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무엇을 바라나요? 전 지금 생활에 만족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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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명숙 씨가 네 번째 시집을 냈다.
그이가 펴낸 "버리지 않아도 소유한 것들은 절로 떠난다"라는 제목의 시집 날개에는 그이의 살아온 날들을 다음과 같이 짧게 적어 놓고 있다.
"196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으며 동덕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92년 <시와 비평> 신인상과 2000년 <솟대문학> 본상을 수상하였으며 지은 책으로 시집 「풀잎뒤에 맺힌 이슬」외 2권이 있다. 현재 사단법인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홍보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살아온 날들을 이렇게 단 몇 줄로 정리하고 마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 아닐까? 더군다나 그이는 시인이다. 시인은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그 무엇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연초 일상사 잊고 맑은 서정시를 주로 쓰는 최명숙 시인의 육성을 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이를 만났다.
그이는, 눈치챘겠지만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있다. 이 장애는 장애 중에서도 중한 편에 속하는 장애이다. 이 장애를 가지고 그이는 마흔 한 해라는 긴 세월을 살아왔다. 그러니 어찌 사연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시인의 유년시절 얘기부터 들어보자.
약력에도 나와있듯이 그이가 태어난 곳은 춘천이다. 그런데 태어난 곳은 춘천이지만 그이가 자란 곳은 강촌이다. 기차 타고 춘천 가기 전 풍광이 수려한 의암댐 옆에 있는 강촌, 이곳에서 그이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그이의 시에는 강촌이 많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강촌은 그이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해도 무관할 것이다. 가령 그이의 시 중에 "가을 야상곡"이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막차가 오르려다
뒤돌아보는 강촌 역 가로등 밑에는
한 세월이 서 있다
별빛 아우성치는 강가에서
조약돌로 씻기며 사는 꿈
목 메인 듯 숨죽이는 어찌 못할 세월
마른 기다림으로
어둠은 한없이 깊어 가는데
그 자리에 강 물결로 남을 거냐
강변에는 어느 샌가
솔바람 한 아름 안겨드는데
그이는 오 남매 중에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건축회사에 다니느라 혼자 춘천에 나가 살았고, 그이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과 함께 강촌에 있는 한 초가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이의 유년시절에 대한 회고 한 마디,
"집 근처에 싸리나무가 많았어요. 동생하고 소꿉놀이 하지않으면 혼자서 싸리나무를 뱅뱅 돌면서 하루를 보냈어요. 동네에 또래 친구도 없어서 주로 혼자서 놀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싸리나무를 발발거리며 돌았던 게 운동이 돼서 그 덕분에 제가 걷게 된 것 같아요."
그이는 내비치지 않았지만 그이의 말에서 알 수 있듯 혼자 외롭게 유년시절을 보낸 건 분명해 보인다. 하긴 그 외로움이 그이를 시인으로 만들었을 터이지만.
그이가 강촌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서울에 올라온 것은 그이 나이 열 살 때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가 서울로 옮기는 바람에 그이는 얼떨결에 서울 가시내가 됐다.
이 때 정착한 곳이 서울 이문동인데, 이 곳에서 그이는 지금까지 내내 살고 있다.
그이는 서울에 와서 뭘 했을까? 초등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음, 장애우가 학교에 들어가면 뭐가 제일 곤혹스러울까? 십중팔구 다른 아이들의 놀림일 것이다. 그이도 놀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이의 회고에 따르면 아이들은 그이에게 손가락질하며 바보 병신이라고 놀려댔다고 한다. 어찌나 아이들의 놀림이 심했던지 그이가 용변을 보러 화장실에 들어가 있었는데, 아이들이 화장실 문을 벌컥 열고 그이를 놀려댈 정도였다.
그런데 기특한 것은 보통 아이들 같으면 상황이 그 정도면 학교를 다니네 마네 난리를 치고, 하다못해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어 우울해 했을 터인데 그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이의 놀림에 대한 대응방식은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 실컷 놀려라" 나는 공부만 할 테니까, 이렇게 마음먹은 그이는 말 그대로 공부만 했고, 그 덕분에 반에서 우등생 그룹에 끼일 수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한 그이, 다행히 중학생 아이들은 철이 조금 들어서인지 몰라도 그이를 놀리지 않았다. 그이는 체육시간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말은 더듬거렸지만 발표 시간에도 주눅들지 않고 아이들 앞에 나섰다. 한 마디로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이는 공부를 조금 잘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랬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이의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사건이 일어난 건 아니다. 하긴 그이 입장에서 보면 큰 사건이지만, 어쨌든 이 일로 인해 그이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게 됐다.
문득 사람들이 연못에 무심코 던지는 돌 하나가 개구리에게는 큰 재앙이 될 수 있다는 비유가 저절로 생각난다. 그이에게 그 일은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맞는 첫 영어시간에 일어났다.
첫 영어시간은 읽기 수업이었다. 그이 차례가 되자 그이는 영어 문장을 읽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 순간 선생님이 그이를 제지하더니 "입 이상하게 벌리지 말고 자리에 그냥 앉아." 이러는 것이었다.
그이 회고에 따르면, 만약 그 사건이 중학교 다닐 때 일어났으면 장애우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선생이구나 라고 체념하고 그냥 자리에 앉았을 거란다. 하지만 그때 그이는 예민한 사춘기 소녀로 자라있었다. 그래서 새파란 이십대 여선생이 그이에게 주는 모욕을 그냥 참고 넘어갈 수 없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자리에 앉은 그이는 반 아이들 앞에서 당한 창피를 두고두고 잊을 수 없었다. "이런 선생 밑에서 공부하면 뭐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날 이후 수업에는 들어갔지만 영어 공부는 전혀 안 했어요. 그 선생과는 마주쳐도 인사도 안 하고, 선생님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삼 년을 보냈어요."
이렇게 영어를 외면하다 보니까 성적이 바닥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과목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그이는 공부를 완전히 망친 채 고등학교 졸업을 하게 됐다.
워낙 성적이 바닥이어서 대학에 진학 할 꿈도 꾸지 못한 그이, 그이는 집에 처박혀 특별하게 하는 일 없이 허송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가 그이는 엉뚱하게 삼육재활원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사연을 들어보자.
"집에서 이년 여를 놀았는데 정말 답답했어요. 뭔가 일을 해야겠는데 장애우여서 오라는 데는 없고,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전화를 걸어 일일사 안내하시는 분에게 미안하지만 서울에 있는 장애우 시설을 알려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봉천동에 있는 삼육재활원을 알려줬어요. 다음 날 무작정 재활원을 찾아갔죠. 마침 직업훈련생을 모집하고 있어서 양재반에 다니게 됐어요."
그이는 삼육재활원에서 일 년여 양재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장애 때문에 미싱은 대충 배울 수 있었지만 바느질이 전혀 안됐다. 결국 시간만 보내고 그이는 다시 집에 처박혀야 했다. 그런 그이가 안쓰러웠을까, 아버지가 살 방도를 열어줬다. 밑에 여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둘이서 해보라며 그이가 다녔던 초등학교 앞에 조그만 문구점을 열어준 것이다. 그래서 그이는 사 년여를 문구점 주인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또 야인으로 돌아갔는데, 왜 문구점을 그만뒀을까?
"장사는 잘됐어요. 그런데 이문을 조금 더 남기려면 물건을 떼러 동대문까지 가야 됐는데, 나는 장애 때문에 물건을 못 드니까 동생이 무거운 물건을 다 들고 다녀야 했어요. 동생에게 굉장히 미안했죠. 나중에는 동생이 생병을 앓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만두자고 그랬어요. 제 개인 시간이 없는 것도 불만이었고, 다행히 돈은 조금 벌어서, 그 돈 믿고 그만둔 거죠."
그이는 자신을 가만히 못 있는 성격이라고 말한다. 무슨 일이라도 해야 적성이 풀린다는 것이다. 어느새 이십대 후반에 다다른 그이, 그때 문구점을 그만둔 그이가 선택한 일은 당시 서울 상도동에 있던 뇌성마비 복지회에 나가는 일 이었다. 삼육재활원에 다닐 때 사귄 같은 처지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복지회에서 그이는 "청우회" 활동을 시작했다. 참고로 청우회는 뇌성마비 청년 모임이다. 이 시기 그이는 또 오뚜기 글방에서 자원활동도 하게 되는데 한글을 모르는 장애우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 이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그이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구십 년대 초 뇌성마비복지회가 복지관을 건립해 중계동으로 이사를 왔고, 마침 중계동은 그이가 살고 있던 이문동에서 가까워 그이는 거의 온종일을 복지관에 나가 보냈는데, 그런 그이를 눈여겨본 복지회 측에서 그이에게 직원으로 들어올 것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이는 구십일년 구월 뇌성마비복지관 직원이 됐다. 꼬박 오 년을 자원활동을 한 덕분에 얻은 일자리였다. 복지관에서 그이는 처음부터 소식지 만드는 일과 언론사를 상대로 복지관을 홍보하는 일을 맡았는데, 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일을 맡고 있다. 그이가 건네준 쪽지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잠에서 깨어보니 낮선 곳에 떨어진 사람처럼 모든 게 낯설었지요. 복지관 소식지를 만드는 것도 그렇고 언론사 홍보를 하는 것도 그렇고 뒤돌아서 서 눈물 흘린 적도 많아요. 특히 언론사 홍보는 기자 작가 피디 등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 더욱 더 그랬어요. 안면이 일그러지고, 언어장애가 있으니 더 그랬을 거예요. 긴장하면 첫마디도 잘 안나오고 손부터 올라가는 사람이 바쁜 기자에게 전화를 했으니, 전화 장난하지 말고 끊으라고 하는 게 당연하죠. 처음에는 그것이 서운했으나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만의 방법을 찾았어요. 먼저 뇌성마비 장애우라고 밝히고,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 본론을 말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제는 보도자료를 보내기 전에 먼저 무슨 기사거리 없느냐고 전화를 해오는 기자들이 많아요."
여기까지가 그이가 살아온 인생이다. 그이의 살아온 삶은 우여곡절이 많았다기 보다는 그냥 큰 굴곡 없이 평범하게 살아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이는 고등학교 때 일을 제외하고는 장애우로서 큰 아픔을 겪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이의 시에는 장애로 인한 슬픔, 분노, 체념 따위의 감정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가령 그이가 쓴 "서른 다섯에" 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나를 위해 장미꽃 한 다발 사는 일이
멋쩍어지던 날
내 나이는 서른 다섯의 언덕에 올라 있었다
나이 먹는 일이 왠지 부끄럽다
밀린 숙제처럼 불어난 삶의 허물을
티끌의 필적으로 남기기엔 지나온 날들이
너무 큰 무거움인 탓만은 아니었다
이유 없이 우울한 날에 보낸 편지의 답장을
머지 않아 보내 줄 벗이 있다 하여도
멋쩍어지는 나이 이제 가슴속에는 쓸쓸한 것들이
아디지오보다 고운 선율로 춤을 춘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난 후
긴 머리가 더 잘 어울린다는 말의 여운처럼
아쉬워서 아름다운 서른 다섯에"
장애우로서 서른 다섯 해를 살아왔다면 아픔이 시에 조금이라도 비칠만한데 그이의 시에는 아픔이 전혀 없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그이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지 다르다면 시를 쓰는 보통사람인 것이다.
시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이제 시인으로서 그이의 삶을 들여다보자.
그이가 시를 처음 쓴 것은 초등학교 사 학년 때다. 학급 문집을 만들 때 "꽃밭에서" 라는 시를 써서 발표했다. 그 후로 그이는 백일장에 나가 주로 시를 써서 몇 차례 상을 받았다. 말하자면 시 쓰는데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었다.
그이가 시에 대해 본격적으로 매달린 것은 이십대 후반이었는데, 문구점을 그만두고 시간이 남자 덕성여대 사회교육원 문예창작학과에 등록해 시 창작과 수필, 문예일반 세 과목을 수강했다. 그 덕분에 문예지를 통해 등단도 하고 팔십구년 첫 시집 "풀잎 뒤에 맺힌 이슬"을 냈다.
그이는 시를 쓰면서 일상생활의의 자잘한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그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 얘기를 시로 형상화한단다.
"주말에 혼자서 조그만 사찰들 같은 데에 많이 가요. 가서 스님들 만나고,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 얘기가 내 시의 보고예요."
가령 그이는 토요일 오후 퇴근하다가 본 노을이 예뻐서 넋 놓고 바라보다가 순간 바다가 생각나면 다음 날 바다를 보기 위해 가방을 꾸려 여행을 떠난다. 기차 타고 바닷가에 가서 파도보고 차 한 잔 마시고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온다. 그 여행 중에 시 하나 건지면 행복해 하는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그이의 시집을 눈 여겨 본 사람은 금방 알 수 있지만 그이의 시에는 유독 여행 얘기가 많다.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경강역에서"라는 다음과 같은 시.
"늙은 역장이 붉은 깃발을 흔들며
시간마다 기차를 반기지만 당신은 내리지 않고
철길위에 부서지는 겨우내 녹슨 햇빛 속의 당신처럼
엘로우그린 빛 점퍼를 입은 소년이
삼월과 오는 사월 사이를 걸어간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 쇼를 들으며 사사로운 한낮
빈 화분 내어 봄날을 준비하던 당신처럼
잠시 뿌린 가랑비에 눈뜬 접시꽃 모종을 내고
화분을 옮겨 놓는 햇볕 자리에 당신의 그림자 드리워
불현듯 핑 도는 눈물"
시인 최명숙 그이는 지금 혼자 산다. 결혼을 안 한 이유를 물어보자 그이는 "사랑을 못 믿겠다"고 대답한다.
"저는 결혼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제가 만약 결혼했으면 스트레스를 받아 제 명을 못 살았을 거예요. 우리 사회에서 결혼은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니라 가족끼리의 결합이잖아요. 아무래도 제가 장애가 있으니까 결혼 생활이 힘들 수밖에 없죠. 또 저는 장애 때문에 아이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기실 사랑을 못 믿는 것보다는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 그이를 혼자 살게 하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이는 올해 이천이년에 방통대 국문과를 졸업한다. 다음 계획은 사회복지 대학원이나 언론정보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 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폐 끼치지 않고 제가 하고싶은 일 하고 살면 행복한 것 같아요. 더 이상 무엇을 바라나요? 전 지금 생활에 만족해요."
이렇게 말하며 그이는 활짝 웃는다. 그런데 불현듯 그이의 웃음 속에서 쓸씀함의 한 편린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이의 나이 마흔을 넘겨서일까, 아니면 부인해도 어쩔 수 없는 장애 때문에?
시인 최명숙의 시 중에 "희망"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병신인가 베하며 쳐다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운 날은 길 위에 돌부리가
유난히도 많이 솟아났다
보이는 것은 어느 하나 다를 게 없다
세상이란 다 이런 건가 보다 눈멀고 귀멀어 살면 그만인 것을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삶의 메아리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 질문을 받는 순간
파란 희망의 빛이 보여 가는 길마다 돌부리에 채어 넘어져도
뭣하나 다를 게 없다고 여겨져도
더러는 사랑을 보듬은 사람들이 곁에서 사는 세상
사는 건 등불 하나 들고 가는 것
다 그런 것인가 보다"
글 이태곤 기자/사진 이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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