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아가는 남자, 박훈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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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 씨(57세 정신지체3급) |
철저히 비장애우 중심의 세상에서 살던 지인 한 명이, 장애 가진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정신이 멍했다고 고백한 적 있다. 뇌병변장애를 가진 사람의 말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고, 상대방에게 집중하기보다 자기가 잘 마주하고 있는 건지에 대해 더 많은 신경을 쓰느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도 그냥 흘려 넘겼다는 것이다. 돌아와서 알아듣지 못해놓고 아는 척 했던 것이 내내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으로 남아있었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이 장애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어떠한 일들을 해나갈 수 있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한다. 고민은 가닥을 잡지 못한 채 아프게 온 몸을 휘감았지만, 결국 그냥 부딪쳐보자! 하면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론은 그에게 유효한 것으로 다가왔다. 잘 알아듣지 못하면 솔직히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라고 얘기했고, 모르면 모르겠다고 했다. 미안했지만 그게 자신인 것은 속일 수 없었다. 그 후, 장애가진 사람을 만나는 건 그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자연스런 것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 위 이야기는 비장애우가 장애가 있는 사람을 처음 접했을 때 가졌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뭔가 다를 것이라 생각하고,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단순한 듯 하지만 이 편견은 두려움을 가져오고 결국 외면과 차별로까지 번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그럴 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사람’만나러 간다, 고 생각하면 그 뿐이다. 단순한 것이 가장 해결에 가까울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솔직히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만나러 갈 때는 적지 않은 걱정스러움(?)이 있었다. 만날 사람은 ‘박훈’이라는 이름 뒤에 항상 ‘정신지체 3급’이라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짧은 시간 동안 만나서 그가 갖고 있는 고민과 일상을 풍요롭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나눌 수 있을지, 느낄 수 있을지….
그동안 정신지체나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 많은 사람을 만나왔으면서도, 친구도 있고, 동생도 있고, 선배도 있는데, 왜 새삼 ‘글의 주인공’이 될 그의 이야기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건지, 나조차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의문은 엉켜진 실타래의 가닥을 잡듯 그와의 전화통화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그는 섭외 차 한 전화통화에서 “기자? 왜? 와서 뭐하게? 오지마. 할 이야기도 없는데, 그냥 죽고 싶어. 여자가 없어서. 그래, 나 안죽어. 난 얘기 못하는데…마음이 조마조마해서 못해.”라고 말했지만, 결국엔 와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귀찮음보다는 약간의 쑥스러움인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내 못난 편견과 의혹이 풀렸다는 것을 알았다. 나 또한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사람을 만나 어떻게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이야기를 살려낼 것인가를 염려했던 것이다. 대화와 소통으로 온전히 그의 이야기만을 다뤄야 한다는 것에 지레 부담이 있었던 탓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자주 가는 사이트에 아는 분이 글을 하나 올렸다. ‘존 버저’라는 사회비평가 겸 소설가에 대한 해설 글이었다. 내용을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중 유난히 눈에 띄는 한 글귀하나, 아마도 박훈(57세) 씨를 이해하기 위해 나를 비롯해 우리 모두가 필히 새겨두어야 할 명제가 아닐까.
“언어는 외견은 서로 달라도 근원은 분리될 수 없기에 결국은 사람들끼리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서로 이해될 수 있다는 토대 위에서만 성립되기 때문이다.”
- <존 버저 해설> 박혜영 인하대 영문학과 교수,
문학수첩 2005. 겨울호
반말, 그만의 소통방식
12시경 점심식사를 하러 교회에 온다고 했지만, 그는 11시 30분경에 이미 와서 교회 앞마당의 떨어진 낙엽들을 쓸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함께 있던 교회 관계자는 “어머 오늘은 안하던 일을 다 하시네?”하며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얘길해야 뭘 하시는 분이 오늘은 자발적으로 착한일(?)을 하신다는 얘기다.
박훈 씨는 지금 수원의 한 교회 집사로 있으면서 교회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처지에 놓여있다. 그 이야기는 후반부에 나오겠지만, 그 때문에 그를 만나기 전, 교회 김광태 장로를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들으려고 한 것이었는데, 그는 우리가 궁금했는지 살짝 우리들 주변을 맴 돌았다.
“에이, 언제 왔어? 왔으면 얘기하지. 난 그것도 모르고 있었네? 난 왜 안오나 했네.” 교회 관계자가 이야기해 온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소개를 하고 인사를 건네자, 몰랐던 척하며 내내 반말로 이어간다. 그게 편해서 그러시겠지, 싶다가 “근데 왜 반말하세요?” 짓궂게 물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그는 아무 말도 못했다. 눈도 마주치치 못한 채, 힐끔거리는 척 하더니만 그냥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또 쑥스러운 듯 혼자 웃었다. 단지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대답은 안하고 슬쩍 말을 다른 데로 돌린다. “밥 먹어야지?” 반말은 아무런 의도가 없는 그의 독특한 의사표현 방식이었다.
꿈에도 소원은 ‘결혼’
원래 교회 선교원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지만, 신세를 지는 것 같기도 하고, 박훈 씨가 좀 더 편한 분위기면 좋겠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했다. 오랜만의 외식인지 그도 선뜻 동의했다. 그는 함께 동행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센터의 김희선 활동가와는 구면인지라 반가운 기색을 하며, “순대 좋아해? 순대?”라고 말하며, 우리를 가본 적 있다는 순대국집으로 안내했다.
맛있는 음식에는 분위기를 갖춰야 하는 법. 우린 그에게 낮술을 권했다. 취하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한 잔은 소화제 역할을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는 거부했다. “안돼, 술 안 먹어. 교회 다녀서. …, 교회에서 못 먹게 해. 입에서 냄새 나잖아.” 잠시 뜸을 들이다가 뒤이어, ‘못먹게 하는 거고 티가 난다’는 말은, 마시고는 싶은데 탄로 나면 안된다는 말 아닐까.
“식사하면서 한 잔하는 건 괜찮아요. 취하지 않을 정도로 많이 마시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그래도 그는 안된다고 생각하는지 그 말에 동의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신한다. 경험상 이럴 땐 그냥 시키고 보면 된다. 역시나 그는 잔을 거부하지 않았다. ‘건배’라는 말에 그도 신이나 ‘짠’하고 컵을 부딪친다.
“보고 싶으셨죠?” “응” “총각은 요?(전에 같이 간 남성활동가)” “됐어, 자꾸 봐 뭐해?”
뭐가 그리 쑥스러우신지 얼굴도 들지 못하고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가는 그이였지만, 속내는 감추지 못한다. 여자는 보고 싶었지만 남자는 보고 싶지 않았다는 것. 그의 소원은 바로 ‘결혼’이었다.
“죽은 아내가 너무 그리워, 꿈에 나타나 살며시 내 품에 안기더라고”
82년, 지금은 동서가 되어버린 사람의 소개로 만나 결혼을 했지만, 부인은 지난 2002년 5월 간암으로 먼저 세상을 떴다. “고향이 어디세요?”란 질문에 뜸도 들이지 않고 “나, 고아야.”라고 말씀하시는 그 이에게, 20년간을 집과 아내 밖에 모르고 한결같이 살아온 아내의 죽음은 지금도 받아들이기 힘든 그 무엇이었다.
“예뻤지. 근데 화낸 적도 있어. 일하고 집에 오면 없는 거야. 자꾸 교회가고 시장에 가서 수다 떨고,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배고파 죽겠는데.”
아내가 살아있을 때에도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을 못견뎌하던 그였다. 그는 “마누라 생각 많이 나지. 괜히 죽어서 속상하게 해, 에이. 며칠 전에는 꿈에도 나타났어. 가만히 내 옆에 눕더라고. 가족은 생각 안 나는데 마누라는 자꾸 생각나. 나도 이산가족 찾을까?”
그는 죽은 아내 이야기를 하다가도 다시 금새 “어디 좋은 여자 없어?”하며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고 조르듯이 말한다. 결혼 하고 싶다는 것이다.
“사모님 벌써 잊으셨어요?”라는 말에는 “여자가 있어야 해. 밥 해줄 여자. 집이 너무 커 혼자 살기에는.”이라며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다. “은행도 다니고 돈 관리도 아내가 다 했는데.” 그는 느리게 한글을 읽고 쓰지만 고지서나 서류가 많고 형식이 복잡한 은행일 같은 것은 난감해했다. 우리가 갔을 때도 케이블TV 수신료 고지서를 가져와 보이며, “이게 뭐야?”묻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필요한 건 그렇게 세세한 일까지 다 챙겨줄 사람도 아닌가 보다. 그는 “장애자 여자는 안돼? 연변 여자는 안돼? 벙어리 여자는 안되나?” 수화 흉내를 내며 손을 움직이더니 “그 사람이 이렇게 하면, 난 응, 그래, 하면 되잖아.”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그것 또한 청각장애우들의 대화고 배워야 하는 것이고 쉽지 않다고 해도 “에이, 뭐, 그냥 응, 그래그래, 하면 되지 뭐. TV에서 보니까 부부가 그렇게 하던데?”한다.
하지만 배워야 한다는 말에 기가 좀 죽은 듯도 했다. 좀 있다가는 “근데 장님여자는 안되고. 뭐 보여?.”라고 말하다가 또 “고물상 주인이 중국여자 소개시켜준다고 했는데 장로님이 안된다고 했어. 안되는 거야?”묻기도 한다. 어찌됐든 근래 그의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이다.
외로우니까 사람인 것일까
그는 워낙 깔끔한 성격이라 하루에 한 번 청소는 기본이고 마루바닥에 뭐가 떨어져 있으면 손으로 계속 훔치기도 했다. 집안은 정말 깨끗했다. 반지하이지만 창문이 크게 나있어 지하 같은 느낌은 별로 없었으며, 큰 거실과 방 하나 욕실과 부엌, 최신형 TV, 세탁기, 전자렌지, 침대, 옷장, 쇼파 등 세간살이까지, 그 정도면 두 사람이 살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아니 혼자살기에는 오히려 아까울 정도였다.
“밥 잘하시잖아요. 김치찌개도 잘 끓이신다고 소문났던데요?”라고 한껏 치켜세우는 말을 하니, “잘 하지. 그래도 여자가 있어야 해. 쌀도 많아. 동사무소에서 줬어.”하신다. 말로는 밥하고 반찬해 줄 여자만 있으면 된다고 하시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고향을 물어보았을 때 그 즉시 “고아”라는 답변이 나온 것을 봐서도 알겠지만, 그이는 단지 밥해 줄 사람 혹은 일상을 돌봐주기 위한 사람이 필요해서 결혼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움과 외로움에 힘겨워하는 것이다.
“마누라 있을 때는 말도 잘 안했어. 사이는 좋았지. 아휴, 화장할 때 눈물이 많이 났어. 산에 뿌렸지. 사진도 이사 올 때 다 버렸네? 하나도 없어. 에휴, 돈도 많이 모았는데. 집 하나 사는 게 꿈이었지.”
그의 꿈은 날아가 버린 걸까, 아니면 잠시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일까.
고향? 나 고아야
그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고아원에서 생활하며 당시 특수교육이란 것이 전무할 때였으니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고 한다. 고아원에서는 점심도 주지 않았고, 후원자가 옷을 주고 가면, 그 앞에서는 입혀보지만, 그들이 가는 즉시 뺏어가 헌옷만 입혔단다. 40여년이 지난 옛일이지만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는지 인상을 쓰며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기억을 떠올렸다. “크니까 고아원에서 나가라고 하더라고. 가진 게 뭐가 있어? 그냥 친구랑 나와서 돌아다녔지. 시장에서 주워 먹고” 질문과 동시에 그의 말을 잽싸게 수첩에 옮겨 적는 내가 신기한지, 아니면, 뭘 그런 걸 다 적어, 싶으신지, 갑자기 “뭘 자꾸 그렇게 적어? 돈이 나와, 뭐가 나와?”하신다. “돈 나오죠. 쓰면. 기자가 어떤 직업인지 아세요?” 왠지 미안한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쳐드는 것 같아 말을 돌려보았는데, 그는 “그럼 알지. 신문에 쓰는 거지? 우리 집에도 신문 있는데, 장애인신문이야?”하며 들춰 보이신다. “네. 그런데 이건 잡지에요. 신문이 아니고. 제가 선생님 이야기를 잡지에 써서 싣는 거에요. 꼭 보내드릴게요.”했더니, 또 그냥 슬쩍 씩 웃고 마신다. 그리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시장에서 짠밥 모아다 돼지 주는 일 했지. 돈은 무슨 돈! 일만 시켰지. 그냥 밥 주고 재워주고. 오리, 메추리 키우는 곳이었는데, 지금도 그 주인 가끔 찾아가.” 힘들고 몇 푼 받지 못하는 일이었을지라도 그에게는 ‘일’자체가 중요한 듯 했다. 뭔가를 한다는 것, 할 수 있다는 것, 할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이 누구에게나 중요하듯, 그에게도 ‘노동’은 가치 있는 그 무엇이었다. “요즘은 일하고 싶어도 못해. 조금이라도 벌어야 하는데. 힘들지, 힘들어도 해야지. 어디 일거리 없어? 아파트 청소 같은 일 하면 좋겠어. 수위나 경리는 힘들고.” 그는 먼저 하던 고물상 일을 계속 하고 싶은데, 장로님이 가지 못하게 한다며, 말 좀 해달라고 살짝 귀뜸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파렴치
아, 이제 교회 김광태 장로, 고물상 주인. 이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두 사람들은 모두 박훈 씨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다. 아내도 떠나보내고 부모형제, 친지조차도 없는 박훈 씨가 안타까워 가까이서 돕고 있다. 우선 김광태 장로는 박훈 씨 아내의 장례식을 도와주면서부터 친하게 되었다. 처가쪽으로는 6형제나 있고 장모도 아직 살아계신다고 하지만, 형제들은 아내 송성학 씨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도 거의 찾아오지 않고 장례식도 책임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과 신도들이 그 모습이 안타까워 장례를 치러줬고, 나중에 박훈 씨가 혼자 살게 되면서도 틈틈이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 전까지 박훈 씨 부부의 일상 중 몇 가지를 살펴주던 사람은 박훈 씨 큰동서였다고 한다. 가까운 곳에 살면서 ‘장애 가진 두 사람이 산다’고 봐줬던 모양인데, 박훈 씨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처가식구들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싫어하기도 했단다. 이유는 지나친 간섭 때문이었다. 처가 죽은 뒤에는 통장, 생활비, 용돈까지 관리했고, 나중에는 박훈시 명의의 카드까지 만든 것이 들통나기도 했다. 주는 사람은 ‘누구를 위해서’라고 쉽게 말하지만, 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무조건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이 새삼 납득이 된다.
여하튼 박훈 씨 동서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장애’를 핑계로 들락거렸고, 마침내 아내가 죽자 이사를 하라고 했는데, 완전 지하방에 습기가 가시질 않는 그런 곳이었다. 김 장로는 “왜 이런 곳으로 이사를 보내려 하냐?”고 물었고, 동서는 “돈이 없어서”라고 했다. 그러나 건설일용직을 20년간 했고, 그때 번 돈으로 전세금 2천만원을 마련한 것인데 돈이 없어서라니, 김 장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통장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니가 뭔데 남의 일에 간섭이냐!”부터 시작해서 “왜 갑자기 도와주려는 것이냐? 제3자는 빠져라”는 등 수모를 겪었지만 김 장로는 박훈씨가 저렇게 사는 것이 안타까워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 문제로 동사무소까지 왔다갔다 하다 보니, 동서들이 그를 광주군의 은혜동산이란 시설에 보내고, 재산을 가로채려 했던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그는 더욱 더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동서들은 그에게 “먹고 자고 걱정 없다. 누가 널 보호하지 못하니까 그곳에 가면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식으로 그에게 시설입소를 강요했고, 결국 박훈 씨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간다고 했지. 에이, 난 그런 데 가기 싫어. 왜 가. 가라고 하니까 가려고 했지.”
그는 잠시 그 때를 떠올렸지만 다시 한번 강하게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를 둘러싼 도움의 실체는 돈?
그 문제가 있을 후로 동서들과 김 장로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김 장로는 우선 편안한 집으로 옮겨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생각되어, 자신의 집 1층으로 이사를 한다. 전세 2천만원이다. 현재 박훈 씨 명의로 되어 있는 돈은 모두 3천6백만원이다. 먼저 일했던 곳에서 아직 월급을 받지 못한 8백만원이 있고, 이사하면서 남은 돈 8백만원 정도가 김 장로가 관리하는 통장에 있다. 동서들은 자신들의 부도덕한 행각이 밝혀지면서 더 이상 박훈 씨 일에 간섭하기 어려워졌고, 이제는 김 장로를 중심으로 한 교회가 박훈 씨의 후견인처럼 된 것이다. 김 장로는 “이 모든 문제가 돈 때문에 생겨난 일이죠. 박훈 집사가 돈이 없어 봐요. 누구 하나 들여다보겠어요? 그리고 어떻게 시설에 보낼 생각을 합니까? 돌본답시고 이용하려는 거지요.”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개입하니까 주변에서도 꿍꿍이가 있다는 듯이 바라보는 게 가장 마음 아프다고 말한다. 그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주변에서 믿질 않아 손 떼고 싶지만, 그러면 박훈 집사는 어떻게 되느냐고 안타까워했다. 이 이야기를 나눈 장소가 교회 까페였고, 타인이 함께 있는 와중에도 쉽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교회 사람들도 숨김없이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듯 했다.
성년후견제 절실한 박훈 씨
그런데, 그 가운데 또다시 고물상 주인과 민사장이라는 사람이 중간에 또 끼어들었다.
그들을 만나지 않아 진위야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이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 또한 김 장로에 대한 불신으로 시작되었고, 자신들이 판단해도 박훈 씨에게 재산이 있는데, 김 장로에게만 모든 것을 맡기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물상은 박훈 씨가 일하던 곳이고, 민사장이란 사람도 박훈 씨가 일하던 곳의 사장이다. 현재 민사장에게는 박훈 씨가 받아야 하는 돈 8백만원이 있다. 민사장은 처음에는 김 장로에게 통장을 주기로 했다가 고물상 주인이 민사장에 찾아가 나쁜 이야기를 전하는 바람에 주지 않고 있다. 당시 준다고 하는 것을 김 장로가 박훈 씨 명의의 통장을 확인하고는 “놔 두십시오. 지금가지 잘해오셨는데, 저도 제3자니까요. 다만 박훈 씨가 결혼을 하거나 이사를 하거나 몸이 아프면 그 때 주십시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합해보건대, 박훈 씨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박훈 씨가 제대로 잘 살길 바라는 것이고, 자신들은 깨끗하고 정직하게 박훈 씨를 돌볼 수 있는데, 지금은 김 장로 한 사람에게 모든 권한이 가 있다고 생각해, 지금은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서로 좋은 일 하려고, 박훈 씨를 진심으로 위해서 다들 관심을 갖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 박훈 씨는 하고 싶은 고물상 일도 못하고 서로와 깊은 관계도 맺지 못한 채 눈치만 살피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김 장로는 박훈 씨 부인인 송성학 씨가 병원에 투병할 때부터 “우리 남편 불쌍하니까 잘 봐줘라. 쌀도 좀 주고 반찬도 주라. 나 죽으면 남편 혼자인데.”라는 말을 들어온 터라 쉽게 박훈 씨를 나몰라라 하기 어려운 듯 했다. 종교인이기 때문에 생할에 있어 너무 반듯함을 요구하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신도들 집에 찾아가 드리는 정기예배를 박훈 씨 집에서 보기도 하고, 반찬도 가져다주고, 교회 행사에도 꼭 중요하게 참석시키는 등 많은 배려를 하고 있는 건 사실인 것처럼 보였다. 특히 교회 사람들이 거의 다 박훈 씨를 “집사님”이라 호칭하며 존중해주는 태도를 봐서는 개인 김광태 장로가 아니라 교회공동체에서 그를 껴안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박훈 씨에게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재산은 누가 가져요?”라고 물으니 대뜸 “장로님이 갖지”하는 걸 보니, 말로만 성년후견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박훈 씨처럼 절실한 상황에 놓여져 있는 사람도 없어 보인다.
유일했던 가족, 아내를 그리며
“이거 입고 찍어? 잠바 입고? 양복 입을까? 사진기는 어딨어?”
사진을 찍자는 말에 조금 흥분되셨는지, 가장 화려해 보이는 빨간 색상의 와이셔츠를 입고 나오신다. “넥타이도 맬까?”하시는데, 괜찮을 것 같다는 말에 “그래도 넥타이 해야지”하시며 질끈 동여매신다. “누가 사주셨어요?”라고 물으니, 씩 웃으며 “누가 사긴? 내가 샀지”하며 자랑하듯 당당한 폼을 취하신다. “이거 여자가 봐?”하시며. 그는 그렇게 맑고 순박한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는 아내,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나와 섰던 아내, 아기를 가졌다가 유산으로 아이를 잃었던 아내, 간암인지도 모르고 배가 아프다고 해서 애기 가졌나, 하고 생각했던 아내 그리고 공원도 가고 시장도 가고 유일하게 말도 편하게 하고 장난도 치며 웃을 수 있었던 그 아내는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본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리고 아내와의 일상은 행복 그 자체로 남아있는 듯 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가족’이 될 ‘아내’를 그리워하며 애달프게 찾고 있는 것이다.
글·사진 홍여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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