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윤 씨, "소진이가 저에게 용기를 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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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새끼는 어미의 뼈와 살을 뚫고 세상에 나온다. 어미들은 제 목숨을 걸고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어미는 새끼 때문에 이전의 삶에서는 겪지 못한 또 다른 기쁨과 고통을 겪는다.
이번 달 〈함께걸음〉이 찾아간 사람도 그렇게 이제 막 "어미"가 된 한 여성이다.
새끼를 낳은 사연이 특별하지 않은 어미가 어디 있겠냐만, 이 여성의 사연은 더욱 그러하다. 허나 이 여성이 척수장애우기 때문에 더 특별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중증의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갓 낳은 아기와 함께 지낼 수 없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사회복지 구조가 특이하다는 말이다.
이번 달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김선윤 씨다. 선윤 씨는 지난 4월 중순에 사과알 같은 딸, 소진이를 낳았다.
이렇게 특이한 사회에 도전장을 내고, 좌충우돌 엄마가 된 선윤 씨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갓난 아기 돌봐줄 사람 없어 부부가 울기도 해
김선윤 씨를 만나기 위해 기자는 서울 송파구에 있는 선윤 씨의 보금자리를 찾아갔다. 마침 지역 복지관의 목욕서비스를 받은 뒤여서 선윤 씨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전동휠체어에 앉은 모습은 익히 봐왔지만, 누운 채로 "어서 오세요."하며 사람을 맞는 상황에 기자는 약간 당황했다. 그러나 뒤늦게 선윤 씨의 장애가 생각나 미안 했다.
방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선윤 씨의 결혼사진 이다. 그런데 사진을 보니 누워 있는 선윤 씨가 많이 수척한 것이 금방 눈에 띄었다.
"선윤 씨, 많이 야위었네요."
"살이 좀 빠졌어요. 소진이 낳고 한참동안 거의 못 먹었어요. 입원했던 다른 산모들은 하루에 4번씩 양푼으로 나오는 미역국을 달게 비우던데, 저는 속에서 받질 않아서."
"그렇구나. 소진이 많이 보고 싶으시죠? 언제 보고 왔어요?"
"지난 주에 만났어요. 그새 많이 컸더라고요. 이젠 눈도 맞추고, 방긋방긋 웃어주니까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그런데 오려고만 하면 자던 소진이가 눈을 뜨는 거 있죠. 그거 보면 눈이라도 더 마주치고 가야지, 하는 맘에 발길이 안 떨어져요."
갓 태어난 소진이는 지금 엄마 곁에 없다. 소진이는 퇴원해 집으로 온지 3일 만에 할머니 집으로 갔다. 선윤 씨 가족은 지금 이산가족인 셈이다. 어떤 부모가 갓난 핏덩이를 떼어놓고 싶겠는가. 선윤 씨가 소진이를 할머니에게 맡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선윤 씨는 척수 장애 때문에 왼손만 겨우 쓸 수 있고, 남편인 김재우 씨도 오른쪽 편마비가 있는 장애우다. 부부는 아기를 곁에 두기 위해서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마땅한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 대부분 마지막 보루로 가족을 의지하는데, 선윤 씨는 그도 여의치 않았다. 친정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신단다. 유일한 의지처가 상계동에 사는 시어머니였던 것이다.
"병원에서는 좀 더 있으라고 했는데, 어찌어찌하다보니 갑자기 퇴원하게 됐어요. 퇴원한 날은 언니가 와서 돌봐줬는데, 언니도 계속 봐줄 상황은 아니고. 재우 씨랑 둘이 있는데 우유 먹은 것이 잘못됐는지 소진이가 토하고 숨을 안 쉬는 거예요. 내가 안아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고, 목도 못 가누는 갓난아기라 남편이 한 손으로 안을 수도 없고. 퇴원하자마자 소진이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져서...우리 둘이서만 소진이를 돌보면 이런 절박한 상황이 자주 생길 텐데, 아기가 잘못될까봐 겁이 났어요. 아기가 아파도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상황...겪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 모를 거예요."
"엄마 없어도 잘 클까, 밤에 보채지는 않을까..."
"소진이 낳기 전에는 할머니의 도움을 좀 받고 복지관에서 보내주는 가사도우미나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받는 활동보조인을 이용하면 제가 소진이를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어요. 현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가사도우미는 집안 일만, 활동보조인은 선윤 씨의 활동보조만을 하는 사람들이라서 갓난아기까지 봐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눈치가 보였다는 얘기다. 게다가 가사도우미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라 갓난아이를 추가로 돌보는 것을 힘들어했고, 반대로 활동보조인은 육아 경험이 없는 젊은 사람들이라서 쩔쩔매기만 했단다.
"밤에도 아이가 계속 우니까, 활동보조인이 있어도 맘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아기가 울면 가슴이 두근두근 떨려요. 그래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활동보조인들이 소진이 때문에 더 힘들어하니까 미안해서 뭐 해달라고 하기도 어렵더라고요. 그렇지만 소진이에게 잘 못해주면 화가 나고. 남편도 몸이 불편하니까 쉽지 않죠. 이래저래 어찌나 속상하던지. 아기가 여러 사람의 불안한 손길을 타니까 엄청 힘들어했어요. 그 갓난 것이... 자그마한 아기가 잠을 못자서 눈이 빨개서는...그래서 강보에 싸가지고 제 팔에 좀 안겨달라고 했죠. 엄마 품이라는 것을 아는지 한참 자더라고요."
첫 아기를 받아 본 사람은 누구나 느낄 것이다. 불면 꺼질 것 같고 안으면 바스러질 것 같은 이 작은 생명을 어떻게 돌봐야 할 지 난감한 때가 많다는 것을.
산고도 채 가시지 않은 몸으로 어미는 그 여린 생명을 위해 잠을 쫓아가며 어르고 젖을 물려가며, 어떻게 하면 아기가 편해하는지를 터득해간다.
그렇지만 선윤 씨는 이 과정을 경험할 수가 없었다. 어미의 손발을 대신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손길에 예민한 갓난아기인데 돌볼 사람들이 계속 바뀌는 것도 문제지만, 그나마도 고정적으로 확보되지 않아 선윤 씨는 소진이를 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까 임신과 출산, 아기의 양육에 대해 교육을 받은 전문 도우미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소진이가 엄마 품에서 클 수 있을 텐데"
"맞아요. 갓난아기임을 고려해 24시간 고정적으로, 상당기간 산모와 아기를 돌봐줄 전문 도우미가 있으면 좋겠어요."
"소진이 떼놓던 날 많이 슬펐죠."
선윤 씨가 한참 대답을 못한다. 그러더니 눈자위가 붉어진다.
"...그렇죠. 고심 끝에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어요. "어머니, 우리 소진이 좀 데려다 키워주세요. 사람들이 자주 바뀌니까 잠을 못자요." 라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데려가도 되겠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결정을 내리고, 막상 어머님이 오셨는데...못 떼놓겠더라고요. 너무 힘들었어요. 보내놓고 나서 며칠동안 내내 울기만...게다가 산후조리했던 한달은 아예 가보지도 못했어요. 몸이 너무 아파서. 엄마 없이도 잘 클까, 밤에 보채지는 않을까...어머니께 맨날 전화해요. 우리 소진이 뭐하냐고."
갓난 새끼 떼어놓는 어미의 심정,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누나한테 까불면 혼난다"
그렇다면 이쯤해서는 선윤 씨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세하게 들어봐야겠다.
선윤 씨는 스물 여섯 한창 나이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약혼 한지 2주 만에 당한 사고였다.
"고향이 전북 남원이에요. 교통사고 났던 때가 92년 9월 추석 무렵이었죠. 약혼자 집에 명절 인사를 하려고 나선길에 우연히 얻어 탄 친척 오빠의 화물차가 넘어지면서 저는 밖으로 튕겨나갔고 그 때 목을 다쳤죠. 허망하더라고요. 약혼했던 사람은 사고 나고 다섯 달 지나니까 더 이상 안 오더군요. 벌써 14년이나 됐네요. 그 시간들이..."
기자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선윤 씨가 견디어 왔을 시간들에 대해 정말 힘들었겠네요라든가,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따위의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선윤 씨가 오히려 이런 기자의 맘을 헤아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다치고 한 7,8년은 물리치료만 받으면서 남원에서 계속 살았죠. 그동안 저는 서울로 가자고 부모님을 계속 설득했어요. 자원봉사 받기도 서울이 낫고, 공부도 더 하고 싶었고. 그래서 2001년도에 서울로 올라왔죠. 컴퓨터 쪽으로 취업하고 싶어서 웹 마스터 과정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재우 씨를 만났죠."
이제부터 선윤 씨의 본격적인 연애담이 펼쳐진다. 어느 날인가부터 얘기나 좀 하자며 끈질기게 문자를 보내고, 점심이나 먹자며 빙긋거리고 웃고 있던 남자가 바로 지금 선윤 씨 곁에 있는 재우 씨다. 그렇지만 처음에 선윤 씨는 재우 씨를 소 닭 보듯 했단다.
"나이도 어린 친구가 앞에서 계속 알짱거리는 거예요. 처음엔 우스웠죠. 같잖아서. 결혼하자 어쩌고 하길래 "너 누나에게 까불면 맞는다고" 쏘아붙였다니까요. 하하"
선윤 씨는 아직도 통쾌하다는 듯이 한바탕 깔깔거렸다. 참고로 재우 씨는 선윤 씨보다 4살 아래다.
"재우 씨가 다가오는 것이 좀 두려웠나요?"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다치면서 "여자"를 포기했어요. 엑스레이를 찍으러 병원 갔을 때 일인데, 엑스레이 찍으려면 저를 안아서 침대에 올려야 하거든요. 그런데 가슴을 막무가내로 안아서 올리는 거 있죠. 비장애 여성한테는 그렇게 못할 텐데. 그 때 나는 여자도 아니구나하고 생각했어요. 남자들이 이런 몸이 된 나를 여자로 봐줄까,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장애우는 그냥 장애우지 여자나 남자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요. 제가 비장애우일 때도 그랬고. 더 상처받기 싫어서 미리 포기했던 거죠.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재우 씨가 저를 여자로 보는 것 같아서 맘이 불편했던 거예요."
"걱정하지마. 조금만 지나면 소진이가 널 안아줄테니까."
두 사람의 관계가 급반전 한 것은 200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상심이 큰 선윤 씨는 몸까지 나빠져 수술을 받았단다. 그 때 곁에 있어준 사람이 재우 씨였다.
"슬퍼서 집에만 있던 저를 불러내준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영화를 보여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답답해서 나갔죠. 저는 답례로 목도리 하나 사주고 계산 끝내려고 했는데, 그게 오히려 계기가 되서 만나게 됐어요."
"에이, 그게 아니라 목도리로 재우 씨를 휙, 낚아챈 거 아니세요?"
"푸하하.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예전에 컴퓨터 같이 배울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하루는 아파서 조퇴하고 나서는데 재우씨가 따라오더라고요. 데려다주겠다는 것을 거절했지만, 실은 앞이 안보일 정도로 어지러웠어요. 하지만 괜히 다른 친구들에게 오해를 사는 것이 싫었어요. 그런데도 재우 씨가 기어코 데려다주더라고요."
그렇게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됐단다. 선윤 씨는 엄마만큼 따스하게 해줬던 유일한 사람이 재우 씨였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선윤 씨는 결혼하자는 재우 씨의 청을 번번이 퇴짜를 놨다.
"사귀면서도 저는 외로웠어요. 어차피 결혼하지 않을 테니까 이쯤에서 그만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움직이지 못하니까...제 옆에 있으면 저 사람 힘들어질 것 같았어요. 자신이 없었어요. 재우 씨도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막상 헤어지고 돌아서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죠."
그런 두 연인을 묶어준 것이 바로 소진이다. 그런데 재우 씨 집에서 결혼을 반대하고 나서자, 두 연인은 우선 속도위반부터 해 사고(?)를 치기로 한 것.
"소진이를 임신하고 나서 모든 문제가 해결 됐어요. 결혼을 반대했던 부모님들의 승낙도 받아내 작년에 결혼을 했죠. 소진이가 아니였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을 거예요. 소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재우 씨와 사이도 더 좋아요."
그렇다면 이렇게 소중한 소진이를 전적으로 돌봐주는 소진이 할머니, 그러니까 선윤 씨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빠뜨릴 수는 없다.
솔직히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식의 장애보다 훨씬 더 장애가 심한 사람과 결혼을 시키는 것 말이다. 그리고 기자는 장애가 있는 며느리의 경우, 당사자 의지와는 무관하게, 빼앗다시피 아기를 데려가 버리는 가족들도 종종 보아왔다.
"저희 결혼, 어머니도 처음에는 반대하셨어요. 정 결혼 하려면 호적 파가지고 나가라고 하실 정도였어요. 그렇지만 저는 어머니 마음 이해할 것 같아요."
"그런데 시어머니께서 어떻게 마음을 돌리신 거예요?"
"저도 그거 궁금했는데, 얼마 전에야 여쭤봤어요.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결정하신 거냐고. 어머니가 "같은 여자로 생각해봤다"고 하시더군요. 몸도 저렇게 불편한데 나까지 내치면 죽으란 소리 밖에 안 되겠다 싶으셨대요. 우리 어머니, 현명하신 분이예요. 저는 어머니가 먼저 "내가 소진이 데려갈란다"라고 할줄 알았어요. 제가 전화해서 소진이를 키워달라고 했을 때도 "그래도 괜찮겠냐. 네가 봐야할 텐데."라고 하셨어요. 나중에 하시는 말씀이, 왠지 데려가겠다는 말을 먼저 하면 안 될 것 같았대요. 그래서 우리 처분만 기다리셨던 거죠. 요즘은 "너 소진이 재롱떠는 거 못 봐서 어떻게 하니, 이 아까운 걸. 네가 받아야 할 효도인데 내가 받아서 미안하다"고 하세요."
선윤 씨가 소진이를 안아줄 수 없어서 속상해할 때마나 시어머니는 이렇게 토닥이신단다. "걱정하지 마. 조금만 지나면 소진이가 널 안아줄 테니까. 그러면 되는 거야"라고 하시면서.
선윤 씨와 소진이
선윤 씨는 소진이 덕(?)에 방송을 탔다. 선윤 씨가 출산하는 과정을 한 방송사에서 취재를 한 것.
장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왕절개를 했지만, 선윤 씨는 자연분만을 하고 싶었단다.
"자연분만 하면 아기를 금방 안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감각이 없어서 아기가 위험해져도 느끼질 못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수술을 했어요."
그렇지만 선윤 씨는 아기를 낳자마자 품에 안아보고 싶어서 부분마취만 하고 수술을 했다. 의사는 선윤 씨의 장애 때문에 호홉 곤란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단다.
"걱정 많이 했는데 다행히 괜찮았어요. 그렇게 각오하고 수술했는데, 소진이 얼굴 한 5초나 보여줬을까? 어이구 얼마나 야속하던지. 저 아이가 정말 내 뱃속에서 나왔나 싶었어요. 그리고는 긴장이 풀리는지 잠이 쏟아지더라고요. 그런데 척수 장애가 있는 산모들은 마취 풀릴 때 자면 무호홉증이 올 수도 있어서 자면 안된대요. 그래서 편히 쉬지도 못했죠."
병원에서도 선윤 씨는 비장애우들보다 더 힘들게 지내야 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움직이기에도 좁았지만, 휠체어에 타고 내리게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병원에서 내내 병실에서 누워만 있었다고. 보통 의사들은 산모들에게 빨리 움직이라고 요구한다. 그래야 회복도 빠르고 몸 안에 남아 있는 노폐물이 잘 배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흘 동안 침대에서 꼼짝없이 누워있었으니 얼마나 갑갑하고 힘들었을까, 맘이 짠했다.
"병원에 있을 때만 꼼짝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임신 6개월부터 산후 조리할 때까지 계속 그랬어요. 척수 장애우들은 기립성 저혈압이 있는데, 아이를 가지니까 그게 심해졌나봐요. 밥 먹을 때도 몇 번이나 앉았다 누웠다할 지경이었죠. 말벗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고. 임신 후반에는 우울증이 오더라고요."
임신과 출산은 온전히 여성의 몸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여성들은 그 과정에서 변하는 자신의 신체를 여실히 느낀다. 그런데 남성들은 신체 구조상 전혀 그렇지 않다.
"저는 남편도 제가 어떻게 느끼는지 잘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자기 몸에서 생기는 일이 아니라서 그런가. 몸도 쑤시고, 배도 아프고 할 때 배 좀 문질러 달라고 하면, 서너 번 쓱쓱 문지르고는 가만히 있어요. 문질러주다가 뭐하나 하고 보면 글쎄 텔레비전에 정신팔고 있는 거 있죠. 몸이 자꾸만 힘들어지니까 왜 그렇게 미워지는지. 발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뻥 차주고 싶었어요. 후후. 재우 씨는 눈 앞에 아기가 딱 보이니까 그 때서야 실감하는 것 같았어요. 소진이한테 쏙 빠져서 이제 저는 두 번째가 됐어요."
"둘째 계획 있으세요?"
"지금은 포기했어요. 임신 중에는 힘들어도 내가 참으면 되니까, 둘째 욕심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아이를 막상 낳아보니 나만 참으면 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내가 힘든 것은 참겠는데, 아기가 힘들어하는 것은 도저히 못보겠더라고요."
"만약 상황이 바뀌면요? 그러니까 24시간 이용할 수 있는 산모 도우미가 상당기간 제공된다면요?"
"그러면 둘째 낳고 싶어요. 하지만 그게 1, 2년 사이에 될 리도 없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제 나이도 아기 낳기엔 많을 것 같아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무엇보다 선윤 씨는 소진이가 자기를 더 많이 닮은 것에 아주 뿌듯해한다.
"재우 씨는 자기를 덜 닮았다고 투덜대요. 하지만 솔직히 남편이 아기 낳는데 공헌한(?) 시간이 얼마 되나요? 큭큭. 시간을 비교해도 그렇고, 더우기 내 뱃속에서 난 아긴데 저를 더 많이 닮는 것이 당연하죠. 안 그래요?"
며칠 전 선윤 씨는 엄마가 된지 백일이 됐다.
보통은 아기가 백일이 됐다고들 하지만, 아기를 낳은 사람 입장에서 보면 "엄마가 된지 백일"이기도 할 것이다.
선윤 씨는 소진이에게 자신이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단다. 그러면 소진이가 나중에 부모의 장애 때문에 사회로부터 상처받아도 엄마 아빠를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란다.
선윤 씨는 8월 초부터 서울 영등포구에서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개소할 계획이라고 한다. 아직 실무자는 선윤 씨 한 사람이지만, 그동안 선윤 씨가 몸소 해왔던 자립생활과 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장애우 활동가들을 조직해 중증장애우들의 자립생활을 위해 노력해보고 싶다고 한다.
선윤 씨가 이런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게 된 결정적인 힘은 바로 소진이다.
"우리 소진이가 저에게 용기를 줬어요."
그렇게 말하는 선윤 씨의 얼굴에 환해진다. 선윤 씨와 딸 소진이, 두 여자의 세대를 넘는 끈끈한 자매애를 기대해본다.
글 최희정 기자 사진 정선아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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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윤씨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딸, 소진이
임신 8개월 당시 선윤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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