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직한 쌈꾼 이규식 이동권연대 투쟁국장 > 함께 사는 세상


우직한 쌈꾼 이규식 이동권연대 투쟁국장

“난 ‘더 이상 죽을 수는 없다’는 각오로 살고 있어요”

본문

▲이규식씨(이동권연대투쟁국장)

약속은 지킨다
벌써 1년 전의 일이다. 2004년 3월 26일.
그날은 고 최옥란 열사를 기리는 추모문화제와 더불어 420 장애차별철폐연대에서 결의한 한 달간의 노숙투쟁이 시작되던 날이었다. 하지만 저녁 무렵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개최하기로 했던 추모문화제는 무산되었다. 경찰이 불법집회라는 이유로 무대 강제 철거와 참여자 전원 연행이라는 방침을 세워 강력 대응을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취재기자들과 장애가 심한 몇몇 참가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각 경찰서로 연행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새벽 1시가 가까워져서야 상황은 종료되었다. 전동휠체어와 전동스쿠터 마저도 트럭에 실리고 사람들은 몸만 따로 경찰차에 태워지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지만 몇몇 과격한(?) 운전을 시도했던 일부 중증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간신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옴싹달싹 하지 않는 그가 보였다. 모든 사람들이 연행되고 조직적으로 노숙투쟁을 결의했다던 상황은 이미 종 친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혼자서 결연히 그 자리를 사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자신이 뒤로 빠질 때의 상황을 동지들에게 알려줬어야 하는데, 그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며 가슴아파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라고 말하며 혼자 노숙투쟁을 지켜냈다.

투쟁? 투쟁! 투쟁!!

▲(사진제공장애인문화연대)
이규식. 그는 직함이 두 개다. 장애인이동권연대 투쟁국장과 420장애차별철폐 투쟁국장. 소속은 달라도 ‘투쟁국장’이란 직함은 똑같다.
‘얼마나 잘 싸우는 사람이기에 이곳저곳에서 다 투쟁국장을 맡고 있을까?’ 이렇게 그에 대한 개인적 호기심은 ‘싸움 잘하는 사람’ 으로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지인들로부터나 혹은 가끔 술 한잔을 기울이며 나눈 이야기에서는 ‘이규식’이란 사람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역시 겉에서 보는 것과 관계 속에서 사람을 안다는 것은 천지 차이다. 단지 그는 ‘싸울 때가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첫인상은 싸납고 무서운 쌈닭 같았다. 워낙 스쿠터와 전동휠체어를 무기로 집회 대치 상태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들이박기"하는 모습이 익숙했고, 무표정한 얼굴로 있을 때는 꼭 화난 사람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편견은 이내 깨져버렸다. 말수가 적고 묻는 말에도 단문으로 대답하는 버릇이 있어 처음에는 괜한 긴장감을 갖기도 했지만 그건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특히 그의 인간적인 모습의 진가는 술자리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처음 그와 가진 술자리에서 술내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지난 2월 있었던 노들야학의 일일호프에서 그와 난 백세주 몇 병을 갖다놓고 ‘부어라 마셔라’ ‘원샷’하면서, 누가 술을 잘 먹는지, 암튼 그런 무모한 짓을 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도 꽉 채운 술잔을 내 앞에 갖다놓았고, 내가 확 하고 한입에 들이키면, 뭐가 좋은지 씩~하고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곧 자신도 한잔을 털어 넣고. 왔다갔다 하던 사람들이 “도대체 둘이 뭐하는 거야?”라며 철없는 우리의 행동을 보며 다들 한마디씩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단지 빠른 속도로 취해가는 것 같은 느낌만 있을 뿐.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갑자기 옆 테이블에서 아주머니, 아가씨 몇 분이 일어서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와 하시는 말씀. “규식아, 술 조금만 먹어라~”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옆 테이블에 계시는 것도 모르고, 누가 누가 술 잘 마시나를 했다니.
하지만 그 무엇보다 정규교육과정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장애가 심한 아들이 공부한다, 운동한다며, 다니는 야학의 행사에 직접 들러 격려와 애정을 표한 것에 대한 작은 감동이 훨씬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난 이규식이란 사람이 가난했지만 식구들이 함께 있는 가정에서 온전히 살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집에서 벗어난 곳, 시설…
“시설에 거의 10년이나 있었어요. 경기도 근처의 시설을 전전해왔죠. 19살부터.”
의외였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리도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시설에서 보낸 세월이 불과 얼마 전이었던 90년대 후반까지였다니.
“매일 집에만 있었어요. 그 때는 전동휠체어, 전동스쿠터도 없으니까 가족 중 누가 이동에 도움을 주지 않으면 나갈 수가 없었죠.”
어렸을 적 그의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셨고 어머니 또한 학교 앞에서 작은 노점을 하셨단다. 2남 4녀라는 다복한 형제를 두었지만 모두 자기의 생활이 있는 법. 그는 17살에 처음으로 하늘을 봤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TV나 라디오가 유일한 친구였죠. 학교도 못가고 매일 집에서만 지냈어요.”
물론 사이가 안좋은 형제도 있지만 여동생은 그의 전폭적인 지지자였다. 지난 해 리프트 추락사를 당했을 때도 휴가를 내면서까지 병원에서 간호를 한 것도 그의 여동생이었다.
여하튼 그는 80년대 후반 힘들고 가난했던 집을 떠났다. 성인이라 할 수 있는 19세의 나이에 집을 나와 그가 간 곳은 사회가 아닌 시설이었다.

시설에서의 생활은 사육 당하는 것
그는 자신보다 더 심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하루빨리 세상에 나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요즘 부쩍 심해진 근육통 때문에, 자신처럼 싸움 하나만이라도 잘 할 수 있는 후배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그러려면 시설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이었다. 시설이란 곳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있어서는 안될 곳인지. 시설에서의 생활 이야기를 해달라는 말에 그는 약간의 한숨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더 이상 죽을 수 없다> 사진집에 보면 그 때의 내 일기가 있는데. 속 모르는 사람들은 산 좋고 물 좋은, 경치 좋은 곳에서 살았구나 싶겠지만, 그건 사람이 사는 방식이 아니죠. 주면 먹고 싸고, 하루 종일 방안에서 빈둥빈둥, 가끔 오는 자원활동가들 보는 게 유일한 낙이고. 아무 생각도 할 이유가 없고 할 수도 없게 되는 거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한다는 건 더더군다나 꿈도 못 꾸고”
어디 글에선가 그는 시설에서 생활하는 건 한 마디로 ‘사육당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장애우공동체’란 말을 많이들 갖다 붙이지만, 그야말로 수용이 전부인 집단생활은 개인은 온데간데없고, 선택권과 자기결정권이 철저히 무시되고 유린되는 현장 아닌가. 그는 장애우들이 사육당하는 시설에서 나와 자기 삶의 터전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는 만큼 세상도 조금씩 변하는가. 어느 날 그에게 전동스쿠터가 생겼고, 누군가 밀어주지 않으면 거의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던 그가, 혼자 바깥에 나가 온전한 인간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스쿠터가 생기면서 독립을 결심한거죠. 이렇게 살 수만은 없다, 가만히 앉아 죽을 수는 없다, 는 생각이 들었고, 알고 지내던 형과 독립생활을 시작한 겁니다.” 그의 나이 27살. 19살에 시설에 들어간 후 근 10년만의 탈출이었다. 아니 집안에서만 생활하던 것까지 합치면 27년만의 탈출이 맞겠다. 비록 사회는 그를 시설이란 곳으로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이규식, 자신답게 살기 위해’ 시설을 박차고 세상으로 나왔다.

▲(사진제공장애인문화연대) 안 좋은 야학에 들어가 인생 꼬였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본격적으로 장애운동을 시작한 게 언제냐고 물었다.
“안 좋은 야학에 들어가 잘못 엮인 거지요. 하하. 내가 똑똑하면 여기 안 들어 왔지요. 딴 데 가서 조용히 살면서, 아마 글이나 쓰고 있지 않을까요?”
그는 98년 5월에 노들야학을 찾아왔다. 정규교육과정에서 배제되었으니 학교 졸업장이라는 것도 없었고, 한글도 서툴렀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초등학교과정은 졸업했지만 중학교 과정은 영어, 수학이 남아 있단다. 하지만 그마저도 포기했다. 이번에는 배제가 아니라 자신의 당당한 선택이었다. “더하기 빼기는 하겠는데, 그것 말고 뭐 더 배울 게 있습니까? 살면서 계산만 할 수 있으면 되지. 공부는 취미에 안맞고. 하하.”
처음에는 사람들이 말하는 공부를 하기 위해, 졸업장을 따기 위해 야학을 찾았지만, 그는 “배운다는 것은 교과서보다 세상이 스승”이라고 말한다. 졸업장과 학식으로 일반적인 직장에 취업할 것도 아니고 평생 자신보다 더 심한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이상 그에게 많은 지식은 덧없음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인생의 공부를 주변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운동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에게 노들야학은 그런 ‘진지’였다.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과 운동적 삶에 대한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 그가 학과 공부는 포기했어도 여전히 갈고 닦으며 배우는 노들인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자립생활은 프로그램이 아닌 운동
그러나 그는 최근 고민이 많다. 나이가 들면서 아침에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을 정도로 피곤함을 느끼고 또 근육 뒤틀림도 심해져 고생이기도 하지만, 자립생활운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인식에 문제인식을 갖고 있었다. 집회에 잘 안나온다는 것이 이유였다.
집회가 다는 아니지 않냐고 하자, 그는 “그럼 뭐가 단대?”라고 되받아친다. 그러면서도 덧붙이는 말 “지금은 돈 받을 때가 아니예요. 싸울 때죠. 자기 힘을 먼저 기르고 난 후의 문제인데, 돈 받고 프로그램대로 운영하는 것에 급급하고 있어요. 그러면 스스로 커질 수 없죠.” 그는 자립생활센터가 늘어나고 자신과 같은 중증장애우들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라며, “돈을 아는 순간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아직 시작단계이니 더 두고 봐야 하는 문제 아니냐는 질문에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말한다. “우려가 아니에요. 우리가 느끼고 있어요. 현장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개인적 고민에 치우치게 되어 자신과 주변의 상황을 연결시키는 운동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죠. 정체되어 있으면 끝이에요. 끝.”
자립생활센터가 거의 모든 구 마다 만들어지고 있지만 정작 중증장애우들이 더 많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현상은 맞는 말인 것 같다. 큰 흐름을 만들어내야 할 시점임에도 오히려 목소리와 몸짓들은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다. 비디오 영상활동가로서의 변신(?)을 준비하고 있는데, 지난 장애인권영화제에서 부대행사로 마련한 영상교육을 수강하고, 거금을 들여 자신의 비디오 카메라 한 대도 마련했다. “수강을 마치면서 평가 작품을 만들기는 했는데…” 수줍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투쟁을 하기 전 아무 것도 모를 때부터 관심이 있던 부분이예요. 하지만 그동안은 싸우느냐고 엄두를 못내고 있다가 기회가 생긴 거죠.”
그는 전에 “무엇 때문에 그리 열심히 싸우냐?”는 사람들의 질문에는 항상 “이것밖에 할 것이 없다.”라는 말로 유명했다.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는 대답이 아닐 수 없는데, 이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외도? 전에는 싸움 밖에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좀 달라졌어요. <버스를 타자>의 박종필 감독이 몸으로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그 싸움의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저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았다. 우선 시중에 판매되는 비디오 카메라 모두가 오른손잡이용으로 제작되어 그이처럼 왼손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이용하기 어렵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휠체어 앞 판을 싸움을 잘 할 수 있도록 특수제작 해 부착해 놓았는데, 그곳에 카메라 설치대를 붙여 고정시킨 상태에서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들고 찍기의 묘미라는 것이 있는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삶 자체가 선택보다는 포기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도 여전히 싱글벙글이다. 야학 교사가 모꼬지를 간다며 카메라를 빌리러 왔는데, 꼼꼼히 설명해주며, 잘 쓰고 반납하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가끔 그는 안부 전화를 한다. 별 할 이야기도 없으면서. 하지만 그 마음씀씀이가 감동적이다. 대체로 단문을 즐겨 쓰는 그이가 그래도 전화를 해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얼마 전 그이의 다른 인터뷰 기사를 보고 또 한번 감동한 적이 있다.
그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돈 많이 벌어 그 돈으로 물건을 막 사는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 보람 있는 일을 해서 겨우라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부자가 아니어도 근근이 살아가기만 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사람사이의 정을 느끼며 서로 돕고 산다면, 그게 행복한 삶 아니냐는 것이다.
경쟁과 효율, 그래서 자본이 지상 최대의 가치가 되어버린 불경스런 세태 속에서도, 그는 고고하고 아름답게 서 있었다. 

글·사진 홍여준민 객원기자

작성자홍여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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