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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사람] 황대권「야생초편지」의 저자

생태공동체-바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본문

생태주의는 환경주의보다 큰 개념으로 인간중심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들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근본적인 인식과 관점의 전환, 그리고 그러한 삶을 실천하고자 하는 주의이다. 황대권 씨는 사회운동을 하다 간첩으로 조작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3년 2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이다. 그는 감옥에서 사회운동의 전망을 고민하면서 그 결론으로 생태주의를 대안으로 갖게 되었으며, 또 감옥 안에 100여종의 야생화단을 만들고 그 기록을 책으로 내기도 하였다. 그는 야생초를 키우면서, 사회운동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그리고 가톨릭 신앙을 가지면서 우리의 삶과 사회에 대한 고민을 하였고, 그 대안으로 생태주의를 뿌리깊게 체득하게 되었다. 감옥에서의 삶조차 즐길 수 있었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황대권씨

 

[미국유학생에서 간첩(?)이 되기까지]
― 감옥생활 경험이 생태운동의 토대가 되셨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구미유학단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요?
“전두환 정권의 철권통치가 극에 달할 때인데요. 몇 년 동안 계속 탄압을 받다가 더 이상 이러면 못살겠다는 기층운동들이 83년∼84년부터 기지개를 펴고 활발해지기 시작했어요. 전두환 정권이 그걸 탄압하기 위해서 작전을 하나 짰는데 학생운동을 직접 탄압하면 더 반발이 나니까‘학생운동의 배후에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단이 있었다’라는 시나리오를 짰어요. 제 3자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딱 걸려든 거죠. 동백림사건과 제일동포간첩사건 이후 터트릴 사건을 찾던 중 미국유학생 사건을 조작, 발표한 거예요. 미국에서 같이 있었던 유학생 중에 한 사람이 평양을 방문하는 바람에 빌미가 되어 같이 있었던 사람들 전부를 포함하여 간첩으로 몰아붙인 거죠.”
― 황 선생님은 같이 있던 사람을 알았고, 스치기만 했는데 그냥 무기징역을 선고 받으셨다는 말씀인가요?
“물론 제가 단순한 소시민 생활을 한 게 아니고 학생시절부터 반정부운동과 반대운동이라고 할 나름대로의 운동과 그에 관한 글을 써서 신문에 발표도 하였지만, 간첩활동하고는 전혀 상관없는데, 모임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반제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는 이유로 그냥 무기징역을 받았지요.”
― 반제국주의, 반미를 공부하러 미국에 가신 건가요? 왜 미국을 가셨나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했어요. 그래서 이 사건과 관련되었던 양동화, 김성만 씨와 함께 유학생활을 시작했지요. 하지만 미국에서조차 반미를 배우기에는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그곳도 자기나라 좋다는 것을 가르치잖아요. 그곳에서 어학코스를 끝내고 정치학과를 들어가 보니 미국의 선거제도나 정치형태와 같은 하품나는 과목만 하는 거예요. 제가 이런 것 배우러 온 게 아닌데 생각하며 짜증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미국에 내가 원하는 과목을 배우고 가르치는 대학이 있나 도서관에서 찾던 중 뉴욕에 있는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라는 대학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강의하는 과목도 제가 원하던 커리큘럼들인 제국주의와 세계경제, 제 3세계 정치경제학, 제 3세계 혁명론 들과 같은 과목들로 채워져 있었어요. 운이 좋았지요. 합격한 후 거기서 제 3세계론 등을  공부하다가 한 학기 남았는데 사건이 난 거죠. 그 후 감옥에 들어와서도 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제 3세계 민중들을 제국주의 치하에서 자주적으로 살아가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며 늘 고민했지요. 처음에 감옥에 들어와서 상당기간 한 6∼7년까지도 정치적 변혁을 사회운동을 통해 이루는 방법을 생각했었는데, 이 후 정치적 변동으로는 근본적인 사회변동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생태와 접목하게 되면서 생태주의로 나아가게 되었죠. 사실은 방향이 바뀌었다기보다는 더 확대된 거지요.”

 

[사회운동에서 생태운동으로]
― 그럼 사회운동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생태주의로 확대되었다는 말씀인가요?
“인간문제 하나만 풀어서는 우리가 올바로 설 수 없어요. 자연을 포함해서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까지 함께 풀어야지요. 이러한 확대가 생태주의로 나타나고 결국 대안사회운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예전에는 정권을 잡아서 정치를 바꾸면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정권을 탈취해봐야 사회에는 전혀 변화가 없더군요. 결국 자본주의가 되었든, 사회주의가 되었든 사람들의 인식이 문제지, 소수의 권력자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정권을 잡아야 사회변동에는 크게 영향을 못 미친다는 것을 역사적 깨달음으로 알게 된 거죠. 그리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조건 자체가 다 망가진 상태에서 결국 근본적인 변화는 생태주의적인 변화, 즉 생태주의에 입각한 지역공동체일 때 가능하다 생각됩니다. 물론 장기적인 사회변화로서 그렇게 결론을 내린 거죠. 이러한 관점은 92년도 감옥 안에서 쓴 책‘백척간두에 서서’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85년도에 감옥에 들어갔으니까 감옥생활한지 꼭 7년만에 책으로 묶어서 낸 거예요.”
― 98년도 출감하시고 그 해 영광으로 내려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생활하셨는지요?
“감옥에서 나오면 사회운동도 하면서 산에 들어가 농사지으며 농부가 되겠다고 결심했지요. 농부이되 단순한 농부가 아닌 사회적 인식을 가진 농부가 되겠다고 말이죠. 농사를 짓는 것도 저는 사회운동의 일환이라 생각해요. 농사를 지어서 먹고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농사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대안사회운동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영광으로 내려갔죠. 농지가 따로 있지 않은 산 속의 벌목지를 개간해서 농장을 만들었죠. 그러다가 노르웨이에서 편지가 왔어요. 저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하데요. 그러기로 했죠. 그 사람들이 산 속까지 와서 다큐멘터리를 찍었어요. 그리고 그걸 상영하는 날 오라고 초청장을 보냈죠. 그래서 99년 유럽을 가게 되었고 2년을 보내고 작년 말에 들어왔습니다.”
― 정말 바쁘셨겠네요. 요즈음 어떻게 사시나요? 생태운동을 위한 모임도 만드셨다는 얘길 들었는데.
“생태공동체를 우리 나라에 뿌리내리는 게 제 꿈입니다. 생태공동체연구모임이라고 생태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생태공동체 탐방을 통하여 생태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모임을 가졌습니다. 올해는 국내 공동체를 총망라하는 편람을 하나 만들려 작업 중에 있습니다.”
―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태공동체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생태공동체는 세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가 공동체적인 요소예요. 둘째로, 생태주의적 측면인데요. 건축물이 생태법칙이라든지, 상하수도가 생태적으로 흘러가고, 에너지가 생태에너지로 쓰이도록 하는거죠. 세 번째가 영성적 요소죠.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정신이 물질추구가 아닌 삶의 주관적인 목적을 영성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세 가지가 모범적으로 녹아있는 공동체가 진정한 생태공동체라 생각합니다.”
― 지금 황 선생님 말씀을 듣다보면 그 실현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품고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한편으론 정말 그런 공동체가 가능할까 이런 의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사실인데요.
“저는 남은 생애를 한국에서 생태공동체 모델을 해 보겠다는 뜻을 두고 현재 움직이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과연 되는지 안 되는지 하느님만이 아시니까 뭐라고 말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도 제 뜻대로 되지 못했어요. 꿈을 가지고 그 결과에 구애받지 않고 생태공동체를 향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따름입니다. 결과와 미래에 대해서는 현재 지금의 노력들이 평가해 줄 것이라 생각됩니다.”

 

[장애우생태공동체를 위하여]
― 현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정말 사회에서 도저히 살아남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러한 생태공동체에서 자기 능력만큼 일하고, 살수 있을 만큼 생존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겐 더없이 행복하리라 생각이 듭니다. 장애우공동체 실현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은데요.
“생태공동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해외의 경우에는 장애인 공동체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제가 장애인 공동체는 직접 방문해 보진 못했지만, 저희 생태공동체연구모임에 계신 한 분이 얼마 전에 멕시코에 있는 장애인공동체를 방문해서 보고문을 올렸는데, 척박한 사막을 오아시스 같은 환경으로 꾸미고 그 곳에서 발달장애나 자폐증을 가진 아이들을 모아 공동체를 꾸며서 장애를 가진 분들이 차별 받지 않고 자원봉사자들과 공동체를 꾸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곳이 많다는 것이 보고되었어요. 대개 공동체들이 격리된 경우가 많아요. 이는 기존 사회에 속한 법, 제도 관습과 같은 틀에 부딪히기보다는 자유로운 생태공동체에 대한 청사진을 펼치기 위한 방편으로 이러한 곳을 통하여 기존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그 확대를 위하여 모색을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생존의 대안으로 야생초와 함께 한 감옥생활]
―‘야생초편지’가 요즘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어릴 때 아련한 기억을 불러오고 있는 야생초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야생초에 관심을 가지시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는지요?
“감옥 안에서 처음 5년 동안은 사실 절망감과 자기 정체성에 대한 탐구, 자기 운명에 대한 절망, 그런 것 때문에 갈등이 많았어요. 그걸 해소하느라고 자신과 무던히도 싸우고, 밖으로 편지도 보내고, 혼자 독방에 앉아 갈등을 겪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정신적·육체적으로 많이 망가진 제 자신을 보게 되었어요. 그것을 치유하려 해도 그곳에 제대로 된 의사가 있습니까, 약이 있습니까. 감옥에서 제일 서러운 것이 아픈 것 이예요. 누가 간호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제가 감옥에서 13년 2개월 중에 10년은 치통으로 고생했어요. 치통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잘 모릅니다. 감옥에서는 진통제도 제대로 나오지도 않고, 의사 보러 가는 시간이 하루 따로 정해져 있어서 그 시간 이외에는 아파도 참고 기다려야해요. 치통이 오면 진통제는 없으니까 방안에서 굴렀습니다. 얼마나 아팠던지 어금니를 그래서 여덟 개나 뽑았어요. 치통을 포함해서 심근경색까지 왔어요. 몸이 안 아픈 데가 없더라고요.
‘정말 안 되겠다. 이젠 내 몸 내가 고쳐야지’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자연의학과 자연요법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요법으로 제일 먼저 풀을 뜯어먹기 시작했지요. 풀을 공부해 보니까 풀이 만병통치약인 겁니다. 한방의 약초가 다 야생초들로, 풀들 하나 하나에 약효가 있음을 알게 되었죠. 감옥에 풀들이 많지 않아‘풀을 길러야겠다’생각했죠. 그래서 풀을 기르기 시작한 거예요. 감옥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지요. 일반 농사하는 것은 보았지만 야생초화단을 직접 기르는 사람은 들어보지 못했거든요. 운동장 한가운데에 야생초를 직접 길러서 성장에 관한 일기를 쓰고, 뜯어도 먹고, 차도 우려 마시면서 풀과 총체적으로 놀았죠. 그러면서 자연요법 뿐만 아니라 명상호흡도 함께 병행했지요. 결국 제가 갖고 있던 지병이 야생초 덕분에 말끔히 고쳐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번에 그때 야생초와 같이 놀던 일지를 책으로 냈는데, 독자분들이 많이 좋아하시더라구요.”
― 감옥에서 야생초와 더불어 삶을 즐기고 사시긴 했지만, 그래도 13년 2개월 동안의 감옥생활이 억울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제가 감옥을‘탈출해야겠다’거나‘빨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감옥생활이 정말 지겨웠어요. 하지만 그런 노력들이 헛수고가 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야‘아! 이거 안 되겠구나. 이게 내 평생 집이고 여기서 살아야겠구나. 이 곳이 내 존재를 실현하는 공간이 되어야겠구나’하고 생각하니까 그 때부터 감옥을 즐길 수 있게 되었어요.‘내가 평생 내 뼈를 묻고 살아야 하는 곳인데 재미있게 살자!’바로 이거였죠. 장애도 마찬가지예요. 장애가 생겼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고 되돌릴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어떻게 장애를 즐기고 재미있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장애해방에서 장애 인정하기로]
― 저희는 장애로 인해 차별 받지 않는 장애해방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황 선생님의 장애와 함께 산다는 의미는 새삼 신선하게 다가오는데요. 저희 책을 읽는 독자분들이 상당수 장애를 가지고 계십니다. 꼭 해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사실 제가 장애인이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이분들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어찌 보면 저에게 있어서는 감옥에 있었던 13년 2개월 동안 겪은 제 인생이 장애였다고 생각됩니다. 심각한 장애였죠. 감옥이란 현실도, 그 속에 갇혀 있었던 저도 모두 장애이고, 장애인이라 볼 수 있어요. 장애를 가지고 계신 분들 중에 자유로운 활동을 하고 계시거나,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시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현실 안에서 어떻게 자아를 실현해 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인간의 인지로는 생각할 수 없는 어떤 힘 같은 것이 있어요. 그 이름을 하느님이라고 붙이자는 거죠. 하느님께서 날 사랑하신다는 마음의 풍요만 가지고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처음에는 제가 절망에 빠졌을 때 원망을 했어요. 주변사람들을 원망하고, 나를 고문한 사람을 원망하고, 나를 심문한 검사를 원망하고, 이런 사실들을 받아들인 사회를 원망하고, 대한민국에 태어난 걸 원망했지요. 하지만, 실컷 원망해 보아도 해답은 없었고, 원망 그 자체로 끝나버리고 말았어요. 그런데, 감옥 안에서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은 미우나 고우나 나를 사랑하신다 생각하니까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지는 거예요.‘왜 나를 감옥에 넣으셨을까? 하느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분인데 왜 나에게 이러한 시련을 더 하셨을까? 아! 무언가 나를 통해서 계획하시고 역사하시는 커다란 뜻이 계실 것이다’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감옥생활 자체가 지겹다거나 괴롭거나 절망적이지 않아요. 감옥은 하느님이 나를 깨우쳐주시기 위해 마련한 선물이라 생각했고, 나를 하느님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다양하게 빚으시고 사랑하시기에, 기쁜 일은 기쁜 뜻대로, 슬픈 일은 슬픈 뜻대로, 무언가를 주신다고 믿었기에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나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실 거라 믿게 되더군요.
실제로 제 자신이 그걸 깨닫고 나서 웃으면서 징역을 살 수 있었고요. 제가 감옥에 있을 당시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이 분들이 편지를 자주 했어요. 처음에는 감방에 있는 나를 위로해 주려고 그분들이 편지를 보내주셨지요. 그래서 답장을 써서 보냈어요. 감옥에서 나온 후 그분들의 초청으로 제가 유럽 가서 이 분들을 만났는데‘우리가 당신을 위로해 주려고 편지를 했는데 오히려 밖에 있는 우리들이 당신에게 위로를 받았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 때 모든 것을 아시고 계획하셨던 하느님의 깊은 뜻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장애를 가지고 계신 분들도 그 관념만 놓치지 않고 산다면 절망은 모르고 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담 김정열 편집주간/ 사진·정리 박광규 기자(kk-park92@hanmail.net)

작성자박광규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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