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생활과 탈시설 운동에 매진하는 이광섭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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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큰 개구리가 깡패를 만났을 때
"안녕하세요?"
눈만 맞주치면 그는 틈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가벼운 목례와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려는 그 순간이 곧잘 미안해지기도 한다. 언제나 입이 귀에 걸릴 듯이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그에게는 그래서 미안함과 반가움이 동시에 든다. 우리가 만나는 그 순간에도 그랬다. 옆에 있던 양영희(광진구자립생활센터소장)씨가 "어구 저 입 큰 개구리"하며 그녀도 똑같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린다.
"별명이 입 큰 개구리예요?"
"아뇨, 깡패예요. 앞뒤 안보고 간다고. 근데 가끔은 사람들이 입이 크다고 그렇게 불러요."
일전에 뇌병변 장애를 갖고 있는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뇌병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근육 경직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 음식을 먹는 경우가 많은데, 그 때 흘리지 않으려고 입을 크게 벌리는 버릇을 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입이 커지는 것 같다는 거라고. 이광섭씨에게도 해당되는 이유인 듯 했다.
그런데 그에게 "입"은 그저 살인미소에만 쓰여지는 것이 아니다. 거의 온 몸을 스스로 움직이기 힘든 전신마비와 같은 상황이라 그에게는 입이 한 몫을 한다. 어떻게? 우선 그는 손이나 발이 아닌 턱으로 전동휠체어를 운전한다. 휠체어를 움직이는 스틱은 아주 미세한 터치에도 왼쪽 오른쪽 종횡무진 한다. 속도를 제대로 조절하지 않으면 언제 옆으로 픽~움직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에게는 너무나 능숙하다. 보는 사람이나 걱정스러울 뿐, 손대신 입이, 턱이 그의 몸을 이끌어왔던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은, 이미 경험을 넘어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싸움의 현장에서는 자칫 심한 몸싸움으로 넘어지기 쉬울텐데도 물러섬 없이 그 큰 입으로 쩌렁쩌렁하게 호령한다. 찡그린 인상이라도 덧붙여질라치면 영락없이 무섭고 진지한 투사가 된다. 싸움꾼이 되지 않고서는 베길 수 없는 이 놈의 현실이다.
단지 "배움" 하나의 목적만 갖고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가, "행복함을 느끼는 순간, 인간임을 느낀다"며 끊임없이 자신이 행복한 삶을 추구해가는 이광섭 씨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눈웃음으로 마음을 열고
각종 집회현장에 나가보면 쉽게 그를 찾을 수 있다. 인터뷰를 하던 날도 사진 기자가 일이 있어 동행하지 못했는데,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조만간 현장에만 나가면 만날 수 있을테니까. 하여간 그와 인사하는 별다른 모임이나 기회가 없었음에도 우리는 현장에서 자주 만나 서로를 아주 잘 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서로가 눈웃음만 짓다가 인터뷰 허락을 받기 위해 "함께걸음 기자인데요,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했더니, 그 답이 내 마음을 참 편하게 해준다. "알아요. 그래요. 근데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요?"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우리 모두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요." 식사를 하고 올라와 그와 난 4시간이 넘게 즐거운 수다를 떨었다.
7년 전 세상에 나와
활동보조인이 없다면 휠체어에 앉기, 물마시기, 식사하기, 약 먹기, 생리현상 처리하기, 다시 잠자리에 들기 등 일상의 모든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심한 장애를 갖고 있지만, 그는 그 나이 또래의 사람들처럼 하고 싶은 게 많다. 특히 본격적인 사회활동은 2001년 노들야학엘 다니기 시작하고 이동권연대 투쟁을 하면서부터이지만, 30대 중반을 넘어서는 지금 "활동가"가 꿈이라고 하니(이미 꿈을 이루었음에도) 그가 느끼는 세상의 것들, 그리고 왜 싸우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만 갔다.
"7년 전부터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면 믿겨져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니, 난 그가 오랜 시간동안 시설에서 살았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가 시설에서 살았던 기간은 단 6개월에 불과하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내가 시설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많거든요. 6개월밖에 살지 않았지만, 내 몸이 먼저 시설을 거부했거든. 탈시설운동도 정말 열심히 하고 싶어요. 내가 이렇게 사회생활하면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시설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끄집어내게 하지 않을까요?"
앗! 기본적인 담금질이 된 사람인가? 암튼 듣고 싶은 이야기가 벌써 생겼지만, 흥분해서는 안되지, 차분하게, 처음부터, 그의 이야기를 듣자.
"어머니 뱃속에서 7달 만에 태어났는데 너무 약해서 의사가 며칠 살지 못할거라고 했대요. 하지만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죠. 안 해 본 게 없다고 하세요. 굼벵이, 지렁이, 지네, 민간요법에 나오는 처방에, 목매달아 죽은 사람의 그 밧줄을 삶아 마시면 좋다는 미신도 있어서 그것까지 수소문해 구해 마셨대요." 그와 가족의 관계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내 입만 아플 뿐이지.
하지만 그의 몸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12살 때까지는 너무 아파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정신적으로도 쇠약해지다보니 부모님은 어린 아이에게 쓰면 좋지 않은 신경안정제를 먹였다고 한다. 근데, 웬걸? 그 약이 그이에게는 진정한 약발을 발휘했다. "근육을 풀어주는 효과도 있어서 모이 한결 가볍고 편해지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 그 약만 먹으면 아프지 않고 몸도 편했어요. 지금도 먹는 걸요?" 아무래도 "세상에 이런 일이~"에 그의 사연을 소개해봐야겠다.
차별 없던 어린시절
그가 태어난 고향은 강원도 주문진. 그러나 이리저리 약 구하러 다닌다고 부모님은 정보가 더 많은 서울로 이사를 했고, 서울의 첫 집에 그는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10살 터울의 동생이 생겨나면서 부모님의 관심이 뜸하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럭저럭 살만 했어요. 처음 이사해서 어느 산동네에 살았는데, 그 때는 제가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고 몸도 아프고 하니까 그냥 집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도 좋은 추억만 가지고 있다고?
"마당이 있는 집이었어요. 마루에 나오면 밑에 동네가 한 눈에 들어왔죠. 그리고 친구들도 있었어요. 옆집, 뒷집, 앞집 사는 또래들이 내가 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저희 집으로 몰려들었죠. 친구들은 마당에서 놀고 난 마루에 누워 깔깔거리고."
그 당시 친구들은 그가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때는 휠체어가 없던 그를 위해 들것을 만들어 와서 어린 친구들 7-8명이 그를 태우고 산에 가기도 했을 정도였다는데, 그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들이 왜 자기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하고 장애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단다. 학교를 다니지 않았지만 따돌림이나 편견이 없었고 그저 한 동네에 사는 친구였을 뿐이라고 회상하고 있었다.
학교가 뭔지 몰랐지만, 아련한 한 때의 시절
그런데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학교"라는 게 있는지 몰랐다고 한다. 형이 매일 어딜 갔다가 와도 그게 학교를 가는 건지 몰랐다는 것이다. "배운다는 게 뭔지 잘 몰랐어요. 나중에 형이 학교라는 델 간다는 걸 알고 나도 보내달라고 했지만, 부모님은 너에게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 고만 말씀하실 뿐이었죠. 저도 그런가보다 했구요."
애정 어린 보살핌으로 살아왔기 때문인지 그는 부모님의 말씀에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산동네에서 어느 빌라로 이사를 하자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사방팔방 벽뿐이고 거실에 나와도 세상 공기를 맡기 어려웠다. 누가 옆집에 사는지, 자기 또래 아이들이 노는 모습도 볼 수가 없는 구조였다.
"근데 어느 날이었어요. 방안에 혼자 있는데 누군가 빼꼼히 문을 열더니, 저더러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옆집 사는 누나가 엄마 심부름 왔는데 아무도 없으니까 제 방문을 연거죠."
그 옆집 사는 누나는 광섭 씨의 첫사랑이다. 17살 사춘기 소년시절,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는 그에게 친구이며 세상 밖 소식을 전해주던 사람이었다. "긴 생머리에 대학생이었고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잠시 추억에 잠기는 표정이다. 그와 나는 잠시 숨고르기를 했다.
놀러가자는 말에 따라 나선 길이 시설 입소
그는 왜 시설에 갔을까. 여동생이 자신 때문에 간호사가 될 정도로 가족들이 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지대했던 것 같은데.
"형이 결혼을 한다고 여자 친구를 데려온다고 했는데, 아마 그 때문일 거예요."
지금 생각하니까 그렇다는 거지, 그는 처음 시설에 가는 줄도 모르게 시설에 갔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느 날 밤에 그의 어머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놀러 갈 데가 있다"고 하시더란다. 그는 밤이었지만 놀러간다는 말에 마냥 좋았지만 어쩐지 어머니가 웃질 않으셔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밖에 나와 보니 자동차가 2대가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와 따로 탔는데, 그저 "걱정마라. 따라갈테니"란 말만 하시더란다. 2-3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차는 계속 갔고 왜 이리 머냐고 물어도 답이 없었다고 한다. 약을 먹었던 터라 그는 얼마 못가 잠에 빠져 들었고, 그게 가족과 6개월간의 이별임과 동시에 시설에 입소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눈을 떠보니 낮선 방이에요. 우리 집 내 방이 아닌." 놀라 주위를 보니 자신과 비슷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19명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한 채 누워 있기만 했다. 밥을 먹으라고 흔들어 깨우는 데도 일어나지 않았다. "원래 집에서도 늦게 일어나고 늦게 먹는 버릇이 있었어요. 근데 나보고 자꾸 일어나서 밥맛도 없는데 밥을 먹으라고 하는 거예요." 정해진 식사시간, 정해진 취침시간, 정해진 기상시간은 시설이 "사람"중심이 아님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개인을 존중해주기보다 단체생활을 지켜가려는 통제의 규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설 이름은 모르겠는데, 자원봉사자도 별로 없어 보였고 재활교사들만 이방 저방 왔다 갔다 했어요. 처음 들어가서 일주일 간 맞기만 했죠. 방장이 있었는데, 비장애우였어요. 알콜릭이나 정신장애가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암튼 그때도 제가 한 성깔 했거든요. 말 안듣고 밥도 제때 안 먹고, 엄마만 찾고 계속 소리 지르며 대드니까요." 나중에는 그냥 포기해버렸다고 하지만, 그에게 폭력을 행사한 건 같은 생활인 방장 뿐만 아니라 재활교사와 원장까지 합세했었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가 방문했다가 원장에게 맞는 것을 보고 "잘 봐준다고 해놓고 어떻게 이렇게 때릴 수 있느냐!"며 강하게 항의 하셨다고 한다. 당시 (15년 전) 돈으로 월 30만원씩을 꼬박꼬박 냈다고 하니 그 배신감이야 이루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러기까지는 6개월이 흘렀다.
분노만 있었던 시설생활
"시설에서 생활하던 사람들과는 관계가 좋았어요. 거의 시설에서 인생을 보낸 사람들이었는데 그나마 제가 바깥세상을 좀 아니까 이야기 해주면 다들 좋아했죠. 그때는 불쌍하다고만 생각했어요. 그 안에서 할 게 뭐가 있어요? 뭘 봐도 천장밖에 더 봐요? 그거 생각하면 진짜…어휴…."
잊혀질 만도 하지만 짧은 6개월간의 시설생활은 지금 생각해도 말도 못할 정도로 속이 아리고 아프기만 하다. 맞은 것도 억울하지만 왜 자기가 자기 뜻도 아니었는데 시설에 와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루는 이렇게 살다가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이렇게 살기는 싫다, 라는게 더 맞겠네요. 그래서 물과 밥을 먹지 않기 시작했어요. 그 때는 단식인지도 모르고 한 거죠. 하하."
지금이야 단식투쟁이 유효한 투쟁의 방식이란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엔 그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을 잃고 의욕을 잃은 터라 곡기를 끊는 게 무슨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약도 안먹으니까 몸이 꼬이기 시작하고 탈이 난 거죠. 눈을 떠보니 엄마가 옆에 계셨고 링겔을 맞고 있었어요. 그 순간에도 난 안심하기 보다는 몸에 꽂힌 주사기를 다 뽑아버리고 울고불고 소리 질렀죠."
순간 그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고 한다. 알 수 없는 분노…, 순하디 순하게, 고디 곱게 자란 그에게 점차 구분과 배제, 격리와 차별의 세상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이광섭의 운명의 남자들
그 후 다시 집에서 생활하던 그는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학령기를 지났으니 어디서 어떻게 배워야 할지 몰랐다. 그 때 우연히 TV에서 교육청이란 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냥 전화를 해서 내 사정을 얘기했죠. 그랬더니 복지관에 전화하래요. 잘 모르니까 복지관에 전화했죠. 근데 또 거기선 교육청에 알아보라고 하고."
자기가 무슨 탁구공도 아닌데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는데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화를 버럭 냈더니 그제서야 복지관에서 한 남자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 남자는 자원봉사 한다고 광섭 씨를 찾아와 한글을 가르쳐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두 사람은 인간적으로 친해졌다. 영화를 좋아하던 그는 "영화관에서 영화가 보고 싶다"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했다. 그는 어디서인가 수동휠체어를 빌려와 그와 함께 극장엘 갔다. 광섭 씨가 처음 간 극장, 피카디리. 당시 흥행 1위를 달리던 "쉬리"를 보러간다는 마음에 약간 흥분되기도 했지만 그건 잠시였다. 자기를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 장애인이 나왔네?" "학생들, 힘들게 뭣하러 나왔어? 집에 있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반 시민들의 반응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난 나오면 안되는 건가…." 집에 돌아와 간만에 바깥바람을 맞아서인지 그의 몸은 탈이 났다. 많이 아팠다. 특히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들이 왜 자기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그 목소리와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아 더 괴로웠다. 며칠동안 그는 잠도 이루지 못하고 심한 몸살에 열병을 앓았다.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그런 물음이 꼬리를 물지만 해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TV를 봤는데, 거기 해답이 있었어요." 도대체 무엇을 봤길래, 해답이라고까지 말하는 걸까. "거기 박경석 교장선생님이 나온 거예요."
아, 일전에 어떤 사람도 인터뷰에서, 인생을 바꿔놓은 사람이 이동권연대 대표이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행위원장이고, 또 노들야학 교장선생님인 "박경석"이라고 말했는데, 아~ 이 사람도?
"장애우의 권리는 당사자가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눈이 확 띄었어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죠. 곧바로 노들야학에 전화를 했는데, 또 교장선생님이 그 전화를 받았어요. 방송을 봤다, 함께 할 수 없느냐?, 고 물었더니 대번 나오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노들야학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어찌된 일인지 복지관에서 만나 한글을 가르쳐주었던 이알찬 씨도 노들야학의 교사로 들어왔다. 그는 "뭐가 되려는 운명이었나 보다"라며, "마음이 사무치면 꽃이 핀다"는 말을 운명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목숨과도 같은 활동보조인 제도
그는 지난 3월부터 활동보조인 제도화를 위한 노숙투쟁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제 일이니까요. 이제 부모님도 연세가 많으셔서 저를 돌보기 힘드시죠."
15년 전 뺑소니 교통사고로 한 쪽 다리를 절단하신 아버지인데, 거기다 빚보증을 잘못 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인지라, 그는 세대주로 독립하여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로 등록했다. 장애수당까지 포함해 한 달에 40여만 원이 나오는데, 이 돈으로 어머니 아버지 용돈도 챙겨드리는 효심 깊은 아들이다. 그럼에도 얼마 전 그이의 어머니는 "나가서 독립해서 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동권연대 투쟁에 처음 결합할 때는 "니가 나가서 뭘 하겠느냐"며 걱정이 앞섰던 부모님이시지만, 이제는 활동보조인과 함께 당당히 사회생활을 하는 그가 믿음직스러우신가 보다.
"우선은 돈이 필요해요. 저에겐 활동보조가 24시간 필요한데, 제도화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또 안정적인 주거공간도 필요하죠. 그 모든 걸 준비하려면 부모님이 원하셔도 시간이 필요해요."
약간 서운한 마음도 있을 법하지만 어쩔 수 없는 단계를 밟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는 연금제도 도입이 자신과 같은 중증의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필수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미 이룬 꿈이지만, 여전히 이루고 싶은 꿈 "활동가"
활동보조인 제도화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그에게 끝난 운동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여전히 모든 것이 현재진행형이고 언제 끝날지 모를 싸움들뿐이다.
이동권투쟁이 그렇고 활동보조인 제도화 싸움이 그렇고 정립회관 싸움이 그렇다. 탈시설 운동은 최근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이 역시 그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제 꿈이요? 활동가에요."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그의 단호한 말에 준비된 답변 같은 느낌마저 든다.
"정립회관 싸움은 명분도 충분하지만 배신감이 더욱 커요. 저에게 자립생활 이념을 가르쳐주고 장애가 심해도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고, 선택권과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알려준 곳이죠. 저에겐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데…. 일이 터지자 그 사람들은 저에게 휠체어를 내놓으라고 하고 활동보조를 쓰지 말라고 했어요. 만일 그렇다면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걸 뻔히 알면서요."
장애인도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려준 그곳에서 이제는 오히려 장애우들의 당당함에 흠을 내려는 행태가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의 꿈은 "활동가"다.
지금의 싸움이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하지만 나중에 삶을 되돌아봤을 때 "부끄럽진 않았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은, 활동가의 품성과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는 "이미" 활동가이다. 부당함에 참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싸우지도 않으며, 작은 이익을 좇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나와서 활동하는 것 자체에서 시설에 사는 분들이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앞으로 탈시설 운동에 매진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을 띤다.
사람을 좋아하고, 그 자체도 사람 좋은 이광섭 씨.
탈시설의 바람이 불 때, 그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벌써부터 눈에 그려진다.
"극장에서 영화 한번 보자"는 말을 남기고, 예의바르고 꼿꼿하게 콜택시를 타고 사라졌지만 그의 목소리와 잔영은 한동안 내 곁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글 여준민 객원기자
사진 전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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