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농구선수 한사현 씨 > 함께 사는 세상


휠체어농구선수 한사현 씨

편견의 벽, 3점 슛으로 날려보낼렵니다.

본문

  I Believe I Can Fly라는 팝송이 흐르고 휠체어에 앉은 선수들이 사력을 다해 코트를 누비며 격렬한 몸싸움을 하고 거친 숨소리가 느껴지는, 모 이동통신 회사의 TV광고를 기억하시는지. 사실 한사현 씨를 만나기 전만 해도 내가 아는 휠체어농구에 대한 지식은 광고에서 본 화면의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이를 만나고 돌아와 휠체어농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출전한 경험이 가장 많은 국가대표 최고의 포인트 가드인 그이는 한국 휠체어농구의 주춧돌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올해 3월 열린 SK텔레콤 배 전국휠체어농구대회에서도 롱제비티팀의 코치 겸 선수로 뛰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대회 MVP를 차지하기도 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소아마비 장애로 휠체어에 의지해온 그이는 운동을 하기 전까지 장애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부모님의 보호가 벽처럼 느껴졌지만 휠체어농구가 자신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휠체어농구에서 인생을 배웠다는 한사현 씨로부터 농구장에서 흘리는 상쾌한 땀과 슛을 던져 공인되었을 때 느끼는 환희와 성취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완벽하게 혼자이면서, 완전하게 함께인 것이 휠체어농구의 매력

인터뷰 기사에 들어갈 그이의 사진을 고르는데, 그 사진을 보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하는 말이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휠체어농구 선수이고, 직업인이며, 한 여자의 남편이고, 두 아이의 아빠인 한사현 씨. 사실 처음 그이를 만났을 때 나의 느낌도 그렇긴 했다. 도대체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삶의 역할을 다 감당하고 살까 싶어 어느 만큼의 존경심이 일기도 했다. 어떻게 건강한 삶을 누리면서, 가족 안에서의 관계도 돈독하고, 사회에서는 차근차근 경력을 쌓으며 직업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그이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아직 내 삶이 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나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바로 휠체어농구에서 배웠다고 생각해요. 도전할만한 목표를 세운 후, 그 목표를 성취할 때까지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헤쳐나가는 것, 그게 바로 스포츠정신이잖아요. 더군다나 운동 중에서도 단체종목은 혼자 개인기가 뛰어나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자기가 맡은 포지션에서 제 역할을 해내야 하고 팀웍을 위해서는 자신을 조절해야 하는 부분도 많아요. 그런 면에서 휠체어농구는 완벽하게 혼자이면서도 또 완전하게 함께인 운동이죠. 사는 일도 마찬가지 같아요. 때로는 혼자서 견디는 시간이 필요하고, 또 때로는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거잖아요."


그이에게 휠체어농구는 삶에서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과 같은 존재인 듯했다.

그이가 휠체어농구를 시작한 것은 지난 86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친구와 함께 소아마비단체인 정립회관에 갔다가 그곳 체육교사의 권유로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더라고요. 장애우가 어떻게 운동을 하나 하는 생각이었죠." 그러다 그이는 그 해 겨울방학에 정립회관으로 친구들의 경기를 구경갔다가 이내 휠체어농구에 빠져들고 말았다.


"아주 속도감이 있고 힘이 넘치면서도 환상적인 팀웍이 요구되는 휠체어농구에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휠체어라는 기구를 타고 운동하는 것 외에 비장애우들이 하는 일반 농구경기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어요. 태어나서 그때 처음 운동을 해봤는데 처음에는 공이 골대 근처에 가지도 않더군요. 그런데 꾸준히 던지니까 골대를 맞추는 공이 많아지더니 마침내 골인이 되는 거예요."


그이는 그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는지 쥐고 있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뜨거운 무엇이 가슴에서 불끈 솟아오르고, 할 수 있다는 성취감이 온몸을 찌르르 감싸 도는데.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어요. 그동안 장애로 인한 편견에 부딪힐 때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과연 무얼까 싶었는데, 마치 내 삶에서 보물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아무래도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 소심해지고 친구를 사귀는 테두리가 넓지 못하거든요. 운동을 통해서 각계의 친구들을 만나 활동범위가 넓어지니까 내성적이었던 성격이 외향적으로 바뀌고 자신감과 성취감을 많이 느꼈었던 것 같아요. 나 혼자가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힘을 합쳐 무언가 하나의 큰 것을 얻어간다는 성취감.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학교 다니던 시절, 체육시간엔 늘 교실을 지키면서 친구들의 숙제를 도맡아 해주곤 했었던 그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다소 의아해 할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아무튼 그이는 휠체어 농구선수로 다시 태어났다.


집안의 반대, 하지만 운동을 할 때 느끼는 성취감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로 운동을 계속하는 데 어려움도 겪었다. 3남매 중 장남인 그는 어려서 소아마비장애를 가지게 되었는데 3남매 중 장남이라 부모는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고 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자식이 가진 장애를 인정하기 보다 일시적인 질병처럼 여겨서 여기 저기 병원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낫게 하려고 애쓰시던 부모님들이 많았어요. 저희 부모님도 어떻게 하면 저를 걷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어린 시절부터 여러 병원으로 저를 데리고 다니셨지요. 국민학교 3학년 때 다리 수술을 해서 3, 4년 동안은 삼육재활학교를 다니기도 했어요. 수술한 후 고등학교 때까지는 목발에 의지해서 걷기도 했지만 별로 차도를 보이지 않으니까 부모님께서는 제가 공부하길 원하셨어요. 그런데 난데없이 고등학교 2학년 때 휠체어농구를 한다고 하니까 굉장히 많이 반대하셨어요.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심하게 꾸짖기도 여러 번 하셨죠. 장애우가 운동한다는 것을 이해하실 수 없었던 거예요. 우리 나라 사회환경이 장애우가 운동한다고 알아주거나 크게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가 운동이라는 게 꼭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도저히 운동을 그만둘 수 없었죠. 장애를 하나하나 극복해 나갈 때 온몸을 엄습해오는 감격, 성취감을 잊을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87년 고교를 졸업한 뒤 이곳저곳 직장을 기웃거리면서도 운동을 잊은 적이 없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휠체어농구를 하는 사람은 150-200명 정도. 각종 대회가 열리기 2, 3개월 전에 선발대회를 하는데 여기에서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사람은 12명이다. 국가대표 선수로서 경력 또한 화려하다.


그이는 89년 고베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94년 북경 아시안게임, 99년 태국 아시안게임,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했었고, 98년 시드니에서 열린 세계농구선수권대회에도 참석했었다. 그이의 선수로서 넓은 시야와 빠른 속도감에 힘입어, 우리나라는 고베 아시안게임에서 4위, 북경 아시안게임 동메달, 태국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89년 고베 대회에서 4위를 하고 돌아왔을 때부터 가족들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부모님도 기뻐하세요. 항상 나 때문에 마음 졸이시던 당신들께서 보시기에도, 내 성격이 활달하고 사교적으로 바뀌었고 사회생활도 잘 적응해나가니까요." 사실 그이도 가족들이 반대하는 운동을 하면서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어쩌나내심 걱정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힘들고 어려웠던 상황들을 극복해내는 그간의 과정들이 바로 삶의 재미였던 것 같다고 기억했다.


열악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휠체어농구 현실 안타까워

그이의 경우 92년 척수장애우용 의료기기 판매회사인 주식회사 리컴 메디컬에 입사하면서 안정적으로 운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됐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휠체어 농구선수로서만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아직 선진국에 비해 장애우의 운동에 대한 배려가 적어 아쉽다며 외국에 경기 나갔을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 같은 경우 시드니 올림픽에도 나가보고 아시아게임에서 메달도 따봤지만, 장애를 갖지 않은 선수보다는 굉장히 처우가 열악해요. 저희는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을 해야 생활이 가능하거든요.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된다하더라도 물질적인 지원은 거의 없습니다. 연금 같은 경우도 세계대회나 아시아게임은 없고 올림픽에만 있어요. 장애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연금이 60만원정도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비장애우선수들의 반도 안 되는 수준이죠. 장애를 가지고도 혹독한 훈련을 거쳐 국제대회에서 입상한 선수들이 일반선수들보다 훨씬 적은 포상금을 받는다면, 더욱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소외된 느낌을 갖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용기와 의욕을 주는 것이 공평한 대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이는 외국에서 열리는 경기에 다녀올 때마다, 휠체어농구에 관한 다른 나라 국민들의 관심에 놀라기도 하고 부러운 마음이 들어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고 했다.

"98년 시드니 세계선수권대회 갔을 때였는데, 시내버스에 휠체어농구 선수들의 대형사진이 붙어 있더라고요. 지하철 벽면에도 휠체어농구 선수들의 사진이 있었고요. 체육관에 가도 입장료를 받아요. 우리나라에서는 무료로 한다고 해도 대회 내내 사람들이 오지 않아 관중석이 텅텅 비는 경우가 허다한데, 유럽에서는 입장료를 받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휠체어농구 경기를 보러 오시더라고요. 더군다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농구를 하는 것에 대해서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이 굉장히 자부심을 가진다고 들었어요. 우리나라도 저런 모습이 언제나 가능할까 하는 부러운 마음이 들더군요." 그에게는 할 이야기가 산더미다. 우리나라 장애우 운동선수들에게 산적한 문제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리라.

 

병원에서 영업사원과 의료사회사업가로 만나 결혼에 골인

그이는 97년, 서른에 결혼을 해 지금은 여섯 살, 세 살 된 남매를 낳아 기르고 있다. 인터뷰 후에 그이가 보내온 가족 사진을 보니 부부의 생김새가 마치 오누이처럼 닮아 보인다,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는 하지만, 그것 또한 서로의 다른 부분을 사랑과 신뢰로 감싸주며 둥글게 만드는 과정을 거쳐야 얻을 수 있는 결실 아닐까? 두 사람은 병원에서 영업사원과 의료사회사업가로 만나 사귄 지 여덟 달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제가 하는 일이 의료보장구 영업이다 보니, 병원에서 의사나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의료사회사업가들도 만나야 하거든요. 아내는 병원에서 의료사회사업가로 일하고 있었는데 서로 자료 주고받고 하다가 자연스레 알게 됐죠. 첫눈에 저 사람이 내 사람이라는 맘이 들어서 의도적으로 차 한잔 마시자고 말 건네고 밥 먹고 그러던 것이 차츰 정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연인관계로 발전했어요."


인연이 되려다 보니, 아내 집안의 큰 반대 없이 비교적 순탄하게 결혼할 수 있었다. "모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어려움은 있죠. 그래도 빨리 아내 집안에 자기 편을 만드는 게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처형이 많이 도와주셔서 다른 분들보다는 쉽게 결혼할 수 있었지요. 장인, 장모님도 썩 마음에 내켜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장애를 이유로 반대하지는 않으셨어요. 제가 미래에 대해 얼마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심이 많으셨고 발전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셔서 결혼을 허락하신 것 같아요."


그이는 결혼 후 생활도, 마음도 안정되고 특히 아빠라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축복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속았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 싶어 항상 미안하다고 한다.

"연애할 땐 그 좋아하는 휠체어농구도 잠시 뒤로 미뤄놓고 아내에게만 시간을 공들여 투자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나서는 경기 때문에 일년에 절반 이상 나가서 지내기도 하고, 평일에는 일 때문에 열두시 다 되야 들어가지요. 주말에도 연습을 핑계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니까요. 잠깐 짬이라도 나면 피곤하니까 쉬고 싶잖아요. 아내는 휴일에 아이들 데리고 어디라도 놀러가고 싶어하는 눈치인데, 아무래도 섭섭해하죠."


아침에 여섯 살 된 아들과 네 살 된 딸아이를 장모님에게 맡기고 정신 없이 하루를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돌봐야 하는 고단한 생활이지만, 결코 짜증내는 법이 없는 아내가 고맙기만 한 그이다. 하지만 아내의 고단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도 하고 육아 부분을 나누어 아내에게 새로운 힘을 주고 싶은 마음에,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이랑 같이 목욕하고 주말엔 틈나는 대로 공원에 가서 축구도 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아이들이 커가면서 이것저것 고민거리도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아직은 아이들이 아빠의 장애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진 않아요. 그런데 얼마 전 큰아이 유치원에서 행사를 하는데 엄마 아빠를 오라고 하더라고요. 아직까지는 그런 자리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클수록 그런 행사가 많아질텐데, 아빠로서 어떻게 해줘야 할 지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장애에 대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주려고요. 지금도 큰아이는 저랑 나가면 뒤에서 휠체어도 밀어주고 딸아이도 서로 밀겠다고 둘이서 싸우기도 하죠.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다를 건 없죠. 부모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오히려 사려깊은 아이들로 자랄 거라고 믿어요."


그이는 튀지 않는 평화로운 행복이 느껴지는 요즘 생활에 만족한다고 했다, 사소한 일상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서로 따뜻한 마음을 나누며 삶의 기운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이가 바라는 가족생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당분간 회사업무에 전념하고자 국가대표선수 자리 반납해

그이는 아쉽게도 이번에 8월에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와 10월에 열리는 아시안게임에 참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는 했지만, 합숙하는 기간만 최소한 한 달에서 두 달, 게임기간도 보름 정도 되기 때문에 업무에 지장이 생겨서 국가대표 선수자리를 반납했다.


정작 자신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도 따봤고 올림픽도 나가봤고, 세계선수권대회에도 나가봤기 때문에 큰 미련은 없지만, 국내 휠체어농구계에 손꼽히는 가드인 그가 이번 경기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하자 휠체어농구협회 관계자들은 15년 농구선수로서의 그이의 노하우가 발휘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대신 그는 당분간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그이는 작년 세계에서 손꼽히는 재활의료용구회사인 오토복코리아 영업팀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토복코리아가 장애우올림픽 때 공식파트너였기 때문에 알고 있기는 했어요. 그런데 작년에 코엑스에서 전시회할 때 우연히 오토복과 인연을 맺게 됐지요. 전에도 장애우용품회사에서 일해보긴 했지만, 오토복코리아 같은 경우는 아이템이 다양하고 회사도 커서 장애우들에게 많은 것을 다양하게 권할 수 있을 것 같고, 규모있는 회사에서 업무도 충실히 배울 수 있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직접 일을 하면서 더욱 이 일이 굉장히 어렵지만 중요한 일이라는 사명감 같은 게 들더라고요. 장애우들에게 휠체어는 일상생활의 질을 결정하는 몸과 같은 존재잖아요. 더군다나 몸이 불편할수록 휠체어의 중요성은 더 커지지요. 오토복코리아는 장애우의 몸에 맞는 맞춤휠체어를 국내에 처음 도입한 회사거든요.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장애우의 일상생활을 보다 편안하게 하고 다양한 사회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일을 하면서도 신이 나요. 함께 일하는 후배들에게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에 대한 노하우도 가르쳐주고 싶고요. 물론 휠체어농구를 아주 접은 건 아니지만, 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노하우가 생길 때까지는 조금 마음을 접어두려고 해요. 하지만 사회생활이나 운동이나 공통점은 있어요. 각자의 영역에서 제 역할을 해야 하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서로 힘을 합쳐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뛰어야할 때도 있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회사생활은 운동에서 파생된 또 하나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삶은 영리하게도 곳곳에 보물과 함께 함정도 숨겨놓아, 혼자만의 힘으로는 보물을 찾기도 함정을 피해가기도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그런 깜찍한 서바이벌게임을 만들어 놓고는 네 힘만으로는 안 되는 일도 있으니 남의 힘을 빌려 보라는 전언을 부록처럼 끼워준 것 같다. 그래서 짝이라는 말, 친구라는 말, 그것도 모자라 커플, 콤비, 파트너라는 다른 나라의 말까지 두루 그 호칭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이에게 운동은 동료들과 함께 삶의 숨겨진 보물을 찾아가는 방법을 안내해준 길잡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두 시간 동안 그이와 이야기를 나눈 것을 메모한 수첩을 뒤적여보니, 대부분의 이야기는 모두 휠체어농구에서 시작되어 그 안에서 해답을 찾아가고 있었으니 아마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사실 인터뷰 약속이 잡힌 그 시간까지 사실 나는 그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만나고 나서도 오래도록 생각이 나는 사람이 있다. 그이가 그런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주어진 삶을 힘껏 살아가는사람을 참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일 게다.


글.사진/ 이나라 기자

작성자함께걸음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