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 아태지역 회장, 아주대 의대 이일영 박사 > 함께 사는 세상


RI 아태지역 회장, 아주대 의대 이일영 박사

“장애문제는 사회중심에서 풀어야 해결되지”

본문

우리 사회에서 의사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까?
분명히 존경을 받지만 그 뒤에는 곱지 않은 시선이 함께 따라간다.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많은 돈을 벌지만 소득을 제대로 신고하지 않으면서 탈세하는 대표적인 직업군의 하나이며 환자에게 권위적 태도를 지닌 불친절한 사람 그리고 환자의 병만 볼 뿐 환자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시선들 말이다.
그러나 여기 이런 시선들이 편견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재활교육을 받고 싶다던 장애우가 3배의 웃돈을 제시하고도 승차거부를 당해 두문불출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으로 불이 나게 달려간 사람, 장애우의 ‘장애’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장애우를 둘러싼 사회 환경까지 생각하면서 이것을 바꾸는 일까지 그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는 말로 시작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충실히 지켜가는 사람, 바로 그가 함께걸음이 이번에 소개할 아주대 의대 재활의학과 이일영 박사다.

 

소록도를 통해 알게 된 재활
첫인사를 나누고 함께걸음 11월호를 건네받은 이일영 박사는 어느 한센인의 절규하는 장면을 담은 표지사진을 보더니, ‘유준 박사 알아요?’하고 물었다. 그는 이럴 땐 자신이 아니라 유준 박사를 만나서 인터뷰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한센인(나병환자)의 재활에 평생을 바친 유준 박사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그것은 유준 박사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어떻게 재활의학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게 65년, 그러니까 연세대 의대 2학년 때였어. 유준 박사님이 기초의학인 미생물학 주임교수님이셨는데, 그분에게 처음으로 재활이라는 개념을 들었지. 당시 그분은 의사였는데도 그냥 ‘재활’이 아니라 ‘사회재활’의 개념을 머리 속에 가지고 계셨던 분이었어.”
그와 재활의학의 인연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듯, 우연한 계기로 만나서 운명처럼 맺어졌다.
“미생물학 강의를 듣고 난 여름방학이었는데, 학교에 들렀다가 우연히 유준 박사를 만났더니 대뜸 요즘 뭐하냐고 물으시더라고. 그래서 ‘뭐, 별로 하는 거 없죠’하고 대답했더니 나와서 자기 실험을 도우라는 거야. 그래서 갔더니 그게 나병균을 배양하는 실험이었어.”
균을 배양해야 그 균을 죽이는 약을 개발할 수 있는데, 당시는 나병균을 배양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필리핀의 셰퍼드 박사가 쥐 발바닥에 나병균을 배양해 성공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자 유준 박사는 그 실험을 모델로 즉시 나병균 배양 실험에 들어갔고, 거기에 당시 학생이었던 이일영 박사가 우연히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나병을 앓고 있는 한 환자의 피부에서 혹처럼 솟은 노듈(nodule)을 떼어내 갈아서 희석한 후 그 안에 있는 나병균을 염색해서 몇 개인지 세고 쥐 발바닥에 주사했다. 그리고는 일정기간이 지난 뒤 쥐 발바닥을 잘라서 동일한 절차를 거쳐 나병균이 몇 개인지 세어 봤다. 나병균의 숫자가 늘어나 있으면 배양에 성공한 건데,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연구가 끝나갈 즈음 교수님이 연구비가 남았다면서 여행을 다녀오라고 하시더라고. 그러니 얼마나 좋아. 근데, 글쎄 교수님이 갑자기 나더러 소록도로 여행을 가보라고 하시더라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지. 겁이 나서 소록도를 혼자갈 수 있나. 같이 갈 친구 7명을 모아서 함께 소록도에 갔어.”
당시엔 젊으니까 아무데서나 잘 잘 때라서 소록도를 다 여행하고 났는데도 돈이 남아서 해운대까지 돌아보고 올라왔단다. 오니까 유준 박사는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을 불러서 나병환자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옛날에는 실제로 환자들에게서 나병균이 나왔기 때문에 전염이 됐을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는 치료가 끝난 상태라 나병균이 전염되지 않는데도 그렇게 격리된 채 살아간다고, 나병 때문에 장애가 생기긴 했지만 그 사람들이 소록도에 격리된 채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그분이 그러시더라고. ‘외국에 가면 재활이라는 게 있는데 우리도 재활을 해야 한다. 재활을 통해서 그 사람들을 다시 사회로 돌아올 수 있게,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이것이 그가 재활과 만난 첫 번째 인연이었다.

재활의학 선구자 하워드 러스크와의 만남
그러나 당시 한국엔 재활의학과는 물론 관련 학회조차 없었다. 있다면 물리치료실 정도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재활에 대해 배울 길이 없었는데, 그가 소록도에 다녀온 65년 그 해에 재활의학의 선구자 하워드 러스크(Howard Rusk)가 그가 다니던 학교에 ‘재활’을 주제로 강의를 하러 왔다.
“뭔가 딱딱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 ‘아~, 이런 전문분야가 있구나. 저걸 해야겠다.’그랬지.”
그는 학교에 남는 걸 포기하고 하루 빨리 유학을 가기 위해 69년 졸업하자마자 바로 군대에 갔다. 그리고 73년에 하워드 러스크가 재직하던 미국 뉴욕대학에 들어가게 됐고, 이후 인턴 1년을 거쳐 74~78년까지 4년간은 꼬박 하워드 러스크 밑에 있었단다.
당시 하워드 러스크가 한국에 찾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워드 러스크는 54~57년까지 RI의 회장을 맡았는데, 당시에 한국은 전쟁으로 인한 장애우가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러스크는 한국 의사 몇 사람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재활의학을 교육시켰고 그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다시 한국에 돌아와 재활의학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당시에 러스크는 전세계 7-80개국에서 의사들을 미국에 데리고 가서 교육을 시켰고, 그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95%가 자신의 모국으로 돌아갔으니 세계에 미친 파급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워드 러스크는 이미 그렇게 한국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미국에서 교육을 마치니까 전문의는 됐는데, 한국에 돌아가서 전문의로서 활동할 자신이 없었어. 그래서 미국에서 다시 펠로우(fellow, 레지던트 과정을 모두 마친 의사가 자신의 전공을 심도있게 연구하기 위해 선택하는 과정)로서 척수손상센터에 가서 척수손상 재활을 하기 시작했지.”
그 뒤에는 현재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 부인의 교육과정이 끝나지 않아서 어물어물 지체하다보니 미국에서 자리가 잡히고 집까지 사게 됐다. 그렇게 73년부터 83년까지 10년을 미국땅에서 살았다. 그가 다시 한국에 돌아오게 된 건 소위 ‘블루베리 사건’ 덕분이었다.

  그를 한국에 돌아오게 한, 블루베리 사건
80년대 초반이었던 그 시절에도 미국에서는 남자가 가족을 위해 장을 보러가는 것이 낯선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자란 그도 미국에서 사는 동안 가족을 위해 장을 보러가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장을 보러 간 어느 날, 그는 파랗게 잘 익은 블루베리가 싱싱해보여서 두 통이나 사들고 집에 갔는데 가족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가족들이 아무도 안 먹겠다는 통에 그는 혼자서 블루베리 두 통을 다 먹었단다. 그러고 나서는 자신이 그랬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는데, 다음날 그 일이 벌어졌다.
“그날은 아들이 내 친구의 아들과 함께 여름캠프에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었어. 그래서 일단 친구가 둘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 있으면 내가 그 친구 집으로 가서 아들을 데리고 오기로 했었지. 그 친구 집이 차를 타고 4시간 거리여서 아들을 데리러 가기 전에 화장실에 간다고 가서 변을 봤는데, 글쎄 변이 시커먼 거야. 다른 사람들이야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의사니까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았지. 검은똥을 눴다는 건 내부 장기에서 출혈이 있었다는 걸 말하는데 거기다 통증조차 없었다면…, 그건 딱 암인 거야.”
그는 충격에 휩싸였다. 친구네 집까지 4시간을 운전해 가면서 그는 이미 죽은 상태였단다. 그래서 죽는다고 하면 도대체 뭐가 아쉬운 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딱 하나가 떠오르더라고.
“내가 미국에 살러 간 게 아니었거든. 난 공부하러 미국에 온 건데 한국에 가서 일도 못해보고 죽는다는 게 말이 되나. 아~, 억울하다는 생각만 들더라고. 이렇게 죽으면 그게 한이 될 것 같은 거야.”
마침 암전문의였던 그 친구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친구에게 검은 변을 봤다고 이야기했다. 친구도 얼굴이 하얘지면서 빨리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그 집에서 또 한 번 변을 봤는데, 어라? 이번에는 정상이었다.
“그제야 블루베리 생각이 나더라고. 이 블루베리가 나로 하여금 4시간동안 거의 죽다 깨게 하고,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거지.”
그때 마침 한국에서 온 친구 하나가 그 집에 잠시 들렀다가, 대학에서 그를 가르쳤던 교수님 한분이 그가 들어오기를 바라더라는 말을 전했다. 말을 전했던 친구는 그가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것을 보고는 한국에 데리고 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 4시간 동안 한국에 나올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인지라 바로 결심이 섰다. 한국에 돌아간다고.
그러나 미국에서 집을 샀던 그에겐 한국에 갈 비행기 값이 없었다. 그때 마침 부인이 직장을 옮기면서 퇴직금을 받은 걸 보고 그는 꾀를 냈다.
“그때 장모님이 우리 아이들을 돌봐주기 위해서 미국에 들어와 계셨는데, 근 7~8년 동안을 한국에 가보시질 못한 상황이라서 장모님이 무척 한국에 가고 싶어 하셨지. 그래서 내가 부인에게 ‘장모님 말이야, 그 퇴직금으로 한국에 좀 보내드리자. 그리고 말이지, 혼자가시는 건 좀 뭐하니까 내가 모시고 갔다 올게.’ 그랬지.”
그렇게 그는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학교로 달려갔고, 때 마침 교수를 공개채용하는 기간이어서 유준 박사의 추천서를 받아 그 자리에서 바로 재활의학과에 지원을 했다. 그러고 나서 집에 전화를 했다. 한국에서 직장을 구해버렸다고 말이다.
“아내는 놀랐지 뭐. 집까지 사서 미국에서 정착해 살려고 준비를 다 했는데, 잠시 한국에 나갔던 남편이 별안간 전화를 해서는 아예 한국에 눌러앉겠다니까, 뭐 난리가 났지. 하지만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한국에 가서 강의를 한다고 합의가 됐어. 그래서 난 미국에서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혼자 한국으로 나왔는데 그게 84년이었어.”

재활도 민주화부터 돼야 가능하다
당시는 전두환 집권기라서 학교 내에도 군사문화가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학교에 돌아온 그가 새롭게 뭘 해보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간호사들에게 척수손상 환자의 몸에 욕창이 생기지 않게 관리를 잘 하라고 주의를 주는 정도도 문제가 됐다.
“척수손상 환자들은 욕창이 잘 생기니까 자세를 자주 바꿔줘야 하는데, 당시엔 간호사들이 그런데 별로 신경을 쓰지 못했어. 나는 간호사를 상대로 계속 강의도 하고, 환자 몸에 욕창이 생기면 간호사 불러서 야단도 치고, 하다하다 안되니까 나중엔 싸우게 되고…. 그러니 간호사들이 날 좋아했겠어?”
그러던 중에 연세대 백낙준 총장이 양쪽 뇌에 모두 뇌졸중이 와서 입원을 하게 됐다. 그런데 총장도 욕창의 예외가 아니었다.
“그땐 내가 미치겠더라고. 총장 엉덩이에도 욕창을 만드는 게 무슨 대학병원이냐고 내가 야단을 했지. 수간호사도 불러서 사표 내라고 그러고. 그런데 얼마 있으니 병원장실에서 불러. 그래서 올라갔더니 병원장, 부원장, 간호부장 할 것 없이 쭉 앉아서 날 가운데 앉혀놓고 군사재판이 벌어진 거야. 당시 병원장 첫마디가 그랬어. ‘야, 이 새끼야, 욕창 처음 봐? 욕창이라는 건 생기는 거야. 누가 외국 안 갔다 온 사람 있어? 니가 병원장이야?’”
당시 요지는 재정상 간호사를 충분히 고용할 수 없어서 생기는 문제를 가지고 왜 자꾸 병원을 소란스럽게 하냐는 거였다. 그러고 나서는 거꾸로 그에 대한 모함이 돌기 시작했다. 결국 1년도 채 못 채우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경험이 그에겐 한국사회에 민주화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깨우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는 미국에 돌아가자마자 홍근수 목사와 함께 보스턴 근교에 사는 사람들을 모아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목요기도회를 열었다. 그렇게 민주화운동을 하다보니 분단의 현실이 민주주의를 얼마나 어렵게 만드는지를 깨닫게 됐고 자연스럽게 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그 다음부터는 전두환, 노태우 물러나라는 대모를 할 때마다 밤 12시 야간열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갔다. 그리고 아침에 워싱턴에 도착하면 하루 종일 데모하고 다시 밤차를 타고 와서 병원으로 바로 출근했다.
“우리나라가 민주화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러니 무슨 재활이고 나발이고 다 민주화부터 돼야 가능하다고 생각했지.”

민주화 운동이 통일운동으로 이어져
민주화 운동이 통일운동으로 이어지면서 그에게 북한에 갈 기회도 생겼다.
“초기엔 연변 쪽으로 현무학 선생과 함께 갔었어. 통일운동을 하려면 공산주의를 알아야겠는데, 그때 북한과 가장 가까우면서 공산국가였던 게 중국이었거든.”
이후 그는 한청학생들이 북한에 방문할 때 그들과 함께 북한에 갈 기회가 생겼고 이후 7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다.
“임수경씨가 방북하던 때 나도 북한에 있었어. 그래서 임수경씨가 북한에 들어오는 장면을 평양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다 봤는데, 세상에 그렇게 감동하고 놀란 적이 없어. 뽑아 보내도 그런 사람을 뽑아 보낼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당차고 똑똑한 사람이었어.”
그는 임수경씨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나 실제 그가 북한에 여러 번 다녀온 이유는 북한에 병원을 설립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북한에 방문했을 때 만난 홍동근 목사를 통해 박세록씨를 만나게 되었고, 당시 북미기독의사회 활동을 하고 있던 박세록씨를 도와 북한에 병원을 설립하게 됐던 것. 그런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북한을 7차례나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북한에 방문했을 때 혹시 장애우를 만나본 적이 있는지를 물었는데 이일영 박사도 전공이 전공인지라 장애우들을 만날 수 없겠냐고도 해보고, 어디 장애우들이 모여서 일하는 공장이 있다고 들었는데 가볼 수 없겠냐고도 해 봤지만, 당시엔 북한이 장애우는 물론 정신질환자도 없다고 말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만나 볼 수 없었다고 했다.

“문민정부 몰라요? 문민정부!”
그렇게 미국에서 나름대로 바쁜 생활에 젖어들고 있을 무렵, 아주대학병원에 초대원장을 하신 이호영 박사가 연락을 했더란다.
이호영 박사는 86년 처음 한국에 나왔을 때 미국에서 같이 연세대에 나왔다가, 그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 자신은 편도로 항공권을 끊어 왔다면서 이일영 박사만 미국으로 보내고 계속 한국에 남아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아주대학병원 초대원장을 맡으면서 이일영 박사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 사람이 갑자기 그 밤에 전화를 했더라고. 혹시 한국에 다시 나오지 않겠냐고. 내가 두말하지 않고 나가겠다고 그랬어. 밤 12시에 자다가 깨서 전화를 받았는데도 다른 생각 없이 바로 대답했지.
근데, 그때 갑자기 북한에 갔다 온 생각이 나더라고. 그래서 내가 7번이나 북한에 드나들었으니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을 텐데 어떻게 한국에 들어가냐고 그랬더니, 그분이 그러시더라고. ‘문민정부 몰라요? 문민정부!’”
그렇게 그는 아주대병원이 개원하던 94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이호영 박사에게 한국에 들어간다고 대답했을 때 침대에 누워있던 아내가 또 어딜 가냐면서 발길질을 하더라고. 하하하. 아내는 언젠가는 내가 또다시 한국에 갈 거라고 생각하면서 늘 불안해했었거든.
어쨌든 그렇게 10년만에 다시 한국에 나온 거지. 그러나 그 10년은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은 아니었어. 그동안에 우리나라 민주화에 대해 눈 뜨고, 통일문제에 눈 뜨게 됐으니까.”

장애청년 리더를 길러라
그렇게 한국에 온 지 이제 또 10년이 됐다.
현재 아주대 의대 재활의학교실 주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일영 박사는 요즘 대한척수손상학회 회장으로서 그리고 함께걸음 의료생협 위원장으로서 중증장애우를 위한 전문요양원 설립을 추진하는 등 장애우복지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는 지난 11월 12일부터 16일까지 바레인에서 열린 RI 총회에서 ‘RI 아태지역 회장’으로 당선됐다.
사실 그가 처음 RI 회의에 참석한 것은 1979년 우리나라 부산에서 지역총회를 할 때였다는데, 당시엔 그 회의를 참석하려고 전세일 박사와 함께 미국에서 부산까지 날아와서 참석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후로는 재활의학계에서만 활동하고 RI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단다.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지난 해 RI의 의료분과위원장을 맡으면서부터다. 그 후 그는 지난 9월에는 RI KOREA(세계재활협회 한국위원회) 의장직을, 11월에는 RI 아태지역 회장을 맡는 등 그의 역할 비중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빠르다는 말에 그는 그만큼 외부에서 한국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걸 반영한 것이라며 그래서 마음이 무겁다고 답했다.
“RI에는 지역별로 6개 지부가 있는데 그중에서 아시아태평양지부가 인구도 제일 많고 장애우도 제일 많아요. 현재 아시아태평양지부에는 아시아 약 20개국이 들어와 있는데, 그동안은 일본과 홍콩이 계속 주도권을 가지고 끌어왔지.
한국은 일찍 시작하긴 했지만 그동안 세계무대에 많이 나가지 않았으니까 이제는 한국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요구가 많아진 거야. 그건 한국이 그만큼 리더급으로 성장을 했는데도 국제무대에서는 그만큼 활동이나 기여를 안 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
그는 지금 회비를 못내는 나라도 많다면서 옛날에 미국 등지에서 우리나라에 찾아와 도와준 것처럼 우리도 이제는 나가서 다른 나라를 도와야 하는 위치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상황을 ‘자리는 많은데 나갈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리더를 빨리 키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국제무대에 가보면 일생을 그 회의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 근데 우리나라는 너무 단발적으로 참석할 뿐이지 지속성이 떨어져요. 그래서 저는 우리 장애청년들을 어서 리더로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거야.”
옛날엔 전문가들이 모든 걸 주도하고 장애당사자들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는 돈이 뒷받침이 안 되고 또 장애우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다고 하면서도 ‘분명 잘못됐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 경증장애우가 장애당사자로 주도해 왔던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옛날엔 경증장애우들만이 밖으로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경증장애우들이 장애당사자로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이제는 그것도 상황이 달라졌어. 이제는 중증장애우들이 리더로 커야 할 때인 거지. RI 바로 전 회장 역시 중증장애우였다고. 앞으로 일생동안 장애문제를 가지고 끌어갈 사람, 바로 그들을 리더로 키워야해.”
그는 장애우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당사자의 입을 통해서 나와야하지만 그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는 당사자만이 아니라 전문가를 비롯해 장애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결합해서 움직여야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장애문제가 장애우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주요 이슈로서 다뤄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장애문제가 더는 장애우만의, 소수만의 문제로 다뤄져선 안 되는 거라고. 그러려면 전국민의 25%가 장애우라는 호주처럼 장애범주를 넓히는 작업도 필요하겠지만, 그와 더불어 장애우의 문제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움직이도록 해야 하는 거지.”
그는 전문가를 배제하면서 당사자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또 다른 분리주의일 수 있다면서 모두 함께 합쳐서 화합해서 나가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일영 박사는 RI 아태지역 회장으로서 많은 계획들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유엔 에스캅(UN ESCAP)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비와코 새천년 행동계획 선언(BMF)’의 2007년 중간평가를 겨냥해, 각국에서 비와코 선언을 어떻게 진행하는지를 모니터하고 평가하는 동시에 각국 정부가 이것을 실행하도록 촉구할 계획이라고. 오는 2008년까지 3년의 임기동안 RI 아태지역 회장으로서 이일영 박사의 눈부신 활약을 기대해본다.

글·사진 조은영 기자

작성자조은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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