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남해신문 한관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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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신문사의 발행인 한관호 사장을 만났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고장. 경상남도 남해군. 이 곳 남해인이라면 일주일에 한번은 펼쳐보는 신문이 있다. 바로 남해신문이다. 아마도 전국에 있는 남해향인들은 같은 시간에 같은 신문을 들고있지 않을까. 남해신문에는 남해의 마늘 값 소식에서부터 누구네 집에서 송아지를 낳은 일, 아무게의 어려운 형편을 도와준 소식, 향인들 모임, 동창회 모임 등 갖가지 일들이 실려있다. 마음속에 정감 넘치는 소식들로 가득한 남해신문은 지역신문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지역언론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힌다. 특정 중앙신문이 전국의 신문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구조에서 남해신문의 성공은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다.
한관호 사장은 95년 입사 후 8년 째 남해신문에 몸담고 있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사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기자는 그를 만나러 가기 전에 그가 신문사에 몸담기 전까지 노동운동에 일신을 바쳐왔다는 것을 알았다. 오랫동안 고향을 등지고 운동에 전선에 있었던 사람이 무슨 연유로 기자가 된 것일까? 지역언론을 매개로 한 또 다른 운동을 선택한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을 안고 남해행 버스에 올랐다.
남해 터미널에 내리자 인터뷰일행을 마중 나온 한관호 사장이 보였다. 그와 짧게 대면식을 치른 후 우리는 곧장 차를 타고 인터뷰 장소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동안 그는 무수하게 차를 세웠다. 다름이 아니라 지나가는 주민들과 인사하기 위해서.
"요즘 장사 잘돼나?" "너 요즘 뭐하고 지내노?"
만난사람마다 일일이 안부를 묻는 그의 모습이 퍽 정겹다. 평소 한 사장의 지역 주민들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리라.
한관호 사장과의 본격적인 인터뷰는 "남해별곡"에서 진행되었다. 남해별곡은 까페 겸 음식점으로 바다 풍경과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황토 통나무집이다. 이 곳의 주인 류경완 씨는 대학 졸업 뒤 고향에 "투신"해 지역 운동에 힘써온 사람으로 한관호 사장과는 형님 아우 하는 사이다. "운동하는 놈끼리 통하는 구석이 많다 아이가" 라고 말하고는 호탕하게 웃는 한관호 사장. 그는 호탕한 웃음만큼이나 시원시원하게 기자의 질문에 응해 주었다. 먼저 신문 이야기부터 꺼냈다.
1.이 길에 들어서기까지
함께걸음>남해신문은 지역신문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는데요. 비결이 뭔가요?
한관호> 남해신문의 최대의 강점은 소유구조의 투명성입니다. 설립당시부터 주민 주주제 방식을 채택해 자본과 지역 토호세력으로부터 구속받지 않는 언론의 정도를 갈 수 있었던 것이 남해신문을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했습니다.
함께걸음>신문사에 입사한 때가 95년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신문사 설립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죠? 그 전에는 노동운동을 전념해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연유로 신문사에 들어가게 되었나요? 초대 발행인이었던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하고 막역한 사이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된 건가요?
한관호>맞다, 김 장관이 꼬드겼다는 거 아이가(웃음). 사실 94년에 남해신문에 오려고 했어요. 김두관 장관이 발행인이었을 때인데 나는 서울서 일용직노조정기회 사무국장으로 한 2년 고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됐어요.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서 지역운동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죠. 신문사에 있으면 사람도 많이 만나고 글로서 운동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사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 때는 자리가 없었어요.
사실 남해신문은 현재 행정자치부 장관이자 남해신문 초대 발행인이었던 김두관 장관을 빼 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한나라당 표밭이었던 이 곳 남해에서 그가 군수로 당선할 수 있었던 것은 남해신문의 역할도 컸다. 중앙지나 지방신문이 등한시하던 지역민들의 인권과 지역에 세세한 정보 전달을 위해 헌신하던 그의 모습은 주민들에게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한관호>그리고 얼마 후에 나는 방산시장에 있는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그 때가 처음으로 거금(?) 월급 70만원을 받고 이제 좀 생활이 안정되겠다 했을 때였죠. 그런데 김 장관이 올라와서는 대뜸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출마했다고 하면서. 그래서 정말 고민 많이 했습니다. 상대 후보 보니까 여당에 행정관료 출신이고 질게 뻔한데 게다가 이 사람은 돈도 없고, 조직도 없고...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나라도 가서 도와줘야지 싶더라고. 그래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겁니다.
2. 선거대역전 인생대역전
함께걸음>당시 선거이야기 좀 해주세요. 아주 흥미진진했다고 하던데.
한관호>나는 언제 한번 기회가 되면 꼭 기록을 하고 싶은데 말 그대로 모범선거였습니다. 그런 선거 다시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든 세 살 먹은 할아버지가 와서는 자원봉사 하겠다고 명함 가져가서 돌리고, 장에 나가면 아주머니들이 꼬깃꼬깃한 천원짜리 오천원짜리 손에 쥐어 주면서 열심히 해라하고, 보통 선거 사무실 가면 밥을 얻어먹는데 여기는 자기네들이 와서 밥 지어주고, 짜장면 시켜주고, 수고한다 하면서 박카스 한 봉지 놓고 가고...
함께걸음>그런 선거가 있었나요? 놀라운데요. 그래서 더욱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은데요.
한관호>우리가 가진 거라고는 두 발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려고 참 많이도 뛰어다녔죠. 우리가 잘한 게 ARS기계를 사용한 것이었는데 선거 결과 예측이 수치로 정확히 나오니까 여론 조성하기가 쉬워지 거죠. 처음 여론조사를 해 보니까 20%정도 차이가 났는데 이게 중반쯤 가니까 10%로 줄더니 선거 3일전에는 5%로 줄더라고. 야 이게 뭔가 되겠지 싶더니 결국 뚜껑 열어보니까 3천4백표 차이로 이겨버린 거지. 말 그대로 역전의 신화였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는 한 사장은 지금도 흥분된다는 듯 신나는 표정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오로지 신념 하나로 승리한 선거가 아니었던가.
선거 후 그는 신문사에 있어 달라는 김 장관의 부탁을 거절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지역정서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그가 신문사에 입사하면 뒷말이 많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한 사장은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삶이 있는데 선거운동해서 신문사에 들어갔다는 말은 듣기 싫었다. 그런데 끈질긴 김 장관의 설득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그가 김 장관에게 설득 당한 논리의 요지는 이렇다. "너희가 당선 시켰으니까 그거에 대한 책임도 너희에게 있다, 내가 제대로 된 군수인지 아닌지 제대로 민초들의 삶을 돌보는 길을 가고 있는지 너희가 감시해야 한다"
한관호>나는 내려와서 개인적으로 굉장히 잘 됐습니다. 결혼도 했고(웃음). 신문사에 들어와서 빨리 적응하려고 노력했어요. 나는 원래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고 글 쓰는데도 뜻이 있었고... 그래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죠. 특히 행사취재를 많이 갔는데 군 단위 행사라는 게 거의 일요일날 하거든요. 그래서 기자들이 잘 안 하려고 해요. 이걸 내가 다 도맡아서 했어요. 거기 나가면 읍면에 말 꽤 한다는 사람들은 다 모이거든요. 그럼 내 인프라 구축이 그 만큼 넓어지는 거죠. 그러면서 빨리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남해별곡으로 오는 동안 수없이 섰다 갔다를 반복한 차안에서 이미 확인한 터였다. 그런데 문득 여러 사람을 만나러 돌아다니기에는 그의 다리가 불편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 쪽다리에 절단 장애를 갖고 있는 그는 의족을 의지해 걷고 있다. 은근슬쩍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더니 그는 "이실직고할게 있다"며 기자를 긴장케 했다. 이실직고의 내용이란 사고에 의한 장애였다는 것. 물론 단순한 사고였다면 이실직고라는 거창한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게다. 그는 술을 먹고 객기에 기찻길에 누웠다고 말했다. 그가 군대를 제대하고 일년 지났을 즈음 정확히 1987년에 일어난 일이다.
한관호>죽겠다는 생각은 아니었고... 술김에 그냥...
그는 술김에 그랬다면서 말끝을 흐렸다.옆에서 조용히 술잔만 기울이고 있던 이태곤 편집장이 한마디 거든다. "당시 상황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게지" 80년대를 청춘으로 보낸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잘 알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젊음은 거추장스러운 것.
분위기를 바꿀 겸 다시 신문 이야기를 꺼냈다.
3. 한관호의 특별한 남해사랑
함께걸음>남해신문의 성공은 다른 지역신문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발행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관호>남해신문도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거품이 많아졌습니다. 대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 실제 재정구조는 여타의 지역신문과 별 다르지 않습니다. 구조에 비해 기대는 너무 커졌어요. 이 거품을 제거해야합니다. 그래서 내가 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절대 좋은 평가는 받지 않으려고 해요. 주주들이나 직원들 한데 욕먹을 각오도 되어 있고.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해요. 그래야 나 다음 그리고 그 다음의 사장이 이를 발판으로 도약할 수 있을 테니까요.
자화자찬 격의 대답을 기대했던 기자로서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결코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해신문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한관호> 그런 다음 다시 평기자로 돌아가고 싶어요. 내 소원이 머리 히끗히끗해 질 때까지 기자로 남는 거다. 사람 만나러 돌아다니고 글 쓰면서...
함께걸음>딱 기자체질인 것 같네요. 원래 글 쓰는 걸 좋아했나요?
한관호>노동운동하면서도 글은 놓지 않았습니다. 전국노동자문학회 회장을 활동도 했었고. 내 어렸을 때 꿈이 시인이었거든요. 그리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서정주 시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회의식에 눈을 뜨면서 서정주를 다시 보게 되었어요. 친일 뭐 그런 거 있지 않잖아요. 이 때의 충격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내 평생 우상이 한방에 깨지는 순간이었죠. 어려서부터 서정주의 발걸음만 따라가도 좋겠다 그랬었는데...
함께걸음>그럼 시에 대한 꿈은 접은 건가요?
한관호>처음 남해신문사에 입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갖고 있는 생각은 "글"로서 지역운동을 계속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형태가 시일수도 있고 아닐 수 도 있어요. 물론 지금은 사장이라는 위치 때문에 잠시 쉬고 있지만 말이죠. 내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남해의 근 현대사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물론 군에서도 기록은 하죠. 그러나 이는 남해 면적은 얼마, 남해 인구는 몇 명이라는 단순 기록에 불과합니다. 역사에 대한 기록은 없어요. 보도연맹 사건을 취재한 적이 있는데 아직도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걸 파헤쳐 기록하고 싶습니다. 남해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싶은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남해사람에 대한 것인데 제목도 지어 놨습니다(웃음). 가칭 "맞아 죽을 각오하고 쓴 남해인"입니다.
함께걸음>맞아 죽을 각오하고 쓰는 남해인이라... 재밌는데요.
한관호> 어느 교수가 그러더군요. 결속력 강하기로 유명한 한국의 3대 조직이 있는데 해병대전우회와 새마을 조직 그리고 남해향우회가 있다고. 그만큼 남해사람들은 뭔가 집요하고 끈질긴 데가 있어요. 봐서 알겠지만 남해는 다 산이지 농토가 없습니다. 옛날에 얼마나 살기 힘들었겠어요. 배를 타고 육지에 가서 거름을 얻어다 산에 밭을 일군 것입니다. 이 생활력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한편 이곳 사람들은 섬사람들이다 보니 대륙적 기질이 없어요. 지엽적인 면이 강하죠. 이러한 남해인만의 기질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꼭 기록하고 싶습니다.
그는 뼈 속까지 남해사람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상상이 안될 정도다. 죽기전에 꼭 해보고 싶다는 일 조차 모두 남해와 관련된 일 아닌가.
한관호 사장과의 인터뷰는 시종 밝은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아무래도 우리가 갖고 있는 문자의 무거움 때문에 그때의 분위기 모두 옮길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인터뷰를 마친 후 다음날 그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온 손님들 어찌 그냥 보내냐며 가이드를 자청 남해의 유명 관광지 곳곳을 안내했다.
사람 좋아하고 남해를 사랑하는 사람 한관호. 그의 이 특별한 남해사랑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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