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우 후학 양성이 저의 사명입니다”
본문
부드러움의 힘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것은 일종의 내면의 곧음에서 나오는 힘이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 흔들리지 않으므로 쉽게 어깨가 처지거나 움츠러들지 않는 것 아닐까? 격하게 분노해 부러지거나 쉽게 열광해 춤추지 않고 오롯이 나침반의 바늘을 자신에게로 두어 담담하게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를 만나면서 든 생각이 줄곧 이러했다.
물론 그가 장애우가 공부하기에는 너무도 척박한 사회환경과 교육환경 속에서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얼마만큼의 노력과 난관들이 있었겠는가 하는 것은 누구나 짐작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김영일 교수는 자신이 교수로 임용된 것이 어떤 인생에 있어서 대단한 것을 이룬 종착역이라고 생각하거나 장애우로서의 인간승리로 그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차분하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자신이 시각장애이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그 방향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앞으로도 그 분야에 대한 연구를 지속할 계획이지만 자신은 그저 원하는 공부를 열심히 했을 뿐이기 때문에 특별한 시선을 받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랬다. 그는 충분히 시각장애우 교수가 아니라 소탈하고 친근한 중용의 덕을 가진 학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열심히 했을 뿐, 세간의 관심 부담스러워 >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그리 대단치도 않은 일을 마치 큰 고생하며 이루었다는 듯 생색을 내는 사람이고, 또 다른 인물은 남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놓고도 마치 매일 아침 이 닦고 세수하듯 덤덤하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이번에 만난 조선대학교 특수교육학과 김영일 교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5월 테네시주 벤더빌트대학교 피바디사범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김영일 교수. 국내 몇 안 되는 박사 학위 소지 시각장애우 목록에 또 한 줄을 추가했고, 조선대 특수교육학과 전임교수로 부임하면서 우리 나라에서 네 번째 시각장애우 교수라는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인터뷰를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경로를 따라가보니 그가 들인 노력이 범상치만은 않다. 그의 주된 이력사항만 살펴봐도 화려하기 그지 없다.
전남 무안군 몽탄면이 고향이라는 김 교수는 선천성 녹내장을 앓아 태어날 때부터 저시력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여덟 살 때 동네에서 아이들과 놀다가 눈을 다치면서 완전히 시력을 잃어버리게 된 경우다. 하지만 부모님의 적극적인 교육열과 학자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전남 목포시 은광학교(당시 목포맹학교)에서 중학과정과 서울맹학교 고등부를 거쳐 연세대에서 교육학 석사학위까지 마쳤고 1993년 한미 양국정부에서 공동으로 제공하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텍사스주립대 특수교육학과 박사과정을 밟던 그는 지도교수가 벤더빌트대학교로 자리를 옮기자 벤더빌트대학 특수교육학과 박사과정으로 옮긴 후 올해 5월 ‘자기주장 훈련이 시각장애우 청소년의 사회성 향상에 미치는 효과’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장애를 떨쳐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시각장애우들이 사회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는 점이다.
김 교수의 경우 어머니 김이지(60) 씨는 당시로선 드물게 시각장애우 아들이 동네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놀도록 했다.
고등학교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식당에서 일하시며 아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는 처지라 선뜻 유학을 결심하지 못했을 때도, 어머니는 “더 큰 세상에 나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라”며 아들의 등을 떠밀었을 정도다. 그렇게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의 영향 속에서 커오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시각장애우의 대인관계문제에 대해서 고민해왔다고 했다.
“‘시각장애’ 하면 문자정보를 볼 수 없다는 것, 이동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 정도의 불편이 드러나는 문제인 것 같지만 사실 시각적인 정보가 없으면 여러 가지 영역에서 어려움이 생기고, 이런 것들이 사회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거든요.
대인관계에서 시각장애우는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과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는 말 있죠? 수동적인 태도는 그런 모습을 말합니다. 시각의 제한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적 정보 접근의 제약으로 인해 시각장애우에게 많이 나타나죠. 그와 반대로 공격적인 태도가 있겠고요. 이 두 태도는 너무 극단적이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적절한 태도가 가장 바람직하겠죠. 물론 수동적인 패턴이 아니고 공격적인 패턴이 아니면서 어떤 중도를 유지할 수 있는 그것을 연습할 수 있는 대인관계 패턴도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서 교육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시각장애우가 사회에 통합되기 위해서는 사회 분위기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자기 주장을 적절히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을 청소년기에 어떤 형태로든 학습해야 한다는 게 제 입장이에요. 자기 주장 훈련이 시각장애 청소년의 사회성 향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 것이 논문의 내용이죠. 내가 대학교수가 되었다고 해서 완전히 시각장애를 극복했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나 역시도 시각장애우로서 순간 순간 내 행동이 수동적인가 아니면 공격적인가 하는 것을 늘 의식하게 되고 과연 그 순간에 적절한 사회행동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될 것 같아요.”
이번에 그가 쓴 논문은 이를테면 이런 그의 고민을 학자적인 시각에서 풀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의 비전과 자신감을 가지고 떠난 유학, 그러나 시각장애와 언어문제로 이중장애의 여려움 겪기도 해 >
연세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중 91년에 6개월 동안 휴학을 하고 한빛맹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대학원 공부를 잠시 접고 맹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기로 결심했지만 맹학교에서 일하면서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결국은 돌아올 곳이 맹학교나 시각장애관련기관이라면 내가 과연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을까’ 두려웠다고 한다. 물론 맹학교 교사도 시각장애아동들의 올바른 교육을 위해 충분히 의미있는 자리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학자로서의 길을 걷고 싶어했던 그는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안정적인 그 자리에 자신도 모르게 안주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는 결국 6개월의 교사생활을 접고 대학원으로 돌아와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던 유학에 대해서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워나갔다. 그 과정에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은 과연 교육학으로 유학을 다녀오면 승산이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아마도 중도노선과 타협일거예요. 유학갈 때 계속 교육학을 공부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했어요. 내가 원하는 공부가 교육학이긴 했지만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교육학을 공부하고 돌아온다면 맹학교 교사나 맹인관련기관 종사자가 되어야 할텐데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내가 가고 싶은 길은 아니었거든요. 내가 학자로서 길을 걷는다면 특수교육으로 박사학위공부를 해보는 게 승산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93년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두달 전 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부인을 만나 특별한 반대없이 결혼식을 올린 후 부인과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나름대로의 비전과 자신감을 가지고 이 땅을 떠났지만 유학생활은 생각보다 버겁기만 했다.
가장 먼저 커다란 벽으로 다가온 건 생각지도 못한 언어문제였다. 영어라면 나름대로 자신이 있던 김 교수였는데 막상 외국에서 공부를 하다보니 시각장애보다 언어의 문제가 더 어렵게 다가왔다.
“말이 안 통해도 얼굴을 본다든지 주변 정황을 살피면 눈치로 의사소통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각장애우는 보이지 않으니까 소의 눈치라는 게 있을 수 없잖아요. 결국 저는 이중장애를 지닌 셈이라 처음엔 엄청나게 고생했죠.”라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미국에서 1년만 살면 언어는 마스터한다고 하는데 그건 좀 허세인 것 같다며 웃었다.
<미국이 장애우의 천국이라 생각하는 건 착각 >
미국의 교육환경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자신이 다닌 대학들은 브레일라이트(시각장애우용 노트북과 점자출력기) 등을 지급 받고, 일주일에 10시간 정도 필요한 자료를 읽어주는 낭독봉사자를 소개받아서 도움을 받을 정도로 학습 환경이 좋은 편이었지만 미국이라고 해서 무조건 장애우들이 살아가기에 천국같은 환경도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미국같은 경우에는 90년도에 미국장애우법이 통과된 이후로 각 대학마다 장애학생을 지원해주는 부서가 따로 있다고 한다. 시각장애 학생들의 경우 낭독봉사자들을 연결해주거나 별도의 장소에서 시험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하거나 점자프린터와 음성 프로그램들이 장착되어 있는 컴퓨터를 설치하는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런데 이 역시도 학교의 재정상태라던지 장애학생수라던지 학교 전체적인 지원수준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처음에 다녔던 텍사스주립대의 경우 학생수가 5만명 정도로 시각장애학생수만해도 50명 가량 있었어요. 그러나 시각장애 뿐만 아니라 다른 장애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도 지원해 하기때문에 장애학생이 개인적으로 받을 수 있는 서비스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죠.
그렇지만 전학을 간 밴더빌트대는 사립대학인데 재정이 아주 좋은 편이에요. 그리고 당시 밴더빌트대 총장이 장애학생들이 어려움없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계셨지요. 전에 다니던 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생수도 적고 장애학생들이 별로 없어서 양적으로 흡족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어요. 낭독봉사자도 내가 원한다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받을 수 있었고, ‘알바’나 ‘브레일라이트’같은 기계도 나 혼자 쓸 수 있도록 학교에서 지원받았어요. 졸업을 하면서 제 사정을 얘기하고 싼 가격으로 이 기계들을 사고 싶다고 하니 그냥 가져가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미국이라고 해서 장애우에 대한 서비스가 다 좋은 건 아니에요. 모든 일을 일반화시키는 건 좀 조심스럽지요. 저는 큰 혜택을 입었지만 미국에 있는 모든 학교가 그런 건 아니거든요.”
장애우가 일자리를 구하는 일도 우리가 생각하는것처럼 장애로 인한 제약없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김교수 자신도 처음에는 풀브라이트장학금으로 근근히 생활을 유지했지만 96년 장학금이 끝나갈 무렵, 큰아이가 태어나면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져 빨리 공부를 끝내고 돌아가야 한다는 입박감과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로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나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라 장학금이 끝나고 나서는 밴더빌트대학교 공공정책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이후 3년 동안 학비와 생활비 조달원이 되었다.
“처음에는 공공정책연구소에서도 저의 시각장애가 연구소의 프로젝트 업무를 수행하는 데 치명적인 어려움이 될 것 같다면서 거절했었죠. 그러나 경제적인 상황도 급했고, 단지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내 능력도 보지 않고 거절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학술지에 발표한 내 논문과 연구원으로서의 계획들을 이야기해서 설득해 일할 수 있었지요. 이런 경험을 통해서 늘 느끼는 것이 시각장애우가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그런 도전이 필요한 것 같아요.”
공공정책연구소 일은 물론 경제적인 이유에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그곳에서 일한 것이 그에게 세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한 가지는 논문을 차분하게 쓸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와 공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 두 번째는 두 아이를 기를 수 있는 경제적인 혜택이 있었다는 것, 세 번째는 연구소에서 연구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연구원으로서의 경험과 경력을 쌓은 것이라고 회상했다.
<첫학기라 수업준비하느라 정신 없지만 학생들 가르치는 일은 새롭고 신나는 일 >
이번 가을학기부터 맡은 강의를 위해 5월14일 귀국한 김영일 교수. 오래 한국을 떠나 있었으니 누구보다 우리 나라의 변화가 한눈에 들어올 터인데 어떤 변화가 가장 크게 다가올까?
“미국에 있을 때 교민들이 우리 나라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부정적인 이야기 일색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8년 만에 나와서 본 우리 나라의 모습은 부정적인 측면보다 긍정적인 면이 더 많더군요. 예전에 비해 나아진 것들도 보이고요. 우선 사람들이 친절해졌어요. 안내를 해주는 사람도 늘어나고 안내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훨씬 부드러워졌더라고요. 장애우에 대한 복지서비스도 향상되었고, 장애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도 한결 좋아진 것 같습니다. 아직 잘 모르지만 우선 제 경우에 비춰봐도 시각장애우에게 대학강단에 설 수 있게 허용한 것은 사회적 분위기가 그만큼 변화했다는 것 아닐까요?”
김 교수는 이전과 달리 편의시설이 많이 생기고 장애우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뀐 것 같다고 했다.
김 교수는 올 2학기부터 강단에 선다. ‘시각장애교육’과 ‘점자및보행지도’ ‘심리학개론’ 등 3과목을 강의한다.
이번 학기에 처음으로 강단에 선 느낌을 묻자 첫 학기라 매시간 준비해야 하는 부담은 있지만 학생들의 반응이 좋고 항상 배우는 입장에 있다가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어서 즐겁다고 명쾌하게 대답한다.
그러나, 아쉬운 건 생활의 여유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학교 일로 그는 요즘 너무 바쁘다. 매일 강의하고 첫학기라서 밤늦도록 수업준비 하는데 보낸다. 강의 준비를 위해서는 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학기가 시작되면서 여유가 없어진 것은 한참 개구쟁이인 두 아들을 키우고 있는 그의 부인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집사람이 필요한 분량의 교과서를 녹음해주면 내가 그것을 듣고 브레일라이트라고 하는 시각장애우의 휴대용 컴퓨터에 강의 개요를 짜서 강의노트를 만들어요. 그런데 그게 너무 집사람에게 부담이 되기도 하고 음성녹음이라는 건 내 맘대로 원고를 다시 편집하는 게 어려워서 앞으로는 스캐너로 프린트를 해서 이미지 형태로 복사를 한 후 점자나 음성으로 읽어서 그걸 브레일라이트에 파일로 만들 생각이에요. 아직 강의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정말 시간이 부족해요. 30, 40대에 해야하는 일이 가장 많지 않겠어요? 제 평생이 이렇게 바쁘지는 않겠죠.”
말은 이렇게 하지만 가정 일을 아내에게 맡기는 것이나,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없는 게 너무 미안한 기색이다. 그래서 아이들과는 가급적이면 몸접촉을 많이하는 놀이를 즐기려고 노력한단다.
“큰아이가 세 살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아요. 블록으로 뭔가를 열심히 만든 아이가 엄마한테는 자기가 만들었다고 보라고 소리를 치더라구요. 그런데 나한테는 옆에 오더니 내 손을 끌어다가 만져보라는 거에요. 참 신기하군요. 우리 아이들은 아빠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걸 아는 것 같아요. 저는 볼 수 없으니까 아이들을 많이 안아줘요. 그리고 블록쌓기나 목마태워주기 같은 실내에서 할 수 있는 놀이를 많이 하죠. 그런데 걱정스러운 건 지금은 몸으로 움직이면서 노는 걸 좋아하는 나이라 덜하지만 조금 더 아이들이 크면 거리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거죠. 그래서 앞으로는 아이들이 들을 만한 내용을 점자로 옮겨서 읽어줄까 생각하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내주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운 김영일 교수지만 그의 연구실은 밤늦도록 불이 꺼질 줄 모른다.
김 교수는 그렇게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문제의 완전한 해결책을 찾는 일은 어렵다고, 단지 자신은 장애우들이 좀 더 나은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연구를 거듭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을 할 뿐이라고,,,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선 현재 맡고 있는 학교 강의에 충실해 특수학교에서 일하는 좋은 교사들을 양성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시각장애 학생에게 적절한 교수 학습 방법을 모색하는 것과 시각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이 자녀들의 성장 가능성을 발견해 도와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싶습니다.”
수많은 나무가 모여 그늘을 만드는 것처럼 다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필요한 한그루의 나무가 되고 싶다는 김영일 교수. 그이의 연구가 이번에는 우리 사회에 무어라 말을 걸어올 지 사뭇 궁금해진다.
글·사진 이나라 기자(n290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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