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 생명임을 깨우쳐 주는 여자, 송희정 씨 > 함께 사는 세상


자존감이 생명임을 깨우쳐 주는 여자, 송희정 씨

“의수요? 그건 내 아름다움이 아니잖아요”

본문

▲송희정씨

‘어?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싶으시다면, 바로 지금 책장을 덮으시길.
그러면 "아!~그렇군" 하면서, 더욱 호기심을 갖고 이 글을 읽지 않을까.
이번 달 사람 사는 이야기를 전해줄 사람은 바로 8월호 표지 모델을 자임(?)하고 나선, 송희정(36세, 지체장애2급) 씨다.
그이를 만나며, ‘인연이란 은근히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고, 자신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자존감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서른 중반에 벌써 나이 오십을 넘은 사람들이 느낄 법한 파란만장한 인생을 경험했지만, 그것들을 바탕으로 오히려 넉넉함과 희망을 품고 사는 ‘그 여자, 송희정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 여자, <함께걸음> 표지 모델이 되기까지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더라구요. 아마 <함께걸음>에서 먼저 말하지 않았으면, 제가 먼저 제안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이제는 객원기자라는 신분을 갖고 있는 터라, 편집팀에서 주문한 내용을 중심으로 취재하고 인터뷰를 하고 있으니, 그녀가 어찌어찌하여 표지모델까지 하게 되었는지, 자세한 경위는 알지 못했다.
만나서 물어보면 되지 싶어 던진 첫 번째 질문의 답. “내가 이 일의 적임자다?”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장애를 드러내자’는 표지 컨셉은 이미 지난해부터 <함께걸음>이 구상해왔고 실제 두 차례에 걸쳐 직접 찍기도 했다. 그렇지만 사실 모델을 찾는 것이 어려워 거의 포기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당시 주변에선 꽤나 좋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다’ 약속해 놓고서는 정작 찍기 전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사람들이 많았고 표지모델 구하기에만 전력할 수 없어, 내심 접었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 것 같다.
그런데, 얼핏 의향을 떠보기 위해 지나가는 말로 던진 것이 송희정 씨에게는 큰 의무감으로 다가왔다니. 정말 의무감만으로 표지모델이 된 것일까?
“처음엔 저도 그리 깊게 생각지 못하고, 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찍죠, 라고 짧게만 답했어요. 근데 집에 들고 온 함께걸음이란 잡지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참 좋은 책이란 느낌이 들었어요. 게다가 나 같은 사람들이 주인공이고, 나 같은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내용들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 거죠.”
편집진에 의하면, 그 후 그녀는 “빨리 찍게 해주세요.”라고 편집진을 닦달(?)했고, 당당하게 장애를 드러내는 촬영 일정은 일사천리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표지모델을 할 말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지리한 설득과 협박, 회유의 과정을 거쳐 본지라, 어쩌면 그녀 말대로 이 정도의 의무감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쉽지 않은가.

‘장애’는 평생가도 변하지 않는 것
“전 원래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고 다녀요. 사람들의 시선이 내 팔에 고정되는 것도 느끼지만, 그건 낯설음에서 오는 것이니 그들만을 탓할 수도 없지요.”
일전에 사전 조사 겸해서 그녀가 보내온 옛 사진들을 본 적이 있다.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는 해수욕장에서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자신 있게 서 있는 모습. 그 한 장의 사진은 많은 걸 이야기하고 있었다.
“처음엔 쉽지 않았죠. 초등학교 때 ‘외팔이’라고 놀림도 많이 당하고 왕따도 당했어요. 그 때는 내가 남들과 뭐가 다른지 구분도 안되고 이해할 수도 없었죠. 무작정 집에 오면 울기만 하고, 나는 이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사람인가 싶은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그녀가 한 쪽 팔 절단이라는 장애를 갖게 된 것은 4살 때다. 언니들을 따라잡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뛰어가던 중 넘어졌는데, 그만 도로에 대(大)자로 넘어지면서, 뻗은 팔 위로 자동차가 지나간 것이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팔을 내밀었다가 절단되었다는 사람의 이야기 이후, 가장 놀랍고 어이없는 장애발생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쉽지 않을 법한 지금의 당당함과 의연함을 어떻게 체득한 것일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의 장애를 인정하지 않는 한 사회 속에서 살기 어렵죠. 물론 구조적인 차별과 인권침해에는 분명히 대응을 해야겠지만, 우선은 자신의 마음가짐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가진 장애는 평생을 가도 바뀌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장애겠어요?” 가벼운 웃음을 짓지만 목소리에는 자못 힘이 느껴진다. 어려서부터 가진 장애이기 때문에 수많은 경험 속에서 단련되어진 것일 수 있지만, 왠지 ‘나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보호막’ 이란 생각도 저버릴 수 없었다. 이 느낌은 그녀 또한 부정하지 않았다.
“철들면서 내가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가 생각해 봤어요. 남들만 탓하며 살기에는 버겁기도 했고. 그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면 그렇게 부르는 몰상식한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다들 그런 건 아니잖아? 라는 생각을 한 거죠.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아픔이 있을 거예요. 저도 장애 때문에 깊은 상처와 아픔을 갖고 있지만 과연 아파하고만 있을 것이냐는 생각에 머무른 거죠.”

 

동정심과 정(情),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고, 심지어 나이 많은 분들이나 아이들의 경우 모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와서 “쯧쯧, 어쩌다 그랬어?” 혹은 “아줌마는 팔이 왜 그래요?”라고 물어도 이제는 “사고로 그랬어요.”라고 웃으며 담담히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말한다.
“아이를 낳으면서 인 것 같아요. 자식을 낳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일종의 동정심이지만 나쁜 맘에서 그러는 것은 아니니까 자존심 상해하면서 화를 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녀는 동정심도 일종의 아끼고 이해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한다고 말한다. 결코 쉽지 않은 태도지만, “일종의 ‘정(情)’이지 않을까” 싶다니…. 한마디 한마디가 도를 득한 도사 같은 답변뿐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역시 그녀는 도사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것도 문제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는.
“물론 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왜 그리 사람이 좋냐? 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정말 짜증나요. ‘장애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거기서 왜 들어가죠? 전혀 관계없는 말이잖아요. 나를 온전한 나 송희정으로 보지 않고, 장애를 언급하는 건 불쾌함을 넘어서 차별적 인식이라고 생각하죠.”
그녀는 경험을 통해 매번 남들의 말에 상처만 받으며 장애를 부정하면 지혜롭지 못한 것이라며, 무지에서 나타나는 상황은 가능하면 설명하고 이해를 돕는 게 필요하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더불어 사는 삶이란 비장애우가 장애우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것도 아니고 장애우가 비장애우의 기준에 도달하려는 모습도 아니라면서.
그녀는 “장애를 가진 스스로를 인정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세상의 다른 모습도 받아들여야 해요. 물론 사람과의 관계는 유연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지만 차별적 제도와 시스템에는 끝까지 싸워야 하죠.”라고 말하며, 우연한 사고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것인데, 자신은 삶의 이유를 과거 얽매여있는 것보다 현재와 미래에서 찾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무슨 인권교육을 듣는 듯하다. 거의 확신에 차 있는 듯한 목소리와 표정에서, ‘과연 그 확신을 심어준 계기는 무엇일까?’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평생의 상처와 고통을 서른 중반의 나이에 모두 겪다
그래서 그녀가 싫어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를 쓰면서까지 그 계기가 무엇이냐고 직설적인 물음을 선택했다. 너무나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이 궁금증을 더 한 것 같다. 그녀는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그리 좋지 않은 가정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죠. 어렸지만 힘겨웠어요. 삶에 의욕은 강한데 현실에서 계속 좌절했던 아버지는 매일 술에 취해 있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엄마와 우리 자식들에게 왔죠.” 그녀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폭력을 겪고는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정의 경제적인 어려움은 학교마저도 중단하게 만들었고, 예민했던 청소년 시기의 감수성을 절망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도무지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 그녀는 결국 "자살"이라는 것을 선택하면서 무작정 집을 나왔다고 한다.
“잠시 안양의 언니 집에 있다가 죽을 각오를 하고 이 약국 저 약국을 다니며, 아무 약이나 막 모았어요. 근데 거의 정신이 반 나간 사람처럼 떠돌다가 언니 집이 어디인지 길을 잃어버린 거죠. 그 때 첫 번째 남편을 만났구요.”
약을 모으기는 했지만 즉시 실행에 옮길 것은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집을 찾다가, 거리에서 만난 남편이 친절하게도 언니의 집까지 안내를 해준 것이다. 당시 그녀의 나이 19세. “근데 오면서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 그 후 그 사람이 저를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정이 좀 들었는데, 어느 날 함께 살자고 하더라구요.” 삶에 그다지 애착이 없던 그녀가 처음으로 낯선 사람에게서 가진 호의와 호감은 즉시 살림을 꾸리는 것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첫 번째 남편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부모님 또한 외로운 사람들끼리 의지하고 살자며, 그녀를 쉽게 받아들인 것이다. 몇 개월간은 ‘꿈’ 같았다고 한다. 본인이 살아온 환경과는 너무도 다른 애정과 보살핌이 그녀를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나’하는 사람 본연의 자세로 돌리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어요. 남편도 술을 마시기 시작했죠. 보통 때는 괜찮은데, 술만 마시면 180도 사람이 달라졌어요.”그래도 자식 낳고 살고 있는 처지라 어떻게 하던 살아보려 했던 그녀지만, 자신의 태도는 변하지 않으면서 이혼만 요구하는 남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결국 결혼 13년 만에 아이는 남편이 맡는 것으로 하고 새롭게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어린 나이에 가진 장애, 그 때문에 받은 외로움과 상처, 가난한 집안환경, 이른 결혼과 출산, 그리고 이혼.
모습은 어두운 티 하나 없이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지만 그녀가 경험한 일련의 것들은 도무지 한사람이 서른 여섯해를 살아오며 경험했을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게 힘겹고 고통스런 과정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지나간 이야기가 되어 대화도중 웃기도 하고 심각해지기도 했지만, "휴~"하는 말줄임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인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힘
 아참, ‘인연’이란 것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연유를 설명해야겠다.
“홀로서기를 시작하면서 정말 난감했죠. 이제 혼자 돈을 벌고 살아가야 하는데, 교육을 제대로 받았나, 기술을 배웠나. 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을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그러다 선택한 직업이 보험 일이었다고 한다. 힘든 상황을 겪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세상과 사람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한 그녀였기에, 사람을 만나 설득하고 관계를 맺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감도 붙었기 때문이다. 생각을 고쳐먹자고 다짐에 다짐을 하는 순간, 그다지 거칠 것이 없는 세상살이가 되었던 것이다.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마음가짐은 그녀를 악착같이 돈벌이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 덕에 몇 년 지나지 않아 꽤 놓은 실적으로 돈을 벌어들였으나, 4개월 동안 하혈을 할 정도로 몸은 심하게 망가져 버렸다.
“보험을 하기 전 카드회사에서 일했어요. 그 때 함께 일하던 언니가 있었는데 서로가 허물없는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생각도 드는데, 저도 외로운 처지였으니까 그렇게 절 인정하고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위안이 되기도 했죠. 어느 날 처지가 비슷하니까 함께 의지하면 살자고 하기에, 그렇게 했는데….” 그 후 그 언니라는 사람은 몇 차례에 걸쳐 돈을 빌려달라고 했고 그녀는 카드빚을 지면서까지 빚보증을 서,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아픈 몸 때문에 직장도 그만 둔 처지라 그녀는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가야 할지 고민이었던 것이다.
“그냥 내가 잘못한 거니까 빨리 돈 벌어서 끝까지 책임지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 그이와 결혼을 하더라도 그 부담까지 고스란히 떠안길 수는 없는 거잖아요. 해결방법을 찾다가 혼자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인터넷을 뒤져 단체를 찾아보았죠. 처음엔 법률구조공단을 찾아갔는데, 개인파산을 도와주는데도 돈이 있어야 한다고 해요. 그래서 알아본 곳이 바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였죠.”

인권교육으로 막연한 당당함이 확신으로
몇 개월간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그녀는 연구소의 인권센터 박숙경 팀장과 상담을 하면서 문제가 일사천리로 진행돼, 이제는 다 끝난 일이 되었다고 한다. 법률위원인 서순성 변호사가 무료 개인파산 신청을 도와줬기 때문이다.
“법률적인 문제로 상담을 의뢰했지만 박숙경 팀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인권학교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알았죠. 전체 강의 중 단 한번만 빠지고 모두 들었어요. 제가 경험한 여러 가지 것들이 일순간에 정리되는 느낌이었죠. 정말 필요한 교육이었어요. 곳곳에서 인권교육이 필요할 텐데 말이죠.”
그녀가 처음 이야기를 꺼낸 것들이 강의에서나 들을 법한 내용이라 생각한 것이 틀린 것은 아니었나 보다. 워낙 당당함을 무기로 살아온 그녀에게 인권교육 프로그램은 ‘확신’이라는 것을 심어준 계기였고, 그녀가 말한 것은 ‘신념’이었다.
여하튼 한번 맺은 인연을 그녀는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함께걸음>과의 표지 모델로 이어졌고, 1년 전 약혼한 재미교포 출신의 약혼자는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연구소의 영문홈페이지 제작을 도와주기로 했다. 직업센터를 통해 취업도 했다. 새 일터가 일산이라 좀 먼 거리지만 휴대폰 대리점이라고 하니, 사람을 편안하게 대하는 그녀의 장점을 살리며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문화센터나 각종 교육프로그램도 열심히 수강하고 싶다니, 이쯤 되면 그녀가 인연을 필연으로 만들어가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자존감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품위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화 된 노출이 아닌, 자신감 있는 노출은 사람을 일순간 자유롭게 해방시키기도 한다. 최근 젊은 여성들이 어깨를 드러내고 짧은 스커트를 선호하는 이유도 일종의 "자유의지"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이 일반화된 ‘노출’에서 결코 해방되기 어려운 사람들이 바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다. 여전히 대다수의 장애우들은 찌는 여름 한철에도 장애를 드러내지 않고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있다. 그건 결코 자신의 장애를 부정하거나 숨기고 싶어서라는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기분 나쁜 시선을 매순간마다 처리(?)해야 하는 불쾌감과 고통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말이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불편부당한 시선부터 거둬내는 일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리고, 그녀가 싫어하는 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자존감을 갖고 산다는 것은 ‘인간’임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아닐까. 장애 여부를 떠나 자신에 대한 당당함과 세상을 향한 신념어린 말과 행동은 언제보아도 ‘품위있는 사람’의 향기를 뿜을 수밖에 없다. 그 모습은 잘생기건, 돈이 많건, 학벌이 좋건, 가정환경이 좋았건, 장애가 있건, 동성애자건, 전과자건 하등의 관계없이, ‘인간은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인간의 품위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가 갖는 자존감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칫 치열한 경쟁이 판치는 가운데서도 자신을 긍정적으로만 포장하려는 모습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념’과 ‘포장’의 구분은 사람에 대한 주의집중이 가능한 인지능력만 있다면 쉽게 가늠이 가능하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일 수도 있는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의 모습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asdf

나는 나, 그것이 아름다움
그녀는 지금 고1인 아들 현준이와 떨어져 살고 있다. 양육문제와 관련해 고민이 많지 않냐고 물으니, 가볍지만 무시할 수 없는 대답이 이어진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란다”라고.
기독교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가끔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지만, “엄마도 결혼하지? 외롭잖아”라는 말을 주고받을 정도로 어느 새 친구가 되었단다. 약혼자와도 자주 만나고 서로 통하는 것이 많다고 한다. 실은 자신보다도 더 앞서고 있다는데, “엄마가 먼저 결혼하자고 해. 나도 동생이 생기겠네?”라는 말도 먼저 쉽게 꺼내주어, 결혼에 대한 부담이 줄었다며 대견해 하고 있었다. 
그녀의 휴대폰에는, 현준이와 친정 식구들과 약혼자가 노래방에서 다정하고 다양하게 포즈를 취한 사진들과 약혼자와 아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 어깨가 드러난 예쁜 원피스를 입은 송희정 씨 자신의 사진 등이 입력돼 있다.
지난 세월, 그 길지 않은 그 시간동안 장애, 여성, 이혼, 사기, 재혼, 아들, 가난, 교육, 폭력…,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여정들이 있었으나, "내가 좀 짧은 시간동안 경험하긴 했어도 다 그렇게 살지 않아요? 어른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요."라고 담담히 말한다.
“내 모습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고 날 인정하지 않지요.”란 단호한 표현에서 그녀를 반이상 이해했다고 말하면 좀 오버일까? 하지만 오버라도 좋다. 기분 좋은 오버가 내 정신 건강에도 좋을 듯하다.
“현실에 충실하고 행복하자”는 말을 되새기며 살고 있는 송희정 씨. 비록 자기암시가 강한 측면이 있다하더라도, 그녀의 의지와 신념은 무시할 수 없는 그것이다.
왜 의수를 하지 않느냐의 질문에 아무 기능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건 내 아름다움이 아니잖아요.” 라고 당차게 말하는 것을 보니, 정말 멋진 표지모델이 아닐 수 없다. 아니 멋진 "그 여자"다.

글·사진 홍여준민 객원기자

작성자홍여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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