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게그림화가 최병수 씨 > 함께 사는 세상


걸게그림화가 최병수 씨

운동은 가장 낮은 곳으로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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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호부터 <함께걸음>은 사회 구석진 곳에서 혹은 이미 알려져 있다할지라도, 꿈을 현실로 전환하기 위해 자신의 처지에서 부단히 애쓰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려 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은 목수(木手) 최병수 씨(45세)다.

 

 
 
최.병.수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무척 다양하다. 현장미술가, 설치예술가, 화가 혹은 화백, 조각가, 판화가, 목수….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그를 화가라 칭한다. 8남매의 여섯째로 태어나, 중 2때 정규 교육과정을 중단하고 곧장 생계를 위해 중국집 배달원, 신문배달, 보일러공, 선반보조공, 목수 등 시쳇말로 노가다 현장에서 활동하던 그가 80년대 후반 이후에는 화가가 된 것이다. 그것도 ?걸개그림?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영역을 개척한 인물로 말이다. 
그렇지만 ‘화가’로 불리는 것에 그도 동의할까?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는 80년 대식 유머로 설명했다.
“내가 ‘화가’가 된 건 너무 ‘화가’ 나서 그래요.”
아니, 요즘 유행하는 말로 치자면, 이 무슨 쌩뚱 맞은 소린가.
“86년 홍대 미대 학생들이 벽화를 그린다고 하길래, 사다리를 놓아주러 갔죠. 당시 난 목수였는데, 그냥 보고 있는 게 심심해 그림 몇 개 그렸어요. 그런데, 그만 학생들이 연행되는 바람에 함께 조사를 받게 되었고, 조사하던 형사가 직업을 묻길래, 목수라고 했더니, 목수가 무슨 그림을 그려? 화가지? 직업, 화가, 하면서 자기 맘대로 조서를 작성한 거예요. 아무리 ‘목수’라고 해도 들어주지 않고, ‘화가’라고 하더라구요. 내 원 참 ‘화가’나서. 그때부터 난 ‘화가’나서 ‘화가’가 되었어요.?
그 후, 그는 87년 6월 항쟁 당시 우연히 전철 속에서 옆 사람이 보던 신문에서 이한열 열사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신문에서 사진만 오려 집에 와, 작은 목판에 그이의 모습을 담아냈다. 그리고 판화로 찍어 집회현장에 나가 시민들에게 돌렸다. 민중화가로서의 공식 데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조직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고, 무슨 직함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목수라는 직업을 가진 한 시민으로서 그 어이없는 청년의 죽음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화가 나서 화가가 된 건 일면 일리 있는 것 같다. 상식이하의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고,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던 것. 모순된 사회를 보고 느낀 이상, 그 분노를 어떤 식으로든 표출하지 않으면, ?화?가 자신에게로 몰아칠 것을 예감했던 것이다.

부시에게서 받은‘암’
우스개 소리를 할 정도로 여유 넘치는 것을 보니 다행이다 싶었다. 얼굴색도 좋아졌다. 손수 밥상을 준비하며 우리에게는 “사진첩이나 보면서 놀라”고 한다. 한 눈에 알아볼 정도로 살이 빠진 것을 제외하면(수술 후 10kg이나 감량되었다고 한다) 그가 최근 위암 수술을 받고 요양중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위암 3기 판정을 받은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이었다. 지난 9월 수술을 받고, 약 2주간만 입원을 한 후, 현재는 일체의 항암치료도 받지 않고 단지 쑥뜸과 민간요법으로 몸을 추스르며, 친구가 내어 준 가평의 낡은 농가에서 요양하고 있다.
“2002년 이라크에 들어가기 위해 요르단에서 잠시 머물 때였죠. 비자가 나오길 기다리며, 근근히 작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피를 토한 거예요. 거짓말 보태지 않고 아주 끈덕지는 검은 핏덩어리를 쏟아냈는데, 그 때 위암일 가능성이 높다며, 빨리 조직검사를 받으라고 했죠. 그런데, 그 때 이라크 비자가 나온 거예요. 제가 어떻게 돌아갑니까? 환자복을 입고 링겔을 꽂은 채 탈출을 시도하다가(그는 남은 링겔이 아까워서 그랬다고 했다) 걸렸죠. 나 바쁘다고 잡지 말라고 하면서요.”
상황이 그랬음에도 별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 건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고, 토해 낸 피가 워낙 검고 덩어리진 형태의 기분 나쁜 것이라, ‘음, 나쁜 피가 몸에 나왔으니, 이제 좋아지겠군. 위에 딱정이만 붙으면 별 일 없을 꺼야’라고 스스로 자위했다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목적의식이 워낙 강해 이라크 공습을 본 후 곧바로 요르단에서 작업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라며, 정말이지 자신이 생각해도 쉴 틈 없이 작업에만 몰두했다고 회상하고 있었다. “한국에 와서 아프지는 않았지만, 속이 자꾸 더부룩해져서 그냥 내시경 검사는 받아봤죠. 처음에는 위가 너무 깨끗해서 위염 내지는 위궤양일거라고 하면서도 조직검사를 받자고 해 준비중이었어요. 그러던 중 이번엔 맑은 생피를 다시 쏟았죠. 그 때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서 머리를 크게 부딪히는 바람에 4시간만에 깨어났는데, 진찰 후 그 정도면 암 초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하지만 수술을 위해 열어보니 다행히 다른 곳에 전이는 되지 않았아도, 엄청 커다란 암 덩어리가 있었던 거죠. 위의 2/3를 잘라냈어요.”
그는 여전히 스스로도 위암말기 환자였던 것을 신기해하는 듯했다. 물론 주변에서는 더없이 놀라워했다. 식단도 거의 위에 무리가 가지 않는 채식 중심이었고, 해외를 가더라도 갖가지 우리 음식과 영양에 도움이 되는 식품들을 꼭 달고 다니는 등 자기 몸 챙기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라면, 햄버거 등 인스턴트 식품은 물론이거니와 술, 담배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오히려 잔소리꾼처럼 술, 담배 적게 하라고 보는 사람에게 마다 충고를 아끼지 않던 그였다. ‘세상은 너무나 급속도로 파괴되어 가고 있고, 그래서 너무 급하고 절실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오감을 넘어 육감으로 살아온 그에게 ‘절제’는 모순으로 점철된 세상에 저항하는 그 나름대로의 방어수단이었다. 

파괴되는 세상과 너무 깊이 일체가 되었나
그런데 암이라니, 가진 거라고는 수많은 연장과 몸뚱이 하나가 전 재산인 그에게, 그토록 절제된 생활로 애정을 갖고 살펴온 몸에 암이라니, 암이란 놈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필 그를 찾아온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제 병은 직업병이예요. 사람들은 산재 신청하라고도 해요. 누구냐구요? 그야 부시죠. 뇌에 분비되는 호르몬이 위에도 같이 분비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제가 그토록 몸에 민감하고 스스로 다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암이란 놈이 들어온 걸 보면, 이건 분명 스트레스에서 온 홧병이란 겁니다.”그는 그의 몸과 마음이 세상과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아는 듯 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그의 몸조차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손해배상 청구를 부시에게 해야 한다며 껄껄 웃는다. 말없이 무표정하게 있을 때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이 어느새 부드러운 기운을 뿜어내듯 가늘게 초생달을 그리고 있다.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이번에 다 낳으면 면역체계가 생겨 암도 안 걸릴거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그이는 안다. 잠시 쉬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서 쉬는 듯 보이지만, 머리와 마음은 내내 세상과 사람에 열려있다.  

근본을 따져보는 운동이어야
“89년도부터 사람들에게 제안했죠.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폐수 버리는 일로 가슴아

 
파하고 파업해야 한다고 했어요. 임금투쟁도 중요하지만 노동운동은 노동자가 주인이 되기 위함인데, 그렇다면 폐수를 함부로 버리는 일은 막아야 한다고요. 강이 썩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어요. 그건 주인적 사고가 아니죠. 노동자들이 한곳에 매몰되지 않고 전인적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어요. 지금의 비정규직 문제도 마찬가지죠. 노동운동은 가장 낮은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이한열 열사 판화 걸개 이후 노동해방도, 장산곶매 등 줄곧 민중진영에서 활동했지만, 그는 폐수와 쓰레기의 문제를 보면서 삶터가 망가지고 있는데도 보고 느끼지 못하는 운동권 내부를 비판했다. 그리고 92년 리우세계환경회의에서 ‘쓰레기들’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당시 전 세계가 주목하고 타임지까지 그를 소개했지만, 한국의 동료들은 “이제 캠페인으로 가는 거냐?”고 했다. “최병수가 달라졌다. 변절했다”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흘러나왔다. “난 근대 모순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어요. 인스턴트 식품은 제국주의 문화를 상징하는 겁니다. 지구본에 라면 등 인스턴트 식품을 잔뜩 올려져 있는 그 작품을 통해 전 ‘제국주의 모순의 심장×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후에도 그의 행보는 환경과 생태 문제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자연보호, 환경지킴이의 수준에 머물지 않았다. 얼음조각 ‘펭귄이 녹고 있다’를 통해 지구를 초토화시키는 지구온난화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냈지만, 새만금 솟대와 북한산 망루를 만들었지만, 미군기지 문제와 이라크 전쟁 등 자주권, 평화 문제가 생태문제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그 무엇임을 주제로 작업을 계속 했다.
“우리는 계속 당하고 있어요. 제국주의 다국적 기업은 세상을 말아먹으려는 겁니다. 맥도날드요? 우리 농민 다 죽이는 시스템이죠. 사람 정신없게 만들잖아요. 더 빠르게 보다 더 빠르게 몸 놀려 일하라! 그게 그 놈들, 근대 자본주의의 본질이에요. 인간을 죽이고 환경을 죽이고, 자본만 판치는.”

나무와 톱으로 자본과 싸우는 치열한 싸움꾼
이야기가 너무 심각하게만 돌아가는 것 같은지, 기꺼이 차를 대주며 동행한 박옥순(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책실장)씨는 “아니, 근데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어요? 너무 신기해.”라고 물으며 화제를 돌린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역시나 였다. “그거만 생각하면 되요. 딱 하나만 집중해서 보고 생각하면. 난 먹고살기 위해 하는 겁니다. 그런데, 환경파괴 되면 먹고 살 수 없어요. 그거만 생각하면 됩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세대와도 관계가 있어 근시안적인 형태로는 해결될 수 없다며, 문명이 거짓된 방향으로 외도하고 있는 것을 목도한 이상, 그는 그냥 하는 거라고 한다. 가끔 운명을 믿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가 그랬다.
“놈들은 호락호락 하지 않아요. 싸우려면 끈질기게, 치열하게, 개가 물 듯이 해야 해요. 세상은 발부터 머리까지 다 썩었어요.”
스트레스 받아 흥분하면 안될 것 같아 또 화제 전환. 장애문제에 대해서도 메시지를 담은 작품하나 하라고 운을 뗐다. 전쟁과 장애문제는 뗄 수 없는 관계니까. “맞아요. 가끔 장애문제를 생각해 봐요. 이동권 투쟁이 진행되면서부터 내내 구상 중에 있기도 하구요. 얼마 전에는 휠체어 바퀴를 하나 떼고 거기에 목발을 달았어요. 서울시의 행정이라는 게 기만적이쟎아요. 두 바퀴로 가는 게 아니라 한 쪽이 목발이니, 제자리 맴맴 도는 휠체어죠.” 당시에는 장애문제를 단지 소재로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고민을 계속 하고 있다고 했다. “한 덩어리라고 생각하면 무시할 게 없어요, 한 몸인데, 넌 아니야, 라고 무시하면 스스로를 부정하는 거죠. 장애는 그런 사회 모순 속에서 나오는 겁니다.”

 
평상심으로 내일을 준비하는
지금 그는 친구 농가의 폐가를 빌려 방 하나만 온통 황토흙으로 발라 아주 단정히, 세간 하나 없이, 사람 하나 자면 충분한 그런 방을 만들어 지내고 있다. 직접 나무로 군불을 지펴 마당에 들어서자 나무 타는 냄새가 정겹게 퍼져있고 마당 한 가운데는 틈틈이 하고 있는 작품 때문에 온통 목재와 톱밥 천지다. 창고에는 그의 재산이자 보물인 갖은 연장이 수북히 쌓여있고, 부엌 겸 식당, 서재로 쓰고 있는 개조된 듯한 방안에는 온통 먹거리 천지다. 아직 빛이 나는 김치냉장고도 있었다. “요즘은 입만 갖고 살아요. 전국에서 지인들이 보내주는 유기농 음식과 먹을 거리들을 잘 보관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김치냉장고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우리가 갔을 때도 먼 곳의 지인은 그에게 택배로 요구르트 제조기를 보내왔다. 위에 청국과 요구르트가 좋다며 직접 만들어 먹으라면서. 그는 “사람이 이렇게도 사는구나”싶단다. 아무래도 이런 경험은 그도 처음이지 않을까? 아픈 경험이란 새삼 주변과 나를 돌아보게 하는 힘일 수 있을 것 같다. 함께 환경운동 했던 사람들에게서의 따뜻한 우정과 환대를 느끼며 행복해 하는 그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충만함은 온전히 전해졌다.
요즘은 주로 생명과 관련된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몸에 안좋은 전쟁과 부시를 잠시 뒤로하고 생각만 해도 풍요로워지는 뭇생명들을 만나고 싶단다. 아플 때는 개인적인 걸 잘 챙기라는 충고를 받고 있다는데, 그러면서도 “파괴의 속도가 너무 빠르니까 그게 잘 안된다”고 한다. “안되면 그리 살아야지 별 수 있겠나” 싶기도 하다. 내 마음이 편한 건 몸이 더 잘 알테니 말이다. 무슨 부처님 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불교에 이런 말이 있단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로써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서 양약을 삼으라」하셨느리라”
최병수, 그이는 보왕삼매론 첫 번째 구절을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글 홍여준민 기자 / 사진 정선아 객원기자
사진자료 http://www.gigubanji.org

작성자여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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