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시설 확보 운동하는 김종훈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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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으로 추락해 산산조각이 난 엘리베이터
세속적인 말로 잘 나갈 때 정장이 150벌, 코트가 20벌, 와이셔츠가 50벌, 넥타이만 130개를 소유한 사내가 있었다. 거기다 그 사내는 똑같은 옷을 이틀을 입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사내는 매일 매일 옷을 갈아입고 출세의 엘리베이터에 올라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사내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그 즈음에는 대학 겸임 교수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었고, 막 자기 사업을 시작해 사장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 날은 정확하게 2002년 9월 30일이었다. 사내는 일본 출장을 앞두고 준비할 것이 많아 잠시 집에 들렀다. 이것저것 잡동사니를 가방에 챙겨 넣던 사내는 피곤에 지쳐 잠시 쉴 요량으로 쇼파에 누웠다가 곧 잠이 들었다. 한 두 시간 숙면을 취한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잠들기 전 멀쩡했던 등이 갑자기 바늘로 쑤셔대는 것처럼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등의 통증은 다음날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직원들은 사내가 통증을 호소하자 ?사장님 담 걸린 겁니다. 약 먹으면 낫습니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데 조언대로 약을 지어먹었지만 통증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져서 서 있는 것도 힘이 들 지경이 되었다. 사내는 부랴부랴 건물 내 한의원을 찾아 부황을 뜨고 침을 맞았다. 그랬는데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내는 어쩔 수 없이 계획된 일본 출장을 포기하고 퇴근했다. 집에서 자리에 누워있던 사내는 통증이 심해지면서 급기야 정신을 잃었고 깨어보니 병원 응급실이었다.
의사가 다가와 망치 같은 것으로 사내의 무릎을 툭툭 치면서 “아파요?” 라고 물었다. 사내는 “아프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의사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척추 농양으로 하반신 마비가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무슨 말이지? 하반신 마비라니? 내가 걷지 못하게 됐다고?’ 사내는 의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의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척추 농양이 급성으로 왔고, 농양이 척수로 흘러 들어가면서 신경 7번을 누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7번 척수 신경이 많이 훼손됐고 그래서 하반신이 마비가 된 것입니다.”
2002년 10월 초, 이런 걸 급전직하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사내가 몸을 싣고 있던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땅 끝으로 추락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때 사내의 나이 43세였는데 그 날 이후 사내는 다시는 두 발로 땅을 딛고 설 수 없었다.
그 후 사내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이쯤에서 사내의 이름을 밝히면 사내는 김종훈 씨다.
“사람들은 내가 옷이 많으니까 연예인이었냐고 묻는데 그건 아니고 오랫동안 패션 의류 산업에 근무했습니다. 86년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머천다이저라고 번역하면 상품기획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패션 의류 산업은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쉬는 날 없이 일에 매달렸는데 제가 신규 브랜드를 만들었던 94 95년 2년은 토요일 일요일이 아예 없었습니다. 그리고 상품기획자는 신규 브랜드를 만드는 일 뿐만이 아니라 브랜드를 백화점에 입점시키는 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밤낮없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죠. 덕분에 돈은 같은 연배에 비교해서 많이 벌었는데, 신규 브랜드를 만들어서 성공했을 때는 회사에서 보너스도 주고 스카웃 손길이 뻗쳐 몸값이 오르기도 하고, 그렇게 소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은 편안하게 얘기하지만 과정에서 피 말릴 때가 많았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일하다 보니 과로가 누적이 된 거죠. 직장생활을 15년 정도 하고나서 내 일을 하겠다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일본 출장을 앞두고 쓰러져서 장애를 갖게 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이는 쓰러지면서 회사를 친구에게 맡겼는데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 회사에 쏟아 부은 자금을 전혀 회수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이는 인간적인 배반감에 더해 사회의 냉혹함을 알게 됐고, 그러자 ‘과연 내가 장애를 가지고 이 험준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고 토로한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었던 그이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1년여를 집에서 아무 하는 일없이 누워지냈다. 그 무렵 그이의 화두는 오직 하나 어떻게 해야 편안하게 죽을 수 있을까 였다.
“누워지내면서 늘 자살을 꿈 꿨죠. 그런데 쉽게 죽을 수 없는 게 내 처지였어요. 추락사하려면 베란다 난간에 올라가야 하는데 장애 때문에 올라갈 수도 없고 약 먹고 죽으려면 약을 사러가야 하는데 역시 장애 때문에 약국에 갈 수도 없고, 동맥을 끊자니 옆에 사람이 있고, 집에 밥 해주는 파출부 아주머니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죽고는 싶은데 마땅한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그이는 우연한 기회에 같은 동네에 있는 국립재활원을 알게 돼서 입원하게 됐고, 거기서 자립생활 강좌를 듣게 됐다. 작년 2004년 초의 일이다.
“국립재활원에서 자립생활 과정을 듣고 집에 왔어요. 그때는 용기가 생겨서 밖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아파트 입구에 경사로를 만들어달라고 관리사무소에 얘기하기도 했는데 경사로 설치가 차일피일 늦어지면서 내 마음도 늘어져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 버렸죠. 밖에 나가기가 두렵고, 사람들 시선이 두려웠어요.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 때의 나를 누가 알아 볼까봐 두려워서 동네 다닐 때도 항상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다녔어요. 집에 있을 때는 누워서 비관적인 생각만 하고, 그러다가 재활훈련을 받으러 다시 국립재활원에 가게 됐는데 병원에 입원했지만 옆 사람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았어요. 심한 우울증에 걸린 거죠.”
롯데마트에 장애우 화장실에 설치한 휴지통
그랬던 그이가 우울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계기는 국립재활원에 근무하는 국은주 씨를 만났기 때문이다.
“병실에 입원해서 우울증에 빠져서 사람들을 기피하고 누워 있었는데 하루는 국은주 선생이 전화로 호출했어요. 상담평가실에 가서 답답한 내 얘기를 늘어놨는데 내 얘기를 듣던 국은주 선생이 세상을 뭐하러 그렇게 고민하며 사느냐, 그렇게 고민만 하고 살려면 차라리 죽어라, 그렇지만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게 더 의미가 있으니까 죽으려고 애쓰지 말고 사는 것도 한 번 생각해 봐라, 그러면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 얘기를 하면서 당장 다음달부터 운전을 배워서 차 사가지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먹고 싶은 거 먹고, 사고 싶은 거 사라고 얘기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운전 면허 시험 끝나면 자립생활 심화과정이 9월에 있으니까 8월까지 운전 배우고 오라고 얘기했어요. 그렇게 국은주 선생과 동료상담을 하고 나와서 신선한 생각이 든 게 뭐냐면, 운전을 배우고 차를 사서 돌아다니고 싶은데 마음껏 돌아다니면서 세상 편안하게 살지 왜 등에다 산만큼 큰 고민 몇 개씩 지고 사느냐는 얘기였는데, 과연 내가 운전을 할 수 있을까? 전에는 운전한다는 생각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그런 나에게 운전을 하라는데 그러면 한 번 해볼까? 운전을 하고 돌아다니면 지금보다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병실에 올라와서 동료들한테 나 같은 사람도 운전 면허를 딸 수 있을까? 라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동료들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거였어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기면서 그때부터 말문이 터지기 시작했어요. 예전의 나로 돌아간 거죠.”
그이는 살아가면서 아무 것도 아니고 보잘 것 없는 것이 인생 전환의 계기로 작용하는 때가 있는데, 그때 자신에게 운전을 배우라는 한 마디가 바로 그 경우였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조금씩이지만 밝아지고 어려웠지만 운전 면허 시험에 도전해 기능시험 네 번만에 합격해서 마침내 운전면허를 취득했단다. 그리고 이어진 자립생활 심화과정, 그이는 영광스럽게도 과정이 끝나갈 즈음 사람들 앞에서 자립생활 성공사례를 발표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사례 발표에서 나는 지금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고 얘기했어요. 구체적으로 호스피스로 일하면서 힘든 사람들 손을 잡아주겠다고 얘기했죠. 그랬더니 관객들이 감동 받았는지 내가 으뜸상을 받았어요. 사실 내가 장애를 가지지 않았을 때 장애 가진 사람들을 이상한 눈초리로 봤던 게 사실이거든요. 그렇지만 장애를 가지면서 이제 남은 생은 나 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어요. 그렇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회운동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이렇게 됐네요…”
그이는 말하면서 밝게 웃었다. 이제부터 주목하기. 함께걸음이 그이를 만나게 된 사연이 시작된다. 그이는 자신의 활동을 사회운동이라고 표현했다. 뭐 뭐라고 부르던 상관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소리소문없이 혼자서 치열하게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오줌 눌 권리를 보장하라!’는 운동, 만약 오줌을 누는데 무슨 권리가 필요하냐고 탓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이는 장애우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이땅의 장애우 현실은 생리현상인 오줌을 누는데도 권리를 보장하라고 외칠 만큼 척박한 것이다.
“자립생활 심화 과정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세탁기를 사러 롯데마트 방학점에 갔어요. 내가 성공사례를 발표하면서 첫 번째 다짐이 뭐였냐면 나는 지금 집에 돌아가서 혼자 살겠다는 거였어요. 누나는 혼자 살 수 있겠냐고 걱정했지만, 나는 다짐했으니까 병원에서 돌아오면서 파출부를 불러야 했는데 안 부른 거죠. 혼자 살기 위해서는 세탁기가 필요해서 롯데 마트에 갔는데 마침 오줌이 마려워서 장애우 화장실을 찾았어요. 그런데 나 같은 척수장애우는 오줌을 눌 때 넬라톤이라고 요도에다가 관을 끼워서 소변을 빼기 때문에 오줌을 누는 게 아니라 뺀다고 표현하는데, 빼는 과정에서 균이 들어가면 염증이 생기니까 1회용 멸균 장갑 끼고 또 오줌을 뺀 다음에는 생식기를 꼭 물휴지로 닦아줘야 해요. 결론은 내가 소변 빼고 난 뒤에 티슈와 장갑을 휴지통에 넣지 않고 변기통에 넣으면 당연히 변기통이 막히는 거죠. 그런데 롯데마트 장애우 화장실에는 휴지통이 없었어요. 그래서 휴지와 장갑을 그냥 변기 위에 놓고 나왔는데, 다음날 점심때가 돼서 다시 롯데마트 2층 식당가에 갔거든요. 밥 먹고 소변 빼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여전히 휴지통이 없고 장애우 화장실에 청소도구를 잔뜩 넣어 놨더라고요. 순간 이거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안내하는 아가씨에게 가서 플로어 매니저 불러오라고 말했어요. 잠시 후 매니저가 왔어요. 왜 그러냐고 그래서 내가 매니저 앞에서 소변 빼는 것을 보여줬어요. 그러면서 보통 휠체어를 타고 다녀도 소아마비 장애우는 정상적으로 소대변을 본다 그렇지만 같은 휠체어를 타고 다녀도 나 같은 척수장애우는 하반신이 마비 돼서 인위적인 행위를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대변을 볼 때도 고무장갑을 끼게 되는데, 장갑을 변기에다 넣으라는 거냐, 만약 장갑을 바닥에다 던져놓고 가면 병신들은 역시 이렇게 하는 짓도 지저분한 애들이야, 못 배워서 그래, 이렇게 너희들이 얘기하지 않겠느냐, 그러지 않으려면 너희들이 장애우의 유형을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설치할 것을 설치해야 하지 않겠느냐, 두 번째는 청소도구를 내가 보는 앞에서 장애우 화장실에만 두지 말고 장애우와 비장애우는 똑같은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장애우 화장실에 청소도구를 갖다 놨다면 비장애우 화장실에다가도 청소도구를 갖다 놔라, 그러면 당연히 소비자 불만사항이 들어올 거고 이런 놈의 마트가 어디 있느냐고 난리 칠텐데 장애우 화장실은 아무 말 없으니까 청소도구를 놔두고 비장애우 화장실은 놔두면 큰일 나니까 놔두지 않는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호통을 쳤어요. 그랬더니 매니저가, 대단히 죄송합니다. 당장 치우겠습니다. 그러면서 즉시 청소도구를 치우고 휴지통도 갖다 놨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죠. 이렇게 작은 부분에서도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권리가 무시되는데 큰 부분에서는 오죽할까 라는 생각이 들어 착잡했죠.”
화장실 설치를 위해 세이브존과 싸우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며칠 후 그이는 오줌 눌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 상황을, 벌어졌던 일을 그이의 말을 빌어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날 그이는 장애인고용촉진공단 서울 지사를 갖다 오는 길에 직업은 못 속인다고 취미가 좋은 옷을 싸게 사는 거여서 혹시 건질 옷이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세이브존이라는 쇼핑몰 노원점을 찾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휠체어에 몸을 실었는데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그래서 그이는 쇼핑몰에 들어가면서 안내석을 찾아 “여기 장애우 화장실 어디 있어요?”라고 물었다. 그랬는데 아가씨가 “장애우 화장실요?”라고 되물으면서 “장애우 화장실 없는데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오줌이 급했던 그이는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라고 물었다. 아가씨는 “남자 화장실 2층에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 화장실에 갔다. 그런데 화장실 입구에 잔뜩 짐 박스가 쌓여 있어서 도저히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었다. 그이는 지나가던 손님들에게 부탁해서 짐 박스를 치웠다. 겨우 치웠나 싶었는데 안으로 꺾어 들어가자 거기 또 짐 박스가 첩첩으로 쌓여져 있는 거였다. 더욱이 쌓여져 있는 짐 박스는 무거워 보여서 손님들에게 치워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이는 할 수 없이 직원을 불러 짐 박스를 치우게 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소변을 볼 수 있었는데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장애우 화장실이 아닌 일반 화장실의 경우 좁아서 휠체어가 반밖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을 열어놓고 소대변을 볼 수밖에 없는데 그이의 경우도 어쩔 수 없이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소변을 뺄 수밖에 없었다. 소변을 빼려면 생식기를 내놔야 했고, 그이의 생식기를 화장실에 들른 사람들이 힐끔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이는 순간 수치심에 세속적인 말로 꼭지가 돌았다. 화가 난 그이는 휴대폰으로 114에 전화해서 세이브존 노원점 전화번호를 알아낸 다음 전화를 걸어 “지금 장애를 가진 사람이 2층 화장실에서 굉장히 힘든 상황에 처해 있으니까 소비자상담실장과 점장 당장 내려 오라.”고 말했다.
잠시 후 직원 두 사람이 화장실에 왔다. 한 직원이 그이에게 다가와 “어디가 불편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때까지 그이는 생식기가 노출된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이는 직원들에게 “장애우 화장실 왜 없어?”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한 직원이 “죄송합니다. 곧 만들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이는 “뭘 어떻게 만들겠다는 거야! 너 지금 내 생식기 봤지? 너희들도 생식기 내놔, 내건 다른 사람들이 다 봤으니까 너희들 것도 봐야지. 그래야 공평하지. 보여주지 않으면 이 통에 있는 소변 나가서 옷에다 다 뿌려버릴 거야. 그러기 전에 어서 생식기 내놔!”라고 몰아붙였다. 직원들은 안절부절 하면서 “손님 제발 진정하십시오…”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분이 풀리지 않은 그이는 “내가 지금 당장 소방서에 전화해서 소방검열 나오라고 할테니까 알아서 해, 백화점은 너희들 할아버지보다 내가 더 박사니까 각오해!”라고 소리쳤다. 그런 다음 그이는 밥을 먹으러 지하식당가로 내려갔다. 그 때 그이 옆에 직원들이 따라 붙었는데 무전기에서 “전 층 화장실에 있는 박스 모두 다 치워!”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날 그이는 몇 번의 실갱이 끝에 경영지원실 팀장을 만나 “장애우 화장실을 빨리 만들고 연락해 주겠다.”는 답변을 듣고 물러났다.
다음 날 그이는 노원구청 사회복지과에 전화를 걸었다.
“세이브존 노원점에 장애우 화장실 없는 거 아세요?”
“알고 있습니다. 민원이 많이 제기돼서 우리도 고민중입니다.”
“그래요. 알고 있으면서도 방관하고 있는 거네요. 저는 어제 갔다왔는데 참지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할 겁니까?”
“세이브존에서 내년에는 예산을 편성해서 꼭 설치하겠다고 그러니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이것 봐요.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그냥 넘어가려 하는데 그렇게는 안됩니다. 감독 책임이 당신들한테 있으니까 언제까지 설치하겠다는 약속 꼭 받아내십시오.”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십시오.”
한 시간 후 그이는 다시 노원구청 편의시설 담당자와 전화 통화를 했다. 담당자는 밝은 목소리로 “저희가 세이브존에 전화했더니 12월 안에 화장실을 꼭 설치하겠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이는 “오늘이 10월 20일인데 어떻게 12월까지 기다립니까, 나는 당장 필요하니까 지금 바로 설치하라고 하세요.”라고 면박을 준 다음 전화를 끊었다.
몇 시간 후 노원구청에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말씀대로 세이브존에서 10월말까지 화장실을 만들겠다고 하는데 제 생각엔 한 일주일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꼭 설치하도록 제가 나가서 행정지도를 할 테니까 안심하십시오.”
그이는 전화를 받고 구청과 약속했으니까 세이브존에서 화장실을 설치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11월 1일 그이는 화장실을 설치했는지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세이브존에 갔다. 예전과 달리 화장실 입구는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지만 장애우 화장실 설치는 물론 화장실 설치를 위한 공사가 시작됐다는 징후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며칠 후 다시 세이브존을 찾았지만 그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가 난 그이는 처음 세이브존을 찾았을 때처럼 비좁은 화장실에서 소변을 빼면서 건물 관리부장을 불렀다. 관리부장이 오자 그이는 “당신 내 생식기 봤지. 당신 생식기도 내놔, 안 내놓으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 관리부장은 “죄송합니다. 내 생식기는 못 내놓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이는 “너는 못 내놓으면서 내 생식기는 왜 봐? 장애우 거는 봐도 되고 내가 너걸 보면 나는 변태니 이런 불공평한 게 어딨어? 나도 너와 똑같은 사람이야, 똑같은 사람인데 왜 나를 이렇게 대해? 여기 전화번호 줄 테니까 좋게 일 처리할 생각 있으면 내게 전화를 줘,"라고 말하고 세이브존을 나왔다. 그렇지만 며칠을 기다려도 세이브존에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이는 마침내 행동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11월 20일 토요일 오후 세이브존을 찾아간 그이는 쇼핑몰 입구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무작정 시위를 하면 세이브존측에서 시비를 걸까봐 사전에 물건을 하나 사서 쇼핑백에 담아 든 다음 바지를 내리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대로에서 오줌을 빼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이유를 물으면 "나도 정당한 소비자다. 소비자로서 쇼핑을 하기 위해 여기 왔는데 소변을 눌 곳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여기서 소변을 빼는 거다.”라고 말했다. 그가 생식기를 내놓고 오줌을 빼기 시작하자 세이브존 입구는 난리가 났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여성들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자 세이브존에서 직원들이 나와 그를 둘러쌌다. 직원들이 그이 행동을 멈추게 하려고 그이 몸에 손을 대자 그이는 이번에는 112에 전화를 걸어 경찰을 불렀다. 그런 다음 경찰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이는 소리쳤다.
“점장 나오라고 해! 점장만 나오면 여기서 화장실 설치하겠다는 약속 받고 끝낼테니까 빨리 점장 나오라고 해!”
소동이 컸는지 점장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이는 점장을 노려보며 “장애우 화장실 왜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점장은 “곧 만들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언제까지 만들 건데요?” “다음주까지 꼭 만들겠습니다.” “그래요. 그렇지만 한 두 번 속은 게 아니니까 여기 당신 명함 뒤에 자필로 다음주까지 만들겠다고 써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세이브존 노원점 점장은 자신의 명함 뒤에 ‘장애우화장실 다음주까지 설치하겠음.’ 이라고 쓴 다음 그에게 건네줬다. 그 명함을 받아 들고 그는 시위를 끝냈다.
세이브존에서 약속한 일주일 후 그이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장애우 화장실 설치 공사가 끝났는데 타일 하나가 깨져서 오늘부터 사용하지는 못하고 내일부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와서 확인해 보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그이는 “고맙습니다.” 짧게 한 마디 하고 전화를 끊었다.
“세이브존 측에서 남자 화장실에 소변기 하나를 없애고 장애우 화장실을 설치했어요. 결국 설치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 성의가 없어서 설치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죠. 아무리 편의증진법이 제정되기 전 건물은 장애우 화장실 설치하는 게 의무사항이 아니라지만 대중이 이용하는 시설인데 편의시설이 없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죠.”
내 활동은 일종의 소비자 운동입니다
세이브존에 장애우 화장실을 만든 그이, 다음 그이 눈에 띤 건물은 을지로에 있는 하나은
화가 난 그이는 취업박람회장에 들어가서 “여기 고용촉진공단 최고 책임자 누구야, 이리 나와!”라고 소리쳤다. 대리 한 명이 황급히 달려와서 “무슨 일 때문에 그러냐?”고 물었다. “너한테 얘기 해봤자 소용없으니까 가서 책임자 불러 와, 안 불러오면 나 여기서 시작할 거야!”
그렇게 말한 다음 그이는 안내하는 여자들 앞에서 바지를 내리는 시늉을 했다. 그제서야 책임자인 부장이 달려왔다. 그이는 부장에게 “장애우를 불렀으면 장애우 화장실이 있어야지 왜 없냐,”고 따진 다음 발길을 돌려 하나은행 본점 관리부서가 있는 9층으로 향했다.
하나은행 건물 관리 책임자를 만난 그이는 “은행에 장애우 화장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너희가 장애우를 단 한 명도 고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장애우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줄 테니까 일주일 내에 은행장이 가장 편한 시간에 내가 10분간 만날 수 있도록 연락을 줘라 그러지 않으면 나 나름대로 행동을 하겠다. 알아둘 것은 내가 하나은행에 온 것은 가지고 있는 짜투리 돈이 조금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테크를 어떻게 운영할 수 있는가 물어보려고 왔다. 고객의 입장에서 왔으니까 행장을 만나겠다는 거다. 꼭 연락을 줘라.”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하나은행 측에서는 일주일이 넘었지만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고용촉진공단 측에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가 하나은행에 장애우 화장실을 설치하도록 문서를 보내서 답변을 받아 가지고 그 문서를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제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단 12월말까지 답을 달라. 아니면 1월에 행동을 하겠다고 얘기했죠. 그러면서 내가 공단측에 말했어요. 하나은행과 공단을 걸어서 공익소송 하겠다고, 그리고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같이 하겠다고, 내가 화장실이 없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생식기를 내놓고 소변을 봤으니까 수치심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하겠다. 그러니 알아서 하라고 말했죠.”
그이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저와 같은 처지의 척수장애우들이 소변을 빼려면 반드시 장애우 화장실과 같은 크기의 큰 화장실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건물에는 장애우 화장실이 없죠. 이건 인권의 문제입니다. 반드시 개선돼야 하는 거죠. 심지어는 공공건물인 예술의 전당도 장애우 화장실을 만들어는 놨는데 봉을 멀게 설치해서 제가 앉으려다가 낙상했어요. 규정대로 설치 안 하고 아무렇게나 설치해 놓고 거기다가 청소도구까지 다 집어놓고,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얘기이지만 장애우 화장실에 청소도구 넣는 건 이젠 일상이 됐어요. 지금 하나은행과 싸우고 있는데 하나은행이 끝나면 그 옆 삼성화재 건물에 문제 제기를 할 겁니다. 삼성화재는 밖에 경사로는 잘해놨지만 역시 장애우 화장실이 없어요. 내가 거기 자동차보험 고객이거든요. 고객으로 왔는데, 고객이면 언제든지 올 수 있는데, 보험가입은 받아 놓고 왜 화장실은 설치 안 하는지 문제 제기 해야죠.”
그이는 말끝에 자신의 활동이 일종의 소비자 운동이라고 강조했다. 일부러 대상을 설정하는 게 아니라 일상적으로 돌아다니다가 눈에 보이면 장애를 가진 소비자 입장에서 그 자리에서 문제 제기를 하는 생활 속의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이에게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중도 장애우들의 권리를 위해 일할 겁니다. 교통사고 등으로 중도 장애우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없고, 권리를 위해 싸우는 단체가 없는데 미력하나마 제가 도움이 된다면 남은 생을 중도 장애우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디에 있던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갖고있는 것을 줘야겠다는 생각은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글 이태곤 기자 / 사진 조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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