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 외국인 노동자에게 꿈과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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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빛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박세리 선수나 박찬호 선수처럼 어떤 기능이 특출나게 뛰어나서 국위선양을 할 수도 있고 미모가 뛰어나서 세계대회에 나가 입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오랜 동안 우리나라에 대한 이미지를 좋은 방향으로 기억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 따뜻한 마음으로 외국인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자칫하면 평생 우리나라에 대한 적개심마저 갖고 살 수도 있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그래도 한국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친구가 있다는 기억을 만들어주는, 광주 외국인노동자센터 사무국장 김용석 씨를 만나보았다.
문화운동 하기 위해 노동현장으로
일미터 사십이 넘을 듯 말 듯한 키에 검은 구레나룻을 덥수룩하게 기른 이 사나이의 나이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뒷모습만 봐서는 초등학생 같기도 하고 구레나룻을 빼고 보면 이십대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삼십대 중반이다.
김용석(35) 씨는 전남 곡성군 옥과면에서 팔남매 중 막내로 아주 평범하게 태어났다. 발육이 빨라 또래 아이 중에서 키가 가장 커서 초등학교 삼학년 때까지 반에서 제일 뒷줄에 앉았다고 한다. 그런데 사학년이 되면서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여자 아이들은 초등학교 사오학년 때 성장발육이 가장 왕성해 일년사이 십센티씩 자라기도 하는데 그이는 키가 자라지 않아 학년이 올라갈수록 뒷자리에서 앞자리로 옮겨와 결국은 맨 앞자리에 앉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그이가 키에 대해 크게 열등의식을 느낀 것은 아니고 개구쟁이 막내 기질이 점차 수그러들면서 성격이 다소 내성적으로 바뀌어갔을 뿐이다.
세월이 흘러 그이는 대입시험을 치렀고 전남대 회계학과에 합격해 부푼 가슴을 안고 광주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고향에 남겨두고 떠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고 삼 수험생들이 그러하듯이 그이에게도 대학에 대한 꿈이 있었다. 따스한 햇살을 쪼이며 푸른잔디밭에 앉아 한가로이 책도 보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뭔가에 대해 열띠게 토론도 하고, 동아리 활동에 빠져보고도 싶고, 멋진 여학생과 연애도 해 보고 싶고... 해 보고 싶은게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대학은 그이가 상상한 것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과 동기들은 대부분 취업을 위해 대학에 진학한 듯 입학하기가 무섭게 학원이나 도서관에 가 취업준비에만 열을 올리고 도무지 진리탐구니 낭만이니 하는 것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자연히 김용석 씨는 과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시선을 밖으로 돌려 그이의 갈증을 해소할 만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시선을 돌려보니 모두가 그렇게 취업에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전남대의 경우 광주민주화항쟁 분위기가 아직도 남아서 진실규명과 학교 및 정부를 비판하는 학생집회가 자주 열렸고 최루탄 냄새도 거의 매일 맡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학교는 자주 휴교를 했다.
마침내 그이는 그이가 몸담을 곳을 찾았다. 그 곳은 교내 연극동아리였다.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현장에서 직접 투쟁을 하며 ‘투사회보’를 만든 전설적인 선배들이 활동하는 연극동아리에 가입해 선배들로부터 진실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연기를 통해서 다양한 삶을 살아보고도 싶었다.
뒤늦게 시작한 동아리 활동은 그이의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이는 점차 연기에 대한 열정과 노동운동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고 2학년 겨울 마침내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현장에 뛰어들 결심을 하게 된다.
“연기라는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잖아요. 연기를 위해서라도 더 적극적으로 현실에 뛰어들어 부대끼고 느끼고 해석해야 만이 제대로 된 연기를 토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 온 김용석 씨는 당장 있을 곳이 없어서 시집간 누이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직업소개소의 소개로 자장면 배달부터 시작했다. 막노동판에서 일하는 것은 그의 신체조건상 곤란했기 때문에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이 자장면 배달이었다. 칠개월 후 그이는 직종을 바꿔 구두 닦는 일을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해서다. 구두 닦는 일을 한 일년 여 하다가 그이는 건강이 나빠져서 잠시 고향집에 내려가 몸을 추스르고 다시 상경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서울 아현동에 있는 구두공장에 취직을 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만난 예수님
그 즈음 김 씨는 서울 성수동에 있는 성수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잠시 교회를 다녀보긴 했지만 대학에 들어가고 나선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것이다.
“한밤중에 광주 무등산에 올라가 시내를 내려다보면 빨간 십자가가 무수히 반짝이는데 마치 공동묘지 같아요. 교회라는 게 양적으로만 팽창할 뿐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고 중세시대 면죄부를 팔듯이 싸구려 복음을 전하는 게 못마땅해서 그만 둔거죠.”
이렇게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그이가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은 성수교회가 민중교회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김 씨는 성수교회를 다니면서 비로소 신앙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성경에 보면 너희 중 가장 작은 사람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어요. 곧 빈민, 장애우, 여성들같이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다름 아닌 예수님이라는 뜻이죠. 저는 이 말씀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저는 정말 예수님을 보게 됐어요.”
당시 구두공장에 다니던 그이는 같은 구두공장에 다니는 형뻘되는 동료를 한 명 알게 됐다. 점차 친해지면서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는데 그 사람은 전에 목수였다고 한다. 예수님도 목수였는데 하는 생각이 언뜻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이가 그 분에게서 예수님을 발견한 것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해 글쓰기는 물론 셈하는 법도 모르는 그 분이 실직한 사람들을 데려다 당신 집에서 재워주기도 하고 밥도 지어 먹이며 돌봐주는 모습을 보고난 후부터라고 한다.
“저렇게 배우지 못한 사람도 이웃과 나누며 사는데 배웠다는 나는 그 동안 공명심에 불타서 살아왔구나. 배움이라는 게 사람을 더 기회적이게 하고 인간적이지 못하게 하는 세상에서 그 분을 만나면서 저는 그 동안 제가 걸어왔던 길을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됐죠. 그리고 앞으로 나를 위해서 챙겨두지 말자는 결심을 했어요. 필요한 것은 다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거죠.”
그 후 그이는 한 일년을 그분과 함께 살며 그 분에게 글쓰기, 셈하는 것을 가르쳐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성수교회 목사를 찾아가 그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의논을 했다. 목사는 그이에게 신학을 공부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했다. 김 씨 역시 목수 일을 하던 형님을 만난 이후 노동운동에 대해 자신도 없고 미음이 흔들리던 터였다. 그래서 한 육칠년 동안 지속했던 공장생활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광주로 내려왔다. 그 때가 일천구백구십일년 유월이었다.
그러나 그이는 당장 시험공부에만 전념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암 말기여서 기도원에 들어가 병간호와 시험공부를 병행해야 했다. 게다가 학비도 벌어야 했기 때문에 그이는 낮에는 아는 선배가 운영하는 동물병원에 취직해 일을 했다. 다행히 그이는 호남신학대학교에 합격을 했으나 아버지는 입학 열흘 전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뒤늦게 다시 신학교에 입학한 그이는 학교생활을 열심히 했다. 물론 10여년 전과는 사회분위기도 많이 달라졌지만 전공하는 학문이 마음에 들어 강의시간이 재미있었다. 특히 그이는 영성수련프로그램을 아직도 기억하는데 그 때 자아에 대해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영성수련프로그램이란 각자 그 동안의 이미지를 탈피해 정말 자기가 돼보고 싶은 이미지를 만드는 건데 그이는 자신의 이미지를 ‘들꽃’이라고 정했다. 큰 얼굴이 되라고 부모님이 지어주신 ‘김용석’이라는 이름대신 그이가 스스로 택한 들꽃에는 그 동안 장애로 인해 갇혀 살았던 것들, 자유롭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탈피하고 싶었던 마음, 또 칠년 동안 노동현장에 있으면서 알게 모르게 무뎌진 마음을 여리게 하고 싶었던 열망도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이라는 게 이렇게 창피할 수가
그럼 그이는 어떤 계기로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사년 전 한 주간지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서 고난당하는 내용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그 때 충격이 대단했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의 나라 사람 데려다 일 시키고는 임금도 주지 않고, 사기치고 일하다 다쳐도 치료도 해주지 않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부는 국내에서 3D업종에 근무할 사람을 찾기 어려워지자 팔십구년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이 불법 취업하는 것을 묵인해왔다. 그래서 이때부터 국내에는 우리나라보다 못사는 동남아시아 국가 외국인 노동자수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는데 구십사년 당시에는 그 수가 십만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 수급정책에 아무런 계획이 없던 정부의 무책임과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채용한 사업주들은 외국인 노동자를 위험한 업종에 배치시키면서도 전혀 기술교육을 하지 않아 이 중 산재자가 천여 명, 사망자가 삼백이십여 명이나 발생했다.
그러나 사업주는 그들에 대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밀린 임금도 지불하지 않은 채 도주하는 일이 많았고, 정부는 불법체류라는 이유를 들어 벌금을 내고 출국하라는 지시만 내렸다. 결국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와서 깨달은 것은 잘 사는 나라 한국에서 돈을 벌려면 자존심은 물론 자칫하다간 건강한 몸마저 망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 때 국내 주간지나 언론지에서는 하나같이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해 기사를 다루었는데 김용석 씨가 주간지에서 읽은 기사 역시 그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김용석 씨는 그 길로 바로 성남에 있는 외국인노동자센터에 찾아가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났다고 한다. 충격이 너무 커서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인데 김용석 씨는 우리나라에 산다는 것이 그 때처럼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단지 가슴 아파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되겠다 싶어 졸업 후 외국인 노동자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세웠다고 한다.
학교에 돌아와서는 외국인 노동자 관련 통계나 정책 등 자료도 찾아보고 외국인 노동자를 직접 만나 피해사례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연구물을 모아서 선교학 논문으로 제출했다. 때마침 광주에 있는 무등교회에서 외국인노동자센터를 설립하려고 실무간사를 찾던 중이라 그이는 졸업하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광주외국인노동자센터는 광주시 월계동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공단이 밀집한 곳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많이 접할 수 있는 곳이다. IMF로 국내 사정이 좋지 않아 작년과 올해 외국인이 많이 빠져나갔지만 그래도 광주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약 사천 명가량 된다고 했다.
광주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는 임금체불, 산업재해, 공장내 폭행, 장시간 노동에 대한 노동상담을 하고 있다. 또한 이성문제와 이로 인한 2세문제, 결혼사기, 출입국문제, 벌금문제, 신앙상담 등도 하고 무료 건강검진 및 진료, 한국어도 가르친다고 한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고 해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오지는 않는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과 불신이 많아 외국인 노동자가 먼저 찾아오는 경우가 드문데 김용석 씨 역시 이 점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센터를 설립하고 첫 사업으로 외국인 노동자에게 무료 건강검진 및 진료를 하기로 했죠. 그래서 지역 신문과 일간지에 의사와 약사를 포함해 의료진 이십여 명이 건장검진을 실시하니 많이들 참여해달라고 광고를 냈는데 겨우 아홉 명밖에 오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결과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았어요. 뭔가 방법에 문제가 있었겠지. 의료진을 줄이던가, 홍보방식을 바꾸자. 그래서 다음에 할 때는 신문이나 방송에 광고를 내는 대신 외국인노동자가 있는 공장에 팩스를 넣었죠. 또 홍보전단을 만들어 공단에 찾아가 외국인 노동자를 직접 만나 설명을 했죠. 짧은 영어 실력이지만 ‘Trust me(나를 믿어주세요)’라고요. 그러자 그 다음 번엔 18명, 20명, 30명씩 점점 늘어나더라구요.”
그 후로 김용석 씨는 사무실에 있는 시간보다 공단에 나가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한 달 평균 백여 명을 만난다고 한다.
김용석 씨의 명함에는 직책이 사무국장이라고 돼 있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실무간사들이 더 있을 줄 알았는데 혼자서 이 많은 일을 모두 하고 있었다. 형편상 사람을 더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월급은 오십만원을 받는다. 그러나 이 월급으로 사무용 컴퓨터 통신비, 차기름값, 사무실 난방비는 물론 각종 세금도 내기 때문에 한 달을 꾸려가기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월급이라기보다 사업비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그래서 그이는 요즘 아르바이트로 시간강사 일을 찾는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김용석 씨는 이 일을 무척 기쁘게 하고 있다. 그 비결은 뭘까?
“일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일을 정말 내 일로 여기고 있는가에요.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남의 일을 그저 거든다고 생각하는 것은 천지 차이죠. 내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만이 최선을 다 할 수 있어요. 공장에서 칠년 일했을 때, 그 때는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신체조건상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오래 할 수 없었죠. 그래서 열심히 하지 못했는데 그 때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오랫동안 남아 저를 괴롭혔거든요.”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요하지 않을지언정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신감과 여유로움이 그이의 말 속에서 배어나오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이는 우리나라 악덕 고용주나 파렴치한 사기꾼들을 만나다 보면 속으로부터 올라오는 분노를 참지 못해 욕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산업연수생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불법체류하게 된 중국인 아주머니를 만났어요. 단속반을 피해 도망치다가 담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대요. 우선 치료부터 받았는데 의료보험 적용이 안돼 아주머니가 치료비를 고스란히 다 내고 있는데 어느 날 그 병원 앰블런스 기사가 아주머니에게 다가와 자기는 전도사라며 돌봐주겠다고 하더래요. 그러고선 아주머니를 자기 집에 데려가 성폭행했는데 아주머니는 불법체류자라는 약점 때문에 고소할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합의금 이백만원에 해결을 봤대요. 헌법에는 피부색, 성, 종교 등의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는데 법제화된 것도 지켜지지 않고 있어요. 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 산업 기반이 이 정도가 될 수 있었을까요? 삼디업종이라면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마다하면서 어떻게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렇게 차별할 수 있는지...”
김용석 씨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속으로부터 올라오는 분노를 참지 못해 그만 욕을 하고 만다.
전후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전도사가 내뱉는 욕설을 들었다면 그 사람의 교양을 의심해 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기자도 그 욕에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 노동자 선교도 장애우 운동이죠
그럼 문화운동에 대한 꿈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 때 문화운동을 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대학도 포기한 채 칠 년여 년 동안 타향에서 공장생활까지 했는데 미련이 남았을 법도 하다. “신학교 다니다 휴학을 하고 인형극을 한 적이 있어요. 어른들은 생각이 굳어서 더 이상 희망이 없단 생각이 들어서요. 그렇지만 연극에 대한 매력이 사라진건 아니에요. 다만 제 신체조건상 맡을 수 있는 역할이 그리 다양하지 못해서 지금은 직접 출연하는 것 대신 대본을 쓰고 있어요.”
인형극 얘기가 나오자 김용석 씨는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는지 초록색 길다란 풍선을 주머니에서 꺼내 불기 시작하더니 불과 일 분여 만에 예쁜 강아지 한 마리를 만들었다. 풍선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우는 아이를 만나면 즉석에서 이렇게 불어준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잠시동안 한 인형극이지만 그 때의 경험이 지금까지 소중하게 남아 그이가 필요로 할 때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칠년 동안의 공장생활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듯이.
일찍부터 문화운동과 노동운동에 눈떴던 그였지만 장애우운동은 장애우등록을 하지 않았을 정도로 소홀했었는데 빛고을재활원 목사님을 만나면서 장애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고 한다.
“목사님께서 장애우로 여김을 받는 사람이 스스로 떳떳하고 당당해져야지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맞는 말씀이죠. 그래서 바로 장애우등록을 했죠. 그리고 최근 차를 구입할 때도 장애우대출을 받았어요. 차 앞유리에 장애우 마크도 붙였구요.”
역시 운동을 했던 사람이라 김용석 씨는 상대방의 말이 맞다 싶으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재활원에서 수련회 갈 때는 꼭 같이 간다. 물론 특별한 일이 없을 때도 찾아가곤 하는데 재활원 장애우들은 이제 그이를 ‘형’이라고 부른다. 그이 역시 자신을 형으로 받아주는 그들과 같이 있을 때 마음이 편하다고 하는데 간혹 재활원 목사님이 그이에게 장애우 선교를 해보는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하신다고 한다. 물론 장애가 있는 교인 중 장애우 선교를 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장애우라고 해서 꼭 장애우 선교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김용석 씨는 지금처럼 앞으로도 외국인 노동자 선교 일을 주되게 하며 문화운동과 장애우문제에도 관심의 끈을 늦추지 않겠다고 한다.
사실 기자가 보기에도 외국인 노동자 일이 결국 장애우 운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국인 노동자 중 상당수가 산재로 인해 장애우가 된 것을 생각한다면 장애를 사전에 예방한다는 차원에서도 또 이미 장애우가 된 외국인 노동자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도 넓게 봐서는 장애우운동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더 넓게 봐서 우리나라에 왔다가 차별받고 상처받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고국에 돌아가 우리나라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김용석 씨는 장애우운동을 넘어 우리나라 국위선양에도 큰 몫을 하고 있는 셈이다.
글/ 노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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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ather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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