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방송인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시각장애우 심준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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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간에 유명한 장애우가 있다. 시각장애우로 방송진행을 맡은 심준구씨(1급시각장애우). 시중 일간지를 비롯해 어지간한 신문에는 단신으로라도 그의 이야기가 다 실렸다. 서글서글해 보이는 외모와 건장한 체격,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우 텔레비젼 진행자, 21장이 넘는 대본을 다 외운다는 이야기, 3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런저런 수상경력까지. 심준구씨는 언론이 좋아하는(?) 장애우의 모습은 다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성공한 장애우의 모습인 것이다. 과연 그게 다일까? 심준구씨를 만나 정말 그의 인생이 그렇게 잘나가고만 있는 건지 그의 속내를 들어봤다.
처음 심준구씨를 취재해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인터넷을 뒤졌다. 섭외를 하기 위해서는 어디로 연락할지부터 알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취재하려는 사람의 이름을 치면, 대부분의 경우 인터넷 검색 창에는 수도 없이 많은 정보가 뜨게 마련이다. 그럼 그 목록 속에서 내가 찾는 장애우에 관한 정보는 어디쯤 있는지 찾아야 한다(대부분 한 페이지를 넘겨야 내가 찾는 장애우의 이름이 나온다). 그러나 심준구씨의 경우는 처음부터 ‘내가 찾는 장애우-심준구’, 그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 심준구라는 장애우가 정말 유명하긴 유명하구나 싶었다.
일단 연락처를 알아내고 나서는 전화를 걸어 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전화를 통해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참 듣기 좋았다. 일반인들보다 한 음절 높은 톤에 깨끗한 음색까지, 아마 모르긴 몰라도 방송진행자로 발탁된 이유 중에는 듣기 좋은 목소리도 한 몫 했을 게 분명하다.
인터뷰 날짜는 방송녹화 날로 잡았다. 섭외를 끝냈으니 다음으로 인터넷에서 모은 심준구씨에 관한 기사들을 프린트해서 읽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약시학급에 입학〉
심준구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진행된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기 시작하면서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고 한다. 망막색소가 변해서 시력이 떨어지는 경우로, 현재는 사물이 아주 흐릿하게 보이는 정도까지 나빠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빠지기 시작한 시력은 6학년이 되면서 칠판글씨가 안보일 정도였다. 다행히 중학교는 일반학교로 진학을 했지만 옆에 친구가 칠판 글씨를 읽어줬고, 시험을 볼 때는 감독관 선생님이 문제를 읽어줬다고 한다.
그렇게 겨우겨우 중학교를 마쳐갈 무렵, 중3 기말고사 시간에 들어 온 선생님이 문제를 읽어줄 수 없다고 하셨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연합고사를 봐야 하는데, 시각장애우를 위해서 문제를 읽어주는 규정이 없다며 안 읽어 주시더라는 거다. 보통은 그런 선생님이 밉고 원망스럽기도 하련만, 심준구씨는 이 일로 인해 자신이 시각장애우라는 현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교육청에 알아봤더니 정말 읽어주는 규정이 없더라구요. 그때만 해도 장애우에 대한 정보가 더 없었던 때라, 맹인학교는 전맹인 장애우들만 가는 줄 알았죠. 그러니 맹인학교에는 갈 생각도 못했고, ‘나 같은 약시학생은 갈곳이 없구나’하는 생각에 아주 막막했는데...언젠가 뉴스에서 약시학급을 만든다는 들은 적이 있어서 그걸 알아보고 다녔어요”
당시에 여의도 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약시학생 20명 정도를 뽑았다고 한다. 약시학급은 교실 천장이 모두 형광등으로 돼 있어서 다른 반보다 훨씬 밝았고, 수업시간에 확대경이나 망원경 같은 걸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다행히 심준구씨는 시험에 붙었고 약시학급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장애를 인정하지 않는 게 바로 심적장애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는 심준구씨는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서 어머니도 공장을 다니시던 때라 대학진학은 생각도 못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수소문 끝에 상일동에 있는 시각장애우 복지관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시각장애우들에게 피아노 조율을 가르쳐준다는 정보를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이 안되려니까 매년 뽑던 피아노 조율반을 그 해부터는 2년에 한번씩 뽑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전년도에 뽑았으니 심준구씨가 찾아간 해에는 피아노조율과정이 개설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피아노 조율을 배우기 위해서는 1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 1년 동안 심준구씨는 점자와 보행을 배웠다고 한다.
“전 통학을 하면서 공부했는데 첫날은 복지관에서 잤거든요. 그런데 첫날 캐인(시각장애우가 걸을 때 쓰는 지팡이)을 나눠주니까, 다들 울더라구요.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고나 병으로 시각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이라, 시각장애우가 된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마치 캐인을 받아든 순간 시각장애를 갖게 된 것처럼 우는데... 아마 그 캐인을 받아들고서야 자기자신이 시각장애우라는 걸 받아들이고 현실로 느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심준구씨는 자신의 장애를 감추고 싶어서 ‘별짓’을 다했다고 한다. 지나가다 투명 유리창을 들이받기도 하고, 서있던 자동차의 백밀러를 부러뜨리면 얼른 맞춰놓고 도망가기도 하고, 쓰레기통이 치이면 “이런 걸 왜 여기 갖다 놓은 거야!”하면서 마치 일부러 찬 듯이 능청을 떨었던 것이다.
“안보이니까 실수를 하면 재치와 유머로 넘겼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하는 거, 그게 바로 심적장애 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심준구씨가 인생의 대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은 20살이 되던 해였다. 취업을 위해 상담하던 교회전도사의 권유로 수련회에 쫓아갔다가 거기서 하나님을 알게된 것이다. 그 날 이후 심준구씨는 피아노 조율사를 하겠다는 생각을 접고, 1988년에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여서 학비는 교회에서 지원해줬다. 신학으로 대학원까지 마치고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을 하면서 무려 8년 동안 심준구씨는 교회 일에 전념했다.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우 컴퓨터 속기사 〉
그러다 심준구씨는 97년에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서 실시하는 연구과정에 지원을 하게된다. 장애인직업영역확대의 하나로 시각장애우에게 헬스 키퍼와 컴퓨터 속기를 가르치는 연구과제였는데, 그가 지원한 것은 컴퓨터 속기사 과정이었다. 5주 과정으로 시작했던 교육과정이 성과를 내자, 연장에 연장을 거듭해 무려 10개월 동안 컴퓨터 속기를 배웠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국가공인 컴퓨터 속기사 3급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국가공인 자격증을 가진 장애우는 심준구씨가 최초였다. 지금도 인터넷을 뒤져보면 심준구씨와 관련돼 당시에 기사화 됐던 내용이 나온다. ‘세계 첫 장애인 컴퓨터 속기사’. 모 일간지에 실린 심준구씨의 기사제목이다.
그 뒤로 심준구씨의 인생은 언론에 보도되는 유명인의 인생이 됐다. 일도 잘 풀렸다. 컴퓨터 속기사를 시작한 이듬해 청각장애우를 위한 자막방송이 시작되면서 회사사업도 번창하기 시작했다.
“만약 제가 자막방송이 시작 된 다음에 컴퓨터 속기를 시작했다면, 지금처럼 일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초단위로 지나가는 대사를 일일이 쳐서 내보내기에 시각장애우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저 같은 경우는 참 운이 좋은 경우죠. 제가 입사하고 1년 후에 자막방송이 시작된 덕분에 자막방송을 기획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가 자신을 ‘럭키맨-행운의 사나이’라고 부를 정도로 심준구씨의 인생은 정말 운이 좋았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그의 인생이 힘든 곳에서부터 시작했다는 말도 된다. 어린 시절 홍제동 산동네의 내리막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고, 지하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함께 생활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했는가 하면, 산동네가 철거돼 개천 옆에서 천막을 치고 천막생활을 하기도 했다. 공장에 다니는 엄마를 생각해, 시각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부터 자기일은 스스로 알아보고 다녔다.
“시각장애를 가졌던 제 환경 때문에 체념하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가만히 있지 안았어요. 장애를 가진 제 맘 고생만큼이나 가족들의 맘 고생도 있으니까요”
〈“전 운이 좋았지만, 사회보장제도는 반듯이 필요합니다”〉
심준구씨는 장애우에 대한 두 가지 소신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장애우를 위한 사회보장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운이 좋았고 항상 능력보다 더 높게 평가받아서 이 자리까지 왔지만, 모든 장애우들이 자신처럼 운이 좋은 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요구와 더불어, 고생스럽더라도 노력하는 자세가 장애우에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회보장제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닌 걸 어떻게 합니까. 제 인생은 여기에 있는데요. 그러니까 고생스럽더라도 노력해야죠. 사회보장제도와 장애우 개인의 노력. 전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야한다고 봅니다”
그에게 장애우들 중에는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고, 심한 경우 노력해야 하는 것도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제가 장애우니까 사회보장제도와 장애우들의 노력을 50대 50이라고 이야기하지, 만약 제가 비장애우였으면 80대 20 정도. 아마 그렇게 이야기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심준구씨 역시 꾸준한 노력으로 자신의 인생을 가꿔가고 있다. 얼마 전 경인방송으로부터 들어온 방송진행 제의를 덥썩 받아들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방송을 시작한지 2달. 일주일에 한번씩 녹화방송을 하는데, 심준구씨가 외워야 하는 방송분량이 함께걸음 잡지 만한 종이로 자그만치 21장이다. 게다가 난생 처음 하는 방송진행이라 어려운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방송자체가 주는 스트레스에, 실수에 대한 두려움까지...
하지만 “쉬고 싶을 정도로 힘든가?”고 묻는다면 그는 “그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스텝들에게 미안하고 스트레스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많이 익숙해져서 할만하다는 것이다. 녹화방송 7번 한 신출내기 방송인 심준구씨는 이제 방송이 뭔지 알겠다며 몇 번만 더하면 자신 있다고 말했다. 심준구씨랑 같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코미디언 김혜영씨에게 어떠냐고 물어봤다.
“워낙 대본을 달달달 외워오니까, 별다른 실수는 없어요. 잘하기도 하구요. 다만 진행하는 사람들끼리는 가 눈빛으로 얘기하면서 사인을 주고받는데, 심준구씨한테는 그게 안 통해요. 그래서 서로 ‘쿡’ 찔러서 표시하곤 해요. 그 외에는 별 문제없이 잘하고 있어요”
〈함께걸음 10년 후, 심준구씨를 만나보면...〉
솔직히 말하면, 인터뷰 전에 심준구씨에 관한 기존의 기사들을 읽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아차’ 싶은 마음이었다. 그 동안 ‘사람 사는 이야기’를 통해서 만났던 장애우들의 이야기와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장애우로 세상을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누가 한번쯤은 들어줘야 할 것 같은 장애우들의 삶을 이야기했다면, 심준구씨는 비록 장애우지만 누구 못지 않게 ‘잘 나가는 장애우“였던 것이다. 그게 나빠서가 아니라 그 동안의 ‘사람 사는 이야기’의 성격상 그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의 성공신화를 높이 평가하는 기사하나를 더하는 건 아닌가 싶었고, 심준구씨의 글을 읽고 혹시라도 다른 장애우들이 ‘나와는 다른 장애우구나’하고 느끼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이 앞섰다. 더군다나 심준구씨 자신도 이야기하듯이 그의 인생은 몇 번의 ‘행운’이 있었지 않는가.
기자는 결국 심준구씨를 ‘좀더 지켜봐야 할 사람’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의 행운이 정말 행운이었는지, 아님 인생의 도전과 노력의 결과인지... 단순히 그를 ‘행운아’라고 단정짓기엔 그 역시 힘든 삶을 살아온 장애우고, 다른 장애우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심준구씨는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 건의해 지체장애우들을 위한 컴퓨터속기사반을 신설하기도 했다. 지금은 전체방송의 30% 수준이지만 자막방송이 더 늘어나면 컴퓨터속기사도 더 필요할 게 분명하다. 시각장애우들이야 자막방송을 위한 컴퓨터 속기사로 일하기 힘들지만, 지체장애우라면 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컴퓨터속기사로 일할 수 있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서 교육만 시켜준다면 취업은 심준구씨가 일하고 있는 ‘한국스테노사’에서 책임지겠다고 졸랐다는 것이다. 다행히 그의 뜻이 받아들여져 지체장애우들이 컴퓨터속기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29살 이후, 그의 삶은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한 10년쯤 지나 그를 만난다면 그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함께걸음 10년 후, 그때 그 사람으로 심준구씨를 만나보면 어떨까.
글 서현주 객원기자/ 사진 윤정은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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