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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공동체 꿈 키우며 사는 조명필 씨

“중요한 건 꿈을 잃지 않는 거죠”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친 조명필 씨

본문

그이 나이 스물여덟살 때 그이는 다시 한 번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공부를 하기 위해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한 것이다. 앞에서 그이를 의지의 장애우라고 칭한 것은 바로 이 부분, 그이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공부를 해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치고 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스물 여덟 살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그렇게 녹록한 일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그이는 해냈다. 그래서 ‘꿈은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표현은 그이의 경우에 해당되는 표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명필씨


<세상 사람들 몇십만명 죽여버리겠다 증오심 가져>
조명필 씨는 의지의 장애우다.
그렇다고 언론에서 장애우를 소개할 때 흔히 하는 말인 장애를 이기고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다. 또 장애를 가진 몸으로 무슨 산을 정복했기 때문에 의지의 장애우라고 칭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이의 살아온 과정 자체가 그이를 의지의 장애우라고 해도 손색이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올해 서른아홉살인 명필 씨는 심한 류마티스 장애를 가지고 있다. 장애가 어느 정도냐면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고 목도 돌아가지 않고 손가락도 굽어서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그이는 이런 심한 장애를 가지고 삼십삼년을 살아왔다. 말인즉슨 그이의 삼십삼년 삶이 한 편의 극적인 드라마라는 것이다.
그이의 고향은 전북 익산이다. 농사를 짓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이남사녀 중 장남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그이가 장애를 가지게 된 것은 그이 나이 여섯살 때이다.
“열이 엄청 뜨겁게 나면서 장애가 발발했어요. 실신도 하고 그랬는데, 부모님 말을 들어보면 숨을 쉬지 않아서 죽었다 라고 생각하고 웃목에다 이불에 둘둘 말아서 갖다 놓으면 아침에 빽빽 울고 그랬대요. 그렇게 누워서 자라면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면서 자랐는데 어느 날 동네사람들이 부모님한테 도시에 나가면 낳을 수 있을 거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일곱 살 때 전주로 나와 살게 됐어요.”
부모님은 생계를 위해 과수원에 품팔이를 나가고 그이는 꼬박 누워서 하루를 보내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꼼짝없이 누워지내다 보니 나중에는 엉덩이에 욕창까지 생겨 아픔을 더했다. 그랬던 그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선 것은 그이 나이 열다섯살 때이다.
“열다섯살 때까지 그냥 드러누워서 살았어요. 아파서 매일 울면서 지내고. 그 아픔이 어느 정도냐면 얼마나 아픈지 잠이 안 와요. 하루에 두세 시간 밖에 못 잤는데, 그것도 아픔하고 잠하고 싸우다가 잠이 이겼을 때 두세 시간 자는 거예요. 그 정도로 정말 아팠어요. 그러다가 서서히 아픈 게 덜해지면서 앉을 수 있게 됐어요. 걷지는 못했지만 앉을 수 있게 되니까 세상에 나가고 싶어졌어요.”
― 학교 가는 것은 꿈도 못 꾸었겠네요.
“그렇죠.”
그이는 열다섯살 때 세상에 나왔다. 그런데 세상에 나온 그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심한 멸시와 냉대였다.
“집에서 혼자 지내니까 심심하잖아요. 그래서 비료봉투를 깔고 그 위에 앉아서 엉덩이로 봉투를 밀면서 동네에 나가 아이들과 딱지치기, 구슬치기를 하면서 놀았어요. 그런데 그런 저를 보고 동네사람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거였어요. 뭐 하러 사느냐고, 사람 같지 않은 병신이 저렇게 돌아다닐까, 부모님만 힘들게 말이야, 이런 소리를 하면서 손가락질을 했어요. 처음에는 흘려들었는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가슴이 메어졌어요. 그리고 욕을 나한테만 하고 가면 괜찮은데 그런 소리를 부모님한테도 하는 거였어요. 그러면 부모님이 술 먹고 오는 날이면 속이 상하니까 술 먹고 오는 날이면 나를 때리고, 지옥이 따로 없었죠.”
― 부모님이 때렸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얘기하는 거죠?
“보기 싫다면서, 너 뭐 하러 사느냐고, 보기 싫게 뭐 하러 나다니냐고 그러면서 저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발로 차기도 하면서 때린 거죠.”
― 어머니는 안 때렸죠?
“어머니도 그랬어요.”
그래서 그이는 바깥 외출을 포기했다. 집에만 있자니 심심해서 라디오를 듣는 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또 라디오만 듣는다고 부모님에게 매를 맞았단다.
“어머니 같은 경우는 잠을 자면 잠만 잔다고 뭐라고 하고, 라디오만 들으면 라디오만 듣는다고 화를 내면서 때리셨어요.”
부모가 장애를 가진 자식을 때리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그 의문에 대해 그이는 부모님이 그이를 위해 고향을 떠나 대처에 나와 고생을 하고 있지만 그이의 장애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연민이 절망감으로 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매를 맞고 자라게 되자 그이는 그이대로 세상 사람들에 대해 큰 증오감을 갖게 됐다. 그이 나이 열여덟살 때 그이는 “내가 성인이 되면 폭탄을 만들어서 던지든지 아니면 수도에 독극물을 푼다던가 해서 세상 사람들 몇 십 만명을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 부모님에 대한 증오는 없었나요?
“그 때 당시는 있었어요. 부모님이 때리면 계속 참아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터지면 저도 댓거리를 하거든요. ‘내가 장애우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닌데, 어머니 아버지는 왜 자꾸  때리느냐’고 대들었어요.”
― 그러면 부모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내가 그렇게 나오면 주춤하시면서, ‘그러면 죽어라, 너 속 편하고 우리 속도 편하다’ 그러셨어요”

<신앙 가지게 되면서 인생 변해>
그이와 부모님 사이에 형성된 가파른 갈등은 그이가 성인이 되면서 풀린다. 그리고 그이는 스무살이 되면서 이렇게 안이하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이가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일은 집 마당에서 개, 닭, 토끼 등 가축을 키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의욕을 가지고 시작한 이 일도 속된 말로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가축을 키워서 새끼를 낳으면 팔고 그러면 되지 않을까 해서 시작한 일 이었는데 생각대로 새끼가 불지 않았어요. 가축은 부모님이 돈을 주고 사와야 되잖아요. 그런데 돈이 안 되니까 부모님이 또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가만히 죽치고 앉아 있을 일이지 돈만 축낸다고,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혹시나 해서 몇 년을 더 버텼는데 결국 손을 들고 말았어요.”
다시 절망에 빠진 그이, 이제 그이가 세상을 살아나갈 방법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이는 하는 일 없이 꼼짝없이 집안에 틀어박혀야 했다. 그랬는데 어느 날 집에 들른 읍내 오토바이 상점 주인이 귀에 솔깃한 말을 전해주고 갔다.
‘기독교방송이란 게 있는데 그 방송을 들어보면 장애우들이 모여서 일할 수 있는 곳을 소개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이는 일년 여 꼬박 기독교방송을 청취했다.
지금 기자도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십수년 전 기독교방송에서는 장애우 대상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막 장애우공동체라는 미신고시설이 우후죽순 생기는 시점이어서, 그 방송을 통해 소개된 시설에 많은 장애우들이 몰리고 있었다.
“일년 동안 청취를 해서 삼육재활원과 나그네촌이라는 시설, 그리고 은혜의 집이라는 시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시설 연락처를 적어서 아버님한테 나를 시설에 데려다 달라고 졸랐죠.”
― 부모님이 쉽게 데려다 주던가요?
“아니요. 네가 거기 가서 뭐 할거냐, 가지 말고 그냥 여기서 같이 살다가 같이 죽자면서 만류했어요. 그래도 저는 고집을 꺽지 않았죠. 일단 데려다만 달라고 졸랐어요.”
이런 과정을 거쳐서 그이는 생전 처음 서울 땅을 밟는다. 그이가 아버지 등에 업혀서 처음 찾아간 시설은 삼육재활원이었다. 그런데 재활원에서는 나이가 많고 장애가 중증이어서 입소가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두번째 나그네촌이라는 미신고시설은 원생들이 꽃을 키우는 일을 해야 하는데 역시 그이 장애가 심해서 곤란하다고 거절을 해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서울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시설이 성남시 은행동에 있는 미신고시설 은혜의 집이었는데, 다행스럽게 그 곳에서 그이를 받아줬다.
“은혜의 집에서 일 년을 살았는데 신앙공동체라서 그 곳에서 처음 기독교를 알았어요. 그렇지만 전 하나님을 믿지 않았죠. ‘하나님 있으면 데려와 봐라. 하나님이 있으면 왜 나를 포함해서 장애우들을 이렇게 비참한 상태로 내버려 두겠느냐’면서 따지고 그랬어요."
― 은혜의 집에서도 하는 일 없이 지냈나요?
“아니요. 거기 있으면서 악세사리 일도 해봤고, 미싱 시다도 해봤고, 인타샤(편물) 일도 해봤어요. 비장애우들과 경쟁했을 때는 수량이 안 나오지만 비장애우가 열 개 만들면 저는 다섯 개나 여섯 개 정도는 만드니까 그 일을 한 거죠.”
그이 회고에 따르면, 그 시설에 있을 때 그이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신실한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이다.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 부흥회 집회를 했는데 그 집회에 참석해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눈물나오고 콧물 나오고 두어 시간 그러더라고요. 그때 제 마음속에 있는 악과 증오가 다 녹았어요.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을 영접했으니까 과연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이 뭔가 심각하게 고민했죠. 그 결과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공부를 하기 위해 그 시설을 떠나기로 했어요.”
― 대책도 없이 시설을 나왔다는 말인가요?
“예. 나와서 한 삼 일을 헤맸어요. 그랬는데 갈 곳이 없더라고요. 단체를 찾아가고 기도원에도 가봤는데 들어갈 데가 없었어요. 가진 돈도 떨어지고, 그래서 다시 성남시로 와서 모란시장 버스정류장에서 어디로 가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그 시장에서 바닥을 기며 수세미 장사를 하고 있던 장애우가 다가오더니 갈 곳이 없으면 부활교회에 가보라며 연락처를 적어 줬어요. 그 곳에 가면 돈도 벌 수 있고 먹여준다고 해서 선택할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를 찾아갔죠.”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부활교회는 이름만 교회이지 은혜의 집과 마찬가지로 오갈 데 없는 장애우들이 모여 사는 미신고장애우시설이었다. 그런데 부활교회가 여타 미신고시설과 다른 점은 부활교회에 있는 장애우들은 시장에서 노래를 틀어놓고 바닥을 기면서 수세미 등 생필품을 파는 속칭 기바리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활교회에 들어간 그이도 기바리 일을 하게 됐다.
“어떻게든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생활필수품 장사를 시작했어요.”
― 몇 년을 했나요?
“일 년 정도 했어요.”
― 돈은 얼마나 벌었는데요?
“한 팔백만원 정도 벌었을 거예요.”
― 바닥을 기면서 장사하는 것이 창피하지는 않았나요?
“조금 창피했지만, 또 아는 사람 만나면 ‘아, 내가 이렇게 하면서까지 살아야 되나’ 회의감도 들었지만 견딜만했어요.”
― 그 일은 왜 그만뒀죠?
“아파서요. 일 년 정도 일을 하니까 몸에 무리가 와서 계속 아팠어요. 열도 나고 그래서 그만 둬야 했어요.”
―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을 했나요?
“그냥 먹고 자면서 놀았어요. 그러면서 밤에는 야학에 다녔는데 하나님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랬는데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오 년을 그냥 보내야 했어요.”
― 번 돈으로 버텼나요?
“아니요. 영세민이 돼서 정부에서 나오는 돈으로 버텼어요.”

<공동체를 만드는 게 꿈>
그이 나이 스물여덟살 때 그이는 다시 한 번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공부를 하기 위해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한 것이다. 앞에서 그이를 의지의 장애우라고 칭한 것은 바로 이 부분, 그이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공부를 해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치고 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스물여덟살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그렇게 녹록한 일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그이는 해냈다. 그래서 꿈은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표현은 그이의 경우에 해당되는 표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공부를 하기 위해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하려고 했는데 난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그 때 제가 살고 있는 곳은 하남시였고, 학원은 서울 종로에 있었거든요. 저는 대중교통을 전혀 이용할 수 없었으니까 ‘어떻게 학원에 다니나’라는 걱정과 또 ‘학원비는 누가 대주지’라는 걱정을 동시에 해야 했어요. 그런데 마침 제가 아는 분이 학원비를 대주겠다고 해서 ‘일단 부딪쳐 보자’라고 마음먹었죠.”
―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학원에 다닐 수 있었나요?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발이를 타고 다녔어요. 하남시에서 학원까지 한시간삼십분 정도가 걸리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걸 타고 다녔어요.”
― 학원은 몇 년 다녔나요?
“꼬박 사 년을 다녔어요. 그 기간 동안 새벽 세 시에 자고 아침 아홉 시나 열 시에 일어나서 밥 먹고 공부하고, 또 점심 먹고 공부하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죠. 그래서였는지 학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한글도 제대로 쓰지 못하던 제가 고등학교 과정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어요.”
― 왜 그렇게 공부에 매달린 건가요?
“사회복지 쪽 일을 하고 싶어서요. 지금도 지방에 가면 형제와 부모한테 천대와 멸시를 받는 장애우들이 많이 있어요. 제가 그 과정을 겪었으니까,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장애우들을 돕기 위해 제가 사회복지 쪽 공부를 해서 조그마한 제도 하나라도 바꾸면 많은 장애우들의 삶이 나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부에 매달렸어요.”
그런데 그이는 그이 바람과는 달리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무슨 까닭이 있었던 걸까?
“솔직히 수능 점수가 낮게 나왔어요. 그리고 왜 제가 주저하지 않고 신학을 택했냐면, 저는 장애우복지가 아무리 좋아져도 정신이 막혀 있으면 장애우들이 정신장애까지 가지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장애우들 마음속에 신앙이 들어가면 사람답게 생각하고 살아가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런 과정에 제가 신학을 전공해서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이는 지금 성남시에 있는 영구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그이는 국내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교단이 운영하는 신학대학을 졸업했는데, 다른 졸업생들은 거의 다 교육전도사로 취업을 한 반면 그이는 장애가 이유가 돼 오라는 교회가 없다. 그래서 실업자다.
비록 지금은 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해 수급자로 지정 받아 근근히 먹고사는 처지지만 그이는 짧지 않은 생애에서 늘 그랬듯이 꿈을 놓지 않고 있다.
“꿈이 있는데, 장애우공동체를 만드는 거예요. 다른 공동체와는 달리 장애우들이 영원히 머무는 곳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가지고 몇 년 머무는 동안 자립해서 나갈 수 있게 뒷받침을 해주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 거예요. 지금은 여건이 안돼서 시작을 못하고 있지만 열심히 기도하고 있으니까 제 꿈이 꼭 이뤄질 거라고 믿고 있어요.”
― 돌이켜보면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나요?
“어렸을 때. 부모님한테 맞고 병신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가 가장 힘들었죠.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장애우복지는 모든 장애는 재산 따지지 말고 영세민 만들어주고 장애우가 있는 집에 혜택도 주고 해서, 장애우가 구박덩어리가 아니라 장애우가 집안에 있음으로 해서 식구들이 잘 산다는 그런 단계까지 가야 장애우복지가 이루어지고 장애우가 살만한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거죠. 아무리 장애가 심해도 사회에서 혜택을 많이 주는데 누가 장애우를 구박하겠어요? 그 단계까지 갔을 때 장애우복지가 끝까지 왔다고 할 수 있죠.”
덧붙이는 말, 그이가 실업자라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건 아니다. 그이는 성남시청 사회복지과에서 유명한 인물인데, 시청뿐만 아니라 동사무소에서도 그이를 두고 학을 뗐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이가 장애우복지를 위해 공무원들을 상대로 따지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은 모두 획일적이예요. 서류에 적힌 대로만 하죠. 주로 장애우들이 생활보호대상자로 책정이 안 될 때 찾아가서 따져요. 형제가 있고 부모가 있어서 안 된다고 할 때 가서 얘기를 하죠. 그러면 돼요.”
― 어떻게 따지는데요?
“논리에 맞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기초생활보장법이 무슨 법이예요? 사람을 살리는 법 아닌가요? 그럼 이 장애우가 형제가 있어서 안 된다면, 그 형제가 도울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장애우 죽게 내버려 둘 겁니까? 그러다가 말이 안 되면 그러면 당신 여기 뭐 하러 있느냐고 소리치는 거죠.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당신이 그 집에 찾아가서 조사를 하는 게 당신 일 아니냐고 소리치고 그래요.”
그이의 살아가는 방식은 매사에 이렇게 적극적이다.
그래서 중증장애를 가졌지만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또 꿈을 가지고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면 장애가 큰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그이의 말에 쉽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글·사진 박광규 이태곤 기자

작성자박광규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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