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사람]“결국은 사람의 힘이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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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경 일본 사회는 비주체적인 일미조약 체결 사건을 계기로 온통 사회운동에 대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당시 일본 학생운동은 80년대 우리나라 상황과 비슷하게 가장 선두에서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단위였다.
이후 그 때 문제의식을 갖던 청년학생들은 환경, 지역자치, 평화, 국제원조 등 자신이 원하는 활동으로 운동을 이어가는데, 여기 장애운동의 한 길에 반평생을 살아온 한 남자가 있다.
바로 사이또 겐조(55세, 일본 나고야 장애우공동사업소 왓빠 운영) 씨. ‘일본 장애우 차별과 싸우는 전국공동체연합(이하 공동연)’의 사무국장이기도 한 그는 ‘장애우의 일을 통한 자주적 삶’이란 화두에서 한치의 벗어남도 없이 살아온 인물로 주변에서 평가받고 있다.
그와 장애운동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이또: 대학교 1학년 때였죠. 1969년이었고, 19살이었습니다. 친구를 통해 프랜즈인터내세널 워크 캠프라는 자원봉사 성격의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 장애우 수용시설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아, 이런 곳이 있다니’하는 생각이 들었고, 산속에 그렇게 고립되어 살고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건 사람이 사는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건 온전한 격리였거든요. 그 때 일본은 철저히 분리수용 정책이 중심이었는데, 제일 작은 규모라 해도 100여명이 넘는 규모였어요. 학생운동이 고조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인지 산속에 분리되어 있는 게 보통사람들이 사는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오기 충분했죠.
▲지난 9일 기획예산처 앞에서 '장애우 노동권 쟁취!일반예산 확보를 위한 결의대회'가 있었다. 이 집회에 참석했던 사이또는 ˝장려금 축소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한국에서 일본에서 아시아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장애우 노동권 확보를 위해 같이 투쟁하자˝고 외쳤다. |
사이또: 글쎄요, 동네와 너무 떨어져 있는 것은 좋은 게 아니다. 일할 수 있는 곳, 생활할 수 있는 곳을 만들면 그런 곳에 가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1년 후에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데, 막상 돈이 필요한 거예요. 당시 ‘장애우의 생활과 노동의 미래를 위한 지원과 연대’라는 소조직을 만들어 장애와 관련된 글과 원고들을 모아 자료집을 만들었습니다. 작은 책자였는데, 제목은 ‘거점’이었구요. 그러니까 아마 장애우들도 함께 살 권리가 있는 인간이다, 지역사회에서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거점이라고 한 거 같아요. 시내 목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판매했는데, 당시 일본은 사회운동이 물결처럼 일어나고 있던 때라 모두들 거리에 나와 자기 주장을 자유롭게 펼쳤거든요, 자리싸움도 만만치 않았어요. 그래도 우리는 좋은 위치를 먼저 차지해서 판매를 시작했는데, 한 권에 100엔이었던 자료집을 10만권이나 팔았습니다. 지금 보면 시시하고 장애와 관련된 시, 글, 논문 등을 그냥 모아본 수준에 지나지 않죠.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고, 뭔가 공동체적 삶을 구현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주장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함께걸음: 대학교 1학년때 그런 활동을 하셨다고요?
사이또: 네, 그렇죠. 차별적 환경을 개선한다기보다는 지역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목적의식성이 훨씬 강했어요. 그래서 시가현으로 나왔죠. 아라쿠사(잡초)라는 공동체를 처음 만들었는데, 동아리 친구들과 지역에 있는 장애우, 시설에 있는 장애우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또 공동체 만드는데 돈을 다 써버렸어요. 저는 사정상 직접 살지 않고 나고야에서 지원했는데, 자금을 모으기 위해 1970년 ‘희망연합’이라는 것을 조직하고 15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결성대회도 열었죠. 그러나 결국 1년 후에 해산했습니다. 성공하지 못한 거죠. 장소가 너무 시골이라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상황이 아니었고 별 뜻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나고야 시내에 만들기로 했죠. ‘왓빠’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1971년도의 일입니다.
함께걸음: 그럼 학교는 졸업했나요? 대학 내내 중증장애우는 시설에서 살면 안된다, 그런 화두를 갖고 활동했는데, 공부는요?
사이또: 물론 대학은 중퇴했죠. 거의 다니지 않았습니다.
함께걸음: 장애우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서 생활하던 때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세요.
사이또: 아라쿠사 공동체는 1년 만에 해체했죠. 정신지체, 정신장애, 신체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했는데, 부모나 시설운영자의 동의를 얻고 데리고 나온 겁니다. 그 후 지금의 넷코사업장, 감바따사업장, 왓빠사업장(일본 공동연 소속으로, 일을 통한 자립생활을 주요목표로 하고 있다) 등으로 확장된 거죠. 중간에 돈이 전혀 없어서 운영이 어렵게 되었지만 방법을 찾았습니다. 처음엔 친구에게 돈을 꾸어 집 하나를 빌려 공동생활을 시작한 겁니다. 그게 왓빠예요. 3명으로 시작했죠. 저, 비장애우 친구, 장애당사자. 처음은 말 그대로 공동생활만 했어요.함께 사는 것만으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 출발한 거죠. 그러다가 좀 더 지속하기 위해서는‘일터를 만들자’고 의견이 모아졌고, 각자 돈을 모아 작은 공장을 통해 부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거 있잖아요, 집에서 주부들이 하는 소일 같은 거. 하지만 그것으로 약간의 생활비는 해결이 되어도 생계를 이어가기는 곤란했어요. 또다시 후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지게 된 것이죠.
함께걸음: 단 한번 시설을 방문하고 나서 시작한 일치고는 실천이 매우 구체적인데요.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해오고 있잖아요. 동기나 이유가 더 있을 것 같은데요?
사이또: 처음부터 장애우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 일반 시민처럼 살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죠. 시민들에게 실상을 알리고 모금활동을 하면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한 뭐가 있는 게 아니라, 공동체운동은 그냥 갈 수 밖에 없는 내 삶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학생운동으로는 안된다, 시민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모든 차별, 불평등과 싸워야 하는데, 그 중 장애문제가 참 심각하다고 생각했죠. 70년대 초반이 일본 장애운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서로 어울리며 잘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함께걸음: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일본 사회가 활기차고 사회운동이 전반에 퍼져있을 때의 장애운동 현실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사이또: 그러다가 시설이나 학교를 졸업하는 장애 당사자들이 자각하기 시작했고, 스스로 차별을 이야기하고 억압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죠. 그 때 마침 일본에서는 어머니가 장애를 가진 자식을 죽인 사건이 큰 파문을 일으켰어요. 그 이유는 재판부가 죄를 묻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그 때 장애 가진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어머니여 자식을 죽이지 마라” 라고요. 그 이후 푸른잔디회 같은 자조모임이 지역마다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죄를 묻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해 사회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걸 주장하는 장애우들이 정당하다고 인정 된거죠. 양호시설에서의 인권침해 사건도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당사자뿐만 아니라 시민단체에서도 함께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이 두 가지 사건이 일본에서 중증장애우 당사자 운동이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요, 70년대 접어들어 여기저기서 스스로 자립생활하자는 운동, 일터를 만드는 운동, 통합교육 운동이 동시에 퍼져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때 장애우들이 어떤 문제에 처해있는지 모든 것이 드러났다고 보여집니다. 개인문제로만 치부되다가 그것이 사회구조적으로 양산되고 차별받아도 되는 사람, 격리 되어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진 것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된 거죠. 아직 문제가 많아도 결국 제도로 인정받게 된 부분이 있는데, 이것 역시 30년 이상 걸렸어요. 아직 멀었습니다.
함께걸음: 차별철폐 운동의 일환으로 왓빠라는 공동사업소 운영을 가장 중심에 두고 있는데, 왓빠는 어떤 의미인가요?
사이또: 왓빠를 만든 목적은 차별은 없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였습니다. 차별을 고발하고 함께 잘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운동이죠. 처음에는 장소를 정하고 일하는 것보다 고발하는 것에 치중했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할 과제가 되더군요. 돈이 없으니까 일터를 통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어요. 나고야 시측에 집을 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법인이 아니니까 물론 거절당했죠. 그래서 단식투쟁을 했습니다. 모두 6명이 참여했는데, 당시로써는 강력한 결의 수준이었어요. 48시간 동안 단식을 하는데 한 친구는 못한다고 하더군요. 시장이 처음으로 나와서 몸이 안좋으니 하지 말라고 하기도 하고 관심을 갖는 듯 했지만 이내 15분 정도 그 말하고서는 가버렸습니다. 그 때 “도망가지 마라”고 외치기도 했는데…. 결국 시장은 운영비는 지원하겠노라고 밝힐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문제는 직업훈련에만 지원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아갈 곳이 필요하다. 훈련이라는 것은 필요없다”고 맞섰죠. 당시만 해도 전국적으로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동등한 관계에서 일하는 사업장이 별로 없을 때였습니다. 결국 나중에 ‘공동생활작업사업’이란 이름으로 예산을 지원받았고 그 돈은 전혀 쓰지 않고 저금했습니다. 훈련이 아니라 장애우들이 함께 참여해서 일하는 곳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결국 그 돈을 모아 우리 장소를 만들게 되었고, 이후에는 보다 안정적으로 일할 기반을 갖추게 되었죠. 그 동안은 하청일 중심으로 일을 하다가 그걸 그만두고 스스로 만들고 판매하는 일을 시작하게 됐고, 나중에 국산 밀가루를 사용해서 무공해 빵을 만들어 판매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함께걸음: 그 동안 장애 운동을 해오면서 힘든 순간이 많았을 텐데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는지
사이또: 힘든 순간은 많았지만 단 한 번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볼 때 장애우 문제는 사람으로서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자유, 평등이 중요한 이념이라 할지라도 장애우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장애우는 결국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게 문제라는 거죠. 환경문제에도 장애문제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환경운동 하는 사람들 장애문제 잘 모릅니다. 그렇다고 환경운동 하는 사람들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장애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결국 자신이 장애우들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사람의 인간성, 가치관이 관건인 거죠.
함께걸음: 그 동안 짧지 않은 교류를 통해 한국의 장애우 운동에 대해 알 수 있었을 텐데,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나요?
사이또: 한국의 장애우 운동은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9월 9일 기획예산처 앞에서 고용장려금 축소 반대 집회가 열렸다)에 재밌다고만 이야기했는데, 일본은 현재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20년 전 까지만 해도 익숙한 풍경이었는데, 한국의 장애 운동이 원하는 것은 이 힘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것일 것 같은데, 그 점에서 저는 한국의 장애 운동이 일본을 따라하면 힘이 약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처음 일본 역시 미국을 따라 갔습니다. 미국의 발전, 풍요, 그것들을 보고 열심히 따라가자고 했는데,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장애운동은 일본의 장애우정책 중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에 대해서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고 보는데, 지금 한국이 연금제도를 가장 주요한 이슈로 잡고 정부측에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하지만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그런다고 장애우 차별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설을 만든다든가, 특수학교를 설립한다든가, 베리어프리라는 명목하에 토목공사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는데, 그 결과 중요한 인간관계나 사람들의 마음이 없어졌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장애우들은 훨씬 더 사회와 분리되어, 장애우는 장애우, 비장애우는 비장애우, 그들만의 문제로 치부되고 있죠. 따라서 한국의 장애 운동은 지금의 힘을 소중히 해서 좋은 관계, 정책을 만들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건 본질이 아니며, 목표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에서 연금을 주장하는 것이 현실 인식으로 봤을 때 틀린 것은 아닙니다. 연금제도가 한국에 없다는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장애우는 경제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일본은 7-8만엔 정도의 연금이 지급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돈이 진짜 장애우들이 쓸 수 있는 돈인가 하는 거죠. 장애우 본인 이름으로 연금이 나오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구좌를 본인이 관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쁜 경우 부모가 쓰거나 저축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연금과 장애우들이 일해서 버는 돈의 관계를 처음부터 명확히 규정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연금이 아닌 것이죠. 장애우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하며, 경제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기초 틀을 언제나 함께 제기해야 하는 거죠. 현재 일본은 일을 하게 되면 연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생활보호비가 나올 뿐이죠. 제 주장은 무조건 연금을 주장할 게 아니라 장애우들의 소득보장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고민하지 않으면 장애운동은 힘을 잃고 안주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함께걸음: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이또: 한국에서 법률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헌법으로 결정하는 것보다 헌법 밑의 법률과 법률은 아니지만 국가공무원이 결정하는 것이 더 큰 효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별금지법이 있어도 그 외 법률, 지침 등에서 모순이 있으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스템입니다. 일본도 지금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이 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데, 차별금지법의 목적은 장애우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지만 차별은 결코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 ADA에 고용차별 규정이 있지만 이 법률이 미국 장애우의 취업에 도움이 되었느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일하는 장애우는 혜택을 볼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취업의 기회를 박탈당한 장애우는 해당사항 없음 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무엇이 차별이고 권리보장인가라는 점을 명확하게 해야 하는데, 장애우들이 특수학교에 가는 것이 권리보장이며 교육을 충분히 받는 것이라 생각하면 차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특수학교 자체가 차별이기 때문이죠. 또 하나 예를 들면 이탈리아에는 사회적 협동조합에 관한 법과 제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장애우 작업장의 수준이 일본보다 높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공동연의 작은 작업장보다 못합니다. 즉 법률이나 제도가 있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내용을 만드느냐가 중요한 거죠. 장애우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가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과 제도를 통해 국가가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합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을 해나갈 수 있는 사람의 힘이 중요하다는 걸 빨리 깨우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현재 한국의 장애우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일본의 장애우들은 차별금지법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차별금지법이 없어도 자립생활 지원과 연금제도 때문에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기 때문이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는 있는 상황인데, 이 조건이 없을 때 차별금지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부연하자면 일본의 장애우정책은 ‘보호’가 중심입니다. 차별금지법의 기본정신이 장애우와 비장애우는 동등하다 라는 입장이라면 일본은 기본법부터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저는 일본도 그렇지만 한국도 서구처럼 시민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모, 가족, 지역이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개인이 독립된 개체로 이해 받는 서구와는 상황이 다른 거죠.
함께걸음: 지난 7월호 함께걸음 좌담을 통해서도 언급했지만, 나이 많은 일본 활동가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이또: 일본은 1960년대 말 경 장애운동만이 아니라 시민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 됐습니다. 미국 일본 안보조약 반대, 학생운동 등, 운동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약해졌지만 당시 주체들은 국제원조, 환경, 장애 문제 등에 집중해서 각기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일본의 시민운동의 고민은 지금 40대 중반 이전의 활동가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젊은 세대, 젊은 후배들이 뒤를 잇지 못하고 있는 거죠. 세대교체가 잘 안 되었고, 20대가 선배들의 운동방식을 받아들이고 운동을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고 있다는 데 고민이 있습니다.
좌담, 정리 홍여준민 기자
사진 조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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