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이야기] 소외된 이웃을 위해 더 낮게 더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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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목포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무안군의 한 산기슭에 열 분의 ‘언님’들이 산다.
개신교를 믿는 수녀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언님은 단순히 수도생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들과 부대끼며 사회복지사업을 맹렬히 펼치고 있다. 장애우와 결핵환우 등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들 속에 섞여들어 봉사와 섬김의 자세로 평생을 헌신하고 있는 이 언님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목포에 위치한 다아코니아자매회 공동체를 찾아가 보았다.
"수녀, 개신교에도 있어요“
그들은 서로를 ‘언님’이라고 부른다. 언님, 어질 인(仁)자에 해당하는 순수한 우리말로 ‘좋다’, ‘어질다’라는 뜻의 ‘언’에 높임을 나타내는 ‘님’이 합쳐진 이 말은 오래 전에 발굴되었으나 잘 쓰여 지지 않은 채 묻혀있던 말이라고 한다. 남녀노소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서로를 부르는 이 호칭은 ‘개신교 여성 수도 공동체’라는 설명보다 주위 이웃과 서로를 존중하며 평등한 생활을 나누는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를 이해할 수 있는 주요한 단서일 것이다.
전남 목포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의 한 산기슭, 예쁜 돌로 지어진 여러 채의 건물에 열 분의 언님들이 산다.
그러나 목포사람들 중에는 이곳을 행정구역상의 지명 보다 ‘한산촌’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산’은 우리말로 큰 삶, 그래서 큰 삶을 이루는 마을이라는 뜻의 한산촌에는 64년부터 여성숙이라는 한 여의사가 세운 결핵환우 요양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땅에 80년 5월부터 성경말씀처럼 하나님께 가기 위해 결혼을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봉사와 섬김의 삶을 택한 8명의 언님들이 둥지를 튼 것은 그 지명이 상징하는 바대로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곳을 포함한 3만평에 달하는 인근 땅을 그들의 뜻을 지지하고 몸소 평생 후원한 여성숙 선생이 다아코니아자매회에 헌납했던 것이다.
아직 이 언님들에 대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은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를 믿는 수녀들이라고 알아두면 된다. 수녀들과 같이 이들 언님들은 수도생활을 기본으로 하면서 사사로운 재산 없이 공동으로 노동해서 얻은 것을 공동으로 나눠 쓰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다.
외견상으로는 수녀복과 유사한 디자인의 곤색이나 회색의 고유한 복장을 입는다는 점이 눈에 띄였다.
“처음에는 사복을 그냥 입었어요. 그런데 웬 여자들만 산기슭에 모여 사는 걸 보고 지역 주민들이 굉장히 이상해하더군요. 당시 무슨 공동체라고 하면 용공세력으로 몰리기 쉬울 때라 관청에서도 노골적인 감시를 하는 등 저희를 이해시키기가 무척 힘들었죠. 그래서 저희 나름대로 고안해서 이 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옷이 활동하는데 불편하다거나 족쇄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이 옷으로 인해 저희가 여러 면에서 보호를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옷과 관련한 쓸데없는 지출을 줄일 수도 있고 또 굉장히 편해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이 여성들이 한산촌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결핵환우 요양원은 더욱 북적이기 시작했다. 극진한 간호와 평화 속에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드는 환우들이 더욱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서운 전염병으로 알려진 결핵환우들이 자신과 가까이 산다는 사실을 못마땅해 하는 마을 주민들과 언님들은 초창기에 갈등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오랜 시간 지켜보니 들 것에 실려 온 임종 직전의 환우들이 저희한테 와서 생명을 얻어 다시 살아서 걸어 나간다는 것을 아시고 이제 저희에 대한 선입견을 많이 거두셨어요.”
그러나 원치 않는 손님도 찾아왔다. 결핵환우들을 치료하다 그 자신들도 결핵에 걸려 건강을 잃는 언님들도 하나둘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병마가 언님들의 활동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저희는 거칠 것이 없으니 그야말로 목숨 내놓고 일하는 거죠.”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웃는 언님들의 얘기를 듣고 기자도 자칫 그 얘길 대수롭지 않게 넘길 뻔 했다.
보수교단에 의해 이단으로 몰리기도
1978년부터 일단의 청년들은 아직껏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생활과 종교공동체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 주창자격이 바로 고 안병무 박사다. 많은 토론 끝에 가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갖고 있지 않는 사람도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시험 삼아 함께 모여 살기로 했다. 그러나 자신이 누리던 것을 모두 갖고 있는 상태에서 남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기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결국 그 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나 거기에 참여했던 여성 중 8명은 결혼을 거부한 채 수도생활을 하며 이들과 함께하는 공동체생활을 감행하기로 했다. 어디에 정착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그들에게 그러한 과정을 모두 지켜본 여성숙 선생이 사재를 내놓으며 자신이 활동하던 목포지역으로 이끈 것이었다.
당시 한산촌 인근의 전남 무안군 주변은 전국적으로 봐도 매우 낙후된 곳으로 꼽히는 도서지역이었다. 남도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한국전쟁 당시 그곳까지 피난 내려와 결국 정착하게 된 피난민들이나 도시를 향해 떠나는 행렬에도 끼이지 못한 노인이나 장애우 가구는 영락없이 빈민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가난한 어민들의 가정은 불규칙한 생활과 수입 때문인지 완전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세대가 드물었고, 거기다 인근 섬에서 뭍으로 유학을 온 가난한 학생들 가운데에는 정신적인 방황을 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지역주민의 실상을 직접 몸으로 부딪쳐 조사해나가며 언님들은 자신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사업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챙겼다. 그래서 결핵요양원 운영과는 별도로 83년부터 무안군 운남면 성내리에 보건진료소를 세우고 그 보건소를 근거로 해서 무료 진료활동 뿐만 아니라 신용협동조합과 탁아소, 도서실, 목욕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보다 신속하고 친근하게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아예 그 지역에 함께 살면서 말이다.
창립 후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의 한산촌에는 사회복지법인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 사무실과 수양관, 예배당과 언님들의 생활숙소 등만이 자리하고 있다. 요즈음에는 결핵환자가 그래도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만 연고가 없는 만성폐결핵환자가 오랜 기간 입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국립기관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착안해 86년부터 그들을 위한 ‘한삶의 집’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결핵등 기관지전문병원인 목표의원도 자매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이런 저런 어려움으로 보건진료소는 89년 문을 닫은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는 한산촌과 돌산 ‘한삶의 집’, 목포의원 이렇게 세 개의 기관이 다리가 되어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를 굳건하게 받치고 있다.
“사적 소유물을 갖다 보면 없던 욕심도 생겨 혹 다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 철저히 사유재산은 인정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기 때문에 여선생님에게 기증받은 땅 3만평을 어떻게 하면 공공의 재산으로 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죠. 그리고 저희들이 개신교도이기는 하지만 어떠한 교단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80년 창립 이후 일부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몰리는 등 저희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외부에 알리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도 겪었어요. 그렇지만 기존 교회성장 지상주의적인 이기적인 모습에 크게 실망해왔기 때문에 기존 교단과는 분명한 선을 긋고 싶었어요. 저희가 늘 가슴에 새기고 있는 ‘우리의 신조’에도 써 있듯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없고,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고난 받으며 그들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참 이웃임을 믿기 때문이죠. 많은 논의 끝에 그러한 고민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현실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복지법인을 통한 사회복지사업을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자매회의 역사를 함께 하고 있는 네 명의 언님 중 한 명인 김정란 원장의 설명이다.
그래서 85년 사회복지법인이 설립됐다. 이미 결핵환우들을 위한 요양원과 보건진료소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보건진료소를 운영하면서 지켜본 지역주민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더욱 적극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91년부터는 재가복지사업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회복지관이 두 곳, 장애우종합복지관이 한 곳밖에 없는 목포지역의 형편상 이들 언님들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갈수록 더욱 늘어나는 형편이다. 목포지역 영세민 가정을 지속적으로 방문하는 한편 사회복지전문요원들과 함께 정보를 나누면서 독거노인이나 장애우는 의료진과 연결시켜 주는 한편 보장구나 밑반찬까지도 나누어주고 있다.
이밖에 등록금이 없어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학생이 있으면 학비를 지원하는 장학사업도 재가복지사업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자매회의 장학금은 성적은 아무 상관이 없다. 얼마나 절실한 가 만으로 판단해 대상 학생을 선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디아코니아의 장학금은 그냥 주면 받는 돈이 아니라 몇 가지 조건에 동의를 해야 한다. 우선 단 1점이라도 성적이 오를 것을 약속해야 하고, 또 언님들이 지정하는 내용의 봉사활동을 수행해야 한다.
“고질적인 가난의 고리를 끊기 위해 장학사업을 시작하긴 했는데, 웬지 그 돈을 받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무척 기가 죽어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됐죠. 그래서 장학생으로 선정된 학생들을 조를 짜서 나이어린 미취학아동이나 저학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도록 하거나 인근 장애우요양원 등에 자원활동을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는지 일단 전보다 훨씬 표정이 밝아졌어요. 이 제도는 정말 다른 기관에도 권하고 싶네요.” 자매회의 도움이 없었으면 고등학교 입학조차 불가능했던 아이들이 야간 대학에까지 진학하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을 볼 때 무척 뿌듯하다고 복지사업을 담당하는 안규숙 언님은 들려준다.
3월부터 장애아주간보호사업 실시 계획도
그런데 영세민가정을 방문하다 보니 적지 않은 가정에 정신지체장애우가 있고 그 장애 자녀 때문에 겪는 경제적, 정신적인 부담이 상당히 크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방문을 계속하면서 이런 저런 가정의 속사정을 허물없이 얘기 나누다 보니 정신지체장애 자녀가 있는 경우 부모님들이 생계유지를 위해서 맞벌이를 해야 하는데 학교 수업이 끝난 후에 그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어 엄두가 안난다거나 또 아이 때문에 집안 대소사에도 참여를 제대로 못하게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저희 자매회에서 학교 수업 후에 아이를 돌보는 일을 좀 해주면 안 되겠느냐는 하소연을 간절하게 하시더군요.”
이미 모든 언님들이 1인 다역을 해오고 있었지만 고민 끝에 주간보호사업을 올해 신규 사업에 추가했다. 공간도 벌써 마련했고, 주 단기 보호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전국 다른 지역의 기관들을 둘러보기도 했다. 게다가 관련교육과정이 개설된 대구대학까지 오가며 놀이치료, 미술치료, 언어치료 등에 관한 전반적인 과정을 이수하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해 각급 학교가 개학하는 3월부터 운영을 시작할 예정이다.
현재 10명의 언님 전부가 현재 간호사로 일하고 있거나 국립사회복지연수원에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거나 현재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명실공히 그 자격에 있어서는 막강한 인력을 자랑한다. 그중 3인의 언님들과 3명의 자원활동자가 10명 정도의 장애아를 담당하는 것을 기본으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짜면서 현재 지원자를 접수받고 있다.
이 겨울에도 산다화가 아름답게 피어있고 조만간 동백꽃이 눈부신 자태를 뽐내게 필 정도로 사철 꽃이 피는 아름다운 주위 경치, 게다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너른 공간이 있고 천사 같은 언님들까지, 주간보호사업을 하기에는 최상의 조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벌써부터 많은 지원자들에게 어떻게 공평하게 기회를 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할 정도이다.
한산촌에서 차로 약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돌산 ‘한삶의 집’에는 최근 몇 해 전에 들어선 아담한 무덤이 있다. 이름 하여 ‘꽃밭 무덤’. 한 눈에 유달산과 목포 앞바다가 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은 그 무덤은 돌산에서 요양중인 8명(남7명, 여1명)의 만성폐결핵환우들의 좋은 산책로가 되고 있다.
한 삶의 집에서 상주하며 이들을 돌보고 있는 정유나 언님은 “벌써부터 아저씨들은 자신들이 묻히기 원하는 장소를 찍어 놓은 눈치”라며 살짝 귀띔해주기도 한다.
무덤이 없었다면 죽음을 앞둔 중병환우들이 사는 곳이라는 것이 전혀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한가하고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이곳에서 치료를 받는 시간을 빼고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염소나 닭, 개를 돌보거나 어성초나 배추 같은 작물도 가꾸고 난도 키워 내다 판다.
결핵은 보통 1년이면 대개 치유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치면 이들과 같이 더 이상 약으로도 어쩔 수 없는 만성상태가 되는 것이다.
유전에 의해서도 발병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사실 결핵은 전염에 의해서만 옮겨지는 질병이다. 그러나 결핵에 걸렸다고 해서 모두 다른 사람에게 옮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조건 격리시킬 필요는 없다. 서로 조금만 조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이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전형적인 후진국 병이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도 결핵치료약 개발에 더 이상 나서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 치료약이 10가지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유나 언님은 “예전 보다 결핵환자수가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목포의원의 경우를 보더라도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환자 수는 비슷한 수준 이예요. 그런데 나라에서 이 문제에서 너무 빨리 손을 뗀 것 같습니다. 국립으로 운영되는 목포결핵병원이 있지만 그 병원조차 결핵약이 없는 것이 있을 정도로 지원이 적어 환우 분들이 오히려 저희 목포의원에 약을 타러 오실 정도예요.”
7~8년의 수련을 거쳐야 비로소 한 명의 언님 탄생
언님들로부터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과연 열 분의 언님들이 그 모든 일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믿기지 않았다. 새벽 6시에 시작되는 아침 기도회에 이어 12시와 7시30분. 하루 세 차례 한 시간씩 이어지는 예배까지 모두 수행하는 그들이었다.
그런데 이 언님들의 기도회 모습은 몇 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 특히 주일에 하는 십자가상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앉는다.
“기존의 예배모습이 한 권위자의 일방적인 지도에 따라 진행하고 앉는 방향도 일렬로 앞을 향하는 형태지만 저희 자매회는 일체의 권위를 배격한다는 의미에서 서로 평등하게 둥그렇게 모여 앉습니다.”라는 설명에 또 새삼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리고 모두 공평하게 차례를 정해 돌아가며 예배를 담당하기도 한다. 또한 말 대신 순서 판을 보며 침묵 속에서 착착 진행되는 것도 자매회 예배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아침 식사 후에는 각자 맡은 일을 한다. 특히 한산촌내에 심은 각종 농작물과 알로에 등을 재배해 판매하는 농사일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이러한 노동은 특히 정식으로 언님이 되기 위해 수련중인 예비 언님에게 있어 기도, 학습과 함께 가장 주된 일과가 된다.
1년여의 지원기와 3년의 예비 회원기, 그리고 다시 2년의 기간회원을 거쳐야 헌신예배를 드리고 정회원이 된다. 7~8년에 달하는 가히 기나긴 통과의례를 마쳐야 하는 것이다.
언님이 되기 위한 특별한 자격은 없다. 다만 나이가 너무 많거나 적으면 다른 사람들과 융화되는데 힘이 들기 때문에 20~35세의 나이제한은 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으나 여성장애우도 수련과정에서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언님들의 헌신적인 사업들이 실제로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수많은 자원활동자들의 힘과 후원자들의 손길이 합해진 결과이다.
“실질적으로 자원활동자들이 그런 사업들을 많이 해내시지요. 아마 목포지역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이곳에 자원활동을 했거나 하고 계신 분들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저희와 숙식을 같이 하며 자원활동을 하시는 사람들도 그렇고, 언님이 되고자 오신 분들 중에는 마음과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로 오시는 분들도 적지 않더군요. 이 분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나 하루 세 끼의 식사와 배변을 하는 것도 힘겨워 하세요. 그러면 저희는 이상할 뿐이죠. 어떻게 생활을 했길래 그런 기본적인 것까지 힘겨울 정도로 건강이 많이 망가질 수가 있느냐 하는 거죠.” 안규숙 언님의 얘기다.
그런데 창립 당시보다 언님의 숫자가 결국 2명밖에 늘지 않았다는 사실은 조금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동안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다른 세인들 속으로 돌아간 사람도 몇 명 있었다. 언님으로서의 생활이란 것이 마음과 몸을 완전히 비우지 않으면 수행해내기가 매우 어려운 고난의 길이라는 점은 능히 헤아릴 만 하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결혼을 거부 한다는 점과 초교파적인 공동체라는 점 때문에 기존의 보수적인 기독교계에서 혹 지원자가 생겨도 말리는 입장이 되어버린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전도 활동을 더 열심히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느냐고요? 저희들이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전도활동 아니겠습니까. 이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단순히 전도활동에 쏟을 정성과 노력을 모아서 대신 소외된 우리 이웃들을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할 겁니다.”
또 다시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글/ 한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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