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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다시 바다로 나가야죠"

어부 박치원

본문

사람이 사는데는 반드시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박치원, 그이도 짧은 인생에서 행복과 불행을 한꺼번에 맛 본 흔치 않는 인생을 산 사람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그이는 장애우로서 어부의 삶을 산, 쉽게 찾아보기 힘든 장애우라고 할 수 있다.

 

사연 많은 한 어부의 삶

지금 박치원 씨는 서산시 고국면 창이리에 있는 외딴 집에서 혼자 산다.

그이가 부석면 창리 바닷가에 있는 집을 나온 건 지금으로부터 이년 전이다. 처음 해미에서 살다가 빈집이었던 이 곳으로 옮겨왔다.

그이는 혼자 살면서, 그이 표현에 따르면, 뚜렷하게 하는 일 없이 차 타고 왔다 갔다 하고, 답답하면 바닷가에 가서 바람이나 쐬고, 낚시나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중이다.

사정을 모르는 남들이 보면 저 사람 참 한가롭게 산다고 말 할 수 있겠지만 기실 내막은 그게 아니다. 그이는 지금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지독한 마음의 상처를…

▲어부박치원
그이가 장애우라는 건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백오십미터도 안 되는 작은 키, 앞, 뒤로 튀어나온 가슴, 절룩거리는 다리, 거기다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는 그 이 모습을 보면 그이가 중증장애우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장애를 가지고 그이는 쉰여덟 해 긴 세월을 바닷가에서 살아 왔다.

그런데 그이는 왜 정든 바닷가를 떠나와야 했을까?
지금부터 사연 많은 한 어부의 삶의 얘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그이가 태어난 곳은 서산시 부석면 창리다. 창리가 어디냐구? 정주영의 서산 간척지 옆에 있는 조그만 바닷가 마을이다. 그이는 그 곳에서 가난한 어부였던 부모의 사 남매 중 둘째로 세상에 나왔다.

장애는 일곱 살 때 가지게 됐는데, 그이는 다음과 같이 그때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추운 겨울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해다가 방에 누이고 이불을 덮어 놨어요. 철모르던 내가 방에서 뛰어 놀다가 그만 그 이불을 밟고 미끄러져서 다리가 부러진 거예요. 오십 년 전인데 시골에 병원이 있었겠어요? 그래서 그냥 방치해 놨는데 한 삼 년을 꼬박 앓았어요. 나중엔 가슴뼈도 앞뒤로 튀어나오더라고요. 어떤 장애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손도 한 번 못 써보고 장애를 가지게 된 거죠."

그이는 장애를 가지면서 학교는 초등학교를 다니는 등 마는 등하며 겨우 졸업했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팡이를 짚어야 하긴 했지만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바닷가에서 중증장애를 가진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바로 고기를 낚는 일 이었다. 그이는 어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바다로 나갔다. 하나의 그림을 연상하면 된다. 망망대해에 조각배가 하나 떠 있다. 배에는 늙은 아비와 소년이 앉아 있다. 아비는 소년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그물을 걷고, 소년은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고기를 신기한 듯 바라본다. 그러다가 해질녘 석양을 뒤로하고 한 점의 배는 포구로 돌아오는 것이다.

소년은 청년이 됐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낚시밖에 없었다. 그이 회상에 따르면 그때는 고기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대신 고기 값이 없어서 고기는 많이 잡았지만 곤궁함을 면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가 그이의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가 갑자가 돌아가셨다. 아버지 대신 형이 어부로 나서고 혼자 된 어머니가 노동 일을 하며 생계를 꾸러갔지만 지긋지긋한 가난의 그늘을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그이 집이 더 결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한 것은 서산 간척지가 생기게 되면서다. 삶의 터전인 바다가 없어지면서 고기도 같이 사라져버렸다. 현대건설에서 쥐꼬리만한 보상을 해줬지만 먹고사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형은 어부 일을 그만둬야 했고,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자 대처인 서산 시내로 나가 살았다.

그래서 창리 바닷가 오막살이집에는 어머니와 그이 단 둘만 남게 됐다.

 

어부의 경험 살려 낚시배 운영하는 선장으로 변신

그런데 이걸 전화위복이라고 하는 걸까, 막막하기만 했던 그이 삶에 활로가 생겼다.

간척지가 생가면서 앞 바다에서는 고기가 잡히지 않았지만 먼바다에서는 그래도 고기가 잡혔다. 그리고 먼바다 고기를 잡으려고 낚시꾼들이 창리 포구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이는 어부의 경험을 살려 낚시 배를 운영하는 선장으로 변신했다. 흔히 통통배라고 부르는 일 톤 짜리 배에 낚시꾼 대여섯 명을 태우고 아침에 바다에 나가 해질녘 돌아왔는데 벌이가 괜찮았다. 그이는 어려서부터 바다에서 살았기 때문에 멀리 군산 앞 바다까지 서해안 지리를 꿰뚫고 있었다. 또 어느 지점에서 고기가 많이 잡히는 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 그의 배를 탄 낚시꾼들은 꼭 다시 그이를 찾았다. 그이는 낚시 배를 운영하면서 조금씩 가난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이는 친구인 바다로부터 보답을 받는다. 간척지 앞 바다에서 가두리 양식장을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두리 양식이 뭔가? 쉽게 얘기해서 바다에 그물을 늘어뜨리고 고정시킨 다음 그 그물에서 고기를 키우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양식장 운영은 아무에게나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허가 내기가 무척 까다롭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이는 태어나서부터 창리 바닷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당연히 어촌계 회원이 될 수 있었고, 어촌계가 주도해서 시작한 양식장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이는 그물 하나를 한 조라고 하는데 여덟 평 짜리 조를 다섯 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우럭 치어를 사와 그물에 풀었다. 그이 말에 따르면 우럭 치어는 한 마리에 이백오십원에 사온다. 이 치어가 양식장에서 별 탈 없이 이 년 정도 크면 큰 고기가 된다. 다 자란 우럭을 횟집에 파는데 그 때 받는 값은 킬로당 만오천원선이다. 우럭 한 마리가 보통 일 킬로가 넘으니까 어림짐작으로도 큰돈을 벌 수 있는 사업임을 알 수 있다.

그이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두리 양식장에 나가 고기 먹이를 주고 돌아와서는 낚시꾼들을 상대로 낚시 배를 운영하면서 바쁘게 일상을 보냈다. 이제 그이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의 길에 접어든 듯 했다. 몸은 고단했지만 그 대가로 큰돈을 만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이의 피는 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이는 돈을 벌었지만 비장애우들처럼 방탕하지 않았다. 술 담배도 일절 입에 대지 않고 열심히 오로지 일만 했다. 그렇게 그이는 불혹의 나이 마흔을 넘기고 일곱 해를 더 살고 있었는데, 그런 그이를 눈여겨본 한 여인이 있었다.

예로부터 포구에는 낚시꾼들을 상대로 라면이나 막걸리 등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음식을 파는 여인네가 있기 마련이다. 이 여인이 어느 날 그이를 찾아왔다.

"외지인 인천 여자였어요. 혼자 돌아다니다가 창리에 와서 장사하던 여자였는데 내가 몸은 불편하지만 열심히 사니까 나를 유심히 보고 호감을 가지고 있었나 봐요. 어느 날 나를 찾아오더니 우리 서로가 외로운 처지니까 같이 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는 거였어요. 그 자리에서 나는 좋다고 했죠. 왜냐면 그 여자는 비장애우였으니까요. 나는 장애 때문에 결혼은 꿈도 못 꾸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장애우 여자가 찾아와서 결혼하자고 하니까 나야 감지덕지했죠."

 

마흔 일곱에 한 결혼, 한때 짧은 행복 누리기도 해

그이의 나이 마흔일곱 여자 나이 마흔넷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하면서 그이는 더 바쁜 날들을 보내게 됐다. 아내가 횟집을 차린 것이다.

양식장에 낚시배에 횟집까지 세 개의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이제 그이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게 됐다. 지긋지긋했던 가난의 기억은 멀리 사라져버리고 대신 부자의 꿈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부부는 아이도 낳지 않고 열심히 돈만 벌었는데, 아이는 자신과 같은 장애아가 태어날 것을 염려한 그이가 낳지 말자고 제안했고, 아내가 제안에 군말 없이 응함으로써 갈등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아이를 낳지 않는 대신 부부는 가슴속에 한 가지 꿈을 키우며 살았다. 그 꿈은 돈을 많이 벌면 우리 보다 약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자는 기특한 꿈이었다.

어쨌든 결혼 생활이 이어지면서 그이의 소망은 하나씩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절정은 오 톤 짜리 낚시 배를 구입한 것이었다. 그이는 삼천칠백만원을 주고 해남 조선소에서 배를 건조해 왔다. 배에 "성복호" 라는 이름을 달고 그이는 설레서 밤잠을 못 이루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 톤 짜리 배와 오 톤 짜리 배는 수입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일 톤짜리 배가 대여섯 명 밖에 태우지 못하는 반면 오 톤 짜리 배는 한꺼번에 낚시꾼 오십 명을 태울 수 있었다. 그이가 성복호에 낚시꾼들을 태우고 바다에 나가면 하루 수십 만원의 돈을 벌 수 있었다. 이제 그이는 말 그대로 부자였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운명의 신이 그이를 시기했기 때문일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그이에게 일어났다.

멀쩡했던 아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일은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에 일어났다. "어느 날 아내가 제수씨 생일이라고 아침밥 먹고 온다고 어머니한테만 얘기하고 나에게 얘기도 없이 동생네가 살고 있는 조치원에 갔어요. 그랬는데 그 다음 날 조치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아내가 죽었다는 거였어요. 가봤더니 재수씨와 자다가 심장마비로 돌연사 했다는 거였어요. 아내는 그렇게 약 한 번 못 써보고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어요."

졸지에 아내를 잃은 그이, 한 동안 그이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할 수 없었다. 그이는 바닷가에 나가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아내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는데 그 무엇으로도 그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이는 짧은 방황을 끝내고 다시 생업에 몰두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이의 인생도 추락하기 시작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은 그이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것을 넘어서서 그이가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불행의 단초가 된 것이다. 그이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비상하던 날개를 접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이의 긴 독백을 들어보자.

"그 여자를 만난 건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일년도 채 안돼서였어요. 그 여자는 내가 살던 창리에서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던 여자였는데 나 보다 아홉 살 어린 여자였죠. 그전에는 그 여자가 한 동네에 살고 있는지 조차 몰랐어요. 서로 얘기를 나눈 적도 없었고, 그랬는데 내가 열심히 살고 어느 정도 돈도 있는 걸 알고 그 여자가 접근해온 거예요. 그 여자는 나를 만나면서 처음부터 돈 얘기를 했어요. 혼자 몸으로 애들 데리고 살면서 빚을 졌는데 그 빚을 갚아주면 나와 살겠다는 거였죠.

빚이 이천 몇 백 만원이었는데, 아들 하나 딸 둘이 딸린 그 여자는 남편이 어부 생활을 하다가 바다에서 죽어 혼자가 된 과부였어요. 식구들이 다 반대하고, 동네 어른들도 자네 그 여자와 살면 앞으로 신세 망친다고 반대했는데, 왜냐하면 그 여자는 쉽게 말해 품행이 좋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사람이 아이들 크고 나이 먹고 그러면 변하는 게 있잖아요. 나는 그것만 생각하고 다 안 된다고 했지만 나만 좋아 가지고 그 여자와 같이 산 거죠. 어머니와 살던 집을 나와 동네에 조립식 집을 짓고 빚을 갚아주고 그 여자와 살았어요, 아이들 넷 하고 여섯 명이 한 집에서 살았죠.

사는 동안 큰 딸 시집보내고, 그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그랬는데 살다보니까 도저히 안 맞는 거예요. 그 여자와 나는 사는 방식이 달랐어요. 그 여자는 돈을 헤프게 쓰고, 거기다 수시로 외박하고, 여자가 장사한다고 그래서 식당 운영비도 대줬는데 그 돈을 모두 유흥비로 쓰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여자와 사 년 동안 살면서 정말 많이 싸웠어요. 여자가 삐딱하게 나가니까 사는 재미가 없었어요. 나중에는 일도 하기 싫었어요. 처음 같이 살 때는 세월이 지나면 낳아지겠지 했는데 더 나빠지기만 하니 정 붙일 없었던 거죠. 점점 더 신경만 날카로워지고, 그러다보니 집에 있기 싫어서 차 몰고 밖으로 다니면서 가지 말아야 할 데도 가고, 그러다가 결국 사고를 냈죠.

지금으로부터 칠 년전 일 인데 차 몰고 가다가 사람을 치어서 노인네가 돌아가셨어요. 어쩔 수 없었죠. 감옥에 있다가 양식장 고기를 다 팔아 육천만원에 합의보고 나왔어요. 그런 일이 생기니까 더 이상 이 여자와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여자에게 나가라고 그랬죠. 여자가 내가 마련한 살림이랑 하다못해 수저와 밥 사발까지 다 챙겨서 나갔어요. 그래서 다시 혼자가 됐는데, 한 마디로 끔찍한 꿈을 꾼 거죠."

서두에서 지금 그이는 혼자 산다고 했다. 이게 그이가 혼자 살게 된 이유다. 그이는 고향인 창리에서 이것저것 절딴 났으니까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했다.

"뭍에서 사는 것은 취미 없지만 지금은 마음이 안 좋아서 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사고 났죠. 관리 안 하는 바람에 양식장도 망가졌고, 배도 팔아버려서 없는데 내가 거기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어요?"

그렇지만 창리 그의 집에는 올해 여든 세 살인 늙으신 어머니가 혼자 살고 계시다. 그래서 그이는 마음이 무척 아프다. 어머니를 모시는 게 도리인 줄 알지만 상처 때문에 선뜻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괴로운 것이다. 형제들하고도 멀어졌어요. 여자와 살지 말라고 말렸는데 내가 살았으니까, 처음에는 그 여자가 고마웠어요. 비장애우 여자가 나 같은 장애우랑 산다고 하니까 그 자체가 고마웠던 거죠. 돌이켜보면 제 눈에 뭐가 씌였던 거죠. 형제들이 반대하고 그랬는데 나 혼자 주장으로 같이 살았으니까,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지만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으면 나도 누구 못지 않게 행복하게 살았을 거예요."

그이가 회한으로 가득 찬 한숨을 내쉰다.

 

다시 바다로 나가려고 준비중

그렇지만 그이의 인생이 여기서 끝난 건 아니다. 그이는 지금 다시 바다로 나가려고 준비 중이라고 했다. 낚시 배를 다시 운영하려고 준비중인데, 고향인 창리 대신 인근 바닷가인 안 흥면 신진도로 갈 거라고 말했다. 그이 말에 따르면 서해안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떠오르는 섬인 신진도가 창리 보다는 훨씬 더 발전성이 있다는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오월달 쯤 낚시 배 운영을 다시 하게 될 거라는 게 그이 말이다.

"바다에 나가면 평화롭고 마음이 그렇게 좋을 수 없어요. 또 배타고 멀리 나가면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 있어요. 결국 나는 바다에서 생을 마치게 될 거예요. 딴 건 하고싶지 않아요, 뭍에 가면 답답하기만 하고, 나를 아는 사람들은 "편안하게 뭍에서 구멍가게나 하면서 살지 왜 그렇게 고생하면서 살려고 그러느냐"고 하는데 나는 그래도 바다가 좋아요.

바다에 나가면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암초가 아니예요. 바로 안개예요. 바다에 안개가 끼면 한 배 안에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만 들리고 실체는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은데 그때가 제일 무서운 거지요. 그렇지만 그 안개도 뭍에 사는 사람만큼 두렵지는 않아요. 그래서 다시 바다로 나가려는 거예요."

 

사람이 사는데는 반드시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박치원 그이도 짧은 인생에서 행복과 불행을 한꺼번에 맛 본 흔치 않는 인생을 산 사람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그이는 장애우로서 어부의 삶을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드문 장애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이가 행복하게 삶을 이어갔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은 비단 기자만이 갖는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이는 지금 힘든 인생의 고비에 서 있다. 그이가 이 고비를 뛰어넘고 다시 바다에 나가 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글 이태곤 기자/ 사진 박종형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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