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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인숙아 곱게 잘 자라줘서 고맙다"

가난 때문에 해외로 입양보낸 막내 딸, 30년 만에 다시 만난 김종대 씨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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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텔레비전에서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장면들이 방영된다. 해외로 입양됐던 아이들이 부모를 찾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것이다. 자신을 버린 부모를 찾기 위해, 자신의 고국이 어떤 나라인지,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어서, 이 나라는 왜 ‘나’라는 사람을 버렸는지 묻기위해 해외입양아들이 대한민국의 땅을 밟는 것이다.
홀트아동복지회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매년 4천명의 아이들이 입양절차를 밟고 있는데, 이중 해외로 입양돼 대한민국을 떠나는 아이들이 2천 4백 명이다. 이렇게 해서 6.25 이후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만 15만 2786명이다.
1953년 6.25가 끝나고 나서도 우리는 한동안 전쟁을 계속해야 했다. 피해를 복구하고 삶을 전쟁 이전으로 되돌리기까지, 군대가 아닌 민간인들의 삶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회복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이번 호 ‘사람사는 이야기’에서 만난 장애우 김종대씨의 삶이 그렇다. 6.25전쟁의 뒷이야기와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또다른 전쟁의 시작
김종대씨의 삶은 다른 이들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그런 평범한 것이었다. 원주에 있는 사돈댁에 기거하면서 농사를 짓는 그저그런 농사꾼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뀐 것은 뒷산에 올라갔다 당한 폭발사고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런 일이 잦았다. 6.25때 쓰였던 폭발물 가운데 상당수가 불발탄으로 터지지 않고 묻혀 있다가 터지기가 일쑤였던 것이다. 군대에서 수거를 한다고 했지만 땅속에 박혀있는 불발탄들을 전부 수거하기란 불가능했고 그 피해는 컸다. 김종대씨 역시 그런 피해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는 치료라는 것도 없었어. 그냥 다친 팔을 절단하고 나왔지. 그래도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이고 살았지”
김종대씨는 사고를 당하고도 병원신세를 진 건 고작 하루였다. 오른쪽 팔을 잃고 왼쪽 시력을 잃어버렸지만 하루 만에 병원에서 퇴원했고 몸을 추수린 건 사돈댁에서였다. 말이 병구완이지 그냥 방에서 쉬는 게 고작이었다. 
사고로 팔과 눈을 잃고 나서 김종대씨는 원주를 떠났다. 그를 장애우로 만든 그곳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객지로 떠난다고 하니까 마을 사람들이 쌀을 모아줬어.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라 돈은 없고 그러니까 쌀을 모아준거지. 사돈댁에서 보태준 것까지 하니까 일곱말이 되더라고. 그걸 돈으로 바꿔서 무작정 원주를 떠났어”
그의 유랑생활을 그렇게 시작됐다.
원주를 떠나 정착한 곳은 신남이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김종대씨는 고물장수로써의 삶을 시작했다. 엿판을 들고 다니면서 병이나 고물과 바꿔주고 다시 그걸 가져다가 고물상에 넘기는 일을 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병하고 고철이 귀했으니까, 배운 것도 없고 장애까지 가진 내가 별 수 있나. 병하고 고물을 고물상에 팔아서 돈을 마련하고 다시 그 돈으로 고물상에서 파는 싼 밥을 사먹으며 살았지.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사는, 그런 삶을 살았지”

  ‘억지’하나로 버텨 온 삶
신남에서 강원도 철원으로 옮기면서 김종대씨는 결혼을 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의 소개로 시각장애를 갖고 있던 유월자씨를 만나 가정을 꾸린 것이다. 그러나 김종대씨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간혹 할어버지나 아버지들로부터 6.25전쟁 이후의 삶이 어떠했는지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그렇게 힘든 삶을 살았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데, 부부가 다 장애우인 김종대씨의 살림은 말해 무엇 할 것인가.
철원에서도 김종대씨는 비무장지대 내에서 나오는 고물들을 사다가 파는 고물장사를 했다. 비무장지대에는 탄피와 이런저런 고물들이 많았지만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1년 중에 몇 달 농사를 지으러 들어가는 농부들에게는 허가증이 나왔고, 농사를 지으러 들어간 농민들은 군인 몰래 고철들을 들고 나왔다. 김종대씨는 그걸 사다가 고물상에 팔았던 것이다. 엿판을 들고 돌아다니던 수고를 덜하게 된 것만도 다행이었다.
“별일 없이 잘들 들고 나왔는데 간혹 군인들한테 들켜서 뺏겼다는 소리도 들리곤 했어. 그래도 부업삼아 농사지으러 들어간 사람들이 땅에 파묻어 놨다가 가지고 나오기도 하고 숨겨서 나오기도 하고… 잘들 가지고 나왔지”
김종대씨는 그곳에서 큰딸 명희씨를 얻었다.
“비무장지대의 고물도 그렇고, 고물이라는 게 끝없이 나오는 게 아니니까. 다른 직업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했지”
그러나 김종대씨의 생활이 인천에서라도 달라질 것도 없었다.
“월세가 5백 원 하던 때였는데, 인천에 딱 내리니까 손에 8천원이 있더라고. 그걸로 인천에서의 생활을 시작했지”
인천에서 김종대씨는 배에서 육지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하역작업을 했다.
“인천항에서 쌀가마나 설탕을 짊어지고 나르는 일을 했는데, 100kg짜리를 옮겨야 하니까 비장애우들도 힘들다고 다 나가떨어지더라고. 그러니 장애를 가진 내가 느끼는 힘들기야 오죽했겠어. 나야 살기위해서 억지로 했지.”

‘수지 싫어’외치는 딸 때문에 입양보낼 결심해
비장애우들도 힘들어하는 일을 ‘억지’와 ‘오기’하나로 했지만, 살림은 제자리걸음도 안됐다. 몫돈이라도 조금 만들어 볼 심산으로 계를 들기도 했는데 계주가 도망가기 일쑤였다.
“지금이야 돈이 생기면 은행에 넣어놓지만, 그때는 어디 그랬나. 계를 들었다가 날리기도 하고 잘 놔둔다고 집안 어딘가에 숨겨놨다가 도둑맞기도 하고 그랬지”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육지까지 배가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도크가 인천항에 생기고 나자 힘들기만 하던 일자리도 사라졌다.
“도크가 생기고 나니까 장애를 가지고 있는 나부터 해고시키더라고.”
IMF 이후 정리해고의 바람 속에서 제일 먼저 해고대상이 됐던 사람들은 장애우와 여성들이었다. 지금도 그러니 옛날이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막상 김종대씨가 일자리를 잃고 나자 집안의 생계가 막막해졌다. 부인 유월자씨가 벽돌을 지고 나르던 일을 하기도 했지만, 여자 혼자 막노동판을 쫓아 다니며 버는 수입이 오죽했을까.
결국 김종대씨 부부는 ‘양친회’라는 곳을 통해 막내딸을 해외로 입양시킬 결심을 했다.
“그때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정부에서 나눠주는 밀가루로 만날 수제비를 해먹고 살았는데, 3살 밖에 안 된 막내딸이 ‘수지 싫어. 수지 싫어’하는 거야.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 얼마나 수제비가 싫었으면… 그래서 ‘너라도 배불리 먹고 살아라’하는 생각에서 막내를 입양 보낼 생각을 했던거지”
간혹 텔레비전에 나온 입양가족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많이 듣게 되는 이야기다. 워낙 배고프고 먹을 게 없던 시절이라 ‘먹을 것이라도 배불리 먹어보라’고 입양을 보내는 일이 그만큼 흔한 일이었던 것이다.
3살 된 딸 김인숙씨를 입양 보내고 나서 가족들은 군인부대가 옮겨가고 난 건물에 들어가 살았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곳에서 고물상을 다시 시작했다. 부인이랑 둘이서 고물상을 운영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유리가 귀했으니까 모아 온 유리조각들이나 병을 색깔별로 모아서 가져다 팔았지. 죽은 집사람한테는 너무 미안한 게 많아. 딸까지 입양 보내고 어려운 시절에 고생만 하고 살다가 암으로 죽었으니까”
부인 유월자씨는 90년 겨울 암으로 3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다가 끝내 막내딸의 얼굴도 못 본 채 생을 마감했다. 둘째딸 인영씨의 결혼날짜도 받아놓은 상태여서 죽는 이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제 엄마를 닮아서 얼굴이 갸름해”
“그래도 애들이 착해서 많이 도와 줬어. 고물상이라고 운영을 하고는 있지만 집사람이 죽고 나자 어디 전화라도 받아줄 사람이 있었나. 큰애도 그렇고 다들 집안일이며 가게일이며 도와줬고 힘들다고 불평도 안하고, 정말이지 애들이 착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그럭저럭 살림을 꾸려 제대로 된 집도 한 칸 마련했다. 아이들도 잘 자라 그 어렵다는 IMF 여파에도 어려움 없이 직장엘 다녔다. 그리고 나니 이제 김종대씨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폭발사고로 왼쪽 눈에는 의안을 했는데, 그나마 남은 오른쪽 눈에 녹내장이 생긴 것이다. 수술을 몇 번 했지만 여전히 실명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을 갖고 살아가야만 한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아마 밖에서 만나면 못 알아볼걸. 희미하거든. 이제 실명할 날만 기다리면서 사는 거지”
집안 마루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을 가리켰지만 정확히 보이지 않는 듯했다. 키가 제일 큰 남자가 누구냐고 물을 때야 둘째사위라고 대답했다. 김종대씨는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에 입양 간 인숙씨를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겼다.
“입양 보낸 따님이 보고 싶으셨겠어요?”
“그럼 한시도 잊혀지질 않지. 온다고 할 때도 와야 오나보다 했어. 믿어지질 않았으니까. 그런데 정말 왔더라고.”
“어떤 때 가장 보고 싶으시던가요?”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지. 내 죄 때문에 마누라는 고생만 하다가 저세상 갔고 딸아이는 생사도 모르고 지냈으니까”
“그렇다 30년 만에 만나셨으니 반가우셨죠?”
“그럼 말이라고”
“공항에서 보니까 알아보시겠던가요?”
“얼굴이 동그스레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둘째딸하고 똑같이 닮았던 걸. 나나 아들아이는 얼굴이 둥근데, 제 엄마랑 둘째랑 막내는 얼굴이 길고 갸름하더라고. 운동을 했다고 하더니, 그래서 그런지 팔이 나보다 더 두껍고… 하여간 밝고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마웠어”
“어머님 무덤에서 인숙씨가 울죠?”
“울긴… 한국에 온 다음날로 갔는데, 인숙이야 덴마크로 입양가서 그 나라 사람 다 됐지. 한국말도 못하니까 대화도 안되고…”
“아버님은 우셨어요?”
김종대씨는 쑥스러운지 웃어보였다.

  “내년에나 손자 데리고 다시 온다고...”
인숙씨 역시 한국에 있는 가족을 찾아 볼 생각으로 자신의 입양기록을 조사 했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인숙씨가 찾아본 서류에는 주워 온 아이를 입양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종대씨 역시 백방으로 인숙씨를 찾았다. ‘양친회’를 통해 보냈던 경기봉사회에도 엽서를 보내봤지만 소식이 없었다. 중간 역할을 한 곳이 사라졌으니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만남의 연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이뤄졌다.
평생 입양 보낸 막내를 못 잊어 하는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 둘째 딸 인영씨가 방송국에 사연도 보내고 인터넷에도 올린 것이다. 그 사연을 전해들은 덴마크의 고태정씨와 이미림씨의 신원보증을 해줬고 인숙씨를 찾을 수 있었다. 인숙씨는 덴마크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컴퓨터 관련 사업을 하는 남편 닐스씨를 만나 15개월 된 아들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인숙씨가 놓고 간 가족사진을 보며 김종대씨는 할어버지로서 손주 자랑을 잊지 않았다.
“정말 예쁘지? 내년이나 후년쯤에 한번 들어온다고 했는데 그때 데리고 온다고 했어. 너무 어려서 이번에는 못 데리고 왔다고…”
‘영어도 배우셔야 겠어요’하는 말에 김종대씨는 꽤 진지하게 대답을 했다.
“그러게 말야. 근데 눈이 침침해서… 첫날은 통역해 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어디 경황이 있었어야지. 애들은 그래도 영어로 몇 마디 묻기는 하던데…”
인숙씨가 머물 동안 뭐하나 제대로 못 물어본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이제는 편안한 삶이기를…
인터뷰 내내 김종대씨는 자신을 자책했다.
“낳기만 내가 낳았지 부모라고 말하기도 미안하고 후회스럽지만,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

 
어. 잘 자라줘서 고마울 뿐이지”
김종대씨는 어려운 삶을 산 장애우다. 6.25 전쟁의 뒤끝에 장애우가 됐고, 원주를 떠나면서 평생 16번의 이사를 다녔다. 가난이 무서워 막내딸은 해외입양을 보냈고, 그의 부인은 암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노년기는 여한이 없다고 한다. 젊어서 힘들었지만 자식들이 잘 자라 제몫을 단단히 하면 생활하고 있고, 해외로 입양 보낸 딸도 시력이 남아있을 때 찾았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인터뷰다 뭐다 해서 여기저기서 청탁이 많았던지, 김종대씨는 ‘어지간히 할 이야기는 다 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끝맺었다. 구구절절한 삶의 이야기 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지도 않고, 애써 변병하지도 않았다.  
아직도 2천 4백 명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고 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아이들은 매년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국을 방문하지만, 결국 실망하고는 자신을 키워준 나라로 돌아간다. 과연 이 고리는 언제나 끝이 날 것인가.집 밖에서 사진 몇 장 찍자는 말에 김종대씨는 생활한복을 차려 입고 나왔다. 인숙씨를 만날 때 입으라고 큰딸이 사온 옷이란다. 비록 힘든 삶을 살았지만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복처럼 이제 그의 남은 생이 편안하고, 입양된 아이들이 인숙씨처럼 밝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만을 바랄뿐이다.

글 서현주 객원기자
사진 정선아 객원사진기자


 

작성자서현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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