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일반학교 시각장애우 교사 송광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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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우씨(34세,시각장애1급) 우리 모두 생각해 봅시다
시각장애우 학교에는 시각장애를 가진 교사와 정안인 교사가 함께 근무를 하는데, 왜 유독 일반 학교에는 시각장애를 가진 교사가 없는 걸까?
시각장애우 학교에는 많은 시각장애우 교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 교육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는데, 왜 유독 일반학교에서만 가능하지 않다고 부정하는 걸까?
통합교육은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아이들은 가르침을 받는 대상(?)이기 때문에 장애가 있어도 함께 교육받을 수 있고, 교사는 가르침을 전달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장애가 있으면 안되는 것일까? 하지만 교육에 있어 주체는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인데, 장애를 가진 교사라고 일반학교에 있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어?
그런 법은 어디에도 없다고. 헌법에도 행복추구권과 직업선택의 자유, 공무담임권 등을 보장하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왜! 왜! 왜! 일반학교에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교사는 왜 없을까?
아니라고? 있다고? 어디? 그런데, 단 한 사람뿐이라고? 왜? 물론 차별과 편견 때문이겠지. 장애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냐는 구시대적 발상과 그에 기초한 법?제도, 그리고 막가파적인 권위를 거들먹거리는 교육계의 분위기가 한 몫을 하고 있는 게지.
오늘 사람 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 어이없는 편견과 차별과 싸운 사람인데, 그렇다고 특별히 투사의 이미지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거나 호들갑을 떨 필요는 전혀 없어. 그에겐 교사가 꿈이었고 생존의 기반이었고, 앞이 잘 안 보인다고 그 모든 걸 포기하는 건 그이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뿐이었으니까.
다만 그이의 이야기를 통해 장애가 있어도 충분히 일반학교 교사가 될 수 있다는 것, 우리의 편견과 제도적 차별이 장애우의 교육계 진입을 여전히 가로 막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정안인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학교생활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조치가 도입되어야 하는데, 교육당국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교사 개인에게 혼자 재주 부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 확인하면 될 것 같음.
앗! 또 하나, 제발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특수교육, 특수학교만 고집하지 말고 일반학교로 진출하기를…. 의무고용적용제외 제도도 없어졌고, 채용 전 건강진단(신체검사제도)도 인권침해 요소가 있다고 논의되고 있으니, 용기를 갖고 교육부, 국가인권위, 행정자치부, 혹은 장애인권단체에 문제를 제기하길 바람. 차별의 벽 앞에서는 될 때까지 치고받는 수밖에 도리가 없으니까.
먼지 폴폴 날리며~ "뛰어! 아웃! 파울!"
시간을 맞추기 위해 택시를 타고 들어갔다. 내리자마자 발야구를 하는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차 소리와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송광우 씨(34세, 시각장애1급)는 우리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터라 바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우리가 5년만인가"?
"하하 여준민 간사님, 정말 오랜만이죠"?
"선생님 반가워요. 그나저나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수업 진행하세요."
"선생님, 저 분들 누구세요"?
"응, 선생님 친구야. 자 빨리 다음 사람 나와서 시작하자!"
기자와 오늘의 주인공 송광우 교사는 서로 아는 관계다. 2001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센터에서 활동할 무렵, "중도에 시력이 나빠져 휴직을 했고, 복직을 하려는데 학교 측
▲체육시간심판을보고있는모습 |
그 이야기는 차후에 풀기로 하고. 일단 몇 년 만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 뛰어노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남녀 학생들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고, 그 옛날 나처럼 키 큰 여자애가 투수를 하는 모습이나 저 멀리 공을 차고 신나게 뛰는 모습 자체가 새로웠다. 아마도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싶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곳에 간 목적을 내가 어찌 등한시 할 수 있겠는가. 5년 전 그가 복직을 하려던 학교 측에서는 "앞이 보이지 않으니 체육활동도 못할 것이다"라고 단언했던 기억이 떠올라, 송광우 씨가 아이들과 어떻게 어울리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여러 각도로 옮겨 다니며 그를 지켜보았다. 결론은 "역시나"였다. 아무 문제없이 오히려 너무 심판을 잘 봐서 조금만 금 밖으로 나가도 대번에 "파울! 아웃!"이라고 공명정대(?)하게 심판을 보고 있었다.
작은 규모에서는 장애, 비장애가 없다
남산초등학교는 교실 건물은 단 한 동뿐이고,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각 학년별 학생수가 10명 내외인 작은 학교다. 2~3학년은 학생 수가 적어 교실도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운동장에 나와 하는 발야구도 한 학년에서 소화하지 못해, 4,5,6학년이 모두 나와 편을 갈랐다. 송 교사와 남자 선생님(너무 젊고 머리가 스포츠형이라 송 교사를 위해 투입된 공익근무요원이 보조교사를 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한 분이 각 팀의 감독이자 심판이었다. 교사 수는 교장, 교감 선생님까지 모두 7명. 대체로 젊은 교사들이어서 서로 마음도 잘 통하고, 6년차 경력인 송광우 교사는 경험을 인정받아 교무주임까지 맡고 있다. 그래서 학교 행정을 처리하느라 최근에는 밤 11~12시가 되어야 퇴근할 수 있단다.
"오늘 인근에 있는 3학교 선생님들이 모여 배구대회를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시간이 별로 없네, 어쩌죠? 오랜만에 만났는데. 밖에서 식사도 할 수 없고. 급식이라도 드실래요"?이미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연발하고 있어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도 아니고, 학교에 왔으면 그 유명한 급식은 먹어봐야지 하는 생각에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사진을 찍어대는 모습을 봐서인지 아이들은 우리에게 와서 "진짜 친구 맞아요? 아닌 거 같은데"?하며 송 교사와 우리에게 친근감을 표시한다. 어떤 아이는 물까지 떠다주는 환대도 보여주었다. 생각보다 보잘 것 없는 식사(농촌지역은 교육청 예산으로 집행되어 질이 떨어진다고 한다)였지만 즐거운 분위기 때문인지 밥은 잘도 넘어갔다. 속이 안 좋아 밥 생각이 별로 없다던 송 교사도 남기면 안된다며 한 그릇을 후딱 헤치운다. 잠시 후 고등학생 같은 사람이 송 교사 옆에 앉자 "우리 학교 공익근무 요원이에요. 저랑 제일 친한 친구고 술친구죠. 저를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서로 친근한 웃음을 보이더니 더 이상의 말은 없다. 오히려 그게 더 편한 관계라는 것을 입증하는 듯 했다. "자, 다 먹은 사람들은 교실 가서 먼저 청소하고!" "네~~"
교실로 들어온 아이들의 왁자지껄 소리에 귀가 멍하고 정신이 하나 없는데, 그이는 오히려 "온전히 열 명의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쏟고 챙기면 되니 생각보다 학교생활은 원활하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내년에는 도시로 전근을 가야 할 텐데, 그 때가 좀 걱정이긴 하죠."웃으며 말하고는 있지만, 순간 그이의 얼굴에 근심이 스치는 듯 했다. 속도와 적정 규모의 문제는 장애에 있어 중요한 차별기제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시 악다구니?
통합교육을 위해 특수학급에 보조인이 배치되기도 하니, 보조교사라고 신청하면 안받아줄까 싶어 충남 교육청에 문의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답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저도 생각은 하고 있는데, 쉽지 않을 겁니다. 언제나 예산 타령만 하고 있는데, 저 하나 때문에 쓸 예산을 배정해 줄까요"?일반 교육 현장에서는 최초의 시각장애를 가진 교사라 그는 자기 문제를 제기했을 때 온전히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몫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교육부에 관련 규정이 있거나 특별 예산을 배정하거나 고용촉진공단에서 지원하면 모를까, 아마 제가 요구하면 들어주지 않을 겁니다."그래서 그는 우선 걱정은 되지만 도시 학교의 특수학급을 맡으면 될 것 같다고 전한다. 순간 교육 관료나 학교 현장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장애 때문에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골치 아프다니까. 스스로 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교사를 하겠다는 거야"?현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터라 근심에서 이어진 환청이지만 이는 비단 나에게만 들린 이야기 같지는 않았다. 아마 그도 이런 분위기와 태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일 것이다. 또다시 혼자 감당해내야 하는, 오로지 스스로가 악다구니 쓰고 얼굴 붉히고 싸워야 하는 현실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특수학급을 선택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밀리고 밀려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내밀리는 것 아닐까.
일반교사, 포기할 수 없다
2000년 시력을 잃으면서 잠시 가졌던 1년의 휴직기간 동안 그는 점자를 익히고, 복직과 동시에 대구대 특수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원래부터 초등학교 교사가 꿈이었다는 그가 뒤늦게 특수교육을 공부한 이유는 뭘까. 그건 장애로 인한 차별현실에서 시각장애우로 살아가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너무 막막해서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죠. 하지만 이왕 살아갈 거라면 빨리 받아들이자 싶었어요. 점자도 익히고 보행훈련도 받고."
하지만 복직에 대해서는 여전히 희망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부터 복직을 생각했던 건 아니죠. 꿈이었던 교사 생활 1년 후 갑작스럽게 시력을 상실하면서 복직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절망적이었지만 꿈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맹학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특수교사자격증을 따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죠. 그런데 대구대 임안수 교수님께서 외국의 경우 시각장애우도 일반학교 교사가 될 수 있는데 왜 우리나라에는 아무도 없냐며, 복직을 할 생각 없냐고 물어보시더라구요. 한번 도전해보겠다고 말씀드리고, 전직 학교에 문의를 했더니, 역시나 부정적 반응을 보이시며 각종 서류와 진단서, 시범 수업 등을 요구하셨죠. 거의 안돼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셨어요."그래서 그이는 장애우 단체의 도움을 받기 위해 부산 맹인복지관에 상담을 했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로 연결이 된 것이었다."
아까 언급하다 말았던 그와의 인연. 당시 인권센터 활동가로 그의 문제를 담당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장애"
당시 기억을 떠올려보면, 교육청과 학교당국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진단서에 "CCTV나 확대경을 사용하면, 교육활동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적혀 있었지만, 그건 스스로 공부할 때 이야기라며 교육활동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의사소견서를 근거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교사, 학부모 등이 참관하는 가운데 시범수업을 실시했는데, 당시 앞에 앉은 학생에게 교탁 위에 있는 교재를 집어달라고 부탁했더니, 그걸 꼬투리 삼아 "그것봐라, 수업할 때 학생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지 않느냐! 교사생활을 할 수 없다"고 까지 이야기 한 것이다.
어느 교사든 수업시간에 아이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자연스런 관계에서 벌어지는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송 교사에게는 "장애"라는 딱지를 붙여 "무능력"으로 연결지은 것이다. 수없이 공문과 전화통화가 오가는 가운데, 결정 시기는 다가왔고, 인권센터는 언론에 슬쩍 이 문제를 알려, 자칫하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될 것이라는 협박 아닌 협박까지 사용해야 했다. 그런데 언론이 무섭긴 무서웠나 보다. 교육공무원 신규채용 시에는 양안의 시력에 대한 규정이 있지만 복직에는 의사소견서가 주요했기 때문에 그를 반대할 타당한 근거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불안감은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꼭 복직을 해야겠다는 신념이나 의지가 강했던 것 같은데요"?라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웃기만 한다.
자연스런 관계가 차별을 없앤다
이곳, 이 작은 분교 같은 남산초등학교에 부임한 지 벌써 5년이 되어간다. 그는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것일까? 눈으로 보았지만 가끔 장애에 무지한 사람들 혹은 솔직한 아이들 때문에 곤경에 처했던 경험은 없었을까?
"학부모님들의 반응은 솔직히 모르겠어요. 직접적으로 들은 이야기는 없으니까요. 대부분 학부모들은 처음에 제가 시력이 안좋다는 사실을 잘 몰랐죠.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고 그때는 제가 아이들에게 성심껏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셨는지 학부모들의 원망을 들은 기억이 없어요. 간혹 몇 몇 학부모들이 모임에서 눈이 잘 안보인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일이 있었는데 제가 별로 신경을 안 써요. 어차피 모든 학부모님들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잖아요. 오히려 제가 아이들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선생님처럼 아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 달라며 말씀하시는 분도 계셨거든요."
역시 장애문제를 관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부족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아무리 교육이나 에티켓을 배워도 직접 일상에서 부대끼며 관계를 맺으면, 어느 순간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자연스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걸 그가 증명하는 듯 했다.
뭐가 필요해? 니가 알아서 해
그의 책상 안에는 컴퓨터 모니터가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책상 위에 또 다른 TV가 놓여져 있다. 문자 확대기였다. "이건 학교에서 배치해 준 건가요"?당연하다고 생각한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아니요, 제가 사비 들여 샀어요. 공단에 문의하니 사기업에 취업한 장애우에게는 1,500만원 정도를 지원하는데, 국가공무원에게는 지원해주는 규정이 없다고 하네요. 교육부나 해당 교육청에서 예산을 지원받아야 한다고요."
일면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공단이 지원 제도에서 배제한 이유를 들으니 화가 솟구쳐 올랐다. "일반 사업체의 경우 2% 의무고용을 하지 않으면 부담금을 내기 때문에 다시 그 돈은 일반 사업체에 돌려줘야 한다는 겁니다. 국가는 의무고용 지키지 않아도 부담금을 납부하지 않으니, 사기업체에서 받은 돈을 국가에 돌릴 수 없다는 거죠."
굉장히 합리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결국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것은 장애를 가진 당사자 아닌가. 누가 요구하기 전에 알아서 해야 할 국가기관이 책무를 이리저리 떠넘기고 있는 형편이라니…. 그에게 문자 확대기는 눈이나 다름없는 꼭 필요한 것인데 그것마저 스스로 준비하고 설치해야 한다. 뭐하나 보장해주는 것 없이 자칫 실수라도 하면 온전히 그의 개인 책임으로 돌려지는 게 여전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선택과 강요 사이
그래도 아이들은 이 문자 확대기 때문에 "이게 뭐예요? 아, 선생님에게는 이게 꼭 필요하겠구나"하면서 호기심으로 시작해 장애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단계로까지 확장하였다. 가끔 전학 온 아이들 경우에는 "눈이 나쁘면 안경을 쓰시죠, 왜 안 쓰세요"?라고 물어와 아이들답다는 생각도 한단다. 그럼 사실대로 대답해주면 그만이고.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서로를 인정해가면서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니, 이보다 더 훌륭한 교육이 어디 있겠나 싶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공립학교 교사이다 보니 한 학교에 근무할 수 있는 연한이 정해져 있어 이제 곧 학교를 옮겨가야 하는데 지금 맡고 있는 아이들의 수(10명)가 제가 지도하기에 적당한 것 같은데 혹시 큰 학교로 발령이 나서 한 반의 학생수가 많다면 과연 지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또 아이들이 적은 학교에 계속근무를 하자니 다른 업무도 많아지고 그러네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좀 더 생각해봐야겠어요."역시 특수학급을 맡겠다고 했던 것은 "선택"이 아닌 "무언의 강요"였다. 물론 스스로가 장애를 갖게 되면서 통합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여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일면 "선택"이라고 볼 수 도 있다. 그는 장애아동이 차별받지 않고 통합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관심이 많다며 잘 할 자신도 있다고 한다. 늦깍이로 공부한 특수교육학을 제대로 나누고 싶은 듯 했다.
분리와 차별을 양산하는 교육환경
"교과서나 교사용 지도서 등 문자매체로 된 자료들을 공부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데 요즘은 멀티미디어 자료들을 다양하게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사전에 한번 검토를 하고 싶어도 대부분의 자료들이 제가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텍스트 형태가 아닌 이미지, 플래쉬 등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것이 조금 불편하고 힘드네요."학교가 교육을 실천하는 장이 아니라 학생들을 관리?감독하는 곳이라는 교사들의 볼멘소리는 실상 여러 가지 행정적인 서류 작성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물론 보다 이해하기 쉬운 첨단 매체를 활용하면 학습적 효과가 크겠지만, 텍스트가 아니면 온라인상에서 자료를 구하고 교재로 사용한다는 것은 그에게 매우 힘든 일이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수 있다.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럴 때 보조교사가 필요한 것인데 그이도 필요성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해결방안을 찾아봐야지요. 실제상황에서 발견된 문제점들을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해결방법을 찾을래요. 제가 처음 복직하고 나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힘들겠지만요. 혹시 저를 위해 보조교사라도 채용해 준다면 좀더 쉬워지겠죠"?라고 말하며, 처음부터 적극적인 도입을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을 내비췄다.
좁다면 좁은 교육계, 게다가 몇 년간은 옴싹달싹 할 수 없는 학교현장에서 한번 관계가 틀어지면 이후 내내 힘들어질 가능성을 염려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는 어딜 가나 마찬가지 아닐까. 장애에 대한 무지와 외면, 차별로 점철된 한국 사회 그 어느 곳에서도 스스로가 먼저 인식하고 함께 할 집단과 연대하지 않으면 그저 받아 줄 곳은 아무데도 없다.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는 한.
고이지 않고 흐르길
그를 만나지 못했던 지난 5년 동안 그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복직을 했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 아들 해비.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갖는 바람에 신혼생활이 거의 없었다고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놓지만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번져있다.
지금 시골학교의 넉넉함과 정겨움이 좋다며 대체로 인간관계와 환경에서 만족스런 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는 모든 일선 교사와 마찬가지의 바람을 갖고 있었다. 평범하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바람.
"저는 특별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평범하게 교사로서 살아가고 싶어요. 아이들이 스스로 가진 잠재능력을 발견해 자아를 실현하는데 도움을 주 수 있는 교사, 아이들의 처지를 이해하며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 안을 줄 아는 교사, 아이들의 머리 속에 오래 기억되는 그런 교사로서요."
하지만 앞으로 그이에게 닥칠 일들은 그다지 호의적인 상황이 아닐 수 있다. 어쩌면 이런 바람을 제대로 실현하려면 복직할 당시처럼 또다시 부디끼는 행동을 싫어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에겐 벅찬 일이지만 함께 하면 나눌 수도 있고, 다른 장애를 가진 예비교사들에게 큰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말하지 않아도 장애우 교사에 대한 처우와 지원이 마련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돌아오면서 갖는 나의 바람이었다.
글 홍여준민 객원기자
사진 정선아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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