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희망으로 노래를 가꾸는 사람, 장애해방가의 작곡가 김호철
본문
80년대 후반, 노래 하나로 척박했던 노동자 문화를 일구고 20여 년이 지난 이 순간에도
노동자의 삶을 위한 노래
개인적 경험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10여 년 전 두툼한 민중가요 노래책을 넘길 때마다 그의 이름은 거의 열장 걸러 한번씩 ‘툭’튀어나왔는데, 노랫말과 곡을 함께 만든 사람으로 기억된다. 노래의 멜로디는 당시 노동자들이 당당한 사회 주체임을 선언하고 앞으로 나가도록 하는, 일종의 선전선동에 유용한 행진곡풍과 어느 자리에서건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드러내면서 쉽게 부를 수 있는 뽕짝풍의 노래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쉽다, 편하다, 평이하다’의 평가 속에는 그의 숨은 의도가 한 몫을 한다.
“노동자들은 상처를 갖고 있죠. 공돌이 공순이란 이름으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도 부끄러워서 자신의 존재를 당당히 드러내지 못했어요.”
그는 부정 당하는 존재를 스스로 인정하고 자본에 의해 생겨난 차별과 소외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의도적으로 ‘쉬운 노래’를 고집했던 것이다. 특히 그의 노래는 노동현장에 구체적인 발을 딛고 있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생생함을 담아내고 있었는데, 직설적이고 전투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건 몸과 마음, 머리가 일체가 되어야만 나올 수 있는 것이었고 시대의 부름에 충실했다는 것 아닐까.
그는 “문화에서 소외되는 것은 삶에서 소외되는 것이나 다름없죠”라며 당시 노래작업이 가졌던 의미를 전한다. 결국 만든 사람과 부르는 사람의 궁합이 잘 맞을 수밖에 없었나보다. 80년대 후반 현장노동자들은 그의 노래를 자연스레 ‘나의 노래, 우리의 노래’로 받아들였다.
태권도를 배운 이유
하지만 처음부터 노동자문예일꾼으로 활동했던 것은 아니다. 사람 좋은 선한 웃음을 지니고 있는 그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한국체육대학에서 태권도를 전공하고 밤무대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느라 1년에 반 이상은 지역을 떠돌아다니는 소위 딴따라 출신이었다. 게다가 처음 노동현장에서는 태권도를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투쟁국을 담당하기도 했다.
“형이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있다보니 어려서 찐따라고 놀림을 많이 당했죠. 아버지가 직업군인이셨는데 저에게 태권도를 가르치셨고, 늘 형 뒤에서 형을 지켜줘야 한다고 그랬어요. 어렸지만 목욕을 하다가도 누가 형 놀렸다고 하면 벗은 채로 낫 휘둘며 뛰어나갈 정도였다니까요.”
그의 형은 한 때 노동자들의 쉼터고 안식처였던 사당의원의 김록호 전 원장이다. 두 살 위인 김록호 원장은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있는데, 어렸을 적 그가 절룩대며 걸어가고 있으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항상 뒤에서 5명 정도는 따라다니며 흉내를 내고 놀려댔다고 한다. 그러나 김 원장이 당시 한국 최고의 엘리트들만 모이는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그의 천재성에 감히 주눅이 들어 놀리지 못했던 것인지, 여하튼 중학교 졸업까지 그는 형의 그림자와 같은 보디가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나팔을 만나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한국체육대학에 들어갔지만 형과의 생활에서 단련된 정의감은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이어져 사회적으로 승화(?) 되었던 것 같다. 학교보다 거리에 있던 시간이 많았고 결국 ‘시국사범’이라는 꼬리표를 안고 퇴학처분을 받아 졸업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고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살벌했던 80년대 초 곧바로 징집대상 1호로 군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서 운명의 그것을 만났지요. 악기를 다룰 줄은 몰랐어도 중·고등학교 시절 청음실력(음악을 듣고 악보로 옮기는)이 뛰어나 칭찬도 많이 받았는데 군악대를 뽑는 거예요. 경험자가 아니더라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뽑는 시험이 있었는데 거기서 합격해 3년 군복무 내내 트럼펫을 연주하게 된 거죠.”
그가 노동해방의 ‘나팔수’라 칭하는 연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삼남매는 용감했다
그의 꿈은 원래 비행기 조종사였다. 사춘기 시절 생떽쥐베리의 야간비행이란 책을 읽고 조종사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꿈’이었단다.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타던 날, 그는 ‘고공공포증’이 무엇이라는 걸 제대로 경험했다나.
제대 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건설 노동자로 가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시국전과를 이유로 포기해야 했다.
“호적에 빨간 줄 있는 사람이 온전히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죠. 그래서 편하게 먹고 살 건 딴따라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잠시잠깐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재즈트럼펫 연주자의 꿈을 갖기도 했는데….”
그러나 그 또한 한때의 꿈으로 남겨둬야 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물결이 사회적으로 서서히 오름을 느끼고 있을 때라 이런저런 생각들이 오가기도 했고, 뭔가에 푹 빠지고 싶은 심정도 있었던 때, 그는 집으로 가스 배달 온 청년이 힘들게 계단을 올라오는 것을 보고 도와준다고 거들다가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밤무대를 잠시 쉬게 된다.
그 사이 현장 노동운동가로 먼저 활동하고 있던 여동생의 꼬득임(?)에 넘어가 구로공단의 한 공장에 위장취업이 성공하게 되는데, 그는 여기서 그가 가야 할 평생의 길은 ‘노동해방’의 길이라고 정리한다.
김록호, 김호철 두 형제에 대한 정보만 있던 터라 “형제는 용감했다”인줄 알았더니 가족 전체가 운동권에 진입해 있다. 여하튼 “삼남매는 용감했다”가 더 적절한 듯 싶다.
운동(sports)선수, 운동권(movement) 노동자 되다
잘나가던 태권도 운동(sports)선수에서 밤무대 딴따라로, 다시 ‘노동해방’의 기치를 내건 운동(movement)권 노동자로 거듭난 그에게 이 모든 경험은 참으로 유효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87년 봄 그는 조직원 한 사람이 연행되는 바람에 회사를 나와 수배자 생활에 접어들었고 회사에선 해고를 당했는데, 활동의 근거를 만들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던 것 같다. 그는 당시의 일화를 몇 가지 이야기하며 숨가쁘고 치열했지만 행복한 회상에 젖는 듯 했다. “태권도 했다는 이유로 투쟁국에 소속되어 언제나 현장과 거리의 맨 앞에서 기습시위며 타격투쟁을 선도했죠. 민주당사는 물론 경찰서까지도 점거했다니까요. 그들은 우릴 가뒀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린 2박 3일 집기를 부수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버텼으니까요.” 말을 이어가는 모습에 점점 힘이 더해진다. “갈비뼈 나가고 내 나팔 찌그러지고 그랬어도 당당하게 금전적 보상을 모두 받아냈어요. 그 돈으로 조직 건설하고 투쟁기금을 마련했죠.” 해고자 시절 투쟁국 활동의 야사는 너무 많아 일일이 말하기도 힘들다는데, 이야기를 듣자하니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해 번쩍 나타나 온 몸으로 싸우고 있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렇다면, 노래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쌈꾼에서 문화활동가로
“이렇다할 노동자 노래 하나 갖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워 노래작업도 함께 했죠. 그 때 만들어진 노래가 <단순조립공> <x에게> <포장마차> 같은 노래였는데, 내내 지겹게 노가바(노래가사바꾸기)만 불러대던 현장노동자들이 참 좋아했어요. 그래서 근거지를 문화국으로 바꿔 활동하게 됐죠. 그 후 계획적인 노래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흩어지면 죽는다~’로 시작되는 <파업가>, <딸들아 일어나라> 같은 노래가 본격적인 노래운동을 시작하면서 만든 곡들입니다.”
그가 노래작업에 있어 범상치 않은 능력을 발휘하자 이를 지켜본 주변의 동료들은 그가 구속된 후 88년 3월경에 나오자 문화국으로 배치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삶은 여기서 더욱 구체화되었던 것 같다.
“구로지구노래패연합(구노련) 결성을 시작으로 구로 1,2,3 공단의 노래패, 풍물패를 모아 활동을 했어요. 이후 이들은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건설의 핵심 활동가들이 되기도 했는데 가장 보람된 나날들이었습니다. 제 정체성도 보다 분명해진 시기구요. 그 전에는 쌈꾼이라고 생각했는데 문화활동가로서 명확히 인식한 거죠.” 이후 한 걸음 더 나아가 최초의 전문 노래운동 조직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노래단’을 결성, <파업가>가 수록되어 있는 이들의 음반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20만장 이상 팔려나갔고, 전노협 건설을 위한 노래판굿 꽃다지를 공연하기도 했다. 노래와 극을 통해 그는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 그리고 희망을 품게 했고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전노협 건설 후 제1회 전노협 노동자상 수상의 영광도 안게 되었는데…, 음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노동자상은 감사패로 둔갑했는데, 당시만 해도 딴따라는 딴따라일 뿐 노동자로 보기에는 애매모호 한 구석이 있었다는 게 주최측의 설명이었단다.
이후 그는 노동자 노래단, 예울림 활동으로 이어지다 이후 통합된 노래패 꽃다지를 끝으로 전노협 활동에 매진한다.
아들, 윤
그러다 그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 ‘노동의 소리’를 통해 현장의 소식과 사건을 발빠르게 알려내고 노동현장의 문예일꾼들을 지원하는 일. 그러나 스스로는 이 시기 정태수 열사 추모음반‘태수야’와 노동가수 박 준, 노래공장의 음반을 내는 것 이외에 활동이 좀 뜸했다고 평가한다.
“첫째 아이가 윤(10, 남)이인데 2살쯤 록호 형이 애가 눈을 맞추지 않는다고 병원에 가보라 해요. 근데 진짜 그런 것 같더라구요. 병원에서 자폐 증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고, 한동안은 여느 부모들처럼 좋다는 데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치료받느라 정신이 좀 없었죠. 윤이는 남을 잘 배려하는 성격이라 친구들과 싸울 일은 별로 없어 걱정은 안해요. 나중에 사춘기쯤 되면 그 또래 아이들 특성답게 굴지 못해 친구가 없을 것 같다는 걱정은 있지만요.”
윤이의 이야기에서는 말을 아끼는 듯 했지만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그저 윤이가 공부나 게임보다 잘 뛰어 놀고 살이 좀 빠졌으면 하는 바람뿐이란다.
장애해방가로 맺은 인연
그래서 였을까? 그는 장애로 인한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집회에서 부를 수 있는 이렇다 할 노래 하나 없을 때, ‘장애해방가’로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장애해방가’를 만들게 된 동기는 어느 날 박경석(노들장애인야학교장), 김종환(전 정태수열사추모위원회 사무국장) 두 사람이 저를 찾아왔어요. 그 전에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는데, 두 사람이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장애대중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 하나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더군요.”
한 때 그는 장애운동을 소위 ‘노동해방, 민중해방의 세상이 오면 다 해결되지 않을까’하는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물론 장애가 있는 사람을 가족으로 둔 한 사람으로 늘 관심과 고민은 안고 있었지만 말이다. 두 사람의 방문으로 정리가 쫙~되는 느낌, 시원한 느낌, 서로 통하는 느낌을 받아 행복했다고 전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건강하고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장애운동을 하는 동지들이 있다는 것에 감탄했죠. 늘 함께 하겠다고 결심했어요. 그 부지런함과 투명성을 보면 노동문예활동가의 한 사람으로 늘 많은 반성을 하게 되거든요.”
그러면서도 그는 “지금 현실에서의 타협과 대화는 힘있는 자들의 무기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장애운동의 방식이 그것과 결별하지 못한다면 결단코 이기는 싸움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낮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늘 현장에서
이 부분에선 좀 심각해 보인다. 작금의 노동운동 현실이 배경에 깔려있다.
그는 최근 노동운동의 현실을 보며 심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적과의 싸움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내부의 적에 대해 말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지켜보고 있는 중이죠. 어디까지 가나. 실명을 거론해서라도 그들의 허구를 밝혀낼 작정입니다.” 그는 사회적 교섭과 노사정 참여 운운하는 것은 힘없는 자들이 끝까지 움켜쥐고 있던 삶과 희망을 포기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했다.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에게 떡고물 나눠줄 자본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그는 최근 ‘노동의 소리’게시판을 통해 “문예는 ‘참’을 줄을 뿐더러 ‘거짓’도 알리고 몰아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노동운동, 문예운동 20여 년 동안 그에게 ‘현장’은 기본이자 중심이었다.
“늘 사람들의 움푹 파인 주름 속에서 함께 하고 싶습니다”
작금의 상황에 대해 그는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하고 있었다.
결코 피해가지 않을 것
“뭐라 해야 하나…, 근데 너무 상투적인 질문 아니예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마지막에 던진 “지금 행복한가요?”란 질문을 받고 잠시 쌩뚱맞다는 듯 머뭇거렸다. 하지만 지금 그 사람이 처해진 상황과 그가 느끼는 여러 것들, 그 속에서 어떤 기대와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지 구체적이진 않지만 대충 감을 잡기에는 유효한 질문 아닐까.
“노동운동가의 한 사람으로서는 최악의 나날을 보내고 있죠. 그래도 결코 피해가지 않을 겁니다. 노동운동의 첫마음을 기억하며 다시 천천히 나 스스로를 다잡아 갈 것입니다. 더욱더 강한 활동가가 되어 현실 노동운동에 깊숙이 관여 해야죠. 물론 문화예술 활동가의 한사람으로서는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울 때 힘이 되는 동지들이 늘 곁에 있고 추운 골방에서 난로 때며 쐬주 한잔 마실 수 있는 공간도 있고, 더욱이 지금 당장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노래생각’마저 있으니 행복하지 않고 배기겠어요?”
어쩌면 현실에서의 하루하루는 힘없고 빽 없는 사람들에게 그저 버티고 견뎌야 하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수 있다. 삶은 자기와의 힘겨운 투쟁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부정할 수 없는 우리네 현실이다. 그러나 그는‘양심’이란 바탕 위에 작은 희망 하나를 조용히 키워나가고 있는 듯 하다.
그를 만나보니, 백무산 시인의 시(詩) ‘누군가를 밟고 있었다면’의 한 구절처럼 “언제나 길과 맞닿아 길과 한 몸이 아니던가…” 란 싯구가 떠올라졌다. 스스로 위안을 삼기 적절한 문구 아닌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냥 그렇게 오던 길을 계속 갈 것만 같다.
삶의 희망, 노래
“밤에 작업하는 딴따라, 가끔 낮에 시장통에 들려 멍게랑 소주랑 한잔 걸치고, 아줌마 아저씨들의 시끄러운 삶의 소리를 들으면 악상이 떠오르기도 하고 노래 생각도 삼삼하죠”라고 말하는 그이의 목소리에 삶의 진정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맹세했다면 끝까지 간다’‘열 번의 타협보다 천 번의 계산보다, 한 번의 혈기를 모아 투쟁으로 말하라’는 그가 만든 노래 가사처럼 현실은 결코 호락호락 하지 않을 것이다.
노래는 시대의 아픔을 달래주는 따뜻한 벗이자 현실과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각성의 힘이기도 하다. 때론 시대정신을 말하고 희망의 빛으로 반짝인다. 그에게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문화적 전술이 유효했을 때 노래는 일종의 무기였죠. 그러나 지금은 삶의 희망입니다”
그는 희망을 가꾸어 가는 그 길에 서 있었다.
글·사진 홍여준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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