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인생의 주인 공은 나다! > 함께 사는 세상


이제 내 인생의 주인 공은 나다!

중증장애우 독립생활연대에서 일하는 박현 씨

본문

처음 박현 씨를 섭외하면서 그의 나이가 스물 일곱이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 나는 아주 섣부르게 ‘나보다도 어린 사람에게서 어떤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막막한 마음으로 첫대면을 했는데 웬 걸… 고백하건데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심상치않은 카리스마에 나는 그만 기가 죽고 말았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나보다 몇걸음 앞서가기 시작했는데 내가 아무리 종종걸음을 쳐도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기가 죽어 ‘좀 천천히 가자’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기가 눌렸는지는 독자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다.

그러나 그는 내가 못 따라올까 싶었는지 어느 만큼 가다가 한번씩 뒤돌아보고는 다시 내 보폭에 맞추어 전동휠체어의 속도를 늦추어 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아, 이 사람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따뜻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아는 사람이구나’하는 믿음을 갖게 해 꽁꽁 언 강물이 조금씩 풀려가듯 그렇게 긴장된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열여덟 살부터 독립생활 한 경험 바탕으로

독립생활연대 간사로 일해


나는 시장에 간다.

내가 사고 싶은 물건을 산다.

이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 중증장애우 독립생활연대 홈페이지에서 -


이 지면은 특집이나 초점도 아니니 독립생활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그의 가슴속에 담긴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꺼내 듣고 싶었지만 그가 쉽사리 자기 속내를 내보여 줄 사람이 아닌 것 같아(이것도 결국 편견이었다) 독립생활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누기로 했다.

독립생활연대 간사라는 직함이 아니더라도 열여덟살 때부터 이미 10년 가까이 혼자 생활을 해온 터이니 박현 씨에게는 독립생활이라면 할 이야기가 산더미일 것이 분명했다.

그는 열여덟 살때부터 그룸홈을 시작으로 독립생활을 해 왔는데 그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중증장애우 독립생활연대에서 간사로 일하고 있다.

그가 일하고 있는 독립생활연대(www.indiliv-ing.org)는 정립회관에서 진행중인 동료상담학교 수료생들 가운데 우리 사회 중증장애우들의 권익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판단하고 그 해결을 고민하던 중증장애우 일곱명과 비장애우 두 명이 준비과정을 거쳐 올해 2월 발족시킨 중증장애우 권익보호와 장애우 독립생활을 위한 단체다.

몇 달 전 나도 역시 중증장애우의 자립생활에 대한 취재를 했던 터라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에 귀가 솔깃하고 신이 나서 그가 생각하는 독립생활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재활과는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박현 씨가 생각하는 독립생활의 의미는 이렇다.

“그 동안 우리 사회의 중증장애우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비참하게 살아왔어요. 대부분의 경우는 의식주도 완전히 가족들에게 의존하고 있고, 편의시설이 부족한데다가 이동수단이 없기 때문에 살아서 숨만 쉬는 동물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이런 조건들만 생각한다면 중증장애우가 혼자서 독립생활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 밖에 없어요. 문제는 타인의 도움을 받더라도 일방적인 봉사가 아닌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나의 생각대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물질적인 자유로움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자유로움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독립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장애우 하나 하나가 자신 장애 정도에 따라 정부나 사회적 지원을 받으면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그렇게 되면 전문가집단과의 충돌을 우려하시는데요. 중증장애우는 재활이라는 페러다임에 들어갈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따라서 우리 같은 중증장애우에게는 재활이 아닌 자립생활이라는 새로움 패러다임이 필요한 거죠. 단지 재활과 자립을 접목시켜 또 다른 것을 만들려는 일부 장애단체의 움직임이 보이는데 이건 또다시 전문가가 중심이 되는 양상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저는 부정적으로 보이더군요.”

부드럽게 그러나 자기 주장이 선명하게 말하는 그의 답변은 갈증의 순간에 꿀꺽 들이킨 한바가지의 샘물처럼 시원하고 담백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더 가파르기만한 사람의 속내처럼, 가면 갈수록 더 어두운 동굴의 그것처럼, 박현 씨는 독립생활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하다보면 이것저것 부정적인 요소들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복잡한 가족생활이 그에게 독립생활 결심하게 해


박현 씨 가족을 둘러 싼 이야기들은 조금의 아픔이 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스무 살이 될 무렵까지 다사다난했던 세월을 보냈고, 비교적 일찍부터 독립생활을 했다. 열여덟살 되던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줄곧 혼자 힘으로 살아왔으니 올해로 9년 째다.

별명이 바이킹이었던 해군 상사인 아버지 덕분에 박현 씨는 일곱 살까지는 진해에서, 그후 스물네살까지는 부산에서 늘 바다내음을 맡고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집에 오면 입에 자물쇠를 채운 것처럼 근엄했던 전형적인 군인 모습을 지닌 분이였지만 그에게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다. 진해에서 사는 동안 군항제 때면 벚꽃이 활짝 핀 부대안으로 그를 데리고 가 배를 보여주고 벚꽃길을 함께 걷던 따뜻함을 가진 아버지였다고 회상했다.

“아버지는 체구는 작지만 까만 피부에 단단한 체격을 가진 전형적인 군인이셨어요. 해군 상사로 제대를 하셨는데 아버지가 기수가 꽤 높은 편에 속했던 터라 같은 군인아파트에 살던 아이들이 저를 놀리거나 괴롭히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당당하시던 분이셨는데 제대 후부터는 술로 세월을 보내시다가 결국은 당뇨 합병증으로 오십도 채 못돼서 돌아가시고 말았죠”

그 당시만 해도 해군 상사 정년이 42세였던 것을 감안하면 박현 씨의 아버지는 제대 후 7년 가까운 세월을 실직상태로 술로 세월을 보내셨던 것이다. 가장이 이런 모습을 보이자 어머니와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별거를 시작해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재가를 했다.

‘그렇게 가족 안에서 생긴 일들이 상처가 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도리어 나에게 ‘그게 꼭 상처가 되어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제가 성격이 모진 데가 있어서 그런지 가족사에 대해 비애를 느껴본적은 별로 없어요. 어머니의 새 남편은 저의 존재를 모른다고 들었어요. 저 역시 어머니가 정확하게 언제 재가를 하셨는지도 모르겠고 지금은 연락도 끊어졌어요. 아파하고 고민해서 나아질 수 있는 거라면 그러겠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거라면 오히려 인정해버리는 편이 마음 편하죠.”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집에서 나와 컴퓨터를 잘하는 몇몇 친구들끼리 모여 5년간 컴퓨터 관련된 일을 했다. 박현 씨 말을 들어보면 그때는 꽤 벌이가 괜찮아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빨리 돈벌어서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IMF로 더 이상 일거리를 구하는 일이 어렵게 되면서 박현 씨는 친구 집을 전전하면서 인터넷 모뎀을 연결해주거나 프로그램을 깔아주거나 모뎀 연결해주는 일을 하면서 용돈벌이를 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서울에 상경한 게 99년 7월이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그 시점에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서울 가서 홀로서기를 해보자는 생각에 앞뒤 재지 않고 결심한 일이었다.

“물론 아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그래도 나우누리 통신 안에서 ‘나누리’라는 모임을 하면서 알게 된 편의연대 배융호 실장님이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현준 간사 같은 사람들이 힘이 됐어요. 그 사람들 집에서 며칠씩 잠을 얻어 자다가 두달 만에 살 집을 구했고 이젠 공부를 해 보자는 생각에 찾아간 곳이 노들장애우야학이었죠.”

박현 씨는 지금 노들야학에서 고등학교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해 올해 수능시험을 보기도 했다. 올해는 시험삼아 본 시험이라 별로 기대를 하진않고 있지만 만약 합격한다면 행정학, 그 중에서 사회복지행정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다는 다부진 계획도 가지고 있다.


지금은 내가 나서서 싸워야 할 때


그렇게 노들야학과 맺은 인연으로 지금 박현 씨는 장애인이동권연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장애인이동권연대의 과격함을 비난하지만 박현 씨는 운동이나 투쟁의 방식은 다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유연한 방법으로 협상을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법이나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동하지 않는 조직은 더 이상 생명력이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노들야학은 저에게 장애운동의 계기를 만들어준 곳이에요. 아마 제가 이동권연대에 개인적으로 연대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죠. 또 한가지 저는 이동권연대가 조직적인 이념보다는 장애당사자가 피부에 와닿는 공감할 수 있는 작은 부분을 운동의 중심으로 본다는 점을 지지합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렇게 온몸 바쳐 언제까지 할 수 있겠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모든 에너지를 운동에 바치는 그의 모습을 안쓰러워하기도 한다. 그도 언제까지 장애판에서 그가 온몸바쳐 투쟁할지 장담은 못 하겠단다. 어쩌면 몇년 후에는 경제적 독립이 최우선이라면서 돈버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일이라며 웃어보였다.

그러나 지금 국가에서 기초생활보장법 수급대상자라고 주는 돈을 받으면서 장애우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이 정도의 일도 하지 않는다면 공돈을 받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영 맘이 불편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지금은 내가 나서서 싸워야 할 때’라는 것이다.

헤어지는 길에서 박현 씨는 나의 느린 걸음에 전동휠체어의 속도를 맞추어 주었고, 그래서 우리는 걸어가면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시위를 할 때마다 몇몇 장애우들의 아픈 과거가 들추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어요. 운동을 하는데 왜 그 장애우가 시설에 있었던 아픔을 들추어내야 합니까? 왜 비장애우들에게 당하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까? 그런 차별을 부각시켜 동정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면 시민들이 호응할지는 몰라도 그렇다면 장애우들이 그 과정에서 생긴 아픔은 또 누가 보상할 건가요? 이제는 장애우를 운동의 대상으로 삼진 않았으면 해요. 장애우도 인간이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차별받고 있다는 인권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생기는 ‘차별’이라는 정체된 공기를 환기시켜 주려는 그의 움직임. 그의 투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글·사진 이나라 기자(n2906@hanmail.net)


 

작성자이나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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