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자들의 벗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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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인터뷰 하면서 다시… "후회했다."인터뷰를 핑계로 그의 과거사부터 시작해 현재의 고민지점들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 까지는 좋았는데, 읽는 사람들에게 한 인물을 통한 그 어떤 메시지가 온전히 전해지는가의 문제는 글 쓰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특히 평소 존경에 가까운 신뢰를 보냈던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은 십중팔구 띄워주기 내지는 칭찬 일색의 흐름으로 전개될 것이 뻔하고, 글 쓰는 사람의 속내를 살짝 내비추게 되어 있으니 여간 부담스런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인터뷰라는 것의 속성이 좀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잘 알든 모르든 사람을 만날 때는 분명한 선의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따라 질문과 답이 오가면 그걸 맛깔스럽게 구성해서 사실만 요약하면 되는데, 세상에 허튼 소리 할 주인공은 별로 없고 또 그 기대로 만나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이 글을 가볍게 여기지는 말아주었으면 한다. 글 쓰는 부담을 어느 정도 해방시키기 위한 나름의 합리화이자 위안일 뿐, 그의 말과 실천적 활동은 "어둡고 낮은 곳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살아가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들꽃이라 했던 386세대(그는 광주세대라고 표현했다)들이 어느새 자기 세력의 확장에만 관심을 갖고 "과거의 나"를 잃어버리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그는 여전히 들꽃으로 피어있다. 끊임없이 자신과 조직을 되돌아보고 인권을 화두로 종횡무진 하는 인권운동사랑방의 박래군 상임활동가가 바로 그다.
▲박래군 씨 |
인권활동가들의 맏형이자 큰오빠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아는 그를 새삼 취재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생각보다 개인 박래군에 대한 진솔한 삶의 이야기는 언론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거다. 인터넷 검색창에 박래군이라는 이름을 적어 넣었지만 대부분 인권강좌, 토론회, 세미나, 기자회견, 국가보안법, 집시법, 의문사 진상위, 인권관련 사건·사고 등 개별 사안에 대한 접근이나 멘트 정도 따는 수준이 전부였다.
그가 의도적으로 인터뷰를 피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거절하고 싶다, 정말. 글은 대강 보일 것만 보여주고 나를 감출 수 있는데 인터뷰를 통해 사람들에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면 나중에 그게 자신의 족쇄가 되는 법이거든"이라며 함께걸음의 인터뷰도 처음에는 거절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그는 의리를 소중히 여기고 특히 후배를 잘 챙기기로 소문난 인권활동가들의 맏형이자 큰오빠이기에 외면할 수 없었나 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시설생활자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은 함께걸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를 주목한 이유도 양지마을이나 에바다 복지시설, 시설공대위 조직 등 시설문제를 근 10여 년 동안 인권운동의 관점에서 풀기 위해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는 믿음직스런 동지란 측면이 강했으니까. 어찌됐든 그는 "그냥 술이나 한잔 하지"라는 말로 대신 OK 사인을 보내왔다.
작가의 꿈, 그러나
그는 많은 말을 쏟아냈다. 친절하게도 연대기 순으로. 그러니까 대학 입학 전부터 시작해 지금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까지 25년의 삶을 거의 년, 월, 일을 정확히 기억해내며 중요한 사건과 현대사에서 자신의 분기점이 되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대학에는 가지 않으려고 했지. 집안 형편도 그랬고 수원에서 혼자 자취하면서 공부보다 문학에 관심이 많았어. 그때는 대부분 외국 소설이었고, 내가 좀 고차원적으로 놀았는데(웃음) 실존주의 철학을 접하면서 인간의 문제를 소설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지. 인생 경험을 더 다양하게 하면 되지 대학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고 예비고사 성적도 잘 안 나와서 내심 포기했어."하지만 그는 재수 끝에 대학에 들어갔다. 이듬 해 81년 연세대 국문학과로.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집이 경기도 화성 제부도 근처인데,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야. 입시를 본 후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눈 오는 어두컴컴한 밤에 혼자 언덕을 넘어 가며 흔들리지 말자를 되뇌며 다짐에 또 다짐을 하고 집에 들어섰는데, 문은 열려 있고 부모님이 안 계시는 거야. 잠시 후 지게에 나무를 한 짐 지고 눈 덮인 산에서 내려오시는 두 분을 뵈었는데…"
그는 차마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자식 외지로 유학 보내 대학에 들어갈 일만 손꼽아 기다리며 평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오신 분들인데 그 분들의 기대를 저버리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라는 말만 되풀이 했어. 1년 재수 끝에 학교에 들어갔고 아버지는 아들이 4년제 일류대 들어갔다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시고."
그 시대 우리네 부모님들이 다 그러하셨겠지만, 그의 아버지는 동네에선 노랭이로 통할 정도로 머슴살이에서 스스로 살림살이를 만들어간 성실한 분이셨다고 한다.
"너무나 착하게 살아온 분들이셨지. 겨울이면 남들은 노름에 빠져있는데, 아버지는 뻥튀기 장사를 하셨어. 다른 자식들 같으면 부끄러워했을 텐데, 난 기특하게도(웃음) 따라다니면서 도와드렸고."
가난한 사람이 결코 정의로운 건 아니지만 정의로운 사람에게 가난과 결핍의 정신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순박하고 가난한 부모님, 그들에 대한 부채의식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어. 2년차 동생과 난 학생운동을 시작했으니까. 아들 얼굴은 볼 수도 없고 학교, 경찰서에서 계속 찾아오지, TV에서 시위하는 장면 나올 때 얼굴 나오지, 구속됐지, 강제징집 됐지. 게다가 동생은 그렇게 갔고. 심정 고통을 너무 드렸어."
아픈 상처를 들춰내는 게 자신 없어 사전에 동행한 사람들과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는데, 그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동생은 88년 숭실대 인문대학생회장으로 활동하다 그 해 6월 4일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학살자처벌을 외치며 분신한 박래전 열사다.
삼 형제 중 막내아들은 민주화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고 둘째는 치열한 학생 운동권이었으니 부모님이 겪었을 고통은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집에만 다녀오면 우울했어.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나의 모습을 보여드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지금도 여전히 부모님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아마 죽어서도 못 갚겠지."
바쁜 일정 속에서도 주말만 되면 만사를 제처 두고 제법 많은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께 달려가는 이유도 그 때문인가 보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91년 고관절로 목발을 사용하시면서 농사를 짓고 계시니 더욱 마음이 쓰일 수밖에. 물론 그는 땅에 발 딛고 땅을 만지는 일에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곤 해 체질에 맞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왜 진작 농부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나 싶어 가능하면 나이 50이 넘어 현장 활동과 가난한 사람들도 유기농산물을 먹을 수 있도록 생명을 살리는 농사를 병행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도 갖고 있다. 그 꿈은 땅에서 평생 살아오신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흙의 아들로 돌아가려는 본능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졌다.
대학시절의 별명이 "올리비아 핫세"였다구?
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시절, 물론 잠시였지만 여전히 스믈스믈 꿈틀대는 문학청년으로서의 한 때를 그냥 넘길 수 없을 것 같다. 지금도 왕성하게 시국 사건과 인권 관련 원고들을 집필하고 있고 성명서, 보도자료, 기자회견문 같은 건 거의 도인에 가까울 정도로 다작을 하고 있는데, 경험에 의한 습득일 수도 있지만 글쓰기를 전업직업으로 가지려고 했던 그 때가 있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아참 그는 자신이 작가가 되지 못한 것이 한국문학사의 "문학적 손실"이라고 꼭 적어달라고 했다.
"입학도 하기 전에 연세춘추문학회라는 곳을 찾아갔을 정도로 열의가 넘쳤지. 이래봬도 1학년 때 연세문학상 소설부문에 당선되기도 했다구. 문제작(?)이었지. 제목은 땅강아지. 땅강아지 알어? 걔는 땅을 파서 살아가는 얜데 밤이 되면 날기도 해. 그런데 농촌현실은 그렇지 않지. 땅을 파고 일구어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농촌 현실. 아들은 농약을 치다가 쓰러지고 나중에는 도망가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그리워하고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만다는 내용이야"
대학 1년 동안은 문학한답시고 술 마시고 글 쓰고 하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고 회상하지만 당시 유행했던 한국 문학의 리얼리즘에 영향을 받아 온 몸은 "사회"에 열려있었고, 문제작(?)이 알려지자, 운동권 선배들 사이에서 "찍은"후배가 되었다. 물론 그도 찍혀 넘어갔고.
그를 비롯해 사람들은 표출되든 가슴 속에 묻고 있든 정서적으로 분노란 것을 안고 살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사람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힘은 학교 선배였던 고 기형도 시인을 통해 많이 배웠다고 한다.
그가 문학적 스승이라 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는데, 기형도 시인은 그에게 "올리비아 핫세"(로미오와줄리엣의 줄리엣)라는 별명까지 붙여줬다. 여성도 아닌 남성에게, 그 예쁜 여자 배우 같다니. 그 별명의 연유를 다들 짐작하기 어렵겠지만 그 만큼 박래군 (학생)이 순수했었다는 건데, 풍부한 문학적 감성과 까만 얼굴에 눈은 초롱초롱 빛을 띠고 있었을 테니 선배가 보기에 얼마나 예뻤을까 싶어, 이해하기로 했다.
작가에서 운동가로 방향전환
"하지만 1학년 말, 그러니까 11월 25일 학교에서 전두환 살인마 처단하라는 큰 데모가 있었는데 학생들이 쫓기다 4학년 선배가 학생회관 4층에서 떨어졌어. 경찰들은 최루탄을 쏘며 심하게 다쳤을 그 사람을 연행해 갔고. 눈이 돌았지."
연행된 학생들이 곧장 군대로 강제징집 되는 걸 보며, 그는 비합법조직에 가담했고 하루에 열 개가 넘는 세미나와 회의 등으로 글 쓰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고 한다.
"현실을 알기 위해 세미나를 하면서 내 고민의 해결지점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야. 스폰지처럼 빨려 들어갔지. 그 후로는 글 쓰는 것이 생경해지더라구. 노동운동을 소설로 쓰려고 했는데, 내가 봐도 딱딱하고."
문학이냐 운동이냐를 놓고 치열한 갈등을 하던 그는 자연스럽게 운동의 길로 방향 전환을 하게 된다.
"3학년 때는 학(생)회장을 했는데, 그 해 신입생 75명 중 2/3이상이 여성인거야. 선배들은 국문과 죽었다 부터 시작해서 남자 몇 놈 뽑아 언더(지하조직)나 만들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난 그 때, 아니다 여성도 한다,고 해서 학회를 중심으로 모이게 했지. 아마 난 그때부터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었나봐(웃음) 암튼 50명이 학회로 모였어."
탁월한 조직가 기질은 그 때부터였나 보다. 그는 하루 3-4시간의 잠을 자며 학(생)회 활동에 전력했고, 신입생 명부를 빼내 이름, 출신학교, 사는 곳 등을 모두 외울 정도로 치밀하게 후배들을 조직화했다. "뛰어다니는 학회장, 움직이는 학회실, 이게 모토였는데, 야, 이런 게 다 기억나네"?그에겐 가장 빛나고 치열했던 한 때가 아니었을까. 그는 시원하게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강제징집, 그 와중에도
하지만 당시 운동권 학생들이 경험했을 그 모든 것을 그도 비껴갈 수 없었다.
"84년 4월 28일 강제징집을 당했지. 왜 그런 날은 꼭 비가 오냐? 이슬비 내리는 경춘가도를 달리는데, 중간에 머리 깎고 금속성의 개목걸이(인식줄)를 거는 순간 눈물이 핑 도는 거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싶었지."
두 해의 겨울을 보낸 27개월 동안 구로노동자파업이 있었고 여자친구(?)도 보냈다는 그이는 "그 때 너무 많은 걸 잃었어. 전두환을 미워할 수밖에 없지, 내가."라며 웃음을 보이지만 다시 기지개를 펴기 위한 준비에는 소홀함이 없어 보였다. 휴가 때는 동지들과 함께 그동안의 활동경과를 공유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단다. 그래서 나오자마자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한다.
노동운동의 길목에서
제대를 했지만 복학은 생각지 않았다고 한다. 제대 후 동생 래전과 자취를 하면서 야학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노동자들의 피나는 파업투쟁에 적극 결합해야 한다는 생각에 목장갑을 만드는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한다.
"취업 당시 학생출신을 용케도 가려냈는데, 난 용모가 준수(?)했기 때문에 그냥 무사통과였지. 손 검사 해봐도 난 걸릴 게 없잖아? 하하."
하지만 일거리가 없다고 무작정 줄 세워 놓고 해고하는 폭력이 자행되는 틈에 끼자, 그는 사람들을 조직해 다음 날 아침 파업을 감행한다. 130명 중 100여명 정도가 모여 파업철회를 외쳤으니 사측도 무시할 수 없었단다. 일단은 성공. "승리에 취해 있었지. 내가 한 걸 아무도 몰랐거든."그러나 결국에는 해고되었고, 86년 5.3 인천항쟁에 가담하면서 노동운동에 대한 꿈을 더욱 현실화시킨다.
"김문수, 심상정 같은 사람들이 당시 지도위원이었는데, 내 이름이 선도투쟁 조에 포함되어 있는 거야. 제대 10개월밖에 안된 사람을 그렇게 부려먹을 수 있냐? 여하튼 못된 짓 많이 했어. 주안역에서 전철도 세우고, 소방차 물대포로 맞아가면서 싸웠지. 용모가 준수하니까 화염병 들고 가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고, 시위하다가 동생 래전이를 만나기도 했어. 돌 깨고 있더라구."
래전은 동생이자 동지였다. 시골마을에선 "창자가 붙어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형제애가 돈독했고, 언제나 고민을 함께 나눈 벗이었다. 용감한 형제는 그렇게 시위현장에서 만나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야기를 하는 내내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웃음을 보이는 그의 태도에 어떻게 호응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나에게는 당시의 치열함이 보이고 그 때 그 사람들은 다 어디 있나 싶어 찹찹한 심정이었는데, 그는 달랐던 것이다.
그는 말 잘하고 논리적인 사람은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에 잘 믿지 않는다고 했는데, 관념과 허무에 빠지지 않기 위해 현장에서 끝없는 성찰적 태도를 견지 한 것 아닐까. 현장에서의 치열한 싸움. 갈등과 고민, 25년간의 현장 운동이 지금의 내공을 쌓게 만들었나 보다.
인권의 코드로 세상 바라보기
그는 86년 감옥에 갔다가 87년 7월 5일 가석방 되어 나오지만 감옥 안에서 장기수 선생님들을 만난다. "입만 열면 혁명!"이라고 외치던 학생들과는 달리 동지에 대한 따뜻함과 철저한 자기 되돌아보기의 생활을 몇 십년간 좁은 감옥 안에서 실천하는 모습, 그야말로 "해석이 필요 없는 만남"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운동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구조적인 문제는 알겠는데, 그렇다면 인간이 뭐냐는 본질적인 물음을 다시 품게 된다. 감옥에서 얻은 고문후유증(팔을 뒤로 해 다리와 함께 포승줄로 묶여)과 "졸업만 해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어길 수 없어 다시 노동현장에 가지는 못하고 복학을 선택하지만, 그의 고민은 계속 "사람"으로 이어졌다.
그는 동생 래전의 죽음으로 유가협 활동을 하던 91년을 가장 힘들었던 때로 기억하고 있었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는 걸 보면서 운동에 대한 회의를 갖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의 실망스런 모습이 꽤나 힘들게 했어."
그는 서로에 대한 신뢰로 힘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반목과 갈등으로 힘을 소진하는 모습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폭주를 하면서도 고민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다가 결국 장장의 편지를 남겨놓고 유가협을 떠났다고 한다. 유가협 시절 50명이 넘는 열사들의 장례식을 치러"재야의 장의사"라 불리었던 그가"인권"에 대한 구체적 고민을 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강기훈유서대필사건"으로 사방팔방 뛰어다니던 서준식과 함께 자료집을 만들며, 인권운동이 정치범, 양심수 위주라고만 여겼던 편견이 여지없이 깨진 것이다.
특히 93년 6월 세계 각국에서 2만 여명이 모여 인권을 주제로 논하는 비엔나세계인권대회는 그에게 문화적 충격이었다고 한다.
"인권의 영역이 그렇게 광범위한 걸 몰랐어. 동성애자? 전혀 감도 못 잡았지. 정치적 폭압과 빈곤으로 남미에서는 3만 명 이상이 죽어 가는데, 우리는 매번 국보법이나 장기수에 매달려 있고, 또 운동이 생활전반으로 퍼져가는 건 좋지만 아시아운동이 정권에 대립하는 운동에서 멀어지는 기회주의적 운동으로 전락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은 사회주의 중심으로 운동을 고민했지만 인권이란 코드로 세상을 읽는 게 필요하고, 독자적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그는 의문사, 유가협의 문제도 인간의 존엄성 문제로 보지 못하고 통일운동진영이 발전해 가는데 기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사랑방과의 인연
그는 인생에서 유일하게 월급 받았던 컴퓨터 회사에 10개월 정도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문국진이란 선배가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을 일으킨 것을 알고는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청구소송을 진행하면서(비엔나에서 torture;고문이란 단어만 있으면 모든 자료를 수집했단다. 혹시 써 먹을 때가 있겠지 싶어서. 그것이 소송에 유용했단다) 인권운동사랑방 한 귀퉁이에 고문피해자모임을 만들었고, 한국에서는 최초로 고문에 의한 국가배상을 (1억 5천만 원) 받는 데 성공한다.
이후 94년 8월 "서준식의 꼬임(?)에 넘어가"2005년 6월 현재까지 12년째 사랑방에 적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사랑방은 조직 운동원칙선언을 통해 활동비를 지급받는 직업활동가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건 운동을 실천할 수 있는 활동가의 정신과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그들에 의하면 "독립군정신으로 활동하는"모범적인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 사무국장 등의 체계가 인권운동과 맞지 않는다며 2년에 걸친 조직론 토론 끝에 수평적인 상임활동가 제도로 전환했고, 이 흐름은 많은 인권단체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허울에서 벗어나 실질적 내부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새겨들어야 할 지점이 많은 듯 하다.
인권, 철저히 낮게 작게 가난하게
그렇다면 오만가지 일에 다 매달리고 있는 그가 관심을 갖는 인권운동의 영역은 무엇일까?
"인권운동 하겠다고 했을 때 개량이다, 변했다 등등의 오해도 많이 받았지. 체제변혁적인 문제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운동 진영의 편협성이 여실히 드러나지? 사랑방은 처음부터 인권운동의 중심내용으로 일반재소자, 사회권,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와 빈곤의 문제를 계속 염두에 두고 있었어.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영역은 갇힌 자들에 대한 문제, 가령 고문피해자, 감옥, 그리고 시설도 마찬가지고. 시설 문제를 처음 접한 건 에바다였지만, 수렁(?)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하루소식에서 다루는 정도만 발을 들여놓으려고 했는데, 내참 그 놈의 박경석을 만나 또 끌려 들어갔지."
하지만 본격적으로 시설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98년 양지마을 사건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탈출한 사람의 제보를 받고 일명 "햇볕작전"이라 했던 사전 방문 기획서를 준비하리만큼 철저하고 대대적인 조사활동으로 수용되어 있던 모든 사람들이 풀려나게 되었던 사건.
"오갈 데가 없으니 그 분들이 사랑방으로 찾아왔지. 옥상에 가건물 짓고 밥해주고 그랬는데, 대부분 알콜중독이라 술 먹고 옷 벗고 가족에게 칼 들이대고…. 인간이 존엄하다? 그건 선언적 규정이지. 정말 어디서 어디까지 존중할 것인가를 인권운동하고 처음 가진 고민이야. 그 때 인권론이라는 것이 철학적 베이스가 약한 것 같아 공부를 시작했고, 인권은 지식인들의 고상한 그것이 아니라 철저히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걸 알았지.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노동자 출신 운동가들은 언제든 그 자리에 있지만, 학생 출신 운동가들은 노동자가 아닌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때 처음으로 평생 운동가로 살려면 다른 길(선택의 가능성)을 포기하거나 봉쇄하고, 더 많은 공부(학위), 더 높은 지위, 저절로 얻어지는 위치 등에 대해서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는 다짐도 한다.
그는 "언제나 낮게, 유연하게, 내적으로는 강하게, 원칙 있는 변화와 열정, 겸허와 의리, 그런 것들을 덕목으로 삼으며 살아가고 싶어"라고 말한다.
고통스럽고 때로는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소중한 것 아니냐며, 오히려 그런 원칙을 견지하고 되새김질 하며 자신을 더욱 공고히 다잡아 가는 것 같다. 그의 이름을 대신하는 메일 서명이 "외유내강"인 것도 그런 연유에서라고 하는데, 주변사람들의 평가를 보자면 일단은 성공한 것 같기도 하다.
시설운동, 자본과 억압에 대한 저항운동
그는 인권운동 진영에서 수많은 일들을 벌인 "주동자"로 평가받는다. 국보법 철폐, 집시법 개정, 네이스 반대투쟁, 에바다, 사회권 운동, 시설공대위, 인권단체연석회의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슈를 만들고 투쟁했다. 하지만 종종 후배들에게는 "치고 빠지기의 선수"라는 말도 종종 듣는다. 여기에는 할 말이 많은가 보다.
"그건 정말 오해야.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누구든 처음 시작을 잘 못하잖아. 그럼 사람들하고 의논을 하는 거야. 지금 바로 이런 것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 말이지. 지난번 네이스 투쟁 때 전교조가 거의 독박 쓰던 거잖아. 그때 이걸 인권단체들이 받아서 인권문제로 제기했고 공대위를 조직했고, 담당자를 남기고는 내가 할 일로 옮겨 갔을 뿐이지."
그렇지만 시설문제는 결코 그런 성질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책임 있게 활동할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데, 그가 이렇게 시설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명확한 현실 인식 때문인 것 같다.
"시설이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면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구조와 관련된 문제거든. 사회적 억압구조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운동이야. 이는 자연스레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운동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거고."
그래서 그는 인권단체연석회의라는 별도의 연대 기구를 조직하기도 했다. 지금의 시민운동이 자본주의 체제를 긍정한 위에 변혁적 방향을 유보하는 운동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인권운동의 독자성을 살리면서 체제를 넘는 운동으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는 인식에서다. 갇힌 자들을 풀어내는 운동, 빈곤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에게 눈길이 가 있는 이유도 이것 아닐까.
희망은 나 자신의 신념에서
빼곡한 일정이 적힌 수첩, 쉴 새 없이 걸려 오는 전화, 하루에 3-4가지가 넘는 회의며 미팅, 그야말로 정신없이 바쁜 그이지만, 그래서 잠이 항상 부족한 그이지만, 그 만큼 고민도 많아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한단다.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이 4-5시간이라니.
언젠가 그는 장애운동 진영의 집회에 한번 결합하지 못한 것을 두고 이런 메일을 보낸 적 있다. "사회적 약자들의 몸부림에 함께 못하면 그 인권운동의 앞날은 전망이 없다고 머리로는 늘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마음의 빚만 늘어간다."라고.
"넌 죽을 수 있냐"?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과 죽은 자들(열사)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그 다운"고백이었다.
참 나도 그에게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선배는 나이 들어가면서 더 멋져지는 것 같다고. 권위나 자리를 탐하지 않고 언제나 넉넉한 마음으로 시선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발은 그들이 서 있는 땅에 꽂혀 있으니 말이다. 이런 느낌은 통하나보다.
"B급 좌파"란 책의 저자로 알려진 좌파지식인 김규항 씨는 "활동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직업(?)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첫 번째 거명된 사람이 바로 박래군이었다.
그이를 보면, "희망은 꿈꾸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 활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신념에 다름 아니다"는 누군가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이의 신념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이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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