 단체의 존재의미에 대해 심각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시기다.
인터뷰 사진 전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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