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사람] 대통령 자문기구 고령화 및 미래사회위원회 김용익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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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건강연대, 건강세상네트워크 등 진보적 성향의 보건의료 단체를 조직하고 참여한사람,
보건의료의 문제가 우리들의 삶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건강한 삶’의 주요한 기반이 됨을 사회적 책임 하에 풀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 보건의료는 지역 안에서, 주민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기본’을 이야기하는 사람,
보건소와 공공병원을 확대해 의료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시민사회계에서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보건의료의 문제와 대안을 속 시원히 밝혀주던 사람,
한국 사회 보건의료정책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던 의료보험통합과 의약분업 실시라는 큰 과제를 수행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오히려 의사 동료들로부터 ‘사회주의자’라고 비난받았던 사람,
김용익 교수(52세, 서울대 의료관리학교실 현 대통령 직속 ‘고령화 및 미래사회위원회’위원장)
그를 만나, 의사로서의 철학과 정책입안자로서 고민하는 현안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이야기 하나, 보건의료인으로서의 김용익
함께 : 우선 가볍게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해주세요. 아버지, 숙부, 형님이 모두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계신데, 그런 속에서 소아마비 장애를 갖게 돼서 가족들의 충격이 크지는 않았나요?
김: 3살 때였어요. 55년도였으니까 한국전쟁 직후였죠. 그 당시에는 전염병이 아주 많을 때였어요. 소아마비도 일종의 전염병인데, 경로는 잘 몰라요. 감기 같이 오다가 심하면 신경까지 마비되기도 한데, 그나마 조기에 발견해서 다행이긴 했죠. 제가 몸이 약했는지 어려서는 결핵도 걸렸어요.
함께 : 그래도 집안 경제사정이 어려운 편은 아니니까 그리 고생은 하지 않으셨겠네요?
김: 물론 밥은 안곯았죠? 하하. 아마 당시로서는 유복하게 지낸 편일텐데, 전북 익산 금마라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실은 얼마 전 서울지역에 있는 초등학교 동기들이랑 밥 한번 먹으려고 연락이 되었는데, 글쎄 은사님을 비롯해서 20여명의 친구들이 다 모인 거예요. 근데 흥미로웠던 것은 친구들이 기억하는 저 김용익이 어땠는지 아세요? 가슴이 뜨끔했어요. 대체로는 그저 얼굴 하얗고 이쁘고, 하하 나도 어려서는 이뻤거든? 그리고 다리를 약간 절었던 아이라고 기억할 줄 알았는데, 다들 우리 집에서 흰쌀밥 먹던 거, 어머니가 따주신 포도 먹던 거, 특히 제가 가죽 가방을 메고 다녔던 걸 기억하는 거예요. 제 기억 속에는 그게 크게 남아있지 않은데…. 당시에는 다들 보자기를 책가방 삼아 다녔어요. 여준민 기자 알아요? 이렇게 보자기에 책을 넣고 등 뒤에 매서 어깨랑 허리 밑으로 엇갈리게 묶는….
함께 : 요즘은 그런 방식으로 메는 배낭이 또 유행이기도 해요.
김 : 하하, 그래요? 암튼 그 때는 다 보자기였는데, 저만 유독 가죽가방이었대요. 친구들은 김용익 하면 그게 먼저 생각난다고 하네요.
함께 : 그래서 말인데요, 어쩌면 그렇게 고생도 모르시고 곱게 자란 분이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줄곧 현장을 떠나지 않으셨나 하는 점이예요. 어느 자료에서 보니 내내 빈민지역에서 의료활동을 하시면서, ‘지역 속으로’를 외치는 지역사회의료라는 것에 매달리셨다고 하는데요.
김 : 내가 71학번이예요. 본과 1학년 때부터 매주 서울지역의 판자촌을 다니며 진료활동을 했고, 방학 때는 농촌봉사활동을 갔지요. 녹색병원의 양길승 원장이 의과대에서 운동권 1세대라고 한다면, 제가 그 뒤쯤 되겠죠. 지역사회의학이라고 하는 것은 60년대 진보운동이 한창이던 미국에서 먼저 나왔어요. 의사들이 지역사회에 들어가고 지역주민들을 임파워먼트(역량강화)해 한다, 건강문제에 대해 지역주민들이 자기주도성을 갖고 의사들은 도움을 주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 치료보다는 예방, 뭐 그런 주제들이 결합된 개념입니다. 이후 중남미에도 퍼졌고, 우리나라에서는 1969년 의료선교사인 시블리(John R.Sibley)가 거제도에서 처음 실시하기도 했었죠. 시블리는 거제도에서 지역사회개발보건원을 만들어, 주민 참여, 의사가 아닌 보건요원 활용 등을 시도했었습니다. 이후 서울대, 연세대 등이 받아들여 추진하기도 했었죠.
함께 : 여하튼 보건의료 운동이라고 해야 하나요? 보건의료의 문제를 의사라는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개혁과제들을 끊임없이 사회에 주장하셨는데요.
김 : 저와 같이 대학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죠. 88년 봄에는 농촌지역 의료보험이 도입되었는데 너무 비싸고 불평등한 것이 문제가 되었어요. 인의협이 창립되고 난 후 2,3년 후였는데 정부가 국고보조 50%를 지원하던지 조세로 하던지 의료보험을 통합하라고 주장했었죠. 당시 의료보험발전위원회라는 것도 있었지만 ‘통합’이란 말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과격한(?) 주장이었죠. 하지만 우리는 내내 통합일원화를 주장했고, 더 나아가 시민사회단체, 노동운동단체들과 함께 의보연대회의를 만들어 중대한 사회적 과제임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98년도부터 의료보험이 통합될 수 있었던 거죠.
함께 : 보건의료운동이 일련의 흐름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근래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의료생활협동조합 운동 또한 내 몸의 주체는 바로 ‘나’라는 주체의 문제를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있는데요.
김 : 운동마다 주체론이 문제죠? 하하. 근데 처음에는 지역주민의 ‘참여’라는 용어로 접근했어요. 참여라는 것이 좀 애매한 개념이기도 하지만 주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시대적 상황도 아니었죠. 이야기가 좀 길어질지 모르겠지만 역사가 있어요. 1965년대 중국에서 모택동이 주창한 것이 있는데, 바로 ‘베어풋 닥터(barefoot doctor)’, 즉 맨발의 의사라는 개념이었어요, 당시 모택동은 대부분의 민중이 국가로부터 보건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특권계층에게만 몰려있다며 의학교육의 개혁을 주장했지요. 그래서 농촌에 마을건강요원을 거점으로 해서 지역사회 모든 곳에 침술이나 약초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을 훈련시켜 기초적인 보건의료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든 겁니다. 자신이 몸의 주체이며 보건과 건강의 일차적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가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이후 이 관점은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쳤고, 여기서 일차보건의료(Primary Health Care, PHC)라는 말이 출발한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세계적으로는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해서 신생독립국들이 많이 생겨나던 때였어요. 그런 나라들은 의사도 병원도 없었기 때문에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이 같은 시스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의료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후 1978년 전 세계 모든 보건장관들이 참여한 가운데 ‘알마아타선언’이 있었는데, 2000년까지 가능한 모든 인류가 건강한 삶을 살도록 각 국가의 정부는 책임있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것이 바로 “2004년까지 모든 인류에게 보건을 (Health for All by the Year 2000)” 입니다.
함께 : 의사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대표적인 전문가집단인데요, 그래서 보상심리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위원장님은 대학 때부터 빈민지역 진료활동을 시작으로 최근까지도 바람직한 의료정책을 만드는 활동을 하셨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일관되게 ‘의료불평등 해소’를 중심에 두고 살아오셨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가요?
김 : 아까도 잠깐 언급했지만, 당시 거제도에서 지역사회보건의료라는 것을 닥터 시블리를 통해 실험하고 있을 때, 연세대, 서울대 의대에서도 결합했었어요. 서울대는 망원동 판자촌 지역을 거점으로 했는데, 아 지금도 그 기억이 정말 선명해요. 처음에는 그저 친구가 가자고 해서 갔어요. 근데 똥을 안밟고는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은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이 들어서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곳은 똥을 퍼부었던 곳이예요. 거대한 방죽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늘 그 똥들이 넘쳐서 난지도를 거쳐 한강으로 유입되기도 했죠. 바로 그런 곳에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진료소를 차렸어요. 그곳은 경제발전 어쩌구 하면서 도시 공업화가 이루어지자 농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도시빈민이 되어 하루하루 쓰레기를 주워 연명하는 사람들이 판자촌을 만들어 사는 지역이었어요. 청계천 철거민들은 모두 성남으로 쫓겨나다시피 하고, 모래내 판자촌도 유명했는데, 화정, 행신리 등으로 다 쫓겨났죠, 여하튼 그곳까지 따라가서 주말마다 진료활동을 했습니다. 진료소라고 해봤자 그저 천막하나 달랑 쳐놓고 할 정도로 모든 것이 열악했는데…. 음, 지금 그 사람들, 다 노인이 되었을 텐데 어찌 사는지 참 궁금하군요.
함께 : 실은 요즘 모임만 하면 대화 주제가 ‘건강’이예요. 그런데 자신의 몸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쏟는 건 당연하기도 하고 바람직한 모습인 것 같지만 마음 한 켠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아요.
김 : 건강에 대해 왜곡된 부분이 많죠.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 ‘불로초 컴플렉스’라는 것이 있는데, 어느 것에 영약(靈藥)이 있을거라 생각하는 거죠. 이건 우리나라 의료가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서 그런 측면이 강해요. 건강을 유지하고 증진시키는 욕구는 있는데, 의사들이 교육도 안해주고 합리적인 건강교육을 받을 만한 곳도 없죠. 결국 의료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예요. 또 의료가 전문화, 기계화되어가면서 비인간화되어가는 측면도 있죠. 이로 인해 의료인들은 전문가주의에 빠지게 되구요. 그래서 지역사회의학이 주장될 때 전달체계와 예방, 재활, 이런 모든 것들이 함께 고민되어져야 한다는 포괄성에 대한 주장이 나온 겁니다. 그 때문에 가정의학 같은 것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여전히 의료는 세분화, 전문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인간으로 보아야 하는데, 환자로만 보는 경향, 그러면 치료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거든요. 의사, 치료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이 함께 협의하는 팀 어프로치(team approach)가 시도되고 있지만 아직 약하죠. 지배하려고만 하면 안되는데…. 의약분업 문제에서도 의사들의 지배주의적인 성격이 드러나지 않았어요?
누군가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를 간파할 수 있는 핵심 사안이 ‘의료’라고 말했다. 의료란 현대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련 있는 일이고, 현대과학의 성과는 대부분 의료를 통해서 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본과 결합해 거대 병원을 중심으로 일방적 치료기술로만 발전되어 왔다. 또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몸의 주인으로 목소리를 높이자는 사회 일각의 주장은 거센 저항을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김용익 위원장, 그는 의사로서의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를 한번도 방기한 적이 없는 듯 하다. 몸을 대상화시키지 않고 자연과 사회와 유기적 관계 속에서만 온전한 몸의 치유가 가능하다는, 그래서 나무가 아닌 숲을 봐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의사, 좋쟎아?” 단 한번도 다른 직업을 가질 생각을 해 본적도, 또 할 의향도 없다고 한다. 의사로서의 사회적 책무는 이미 그 안에 확고히 내재되어 있었다.
그가 강조해 온 지역사회의학이란 단순히 의대 커리큘럼에 포함된 교과목 중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을 통해 지역보건의료 문제에 대한 철학적, 이념적 지향을 담아냈고, 의료기술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사회적으로 건강한 삶을 설계하고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책임과 윤리의식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 누구든 땅에 발 딛고 살아야 하며, 모든 사람들이 생활의 주체로서 의료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었다.
의약분업 실시 과정에서 그는 대한의사협회로부터 회원자격을 2년간 박탈당하기도 했다. 시민단체에 참여하고 잘못된 의료정책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내가 잘못한 게 없기 때문에 걱정 안한다”며 단호한 입장을 보이던 그는 명예훼손으로 의협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진행했고, 1천만 원의 위자료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야기 둘, 참여정부 정책입안자로서의 김용익
함께 : 대통령 직속의 ‘고령화 및 미래사회위원회’위원장직을 맡고 계신데, ‘고령화’라는 것은 말 그대로 이해할 수 있지만 ‘미래사회’라는 것은 좀 추상적인 것 같아요.
김 : 우리나라의 인구변동이 급격히 변하고 있지요. 아시다시피 2000년 들어서면서 노인인구가 7.2%를 넘어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지 이미 오래고, 2014년이면 14%, 그러니까 ‘고령사회’로 접어드는 거죠. 그 어느 나라도 이 정도의 속도로 인구변동이 있지는 않았어요. 이는 낮은 출산율과 맞물려서 진행되는 문제인데, 그야말로 우리의 미래사회가 노동인구의 변화로 경제, 복지적 측면에서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예측, 진단하고 지금부터 대안을 모색하자는 것이죠. 구조가 변하면 사회 모든 시스템과 정책이 그 틀에 맞춰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원회는 ‘저출산, 고령화’사회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있지요.
함께 : 이번에 제가 유럽의 몇 도시를 다니며 느낀 것 중의 하나가 ‘아 참 노인들이 많구나, 이들이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있구나’하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농촌이나 종묘공원, 탑골공원 등 특정한 곳에 가지 않으면 ‘노인’을 만나기 참 어렵죠. 계층간 구분이 분명하다는 건 그만큼 차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인데요.
김 : 그건 장애우 문제와 비슷하다고 봐요. 건축과 교통 환경이 신체적 약자들의 접근을 막고 있죠. 그 장벽부터 제거해야 하는데, 아마 곧 우리나라도 그렇게 될 수박에 없을 겁니다. 지금은 상대적으로 젊은 나라에 속해 잘 느껴지지도 않고 정부 정책도 미진하지만 20년 후만 되어도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가 되요. 아마 2050년이 되면 훨씬 늙은 나라가 되겠죠? 그건 바로 노동인구가 줄어들고 대신 국가나 젊은이들이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늘어난다는 겁니다. 나이가 들어도 건강하게 생산적인 활동을 하면서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으면, 단지 ‘돈이 없어서’쓸모없는 사람 취급받게 되고 사회 불균형이 심각하게 될 겁니다. 지금의 상황만 보더라도 가늠이 되지 않겠어요? 한번 보세요. 지금은 1920, 30년대 태어난 사람들이 주로 노인층인데, 그들의 삶을 봐요. 해방을 경험하고, 전쟁을 겪고,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중동에 나가 노동력을 팔고, 먹고사는 것만으로도 허덕대다 노인이 되었는데 노후보장책을 준비 못했으니 경제력은 거의 없죠. 하지만 2010년이 되면 45년생들이 노인 인구가 됩니다. 그러면 분위기는 확 바뀔 수 있어요. 준비된 노인세대가 나오는 거죠. 재산도 있고 교육도 받았고…, 그러면 문화, 경제적 측면에서 주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함께 : 그동안은 우리 사회가 고령화 사회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무척 소홀했고, 단순하게만 바라본 측면이 있다고 보는데요, 인구 구성이 변한다는 것은 사회 근본구조가 바뀐다는 의미 아닌가요?
김 : 그렇죠. 일할 능력이 있는 젊은 세대가 충분하다는 것을 전제로 모든 사회 정책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계속 노동인구가 축소될 것입니다. 국가운영 방식이 전면 바뀌어야 하는 상황이 곧 온다는 얘기죠. 인구구조의 변동은 한국사회 구조를 바꿔 놓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양한 변화에 준비하지 않으면 안돼요. 출산력을 복구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는 단순 계산상 소멸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위원회는 인구학적 변동에 따른 사회적 대응과 복지, 고용인구에 중점을 두고 활동합니다. 여성보육팀, 인구경제팀, 고령화대책팀으로 나누어 전문위원을 두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지요. 고령화 시대라는 것이 단순한 노인인구 증가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자기 역할이 온전히 충실히 이행될 때 해법은 나옵니다. 그런 측면에서, 노인 노동력에 대한 개념도 바뀌어야 하는데, 소일거리가 아니라 생산력을 가져 2차 직업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여성노동력 또한 마찬가지로 국가의 중요한 근간으로 모든 차별적 요소를 제거해 나가야 합니다. 교육도 받았고 자기실현의 의지가 높은데, 보육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죠. 이는 사회적 낭비예요. 육아문제를 국가가 함께 부담해야 남녀가 가사를 분담할 수 있는 진정한 양성평등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보육문제를 국가가 책임있게 가져가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장애우도 마찬가지예요. 기본적인 이동문제를 해결해서 교육받고 직업을 갖고, 보장구를 발전시켜 사회적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은 고령화 시대에 필수적인 과제라는 겁니다. 복지와 노동의 개념은 따로 떨어뜨려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담당부처가 있다하더라도 종합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문제해결에 접근해 나가는 것, 지금이 그 근간을 바로 세워야 할 때입니다.
인터뷰 후기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 출범 당시 진정 제1호로 기록된 제천시 보건소장 임용에서의 장애우 차별사건. 당시 이 사건은 이희원 과장(현 춘천소년원 의무과장)이 장애를 이유로 제천시 보건소장으로 승진되지 못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스승 김용익 위원장이 제자를 대신해 진정을 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잠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자면, 진정 1년이 지나서야 발표되었고, 차별임이 인정되어도 되돌릴 수 없다는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 났었다. 그래서 지금은 행정소송과 민사소송으로 이어져 현재 진행형이 되고 있다. 1심에서 각각 각하와 3,백만원 배상판결을 받았지만, 현재 모두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벌써 3여년이 지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진정을 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먼 제천까지 내려가 1인 시위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기자회견에 나서 부당한 차별임을 강하게 주장했다. 인권위의 결정을 비판하는 토론회에도 참석해, 인권은 법의 감수성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자신의 지위나 명예 같은 것은 뒤로 한 채, 해야 할 사안이 있으면 어김없이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정부에서 제공한 기사 딸린 자동차를 타고 출근할 때면, 마음을 곳추 세우고 흔들림 없이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김용익 위원장.
흔들리는 참여정부에 비판적 시선을 보내는 시민사회계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만, “운동은 어디에서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단호한 한마디로 마무리한다.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에게 한없이 시선을 두었던 그이였기에, 그의 확신은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글 홍여준민 기자 / 사진 조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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