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늦은 공부 시작하는 김문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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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특수학교에서 나이가 많다고 입학을 거절당해 유명해진(?) 장애우가 있다. 목포시에 살고 있는 김문재(44)씨의 이야기다. 시각장애(5급)에다가 지체장애(2급)까지, 중복장애를 갖고 있지만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에 특수학교에 입학원서를 냈건만, 학교로부터 거절당한 것이다. 이유는 한가지였다. ‘고령화’ 그가 학교측으로부터 받은 거절 이유는 이 한가지뿐이었다.
“전화로 그 말을 해주더라구요. 제가 너무 나이가 많아서 같이 공부하게 될 사람들한테 방해가 된다구요. 근데 웃긴 건 특수학교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거에요. 일반 학교들은 나이 제한 조항이 없는데 이상하게 특수학교가 23세까지만 입학할 수 있도록 전남도교육청이 만들어 놓은 거죠.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참 힘들더라구요. 그게 작년 12월이었어요”
학교측의 일방적인 전화통보를 받고 김문재씨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 자신의 문제로 진정서를 제출하게 된 것이다.
〈입학거절에 인권위제소라는 강수로 맞대응〉
김문재씨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 접수’라는 강수를 둘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평소 김문재씨의 ‘장애우들의 권리찾기’의식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소에 시민. 사회단체에서 활동을 해오고 있었어요. 그래서 입학 거절이라는 문제가 터지고 나서 그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풀 것이냐를 가지고 고민을 했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접수한 것도 그렇게 해서 생각해 낸 거에요. 입학거절 당한 사람이 저 하나는 아닐테니까요. 잘못된 건 고쳐야죠”
실제로 김문재씨랑 똑같은 이유로 입학거절을 당한 장애우가 3명이었다. 결국 김문재씨의 진정으로 인권위는 목포를 방문하고, 전남도교육청에 입학연령제한을 없애라는 권고문을 보냈다고 한다. 도교육청은 언론을 통해 ‘고령화를 들어 입학을 거절하는 등의 장애우들에게 불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사과문도 냈다. 김문재씨는 3월 10일부터 은광특수학교에 입학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김문재씨의 행동이 단순히 자신의 입학거절이라는 억울함을 풀기 위한 일시적인 행동이 아니였다는 것은 평소 그의 활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목포에 경실련이 생기면서 첫 사업으로 ‘장애우와 함께 하는 어울마당’이라는 행사를 했는데 그게 인연이 됐어요. 그때부터 경실련 회원으로 사회복지분과에서 활동하게 된 거죠. 원래부터 장애우들의 권익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제가 경실련과 인연을 맺은 게 4년 전인데, 그 때만해도 목포에 장애우 편의시설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정도였어요”
김문재씨가 활동하는 경실련의 사회복지분과는 모두 12명으로 한달에 2∼3회 장애우편의시설 실태조사를 하고 있다. 관공서 건물이나 우체국, 농협 등을 돌아다니고 문제가 있는 곳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실제로 시청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요구하기도 했고, 장애우를 위한 병원 화장실 설치 등의 성과를 내기도 했다.
사실 김문재씨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려 했던 것도 이런 행동과 무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고 나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싶었거든요. 직업으로가 아니라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고 장애우들이 살아가는 시설이 워낙 어려우니까요. 요즘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보니까 한계를 느끼는 경우가 많았어요. 지금 정도만 활동한다면 그냥저냥 해나갈 수 있지만, 좀더 전문적인 공부를 해보고 싶어요. 많이 알면 많이 일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름이 문재라서 그런지 인생에 문제도 참 많았어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가지고 베스트셀러 한 권은 쓸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야기 많고 할 얘기 많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김문재씨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가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싶은 것도 다 사연 있는 인생을 살아온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제가 중학교까지 밖에 졸업을 못했거든요. 고등학교를 진학을 앞두고, 집안형편이 어려워지기도 했고, 또 선천성 시각장애라서 집중해서 칠판을 보거나 하는 게 너무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진학을 포기했어요. 그랬는데...”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그가 시작한 건 석유배달 일이었다.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문재씨에게 쉽기만 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3년 넘게 그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친구가 모는 오토바이 뒤에 타고 돌아오는 길에 뒤에서 오던 트럭에 치인 것이다. 그 사고로 문재씨는 3년 8개월을 병원신세를 져야만 했다.
“이름이 문재라서 그런지 인생 살다보니 문제도 참 많았어요. 같이 탔던 친구는 별로 다치지도 않았는데 전 그 사고로 오른쪽 팔을 못쓰게 됐으니까요. 사고로 지체 장애 2급을 받았지만, 트럭은 뺑소니를 쳐서 병원비 한푼 못 받아 냈어요. 사고가 나고 처음에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지, 한 쪽 팔만 잃고 병원을 나올 수 있었죠”그는 이야기하는 몇 시간 동안 연신 오른쪽 팔을 움직여 가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했다. 왼손이 몸에 묶인 듯 움직일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많이 움직였고, 그렇게 자신의 환경과 장애에 적응해 왔던 것이다.
〈독학으로 공부하고 전기수리점으로 성공했지만...〉
병원에서 1년쯤을 지내고 나니, 문재씨는 슬슬 자신의 앞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각장애라고 하지만 5급이라서 생활하는데 별다른 지장이 없었는데 사고로 왼쪽 팔을 못쓰게 됐으니 뭔가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가 전기기술을 배워보라고 권했다. 당시만 해도 동네 전파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문재씨는 급한대로 책을 한 권 구입했다고 한다.
“팔을 다치고 나서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하게 됐어요. 선배 권유도 있고 해서 공주 전대병원에서 전기기술에 관한 책을 한 권 샀어요. 그때가 병원생활을 시작한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니까 그 뒤로 2년 넘게 병원에서 독학으로 전파사를 차릴 준비를 했죠”
문재씨는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목포 대성동에 전기수리점을 냈다. 기술이 좋다고 소문도 나고 해서 손님도 많았다고 한다. 문재씨는 냉동장비를 전문적으로 고쳤는데 조그맣게 시작한 가게를 늘려 2개를 얻어 종업원까지 둘 정도로 사업이 잘 됐다. 문재씨의 인생에 가장 경제적으로 성공한 시기였다고 한다.
“그때 돈도 좀 벌었죠. 지금이야 물건도 흔하고 값도 싸서 망가지면 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때야 사람들이 뭐든 고쳐서 쓰는 일이 흔했죠. 또 밥통을 사건, 냉장고를 사건, 업체에서 서비스해주는 일도 별로 없었구요. 그러니 사람들이 그냥 동네에 있는 전파사를 이용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지 전자업체들의 서비스가 발달하면서 손님이 줄더라구요.”
전기일을 관두고 다른 일을 시작할까도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일을 접고 나니 그렇게 번성했던 사업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중에 남은 돈이 별로 없었다. 그 동안 벌어들인 돈이 동생 뒷바라지로 다 쓰였던 것이다. 지금은 맘잡고 잘 살고 있는 동생이 한동안 방황하면서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고, 장남인 문제씨가 변호사를 선임해주거나 사고처리까지 도맡아서 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봉사활동 시작하면서 사회복지에 관심 갖게돼〉
문제씨가 수리점을 관두고 시작한 일은 봉사활동이었다. 청게에 있는 한 수용시설에 들어간 것이다. 페교가 된 초등학교 건물을 얻어 장애우와 노인들을 모셔놓는 곳이었는데, 말이 시설이지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문재씨가 그곳에 머문 기간은 1년이 채 안됐다. 장애우나 어려운 사람을 도울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정부 보조금을 받으려고 혈안이 된 것이 너무 뻔히 보여 마음이 편하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잊지 못할 노인도 한 분 만났는데, 문재씨가 폐교에 머물 당시 보살피던 김일동(67)이라는 할아버지다. 7개월이 넘도록 대소변을 받아가면 수발을 들었더니, 막상 시설을 나오면서도 마음에 걸려 문제씨가 나올 때 모시고 나와 요양원에 모셔다 드렸던 것이다.
“요양원에 모셔다 드리고 나오는데 제 손을 잡고 놓질 못하시는 거에요. 우시기도 엄청 우시구요. 근데 어쩌겠어요. 걸음이 안떨어지지만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나왔죠. 그 뒤에 기저귀를 사들고 한번 더 찾아뵀는데...절 못 알아 보시던데요. 나이가 드셔서 절 기억하지 못하시는거죠.”
그 일이 계기가 된 것인지 문재씨는 사회복지나 장애우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전 휠체어 장애우랑 결혼할꺼에요”〉
문재씨는 지금 15평짜리 영구임대아파트를 얻어 혼자서 생활하고 있다. 결혼 못하고 혼자 사는 문재씨를 안타까워하는 어머니 때문에 집에서 나와 혼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왜 결혼하지 않느냐고 묻는 질문에 선뜻 “전 휠체어 장애우랑 결혼할꺼에요”라는 말을 했다.
“육체적 장애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정신장애는 정말 극복이 안되거든요. 세상 돌아가는 거 보세요. 요즘 사람들은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잖아요. 전 어머니한테도 이미 이야기했는걸요. 휠체어 장애우랑 결혼할 생각이라구요. 그래서 가족들도 다 그런 줄 알고 있어요”
문재씨가 비록 중복장애를 갖고는 있지만 생활하는데는 별다른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문재씨의 확고한 의지가 놀라웠다. 시력장애가 있지만 일상생활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고, 왼팔을 못쓰지만 혼자서도 생활한 걸 보면 그것 또한 별다른 어려움이 되는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3월말에 목포에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생겨요. 아직 별다른 계획은 없지만 할 수 있으면 전 장애우들의 결혼문제를 꼭 해결해 주고 싶어요. 모임도 갖고 만남의 기회도 주선하고...마치 선 보듯이 만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모임가운데서 만날 수 있으면 장애우들의 결혼문제도 조금은 쉽게 풀릴 수 있지 않을까요.”
장애우들의 결혼이 힘든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상대를 만날 기회가 적다는 것이다. 활동이 불편한 장애우들을 바깥출입이 별로 없고 모처럼 나와도 별다른 장애우들만의 문화가 없어서 이성을 만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다. 또 하나는 장애우일수록 자신보다 장애가 덜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장애를 자지고 혼자서도 살기 힘든데 상대마저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 더 어려울 거라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김문재씨가 휠체어 장애우를 결혼상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건 그의 생각이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던데...〉
“7년 전부터 ‘애인해’라는 친목모임에 다니고 있는데요 한 달에 한번 모여서 밥 먹고 가는 게 고작이에요. 근데 대부분 중증장애우들이에요. 50명 정도가 회원으로 있는데, 돈이 되는대로 모아서 장애우들의 쉼터를 만들 생각을 갖고 있어요. 벌써 모아둔 돈이 4천만원이 넘었거든요. 그걸로 5월이면 땅을 사고...건물은 대출로 짓던지 할 생각이에요”
장애우들의 쉼터를 만들거라는 계획에 그는 신이 나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인생에 몇 가지 문제들이 남아있다. 인권위에 진정서까지 내면서 어렵게 들어갔던 학교를 휴학중이라는 것도 그렇다. 집에서 학교까지 30분이 걸리는데 통학문제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또 막상 수업을 들어봤지만 일반중학교까지 졸업한 문재씨에 비해 수업수준이 턱없이 떨어졌다. 같은 반에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있어서 수업진도를 문재씨에게만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특수학교는 문제씨가 생각했던 그런 학교가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문재씨는 어렵게 들어간 학교를 휴학하고 검정고시나 통신고등학교를 지원해볼 생각을 하고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의 말대로 이름이 ‘문재’라 그런지 그는 이런저런 문제가 많이 생겼던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름대로 인생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고, 아직도 몇 가지 문제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웃고 있다. 자신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사회단체 활동이나 모임을 통해 자신보다 힘든 사람들을 돕거나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하겠다며 웃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봄 햇살아래 참 아름답다.
글/사진 서현주(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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