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친근한 장승, 그 미소를 만드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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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 ‘사람사는 이야기’에서 만난 강성철씨 역시 가장 한국적인 것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장승을 만드는 남자-강성철.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옛날 옛날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란다, 한 나그네가 밤길을 가고 있었어. 나그네는 낮 내내 걸어서 산 하나를 넘었왔더니 아주 많이 지쳐있었지.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구덩이에 빠지지만 않았다면 주막에서 따뜻한 밥도 먹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쉬고 있었을텐데… 나그네는 쉴 곳을 찾아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해야 했지.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집이 보이질 않는거야.
나그네가 힘들어서 그냥 산속에서 잘까하는 생각할 무렵이었어,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이지 않겠니. 나그네는 반가운 마음에 부랴부랴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글쎄 마을을 코앞에 두고 무엇에 놀랐는지 나그네가 그만 기절을 했지뭐냐.
다음날 아침에야 나그네는 자신을 놀라게 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단다. 그건…”
할머니가 들려주셨을 법한 옛이야기의 한토막이다.
과연 나그네를 놀라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장승만 봐도 성격을 알 수 있는 남자, 강성철
강성철씨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광주로 출발했다. 흔히들 퇴촌이라 부르는 이곳에 강성철씨가 운영하는 ‘목산공방’이 있기 때문이다. 팔당호로 접어들 무렵, 여느 국도변과 다른 것을 발견했다. 예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세워졌다는 장승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길가에 서 있는 것이다. 마치 ‘환영합니다’는 인사를 하듯이.
언뜻 우리가 떠올리는 장승의 얼굴은 무섭기까지 하다. 마을을 지키고 사람들의 의지가 되다보니 표정부터 근엄할 법하다. 그런데 퇴촌에서 만난 장승은 하나같이 재밌었다. 재밌다 못해 우습기까지 한 장승도 있었다.
나팔처럼 긴 코를 달고 있는 장승. 뺑덕어멈처럼 머리를 틀고 서서 웃는 여장승, 바보스런 웃음을 웃는 머슴장승, 뻐드렁니를 드러내고 웃는 장승, 파이프를 입에 물고 웃는 장승, 각시장승, 혀를 낼름 내밀며 ‘나 잡아봐라’를 외치는 장승, 선녀와 나뭇꾼 장승, 쌍둥이 장승, 윙크하는 장승…
목산공방으로 향하는 차도 옆으로 이렇게 다양한 장승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직 그를 만나지는 않았지만 장승만 봐도 강성철씨가 근엄하게 무게잡는 사람이 아니란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강성철씨가 만든 장승을 보고, 강성철씨를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장승이 그를 닮았다’고 말한다. 활짝 웃는 모습은 정말 그렇다. 조금은 과장된 이와 광대뼈, 천진한 웃음을 가진 그의 장승들은 한결같이 강성철씨를 닮아 있었다.
“옛부터 마을을 지키던 전통적인 모습의 장승도 만들지만, 전 우리 이웃같은 장승을 만들고 싶어요. 이웃사람처럼 친근하고 누구나 부담없이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장승이요”
강성철씨가 처음 장승을 접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삼촌이 강성철씨를 데리고 고 이방자 여사가 운영하는 명휘원에 데리고 간 것이 계기였다. ‘내일은 푸른하늘’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다가 명휘원에서 기술을 배울 학생을 모집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삼촌은 강씨에게 기술이라도 배우게 할 요량으로 명휘원을 찾았던 것이다. 그곳에서 강성철씨는 처음 장승을 봤다.
“직접 본 건 처음인데 무섭지가 않고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그곳에서 수업을 듣던 학생들이 만든 장승이었는데, 참 좋더라구요”
흔히 말하는 ‘작품’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장승을 배운 사람들이 만든 것도 아닌데, 고작해야 학생들의 수료작품에 ‘뿅’ 간걸 보면 장승과 강성철씨의 인연도 깊은 듯하다.
삼촌은 장애우에다 별다른 기술도 없는 강씨가 걱정된 나머지 전자제품 수리기술이라도 배워 밥벌이 걱정은 없이 살길 바랐지만, 이왕 장승을 본 이상 강성철씨의 마음은 확고했다. 강성철씨는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고 강씨의 고집 앞에 삼촌이 무릎을 꿇었다. 결국 강씨는 명휘원 목공예학과에 입학했다.
그네에서 떨어져 척추가 엇나가
강성철씨네 집은 동네에서 꽤 크게 농사를 짓고 살았다. 한참 농사가 바쁠 때면 3살 밖에 안된 강씨는 집안일을 돌봐주던 일꾼 등에 업혀 나가곤 했다. 어른들은 모두 농사일로 바쁘니 강씨를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어른들은 농사일로 바쁘시니까 농사일을 돕던 집의 아이들에게 저를 업혀 내보냈나봐요.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지만, 그네를 태워준다고 밀었는데 그만 어린 제가 떨어진 거에요.”
아이가 우는데도 어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강씨를 업고 나갔던 아이가 무서워 솔직하게
“할어버지는 동네 사람들 체하고 아프면 침도 놔주고 그러셨어요. 원래 시골이 그렇잖아요. 그런데 막상 손주한테는 쉽지 않으셨던 모양이에요. 척추가 엇나갔지만 별달리 손도 못써봤어요”
허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하고 6개월이 지나도록 깁스붕대를 한 것이 고작이었다.
“할어버지가 침을 놓으시니까 양약을 미더워 하지 않으셨던 것같아요. 장손이라 행여 잘못되면 어쩌나 싶으셨는지…”
고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는 결핵성 골수염이 생기더니 중학교 2학년까지 고생을 했다. 염증이 생기면 할아버지는 느림나무 껍질을 가지고 달려드셨다. 고름을 째내고 느림나무 껍질을 넣어서 새살이 돋도록 벌려놓곤 하셨다. 고름이 남은 채로 살이 아물어 버리면 다시 재발하기 때문에 새살이 생겨 고름이 완벽히 제거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강성철씨는 지금까지도 그 아픔을 기억하고 있었다.
‘목산공방’에서 시작된 장승살리기
명휘원을 졸업한 후에 강성철씨는 명휘원에서 운영하는 작업장에서도 몇 년 동안 근무했다. 이곳저곳에서 목공예기술도 배웠다. 그러나 목공예 분야가 사양산업이다 보니 일하던 많은 회사가 문을 닫기 일 수고, 강성철씨는 그때마다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경력이 쌓여가면서 강성철씨의 기술도 발전해 갔다.
90년에 전국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 참가해 금상을 받았고, 91년도에는 제3회 홍콩 세계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 은메달을 받아 석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덕분에 1년 간 일본 연수를 다녀올 기회도 가졌다.
강성철 씨가 본격적인 장승살리기를 시작한 것은 6년 전부터다. 비닐하우스를 짓고 ‘목산공방’을 차려 본격적으로 장승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이 있다면 ‘장승학교’를 만드는 거에요. 사람들이 찾아와 장승 만드는 것도 직접 해보고, 편하게 쉬었다 가고 그런 곳을 만들 수 있으면 바랄 게 없어요”
사람을 만나기를 좋아한다는 강성철씨다운 바람이다.
현재 장승을 만드는 사람은 전국적으로 20명 남짓, 결코 많은 수가 아니다. 강성철씨 나름대로의 특색 있는 장승을 만들어 나름대로 이름도 나있고 여기저기 찾는 곳도 많다. 친근한 그의 장승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럼 돈도 꽤 벌었을 법한데 실제 형편은 그렇지 못한가보다. 지금 목산공방이 있는 곳도 남의 땅이라 언제 비워달랄지 모를 일이다.
좀더 대중적이고 친근한 장승을 꿈꾸며
실제로 강성철씨를 찾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한번은 아픈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을 지켜줄 장승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그 마음이 좋아 저도 정성을 다해 장승을 깎았어요. 비록 돈을 받지는 않았지만 제주인을 만나 자기자리로 가는 장승들을 보면 보람이 느껴져요”
강성철씨는 장승을 보고 싶다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간다. 인터뷰를 하는 날도 도봉산에서 열리는 도봉축제에 내보 낼 장승들을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전시하는 날은 하루뿐이지만 사람들과 장승이 만날 수 있다니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마당극 ‘아으 다롱디리’를 공연 때도 장승을 전시했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 공연중에 직접 장승을 깎고 사람들이 직접 장승에 소원을 빌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공력이 들어간 장승이죠. 여러 사람이 깎고 사람의 다양한 소원이 담겨 있으니까요”
이외에도 울진 학고을 관광농원, 분당 중앙공원, 경기도 광주 도자기엑스포장과 생태수목원에 장승거리를 조성하는 등 강성철씨의 활동은 왕성하기만 하다.
나무를 살리는 사람, 사람을 지키는 장승
“퇴촌으로 들어오다 보면 장승이 세워져 있잖아요. 그중에는 큰 사고가 많이 나는 곳도 있었어요. 일년에 몇 명씩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으니까요. 하지만 장승을 세운 뒤부터는 달라졌대요. 사고가 나기는 해도 큰 인명사고는 없대요. 사람들이 장승을 보느라 속도를 줄이기 때문이죠”
강성철씨의 말대로 굳이 무속신앙의 의미가 아니더라도 장승이 사람을 보호한다는 의미는 아직도 충분히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예일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주는 것은 장승만이 아니다. 강성철씨 역시 나무에게 생명을 주기는 마찬가지다. 건축공사로 잘리거나 뽑힌 나무들은 물론이고, 수해로 떠내려 온 통나무, 최근에는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뽑혀나간 플라타너스까지 강성철씨의 손에서 장승으로 되살아난다. 강성철씨는 나무를 살리고 장승은 인간을 보호하고, 서로를 이롭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외부에 세울 장승은 나무 무게만도 대단해요. 그래서 힘이 필요하죠. 비록 제가 장애를 가지고는 있지만 아직은 작업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어요. 하지만 좀더 나이가 들면 실내에 진열할 장승처럼 소품을 위주로 만들게 되고, 제 개인적인 의식을 담은 작품활동도 더 활발하게 할거예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공방 안의 장승들 하나하나에 관심이 갔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담아 가지에 새겨진 12개의 장승, 한 가지에 뿌리를 둔 가족장승 등 처음에는 어수선하게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던 장승들이 눈에 익기 시작했고 그지없이 정겹게 느껴졌다.
그래설까. 조각하는 이를 닮은 장승, 장승을 닮은 남자 강성철, 그의 웃음 또한 정겹게만 느껴졌다.
글 서현주 객원기자 / 사진 정선아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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