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짜리로 살아간다!”
본문
‘여기’서 나와 ‘저기’를 찾아 들어가는 사람들. 그 사이로 몇 명의 아저씨들이 보이자, 움직임이 바빠지는 사람이 있다. 피던 담배를 급히 끄고 손이 올라간 곳은 눈썹 바로 위. 빳빳하게 선 칼날 같은 손등과 함께 ‘충성!’ 소리가 원형광장에 울려 퍼진다. ‘짜리’다.
“새로 온 아가씨 있어요”
“어디 찾으세요?”
“잘 해드릴테니 한잔하고 가세요”
40대 남자들만 나타나면 ‘짜리’는 바빠진다. 관심을 보이는 듯하더니 그냥 가버리는 한무리의 아저씨들에게 광고용지를 건네며 ‘입구에 와서 짜리를 찾으면 잘해주겠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이번호 사람사는 이야기에서는 자신을 ‘짜리’라고 부르는 홍성배 씨를 만나봤다.
평범한 장애우?
매달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정해지면 전화를 걸어 인터뷰 날짜부터 잡는다. 시간과 날짜를 정하고 혹시라도 알아야 할 정보가 있으면 미리 찾아둔다. 그리고 인터뷰 당일, 제일 먼저 보는 건 상대방의 첫인상이다. 인상 좋은 아저씨인지, 퉁명스러운 성격은 아닌지. 몇마디 이야기를 하다보면 오늘 인터뷰가 어떨지 대략 감이 잡힌다. 하나를 물으면 열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고, 열개를 물어도 하나 듣기가 힘든 사람이 있다. 물론 인터뷰를 하는 입장에서는 하나를 물으면 열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편하다. 말문만 트면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구구절절 쏟아 놓으니까.
집이나 직장으로 찾아가 몇 시간이고 앉아 이야기를 하다보면, 별별 사소한 이야기까지도 다 하게 된다. 어떤 때는 이야기 하는 재미에 잡지 내용과는 상관도 없는 이런저런 일로 한참 수다를 떨기도 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고민이다. 인터뷰 대상자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평범하다는 거다.
특별한 사연을 가진 장애우들이 아니라, 어찌어찌 살다보니 이렇게 됐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정말 (평범한)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홍성배씨도 마찬가지다.
처음 왜소증의 장애우를 인터뷰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언뜻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이하 난쏘공)’이라는 소설을 생각했다. 그의 직업탓도 있다. 흔히들 난쟁이라고 부르는 왜소증 장애우인데다 ‘삐끼(이하 ‘여리꾼’)’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이런저런 사연이 많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는 건 당연하다. 적어도 조세희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왜소증의 장애우는 그랬다.
철거된 집값으로 ‘딱지’를 얻었지만 아파트 잔금을 치룰 돈이 없어 헐값에 딱지를 팔고야 만 하는 주인공. 70년대에 힘없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로 대변되는 주인공 아버지는 칼갈이부터 건물 유리딱기, 수도고치기 등 안해본 일이 없지만 결국 공장굴뚝에서 자살을 한다. 비록 ‘난쏘공’ 정도는 아닐지라도, 거리에서 여리꾼으로 일하는 왜소증 장애우에게서 나올 이야기는 많을 듯했다. 그런데 막상 홍성배씨를 만나고 나서의 느낌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거다. 지금부터 홍성배씨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우선 홍성배씨는 왜소증 장애우로서 서럽다는 기억이 없는 듯했다. 반면 부모의 마음은 달랐다. 3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난 홍성배씨는 태어날 때부터 왜소증 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니 부모 된 입장에서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매학기가 시작되면 성배씨의 부모님은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부탁말씀을 잊지 않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학교에서 돌아온 홍성배씨를 붙잡고 물어보곤 했다.
“혹시 학교에서 놀리는 애들은 없니?”
그럼 성배씨의 대답은 간단했다.
“없어”
더군다나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체육시간에 100미터 달리기를 하다가 쓰러진 이후로는 더했다.
“체육시간에 백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한 50미터쯤 뛰고 났더니 갑자기 하늘이 멍해지는 거에요. 그리고는 기절해서 선생님들이 많이 놀라셨어요. 장애로 인해 하체가 발달하지 않았는데 전력질주를 하니까 몸이 못 버텼나 봐요”
홍성배씨의 부모님은 그때도 학교로 쫓아와 한바탕 난리를 하셨단다. ‘애 잡을 일 있냐’고. 다행히 홍성배씨에게 아무 일도 없어서 그냥 지나가긴 했지만, 그 일이 있은 후 체육시간은 성배씨와 상관없는 수업이 됐다. 다른 아이들이 뛸 때 나무그늘에 앉아 친구들을 구경했고, 체력장 기록부에는 의례 반평균이 기록됐다.
취직도 비교적 쉬웠다. 충남 예산에서 합동농고를 다닌 성배씨는 달리 직업교육을 받지 못했다. 다행히 선생님이 추천으로 서울 종로에서 세공일을 시작했고 이후 7년 동안 보석세공일을 했다.
“세공일은 앉아서 하는데, 저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도 발이 땅에 닿질 안아요. 그러니 척추에 무리가 생길 수 밖에 없죠.”
침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았지만 아픈 건 여전했다. 일도 손에 익어 밑에 직원도 두고 부릴정도가 됐는데, 몸이 아프니 딴생각이 나더란다.
“가끔 술 먹으로 나이트나 이런 곳에 갔는데, 보면 왜소증 장애우들이 여리꾼으로 일을 많이 하더라구요. 몸이 아프니까 다른 직업을 생각하게 되고,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결국 한 2년 정도 세공일과 여리꾼생활을 같이 했다.
“달리 줄을 댈 필요도 없이 다짜고짜 업소에 찾아가 일 시켜달라고 하니까 시켜주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여리꾼생활을 시작했어요”
처음엔 ‘욱’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넉살’로 살지요
말하는 도중 홍성배씨의 오른쪽이가 심하게 다친 것이 보였다. 이를 완전히 갈아 끼워야 하는데 치료비는 빼고 이 값만 8백 50만원이 나왔다.
“화가 난 손님이 캔들을 휘둘렀는데 못 봤어요. 덕분에 이가 완전히 나갔죠”
나이트에서 종업원을 부를 때 손님들이 책상위에 촛불을 흔들면, 종업원을 배치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그런데 재수가 없으려고 그랬나. 손님이 흔드는 촛불을 보지 못했고 화가 난 손님이 촛불을 잡고 흔드는 걸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그때 맞은 충격으로 아직도 윗니는 멍이 든 것처럼 검다.
말이 나온 김에 왜소증 장애우라고 손님과 부딪힌 일은 없는지 물었다.
“왜요. 손님들 중에 제가 작다고 머리를 "탁"하고 치면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처음에는 욱하고 성질이 났지만, 지금은 잘 참아요. 손님들도 일단 안좋게 보니까 제가 위축되더라구요. 세공일 할 때는 몰랐던 감정이죠”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사람들이 쳐다보면 성배씨는 욕을 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싫더라구요”
길거리에서 쳐다보는 사람한테 욕을 하는 바람에 싸움이 붙은 적도 있다. 덕분에 경찰서까지 갔다.
“울기도 하고 사람들보면 위축되고 그랬는데. 이 일을 하면서 생각이 변하더라구요. 흔히들 ‘넉살좋다’고 하잖아요. 제가 딱 그래요”
길거리에서 광고전단을 나눠주면, 사람들은 왜소증 장애우가 나눠주니까 우선 관심을 갖는다. 직업에 장애가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으니 받아들인 듯도 하다. 왜소증 장애우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하니 홍성배씨가 받아들일 수밖에.
그래도 ‘희망’을 놓고 싶진 않아요
여리꾼 생활만 7년째 접어들다 보니 사연도 많기는 하다.
“혹시 ‘한심해부자’라고 아세요. 텔레비전에도 나왔는데…”
한심해부자는 텔레비전에 나올 정도로 그 방면에서는 유명한 왜소증장애우다. 아버지 ‘한심해’와 아들 ‘두심해’가 파트너로 무대에서 마술퍼레이드도 하고 재치 있는 말솜씨로 손님한테 인기를 끌었다. 홍성배씨도 한 때 여리꾼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대에서 할만한 마술을 배워 볼 생각도 있었다.
“마술같은 걸 배워서 무대에서 해 볼 생각도 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잘 모르니까 아는 형한테 가르쳐 줄 사람을 알아봐 달라고 돈을 맡겼더니, 그 돈을 가지고 사라져 버렸어요”
시흥에서 룸싸롱을 운영할 때는 더 기가 막힌 일을 당했다. 그동안 모은 돈을 몽땅 들여 연 가게니만큼 열심히 했고 손님도 괜찮았는데, 그것도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믿고 맡겼던 인감이며 통장을 담보로 총무가 사채를 쓰고 홍성배씨를 보증인으로 세운 것이다.
“그 일이 있고나서 "운 없는 가게"라고 해서 문을 닫았어요”
결국 가게 판돈을 그 자리에서 고스란히 사채업자에게 넘겨줘야 했다. 그 외에도 누나 빚을 대신 갚기도 하고 30년 조금 넘게 산 그의 인생 속에는 이런저런 사고들이 많았다. 그런 사고들이 남긴 건 ‘신용불량자’라는 낙인이다. 덕분에 아직까지 자기이름으로 핸드폰도 만들 수 없다고 한다.
그래도 사람이 대단한 건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거다. 홍성배씨 역시 이런저런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
“가끔 참고 세공일 계속할 걸 하는 후회도 해요. 세공일 같이 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엿한 가게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저도 돈이 좀 모이면 다시 장사를 시작하고 싶어요. 아직 젊으니까 벌면 되겠죠”
체념 반, 무심 반
좋은 것만 남은 건 아니다. 쉽게 돈을 벌다 보니 돈을 어렵지 않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팁이다 뭐다 해서 매일 현금이 들어오니, 한달 버는 돈이 얼마가 됐든 돈 어려운 줄 모른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경기가 좋아서 잘 벌 때는 한달에 7백만 원도 넘게 벌었지만, 물론 요즘 같은 경기에서는 어림도 없는 액수다.
또하나, 그는 여전히 손님들 앞에서는 위축된다. 외모 탓이다. 그래서 여자도 작은 사람이 좋다.
“두 번 정도 호감이 가는 여자가 있었어요. 한사람은 업소에서 같이 일하던 아가씨고 또 한사람은 손님이었어요. 근데 내가 자신이 없으니까 그냥 말았어요”
술집에서 여자들과 같이 술을 마시고, 2차를 가던 문화 속에서도 그는 별로 내켜하질 않았다.
“같이 술 먹고 2차를 가는 분위기여서 여자들과 함께 여관방에 갔어요. 그럼 전 그냥 같이 있다가 가라고 해요.”
32살의 한참 나이니 욕구가 있을 법도 한데,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도 한심해 부자가 나와서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저런 사람들은 잘 사는데…’싶더란다.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경험이 그를 체념하게 한 것이다.
홍성배씨는 지하철 무료표도 받지 않는다. 장애인증 내고 전철표 받는 것이 싫더라는 것이다. 그런 그를 보고 옆에 사람들이 장애우한테는 지하철 표가 공짜라는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는데, 그는 여전히 자기돈을 내고 지하철타기를 고집한다.
홍성배씨는 장애우라서 가슴에 한이 맺힐 만큼 서러운 삶을 살지도 않았고, 여리꾼 생활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신체조건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 선택했고 나름대로 그 생활에 적응도 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 속에서도 언뜻언뜻 상처가 보인다. 누구나 그렇듯이 반은 체념하며 받아들이고 반은 무심해지지만 여전히 그 사이에는 쓰디쓴 감정이 남기 마련이다.
파란 윗옷에 빨간 코트를 입은 나는 "짜리"
오늘도 저녁 7시면 홍성배씨는 어김없이 출근을 한다. 지하철 매표소에 천 원짜리 한 장
“저녁은 드셨소?”
“이제 나와?”
“장사 잘돼요?”
가게에서 직원들과 저녁을 먹고 나면 성배씨는 작업복을 갈아입는다. 조금은 촌스러워 보이는 파랑 윗옷과 빨강색 코드를 입으면 단장 끝. 가슴에는 스스로 ‘짜리몽땅’하다고 지은 "짜리"라는 이름을 달고 거리로 나선다. 광고전단을 나눠주는 아줌마와 티격태격하며 걸쭉한 입담도 나누고, 추울 때면 포장마차에 들어가 따뜻한 국물도 얻어 마시면서, 멀리서 손님이 나타나면 여지없이 ‘충성’을 외치면서 달려간다. ‘새로 온 아가씨 있어요’를 속삭이고 가는 손님 잘가시라고 택시도 잡아주고… 그렇게 새벽 2시가 넘도록 손님을 붙잡는 것이 그의 일이다.
일이 끝나는 새벽 3시, 집에 들어와 잠이 들면 점심때가 지나서야 일어나게 마련이고 출근준비를 해야할 시간이다. 어쩌다 일 끝나고 술이라도 마시는 날이면 늦잠을 자게 마련이고 그럼 하루살이가 바쁘기만 하다. 한달에 두 번 쉬는 날이면 인천에 사는 누나네 집에 가거나 고객관리 차원에서 단골손님을 찾아가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신다. 홍성배씨의 하루하루는 이렇게 흘러간다.
혹여 네온사인 찬란한 거리에서 누군가 ‘충성’을 외치며 당신에게 말을 걸면 한번쯤 뒤돌아보라. 그가 바로 홍성배, ‘짜리’다.
글 서현주 객원기자
사진 정선아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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