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지킨 농꾼 박순순·김근순, 노부부 이야기 > 함께 사는 세상


땅을 지킨 농꾼 박순순·김근순, 노부부 이야기

“농사짓고 살던 사람들이 가면 어딜 가!”

본문

▲땅꾼을 지킨 농꾼 박순순 · 김근순, 노부부

 

세월이 빚어낸 ‘넉넉한 모습’
어느 시골 마을에 몸이 불편해 목발을 짚으면서도 농사일을 놓지 않는, 아니 놓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계셔. 바로 박순순(남, 79세), 김근순(여, 75세) 노부부의 이야기인데, 두 분은 일제 때 태어나 한국 근현대의 격동적인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이지만 아주 소박하고 평범하게 오로지 한평생 땅만 일구고 살아오신 분들이지.
전쟁의 최대 피해자가 민중이듯이 이 분들 또한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더 고달픈 삶을 사셔야 했어. 왜냐면 할아버지가 결혼 3개월 만에 군대에 강제 징집되어, 피죽 하나 끓여먹기 힘들 정도로 가난한 시집 살림살이를 온전히 할머니가 책임지셔야 했거든. 당시 결혼을 늦게 하는 바람에 21살의 성인이었다 해도, 갓 시집온 새색시가 결혼식 당일 처음 만난 남편과 정도 붙이기 전에 이별 아닌 이별을 하고 남이나 다름없는 시집식구들과 정붙이고 맏며느리 노릇을 했으니, 그 힘겨움이야 이루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할아버지는 1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세가 더욱 기울어졌고, 그 탓에 학교도 제대로 못다니고 어려서부터 남의 일만 죽도록 하셨대. ‘이렇게 일하다보면 어찌되겠지’라는 기대와 희망에서가 아니라, 당장 굶고 죽을 판이었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 일하셨다는 거야. 할머니는 같은 마을 옆 동네에 살고 계셨는데, 나이 찬 총각이 있다고 중매가 들어와서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시집을 오셨다고 하고. 이 대목에선 “믿겨져? 재밌지? 그렇게 살았어.” 하시며 지난날을 떠올리며 웃으시더라. 요즘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시대였다고 하시면서.
암튼 근데, 그 분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살아온 세월이란 것이 참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당신들 몸이 아프고 힘들어도, 자식 일로 깊은 한숨을 내뱉고 있어도, 참 넉넉한 모습을 지니고 계셨거든. 지금의 표정과 말투에선 전혀 그 힘겨움이 느껴지지 않았단 말이지. 오히려 “참 재밌게 살았지?”라고 반문하시는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

 

시대슬픔에 막내를 보내고...
전쟁 이후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지. 물론 내가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우린 교과서에서, 책에서, 선배들의 이야기 속에서,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도대체 이 조그만 남한 사회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는지 알 수 있었잖아?
4.19 혁명이 있었고, 5.16쿠데타를 시작으로 박정희 독재정권이 권력을 휘두르며, ‘잘살아보세’란 한마디로 국민들을 뭐에 홀린 사람처럼 만들어 새마을운동이다 뭐다 한다고 농촌공동체를 붕괴시켜버렸잖아. 도시로 몰려든 농촌 사람들은 공장이나 건설일용직을 하면서 도시빈민층으로 전락했고, 힘없고 어린 노동자 착취를 두고 보지 못한 전태일 열사가 몸에 불을 지르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주장하기도 했지. 그 후 80년 5월 광주항쟁과 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겪으면서 세상이 변할 것처럼 기대되기도 했지만, 결국 오늘날의 모습은 그때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인, 아니 잘못된 상식에 얽혀 오히려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목소리들이 점점 외면당하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그 시대를 직접 살아오신 이분들은 어떠셨을까? 경기도 화성이란 시골마을에서 조용히 농사나 짓고 사셨으니, 그 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잘 모르실꺼라고? 아니야 그렇지 않았어. 이분들이 독재가 어떻고 민주주의가 어떻고 와는 상관없이 살아오신 분들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단 말이야.
우선, 이 분들은 슬하에 3형제를 두고 계셨어. ‘계셨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분들의 막내가 지금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이네~.
막내 아들의 이름이 참 예쁜데, 래전이었어, 박래전. 막내는 80년대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에 대학을 다녔는데, 광주시민의 피로 정권을 획득한 전두환 정권 퇴진을 요구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 둘째 아들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그리고 이제는 인권운동을 한다고 여전히 부모님에게는 불안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첫째 아들은 공부 잘하고 촉망받던 둘째가 그런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막내가 그렇게 갔고, 부모님이 고생하신다며,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뜸한 사이가 되어버렸지.
참 둘째 아들의 이름은 박래군이야.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활동하는. 이쯤 되면 이 노부부가 어떤 분들이신지 알 수 있겠지? 
자, 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분들이 단지 직접적인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셨을 뿐이지 세상에 대한 원망과 회한이 얼마나 크실 지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그 큰 슬픔을 당신들의 몫으로 조용히 안고 살아가실 수 있는 걸까? 단지 세월의 핑계만 대기에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지.

이 두 분은 지금, 화성에서 제부도 가는 길에 위치한 서신면 상한2리에 살고 계시는데, 집이 참 이뻐. ㄱ자형 기와집에 굵은 나무의 기둥이 중간중간 보이고, 나무와 유리로 된 문은 꼭 운치있는 드라마 세트장 같은 느낌이지. 대문에서 들어서면 너른 마당과 시원한 지하수가 나오는 우물가가 한 눈에 들어와서, 진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들어선 느낌이야. 아파트, 연립에 비길 바가 아닌 훌륭한 집이지. 근데 그 느낌의 이유는 다른 곳에 있더라구. 두 어르신들만 살기에는 너무 큰 집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직접 집을 지은 지 벌써 30년이 되었고, 막내 래전이가 틈틈이 와서 집짓기를 도왔다고 하시네. 할머니에게 이제 막내 이야기는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닌가봐. 너무 조심스러워서 말 한마디 못 꺼내고 있었는데, 스스럼없이 말씀해 주시네. “막내가 나 닮았지. 삼 형제 다 착하고 이쁘지만 막내가 제일 예뻤어.” 하시며. 성당에도 나가시는데 “래전이가 살아생전 꼭 같이 가자고 했는데, 한 번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라고 이유를 말씀하시는 거야. 종교적 신념보다는 성당에 가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은 물론 막내와 마주할 수 있다는 생각이 훨씬 많으신 듯 했어.

 

 

 

스스로 농사지어 살림 꾸린 자부심
그 분들이 계시는 화성 집에 도착하기 전에, 둘째가 부모님께 전화를 했어. 후배랑 같이 가는데,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까 이쁘게 하고 계시라고. 근데 도착해서 보니 집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거야. 어찌된 일인가 싶어 밖에 나가 둘러보다가 다시 안에 들어와 안방에 들어갔는데, 웬일? 아버지는 방에 계신거야. 침대에 그냥 가만히 앉아계셨고, 아주 무덤덤한 얼굴로 아들을 힐쭉 쳐다볼 뿐이셨지. ‘화가 나셨나?’했는데, 그게 그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와 아들의 무뚝뚝함이고 쉽게 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세대의 특성이란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지.
둘째는 평택미군기지 문제로 잠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를 대하고 있었어. 정말 오랜만의 만남이고 그동안 다 큰 아들 또 감옥살이 한다고 걱정 꽤나 하셨을 아버지인데, “몸은 괜찮으세요?” 란 말보다 “침대 새로 샀네? 언제 샀어요? 얼마야?” 이런 거나 물어보는 거야. 그 때 어머니가 들어오셔서는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하시고 장난치시면서 “300만원 주고 샀다. 좋지?” 하시는데, 그제서야 옅은 웃음을 내비추시면서 아들과 논에 가기 위해 일어나시더라고. ‘천상 일꾼’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더라. 일꾼오자 곧바로 나가시고, 농부의 아들은 재빨리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나서고.

그래도 아버지와 똑같은 관절염이란 놈이 1년 전 어머니에게까지 찾아온 것은 걱정이 많이되나봐. 독한 약 때문에 부어오른 얼굴을 보고 걱정과 안타까움이 절로 비춰지는 얼굴이었어.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 걱정할까봐 “맛있는 거 많이 먹어서 그러지. 이뻐졌지?” 하시더라. 곤란하거나 심각한 상황을 가볍게 모면하는 아들의 습성을 익히 알고는 있었는데, 물려받은 기질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 
여하튼 어머니는 아들 얼굴 제대로 보고 이야기 한번 해보려고 했지만 목발 짚고 서둘러 앞장 서는 어른 앞에서는 도리가 없는지 그저 따라가기만 하시더라구.
둘째가 트랙터를 몰 수 있지만, 몸을 놀려야 하는 하루일꾼이 되었으니, 아버지가 운전을 하고 아들은 가장 편한 자세로 뒤에 올라타 가장 거만한 자세로 거의 눕다시피한 채 흥얼거리고, 어머니는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나중에 어머니는 집 앞 비닐하우스에서 열무를 뽑으시다가도 다시 나가셨는데, 따라 나가보니 그냥 “어디까지 갔나”하면서 남편과 아들의 모습만 찾으시는 거야. “도로를 달리는 차만 보면, 우리 아들은 저런 거 타고 안 오나 싶어.”라고 말씀하시면서.
난 요즘 땅에 대한 생각, 흙에 대한 생각을 참 많이 해. 요즘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싸움도 그렇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야만적인 세상의 모습에서 대안이 될 수 있는 삶이 무엇일까를 고민해보면, 서로가 보살피고 자급자족할 수 있고, 땅을 일구고 사는 마음과 실천이 대안이지 않을까 싶거든. 좀 감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직접 땅을 가꾸고 사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감상이나 이상이 아니라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대안 아닐까? 무작정 파국으로 내닫는 경쟁사회 속에서 능력을 더 키운다거나 더 좋은 직장에서 더 많은 돈을 벌어 소비한다거나 하는 것보다 말이야.
그런데, 이 분들의 모습을 뵈니 그 확신이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지는 거야. 할아버지는 15년 전 고관절로 인해 장애1급 판정을 받으시고 난 후에도 목발을 사용하시면서도 농사를 짓고 계시는데, 농사일을 어떻게 하시는 줄 알아? 집안에 스티로폴로 만든 작은 방석 같은 게 있었는데, 그게 이 분에게 가장 중요한 기구였어. 서서 힘주는 일은 두 팔을 모두 목발에게 내주었으니 하기 힘드시지만, 앉아서 땅에 앉거나 엎드려 기어 다니듯이 이동한다고 해도 팔과 손으로 못하는 것이 없으시지.
그래서 그 날도 논에 물을 주기 위해 양수기를 옮겨 놓는 것만 둘째에게 시키셨지, 다른 일은 시키지도 않으셨어. 또 집 바로 옆에 있는 밭에는 나중에 흙에 뿌릴 석회석 비료 푸대를 적정한 거리를 두고 내려놓으면 그만인 일이었는데, 아들이 돌아가면 방석 같은 걸 땅에 대고 혼자 이동하시면서 하나하나 흙에 풀어놓으시는 거야. 그리고 포도밭에 가서는, 흔들리는 말뚝이 많았는데 이것저것 지시만 하면 힘 좋은 아들이 새로 박거나 땅을 파고 돌을 끼워 넣어 흔들리지 않도록 파묻는 일을 하는 거지. 완벽한 분업으로 일은 순조롭고 조화롭게 , 그리고 완벽하게 진행됐어.
아들 래군은 움직이면서도 내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흥얼거리더군. 그는 언제나 그렇듯,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전화통화를 그 틈에도 하고 있었는데, 잠시 지켜보시더니 “에구 저 놈의 전화통화.” 라고 딱 한 마디만 하시더군. 그 통화가 평택에서 구속된 6명의 구속적부심 문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계셨을까?

여하튼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그 자잘한 손길이 필요한 농사일을 하시나 많이 궁금했는데, 농사일도 역시 다른 모든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혼자하면 안되고, 같이 해야 한다는 평범함을 다시 깨달았지. 특히 장애가 있으면 그 장애 때문에 물리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황이거든. 일반적으로 그걸 무시하고 “다해라, 완벽하게 해라”라고 다그치니까 취업도 안되고 중간에 포기하고, 또 그 결과적인 현상만 놓고 평가해서 장애가진 사람들이 능력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할 수 있는 일만 제대로 하게끔 해도 장애인의 노동권이 보장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도 덤으로 얻게 되었는데, 여하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도움 받지 않고 스스로 하시면서도 장애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은 당당하게 사람을 고용하거나 아들에게 맡기시면서 지금까지 큰 수확을 올려 오신거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일해서 살림을 꾸려간다는 자부심도 대단하셨는데, “내가 이 나이에 이 몸을 갖고 어디 가서 대접 받으며 살어? 그래도 농사나 지으니까 이 정도 수입을 가질 수 있지. 돈 벌어 뭐하냐고? 나 쓰지·병원도 가고 용돈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하시면 웃으시는 거야. 또 “힘들게 일하면서도 힘들지 않다고 생각한 건, 이게 내 일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많지 않아도 한 평 한 평 땅을 사서 가꾼다는 게 어떤 건지 알어? 지금 몸이 이렇게 되었다고 내가 농사짓지 않고 남에게 주면 땅은 망가지는 거야. 또 농사 안 짓는 사람들이 땅을 살 수도 있잖아. 내가 그걸 어떻게 두고 봐.” 라고 말씀하시는데, 땅과 어르신은 뗄 수 없는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꾸 ‘농사지으면 평화온다’는 평택의 구호가 생각나는 이유는 왜였을까.

 

 

 

농사지으면 평화가와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하셨지만 땅을 일구는 농사일은 자연스럽게 사람의 됨됨이도 가르치는 것 같아. 아니 가르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닫고 터득하는 거지. 특히 가장 낮은 자세로, 꼭 절을 하는 듯한 모양새로 흙과 하나가 되어 농사를 지으셨으니, 거짓말 하지 않고 보살핌과 애정만큼 피어나는 열매들에게 세상의 이치와 삶의 지혜를 몸으로 배우신 것 아닐까?
필요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고도 만족하는 삶은, 흙과 함께 산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런 일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군. 너무 일반화시킨다고? 에구 주제가 이것이 아니니, 이 얘기는 여기서 그만두어야겠다. 그래도 그 분들을 통해 ‘내가 찾는 행복’이란 걸 말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이 분은 둘째의 안부를 나에게 물으시는 거야? “래군이는 이제 뭐하고 산대?” 아, 나에게 그런 어려운 질문을 하시다니…, 내가 해드릴 말이 뭐가 있겠어? 그래서 “직접 물어보신 적 없으세요?”했더니, “무슨 속 시원한 말을 해줘야 알지. 우린 지가 말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몰라.” 하시는 거야. 그러자 아버지가 한 수 거드시는데…, “우린 구치소 다녀온 것밖엔 몰라”라고.
나중에 일하다 들어오셔서 쉬는 중간 중간 반주와 곁들인 술이 소주 2병 분량에 가까워지자, 취기가 오르셨는지 둘째에게 직접 묻기도 하셨어. “래군아 니가 원하는 게 뭐냐?” 처음 뵈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의 강한 질문이었어. 잠시 당혹스러운 듯 했지만 이번에도 대화 깊숙이 들어가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한 대답뿐이었지. “예? 그냥 좋은 세상이요.”
“에구, 에구”란 말만 되풀이하시지만, 이제 다 커버려 제 식구까지 있는 아들에게 더 이상의 물음은 소용없다고 생각되시는가봐. “학생 때도 못 말렸는데 지금 말한다고 듣나?”하시던 어머니와 비슷한 심정이셨겠지?

그런데, 이번 구속 상황을 모르게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어떻게 아셨는 줄 알아? 부천에 살고 있지만 주소가 아직도 화성으로 되어 있었던 거야. 그러니 통지서가 이곳으로 날아올 수밖에. 처음에는 크게 놀라 무슨 일인가 하셨대. 하지만 구치소 면회 가서는 생각보다 담담하셨다는데, 시대에 충실하게 살았던(?) 아들 덕에 이제는 단련이 되셨는지 글쎄, “감옥 많이 좋아진 것 같던데?”하시잖어? 어머니는 20년 전 처음 아들이 구속되어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를 떠올리며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씀하시더군.
“그때 래군이가 영등포구치소에 있다가 대전 교도소로 갔는데 일주일에 2-3번은 면회를 갔어. 우리 막내랑. 근데 하루는 가보니까 애가 머리를 빡빡 깎고 얼굴은 시커멓게 쪼그라들어 있는 거야. 어디가 심하게 아파보이기도 했고. 안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아 물어봤더니, 그냥 괜찮다고만 하는 거야. 근데 조용히 막내 래전이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말하면서 밖에 가 이 사실을 알리라고 하는 거야. 얼마나 기가 막히고 눈이 뒤집히던지. 그 자리에서 나와 소장실로 바로 가서 난리를 쳤지.”
며칠 동안은 대전에 머물면서 매일 같이 소장실로 달려가 울고불고 항의하고, 그 먼 화성과 대전을 매일 같이 오가며 면회보다 소장실을 먼저 찾아가 계속 항의했다고 하셔. 때마침 6월 항쟁의 승리로 가석방되어 나오기는 했지만 고문의 상처와 분노는 여전히 모자의 가슴과 몸에 얼룩져 있는 것 같았는데, 이번 상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 
“근데 이번에는 울지 않았어. 예전보다 감옥이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세상도 많이 변했잖아? 또 크게 잘못한 일도 아니고.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고 했고 조만간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 운동권 아들을 둔 덕분에 이제는 정세까지 파악하는 능력을 갖추셨나봐. 또 나이도 있고 평택 일은 당신과 같은 처지의 힘없는 농민탄압이라 생각하셨는지, 감옥에 있는 아들의 건강만 걱정될 뿐이지 다른 조바심은 없으셨대. 하지만, 면회를 나와서는 상황이 달라졌지. 역시 어머니였어.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눌 때는 잘 지낸다는 것에 순간 안심을 했지만, 며느리, 손녀와 헤어지는 순간에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려 화성까지 울면서 오셨다는 거야. 1년 전 얻은 관절 때문에 쓴 독한 약 기운에 피부가 약해져 멍도 잘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걷는 것도 힘든데, 쏟아지는 울음 때문에 더 제정신이 아니셨겠지. 특히 처음에, 둘째 결혼식 사회를 볼 정도로 절친한 친구 우상호는 국회의원이 되어 간혹 TV에도 나오고 한다면서, 더 똑똑한 니는 뭐하냐?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시던데, 바로 그런 복잡한 심경이 여전히 부모님 마음에 남아 있었을 테니까. “애기들이 너무 불쌍한 거야. 지 아비와 헤어져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들겠어. 애기들이 내색은 안해도 내가 보기에 이게 뭔가 싶어서…” 세월이 흘러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왜 유독 아들의 상황은 멈춰버린 시계 같은 건지에서 오는 답답함이었을까? 그래도 석방 후 처음 만나는 부모 자식 간 치고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부모와 아들 모두에게 ‘세월의 덕’이라는 게 있는 거구나 싶더군.

 

장애가 있어도 당당히!
술이 약간 오른 아버지는 나에게도 슬쩍슬쩍 술을 권하셨어. 오히려 안주시면 서운해 할 나라서, 난 좋아라 다 받아 마셨지. 근데, 목적은 딴 데 있으셨나봐. 나에게 전혀 관심 없는 척 하시더니, “책 만드는데 얼마나 들어?”하시는 거야. 대충 가격을 말씀드리고 “책 쓰고 싶으세요? 하실 말씀 많으세요?”라고 여쭈었더니 “그럼, 할 얘기 많지. 여지까지 고생하며 살아온 이야기 쓰면 책 한권 넘지”하시는 거야. 그래서, 제게 말씀해 주십사 했더니 대번에 “아들이 있는데?”하시잖아? 둘째가 <사람>이란 월간지 만드는 걸 아시는가 싶었는데, 여하튼 그건 아니었고, 나중에 책을 보여 드리며, 아들 이름이 나온 페이지를 보여드리니, “우린 쟤가 뭐하는지 아무 것도 몰라. 말을 해야 알지. 우린 구치소 간 거밖에 몰라”라고 또 말씀하시는 거야. 품안의 자식이 아니니 이제는 지켜볼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뜻이겠지.
두 어른은 평택싸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계셨어. “그럼, 땅에 농사짓고 살던 사람들이 가면 어딜 가! 거기서 살아야지. 몰아내면 되나? 그 땅이 사람들에게 어떤 땅인데.”하시면서. 아마 그래서 이번 아들의 구속도 그냥 모르는 척 하시려는 것 아니었을까? 그래서 요즘은 TV에 평택이야기만 나오면 유심히 보신다고 해. 아마 우리 아들 잘못한 거 없다라는 걸 확인하고 싶으신 거겠지?  
참, 어머니는 부모 자식간에 있을 법한 대화를 원하시는 것 같았어. “래군이에게 떼써야지, 벚꽃 구경 시켜달라고. 여의도에는 다 피었다며?”하셨거든. 근데 무심한 아들은 또다시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소리만 하는 거야. “안돼, 황사 때 돌아다니시면 안 좋아. 이게 건강에 얼마나 안 좋은데.” 미리 예견했던 답인가? 그의 어머니는 그냥 말없이 웃고만 계셨어.
저녁 식사 때 나물 넣고 비빔밥을 해먹는 아들을 대견하게 보시던 어른들은, 아들의 차가 떠나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계셨어. 앞에는 어머니, 저만치 뒤편에 아버지.
아들은 마음 쓰지 않는 척 그저 운전만하면서 가더군. 실은 그것밖에 도리가 없으니까.

처음에는 심한 장애를 갖고도 땅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그 분들을 찾아뵈었어. 근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온통 사회운동 하는 아들 둔 부모이야기로 치우쳐 버렸네? 어쩌면 팔십이 다되어가는 어르신들 이야기니까 자식 농사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이제 9월이 되면 포도 수확을 해야 한다고 하셔서 다시 찾아뵙기로 약속을 했어. 장애가 있어도 당당히! 나이가 들어도 당당히! 옆에서 조금만 함께하면 재미난 일 아니겠어? 들에 서서 흙을 밟고 흙을 만지고, 곡식이 자라는 풍요로운 너른 들판을 바라보면, 나는 땅의 일부란 생각도 들고 우리는 그 땅에 철저히 발 딛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겠지.
그래서 말인데, 우리 모두의 생명의 근원인 땅을 더 이상 포크레인이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건물을 짓기 위해, 골프장을 건설하기 위해, 군사기지를 만들기 위해, 파헤치게 만들지 말자. 이곳 어른들이 계시는 곳이 아니더라도, 쓸쓸한 농촌을 제발 더 외롭게 하지는 말고, 올 해에는 꼭 나도 농사지을 수 있는 농활을 떠나 보자. 친구와 가족과 동료와 함께 들판의 울음을 멈추어보자. 

 

글 사진 여준민 객원기자

작성자홍여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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