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는 거인입니다”
본문
70년대 말 난장이로 불렸던, 왜소증 장애인 일가를 소재로 소외계층과 노동자들의 피폐한 삶을 그린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공(일명 난쏘공)’을 발표해 많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던 작가 조세희 씨. 그가 오랜 침묵을 깨고 우리 곁에 돌아 왔다. 당시 노동소설로만 알려졌던 난쏘공은 기실 장애인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읽히기도 한다. 작가 조세희 씨를 만나 좌절된 장애인의 희망과 꿈을 들어 보았다.
70년대 장애인들의 초상인 난장이
기억을 떠올려 한 왜소증 장애인을 기억해 보자.
소설 속에서 난장이로 불린 키 백십칠 센티미터, 체중 삼십이킬로그램의 김불이 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평생을 칼갈이, 고층건물 유리닦기, 펌프 설치공, 수도 수리공 등의 힘든 일을 하다가 사회적 모순의 희생자로 벽돌공장 굴뚝 속으로 떨어져 쓰러져야 했던 그는 70년대 장애인들의 초상이었다.
사람은 없고, 성장 위주 정책만이 판을 쳐서 장애인복지라는 개념조차도 없었으며, 장애인 문제가 전혀 사회적 관심을 끌지 못했던 그 시기, 난장이로 불렸던 장애인 김불이 씨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꿈꿨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김불이 씨의 아들 영수의 입을 빌려 토로한 이러한 비극 적인 장애인 가정의 현실은 유감스럽게도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실존인물이 아닌 소설 속의 인물이지만 난장이는 현실에서 여전히 죽지않고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왜소증 장애인 김불이 씨의 다음과 같은 소망은 마찬가지로 오늘을 사는 모든 장애인들의 소망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그 세계의 지배 계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네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 버리고, 바람도 막아 버리고, 전기줄도 잘라 버리고 수도선도 끊어버린다. 그런 집 뜰에서는 꽃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날아 들어갈 벌도 없다. 나비도 없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에서 강요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사랑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나 제비꽃 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아버지는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함께걸음에 ‘장애인의 세상형편’을 연재하고 있는 자유기고가 이현준 씨는 솟대문학 94년 여름호에 발표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장애인관’ 이라는 평론 글에서 작가 조세희(56)씨가 78년에 발표한, 장애인 김불이 씨가 등장하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일명 난쏘공) 연작소설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장애인 문학으로 꼽았다. 다소 길지만 이현준 씨가 난쏘공을 장애인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은 이유를 옮겨 보면 이렇다.
“장애인을 소재로 다룬 문학작품들은 많다. 그러나 대부분 장애인을 사회에서 전락한 패배자, 능력 없고 모난 존재로 그려 값싼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비하하는 경우가 많다.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된 작품은 찾기 힘든 실정이다. 더더군다나 장애인을 그린 작품이 뛰어난 문학성까지 겸비한 경우란 거의 드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조세희의 난쏘공은 다르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 작품은 장애인 문학으로서의 성격보다 노동문학적 성격이 강하다. 넓은 뜻으로 보자면 난장이는 산업사회로부터 소외된 소시민을 통칭할 수도 있고, 정착지 없이 인생 유전하는 도시 외곽의 유민을 상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장애인 문학에 있어서 한 전범으로 삼고자 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드물게도 장애인 현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뿐만 아니라 장애인을 마냥 무력한 존재로만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장애인은 억압에 대해서 적극적인 면모도 보이고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 작품은 장애인의 문제를 개인의 잘못이 아닌 산업시대의 부산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여러 곳에서 장애인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인식이 드러나 있어 이 작품을 대표적인 장애인 문학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여기서 이현준 씨의 언급 외에 소설집 난쏘공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이미 1백쇄를 찍어 50만부 이상이 팔렸고, 지금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꼭 읽어야할 교과서로 자리 잡은 난쏘공의 내용은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난쏘공을 노동소설로 보느냐, 아니면 장애인 문제를 다룬 소설로 보느냐의 관점의 차이에서 이 대담은 후자의 입장을 취했다는 점을 밝혀두고자 한다. 매체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굳이 이현준 씨 언급이 아니어도 난쏘공은 장애인 문제를 다룬, 여전히 유효하게 장애인 현실을 가장 잘 그리고 있는 소설로 평가받아 마땅하다는데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 씨를 만났다. 그는 지금 오랜 침묵을 깨고 계단 ‘당비대평’의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현실 문제에 적극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 그런 조세희 씨와의 대담은 당연히 난쏘공 연작에 형상화된 장애인 문제에 대한 얘기로 시작됐다.
난장이는 실존 인물
― 소설 난쏘공을 보면 장애인 문제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사전 이해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인데 가까운 인척이나 친구 중에 장애인이 계신 건가요?
“그 질문에 답변하기 전에 먼저 내가 난쏘공을 쓰면서 난장이란 말을 써서 지금도 마음속으로 장애인들에게 굉장히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그런데 변명 같지만 난장이란 단어는 문학 속에서 굳어진 단어입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등 유럽 쪽에서 보면 난장이가 주인공이 되는 작품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표준말로 난장이를 난쟁이로 쓰라고 그러는데 내 책은 고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표준말이라지만 난쟁이라면 왠지 왜소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쓴 난장이 연작에는 왜소증 장애인뿐만 아니라 앉은뱅이가 나오고 곱사등이가 나오고 시각장애인이 나옵니다. 그런 장애인들과 저는 어렸을 적에 한 동네서 같이 살았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경기도 가평 아주작은 동네에서 살았는데 우리 동네에는 다리가 불편에 앉아만 지내는 아저씨가 한 분 사셨어요.
그런데 그 분이 얼마나 유식하고 심성이 착하신지 해마다 정월이면 동네 사람들 토정비결을 다 봐주고 그 뿐만 아니라 민간요법을 통한 응급처치로 동네 사람들을 여럿 치료해 주셨어요.
그리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분 중에 등이 나온 아저씨가 있었지요. 지금 그 어른들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던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난쏘공에서 장애인들을 장애인으로 그리지 않고 멀쩡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피폐해 있다는 것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오히려 건전한 사람을 그렸습니다. 이건 제가 처음으로 밝히는 사실인데 이 사실을 짚은 평론가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난쏘공을 자세히 읽어 보면 장애인들이 오히려 거인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난쏘공은 70년대 노동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로 평가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노동문제를 다룬 소설에 장애인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비극성이 깊게 드러나는 측면이 있는데 그 점을 의식하고 소설을 쓰셨는지요.
“장애인들을 등장시켰기 때문에 비극성이 강조되지 않았느냐는 지적은 먼저 소설에 등장하는 장애인들이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가능한 지적입니다. 난쏘공에서 부도덕한 인물들은 장애인들의 반대편 인물들이니까요. 다른 영화나 소설을 봐도 정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핍박받는 지에 처했다면 슬픈 것이 당연한 겁니다. 제가 70년대 상황을 그리면서 너무 비극적으로 그렸지 않느냐고 그러는데 지금 IMF시대가 되니까 어떻습니까? 70년대 저는 독재치하에서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세계 최장시간 노동을 해도 우리나라가 선진국도 못되고 소수 몇 %를 위한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 당시에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당시에 IMF란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제3세계 여러 나라들이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죠. 그런데 그 단계에서 노동자들이 이기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이기는 신나는 소설을 썼다면 난쏘공은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하고 벌써 죽었을 겁니다. 선한 사람들이 이긴다? 하지만 현실은 어디 그렇습니까? 악이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비극은 당연한 겁니다.”
― 소설에 등장하는 난장이 김불이 씨는 70년대 장애인들의 전형인데요. 김불이 씨가 혹시 실존 인물입니까?
“소설을 쓸 무렵 저는 서울 기자촌이라는 동네에 살면서 중앙일보 출판국에서 잡지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겨울이라 체감 온도가 엄청 추웠습니다. 기자촌이라는 동네가 높은 지대에 있는 동네입니다. 택시를 타고 동네 입구에서 내렸는데 하나 있는 외등 아래서 어둠에 싸인 동네를 향해 어느 한 사람이 욕을 퍼부으며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까 그 아저씨가 왜소증 장애인였어요.
그 아저씨는 오징어를 팔고 있었는데, 하지만 어디 한밤중에 오징어가 팔리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오징어 세 마리를 샀지요. 그런 다음 나는 난장이 아저씨를 잊어 버렸어요. 그리고선 며칠 후 일요일 늦잠을 자고 있는데 집 사람이 나를 깨우면서 아이 자전거를 찾아와야 한다는 거예요.
애를 앞세우고 가보니 고개넘어서 무허가 동네가 나와요, 그 동네 한 허름한 집 아이들이 우리 아이 자전거를 타고간 거였어요. 내가 갔더니 그 집 아주머니가 나와서 아이를 막 야단치는 거예요. 그 와중에 화를 내며 그 집에서나 나오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바로 내가 오징어를 산 난장이 아저씨였어요. 그런데도 난 그 아저씨를 잊어버렸지요.
그러다 얼마 후 아이들과 밥을 먹는데 우리집 아이가 조그만 생선을 들고서 “아빠 이거 난장이 바다에서 온 난장이 고기다”그러더라고요. 그 말을 듣자 바로 난장이 아저씨가 생각났죠. 그 무렵 나는 소설을 써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70년대를 상징할 어떤 인물을 찾고 있었는데, 난장이 아저씨가 떠오른 겁니다.”
― 지금 왜소증 장애인 김불이 씨가 70년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하셨는데 장애인이 한 시대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은 문학으로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대단히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보여집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로 장애인을 한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야 되겠다고 생각하셨는지 말씀해 주시죠.
“나는 외국은 많이 다니지 못했지만 초대를 받아서 독일의 어느 도시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행한 같은 한국 사람이 “조 선생, 이 나라에는 참 병신들이 많네요.”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 사람이 장애인을 병신이라고 얘기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에 왜 장애인이 많이 보이는지를 제3세계인 우리나라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화가 난거죠. 독일에는 도로에 턱 하나 없고, 광장도 편의시설이 완벽하죠. 햇볕 따뜻한데 왜 장애인이 숨어 있겠습니까?
나는 속으로 ‘우리는 언제 저 단계에 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아파하고 있는데 같은 한국사람은 그런 말을 하니까 화가 나는 거죠. 즉 우리 동시대인의 장애인에 대한 몰이해에 화가 난 거죠.
내가 잠시 딴 얘기를 했지만 난쏘공 속의 난장이는 아주 왜소하지만 거인을 상징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난장이 김불이 씨는 70년대 대다수 국민들처럼 평생을 노동하면서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그러는데 살고 있던 집이 철거되면서 거리로 내쫓기게 됩니다. 그런데 국가와 사회는 전혀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내가 잠시 독일 얘기를 했는데 독일에서는 개인의 불행을 사회와 국가가 책임져 줍니다. 그게 복지 사회의 특징이지요.
그런데 우리사회는 어떻습니까? 개인의 불행은 개인이 책임지고 개인이 대응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난장이는 그 거대한 폭력에 쓰러져버리는 겁니다. 쌓이는 스트레스 때문에 외계를 꿈꾸고, 한국이 얼마나 지옥이면 김불이 씨의 간절한 소망이 달나라 꿈꾸겠습니까? 그걸 일종의 도피라고 얘기하지만 내가 의도했던 것은 ‘봐라. 한국 사회는 장애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역공의 인식이 포함돼 있는 겁니다.
내가 소설 속에서는 결국 난장이를 죽게 했지만 난쏘공이 쓰일 때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던 아이들, 지금 스무살이 넘은 청년들이 난쏘공을 읽고 난장이를 소인이라고 절대 얘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난장이 김불이 씨를70년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렸는데 김불이 씨는 20여년이 지는 지금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즉 70년대 그 엄혹했던 상황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죠. 결국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도 우리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숱한 문제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문제도 해결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들이 사과해야
― 난쏘공을 읽어 보면 선과 악,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비극적이지만 따뜻함이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작가의 휴머니즘이 잘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은 왜 그런지 늘 약자편에 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도 재벌과 가진 자들에 대해서 저항하는 마음이 많은 것은 내가 가진 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죠. 내가 많이 가졌다면 편해질 수 있을 거예요.
딴 말 이지만 지금 우리나라에는 대학교수가 4만 명이나 있습니다. 이4만 명이 들고 일어나면 한국에 대변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4만 명의 지식인 중 태반은 편안한 상황에 있습니다.
교수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편할 수 있는 상황, 즉 어떤 불의가 진행되는데도 난 편안하면 아무 일도 안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불편하면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말을 하게 됩니다. 그게 없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한테 ‘사람 사랑하는 이야기가 난쏘공이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강조하자면 난장이 세계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권력자나 재벌 등 사회적 부를 많이 가진 사람들을 나는 죄인이라고 얘기했어요. 나는 소설을 쓰면서 난장이 세계를 억압하는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수도선도 전기선도 끊어 버리고 햇볕도 가려버리라고 그랬어요. 이것은 내가 잔인해서 한 얘기가 아니라 한 공동체를 위해서 공동체를 파괴하는 부도덕자에 대해서는 응징을 가해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역사 4천 몇 년 만에 가장 큰 도둑, 동족을 죽여서 집권을 한 그 일로도 법에 보면 사형을 당하게 돼 있는데, 거기다가 4천 몇 백억 원이라는 조 단위에 가까운 부정을 저지르고, 쿠데타에 가담하기까지 한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집에서 편안하게 다 잘 살고 있죠. 이런 상황이 벌어져선 안 된다.
그러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70년대 암흑 세상에 앉아서 피말리며 쓴 것이 난쏘공입니다. 전두환 노태우를 사형시키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잔인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람들이 죄를 인정해야 되고 자기 권력이나 부 그리고 성공을 위해서 악마와 거래한 것을 회개하고 국민들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거죠. 성공을 위해서 영혼을 판 자들이 사과하는 과정이 없는 한 제가 장애인을 묘사한 난쏘공은 앞으로도 여러 의미로 읽힐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장애인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장애인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로 치부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지식인들의 책임도 큰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전경련이 장애인 의무고용제 철폐를 주장하는 것을 보고 정말 화가 났습니다. 많은 장애인들이 이 땅에 태어나서 큰 고통만 당하고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전경련이 하는 짓은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장애인 운동가가 아닙니다. 나서서 장애인 운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화를 내는 것은 굳이 장애인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이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전경련의 무식한 시도는 없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경련처럼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장애인 같은 약자를 돕지 않는다면 그건 그 사람들이 무지해서 그런 겁니다.
예를 들어서 미국에서 인권운동이 한참 일어날 때 인권운동을 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인권운동을 했습니다. 하버드나 에일대 법대나 공대를 나온 사람들은 수입들이 어마어마한데 그들이 흑인들 지역에 가서 도와주고 같이 매도 맞아주고 같이 운동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왜 인권운동을 했겠습니까? 결코 흑인들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들을 위한 거였습니다. 나는 미국이란 나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지켜지는 룰은 본받아야 된다고 봅니다.
미국에서는 하버드나 예일대 출신들이 나쁜 맘을 먹고 50평 아파트를 사서 되팔았다면 자기네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그건 옳은 부의 축적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선 많은 국민들이 장애인 인권운동을 도와주기는커녕 장애인 시설을 짓는데 방해하고 그러는데 그 사람들이 무지해서 그런 겁니다.
이 무지한 사람들이 36년 동안 투표를 해왔으니까 독재자들이 맨날 이 땅에 와서 설치고 있는 겁니다.”
― 지금 우리 사회는 IMF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IMF 시대의 특징은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예컨대 장애인 같은 소외계층이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난쏘공 작가로서 IMF시대에 대한 소감은 어떤지 말씀해 주시죠.
“21세기가 내일 모렌데 북한에서는 굶고 남한에서는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생각해도 민족적인 재난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IMF 시대를 맞아 장애인을 비롯한 약자 문제를 보면서 슬픈 생각이 자꾸 드는 것 은 결국 물질이 우선되는 생활을 우리가 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말인데 미국에 대공황이 왔을 때 루스벨트가 한 말이 ‘미국이 끔찍한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미국의 문제는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곧 극복이 가능하다’고 한 말입니다.
내가 보기에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지금 물질과 정신이 모두 포함된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어려운 시기에 제일 먼저 깊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장애인을 비롯한 약자이죠. 지금 상층에 있는 사람들은 이 불행한 시기에도 행복하게 얼마나 잘 삽니까? 결국 장애인을 위하고 약자를 위하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다는 것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또 다시 외국의 예를 들자면 유럽 쪽에는 제가 알기에 사회 약자들을 위한 연대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그게 없어요. 누구도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지 못하고 있지요. 물론 장애인들 먼저 자체의 그 끈끈한 사랑과 믿음으로 연대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것만으로 부족하니까 장애인들과 함께 호흡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것으로 저는 믿고 있어요.
나는 가끔 장애인들이 눈물 나는 투쟁을 한다는 얘기를 듣는데 눈물 안 흘리고 투쟁 없이 무지한 사람들과 이야기가 잘 되긴 힘들 거라고 저는 봅니다. 저는 한국에서는 당분간 좀 더 나은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우리 공동체 전 구성원이 긴장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러 나라를 다녀보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노동자들이 파업했을 때 가봤어요. 우리나라엔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총파업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연대한 건 학생과 빈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에서는 노동자 몫을 약간 덜어서 빈민에게 준다고 그랬는데 빈민들은 왜 정부 편을 안 들고 노동자편을 들었겠어요? 그건 결국 프랑스 빈민들이 정부는 신뢰할 수 없고 대신 노동자들은 언제든지 연대가 가능한 친구세력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도 연대를 뜻하는 ‘쏠리 달리테’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는데 장애인을 비롯한 약자들이 IMF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운동 세력과 연대해서 싸워야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노동운동만 봐도 세계와 연대하니까 힘이 있잖아요. 실제로 그게 가능한 시대가 됐습니다. 혼자 고립되지 말고 연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힘 있는 자들이 약자들을 무시하지 못하고 약자들도 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덧붙일 말은 아주 험악한 단계에선 선악의 구별이 뚜렷한 세상이 있다는 겁니다.
70년대 제가 선악 이분법을 썼다고 공격하면서 절대악이 어디 있고 절대선이 어디 있냐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선악 구분법 이전에 이건 법 조항의 문젭니다. 법을 무시하고 악이 권력을 잡고 멋대로 하는 거거든요. 그때 악은 어떤 모습입니까? 악이 분산된 모습입니까? 악은 단결한 모습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악은 의외로 소수입니까.
역사를 보면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는 선이 단결하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는 뜻밖에 간단합니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쓸 때 악이 단결할 때 선이 단결하면 아주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던 문제도 뜻밖에 쉽게 풀릴 수 있다고 한 거죠. 저는 늘 이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애인들이 나의 스승
― 얼마 전에 당대비평에 쓰신 글을 보니까 헌법 1조인 ‘모든 국민은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가진다’는 구절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하셨더군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은 첫 장부터 권리죠. 그러니까 우리는 할 수 없어요. 헌법책 들고 나가서 이게 뭐냐 그러면서 싸워야 하는 거죠. 잠시 내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 세대의 특징은 늙고 모두 행복한 세계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우리 세대의 공부한 50대들은 한국에서 자기가 원하는 걸 거의 다 이뤘어요. 단 그러기 위해선 조건이 있었죠. 어떤 악이 보여도 어떤 핍박이 있어도 맞서지 않고,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고 침묵하면서 50평 아파트 필요하면 50평 아파트 향해 달려가고, 장군이 되고 싶으면 장군을 향해 달려가고, 이게 우리 세대의 특징이죠.
얼마 전에 저희 세대 33명이 모였는데 다들 담배들을 안 피우고 나만 피웠어요. 그랬더니 친구들이 나를 공격하는 말이 ‘너 왜 죽으려고 담배 피우고 그러느냐’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이루지 못한 게 많아서, 이렇게 생명을 단축한다고 그러니까 나를 이상하게 생각해요.
그 친구들은 건강을 돌보고 부족할 게 없는 그런 세계에 가서 살죠. 나는 그 세계에 가서 살면 재미없을지도 몰라요. 너무 삭막하고 너무 재미없고, 기본룰이 무시되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아주 희박한 세계니까.
어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이상주의자라고 그럽디다. 환상적인 낭만주의자라고도 하고요. 그런 말을 대기업이나 높은데 있는 친구들이 하면 내가 공격을 합니다. 왜 내가 이상주의자냐 헌법 지키자는데 왜 이상주의자냐, 넌 제3세계 칠레나 에티오피아 국민이 지배하는 아프리카 독재국가에 살아서 그러는 거야, 라고 공격을 하죠. 제1세계, 말하자면 유럽 여러 나라와 일본까지, 그리고 싱가포르와 대만까지고, 2세계는 국민소득이 2만5천불, 3만불이에요. 그런데 한국은 뭐에요? 지금 5천에서 7천 달러 사이죠. 사실 얼마나 미개한 나라입니까? 이런 나라에서 헌법대로 하자는데 그게 왜 이상주의입니까? 법을 지켜야 되는데, 도둑이 나쁜 짓을 하면 감옥에 넣어야 하는데, 죄를 지은 사람을 감옥에 넣자는 게 왜 이상주의입니까?
얼마 전 일본에서는 한 도시가 발칵 뒤집혀 졌어요. 그 도시에서 공무원에 의해 저질러진 부정이란 것이 우리나라 돈으로 1백40만원에 불과했지만 시민들이 아무리 얘기해도 처벌을 안 하니까 도시 전체가 일어난 거예요. 그 모습이 1세계지, 우리나라에선 전두환이 몇 천억 원을 갖다 먹어도 가만히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어느 대재벌기업의 사장이 나한테 이상주의자라는 말을 하기에 내가 공격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너는 후진국의 아주 못된 재벌의 일개 사장이다. 네가 그런 암담한 세계에 살면서 내가 밝은 쪽 이야기를 얘기하는 것을 공격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내 숫자가 비록 적어서 그렇지, 나 같은 사람이 늘어난다면 너는 말조심해야 할 거다’ 그랬지요.
80년대 초반에 내가 대기업 경영자들 교육받는데 가서 한국 경제가 처할 암담한 미래를 이야기하고, 노동자들 이야기, 빈민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처럼 분배가 미개하게 이루어져서는 좋은 세상이 올 수가 없다고 이야기하니까 모두들 픽픽 웃었어요. 재벌은 까닭 없고 한국은 더 발전하고 그런다는 거지.
그런데 지금 봐요. ‘재벌’하면 지금은 ‘대기업’이라고 불러달라고 그런다는데, 그건 재벌하면 죄와 연결되어진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죠. 도대체 천 조 이상의 빚을 재벌이 지고 있는 나라가, 지금 이 세상엔 2천5백여 인종에 1백80여 개의 나라가 있는데, 어느 나라의 재벌이 그런 빚을 지고 있는 나라가 있는지 대보세요.
이런 현실에 왜 흥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내가 이야기하면 이상주의자라고 그러는데 무지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내가 이상주의자죠. 다행히 그래도 소수지만 지금 20대와 80년대를 거쳐 온, 그 시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을 했던 30대들은 내 말을 이해해 주고, 가끔 만나면 ‘선생님 힘내십시오’ 그래요. 내가 청년들 말을 믿고 힘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이 힘든 시기를 벗어나려면 어떤 처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할 수 없죠. 아플 때는 병을 앓아야 해요. 우리나라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이 있죠. 난 그 소리 들으면 답답해요. 하늘이 무너지면 다 죽어요. 서양의 속담은 뭐냐면 ‘하늘이 무너지면 파랑새를 잡자’예요. 우리나라도 파랑새를 잡아야죠. 민주주의가 없었다면 민주주의라는 파랑새, 분재가 없었다면 분배라는 파랑새를 잡아야 하는 거에요.
공동체를 위한 희생, 이기심, 명예, 도덕이 없었다면 그것들을 살리는 살림의 파랑새를 잡아야 하는 거죠. 이런 노력이 아마 우리 민족에겐 혁명처럼 어려운 일일 거예요.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해야 우리가 IMF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국가가 암담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아직도 긴 시간을 공부하고 노력하고 싸워야 됩니다. 우리를 이렇게 암담한 세계에 빠뜨린 그 암담한 세력에게 투표한 국민들인 우리 자신이 자신과 싸워서 깨달아야죠.
어느 사회나 배운 자들이 침묵하고 눈 감으면 그 사회는 끝나죠. 그래서 나는 아까 20대와 30대를 얘기했는데 20대와 30대가 한국의 척추에요. 이 친구들이 20대와 30대에 정의라고 믿는 게 계속 그대로 가야죠. 전 개인적으로 희망을 거는 게 재야 단체들의 운동이에요. 그 분들이 하는 운동이 실패를 한다면 우리나라가 참 암담해져요.
결국 시민들이 참여해야 하는데, 나라밖의 얘기를 하나 더 하자면 독일의 어느 공무원한테 너는 운동을 어떻게 하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나는 바빠서 직접 운동은 못하지만 일곱 군데의 시민 단체에 후원금을 내고 있다’면서 영수증을 보여줬어요. 세금만 내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이죠. 시민들이 재야 시민단체를 지원해야 합니다.”
― 오늘 말씀 고마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난쏘공 작가로서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한 말씀 해주시죠.
“내가 80년대 중반 이후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어요. 그 때 굉장히 암담해 지더라고요. 그래서 그 후 될 수 있으면 암담한 생각은 털어버리고 밝은 생각을 하자 그러는데 그것만 가지고 안돼요. 그래서 나는 내가 하지 못한 일을 떠올렸어요. 난쏘공 쓴 이후 쓰지 못했고, 본격적으로 한 번 써봐야지 했는데 전두환 노태우 시절이었고, 사실 좀 아프기도 해서 그래서 못썼어요. 이대로 죽으면 얼마나 쓸쓸할까 생각해서 빨리 몸 나아서 못다한 일 하자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찾는 거, 그래서 그게 자기이익 뿐만 아니라 딴 사람을 도울 수 있을 때 그것이 제일 행복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거예요. 나머지는 장애인들이 저의 스승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실제로도 제가 배워야 될 입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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