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이 하나되는 삶
본문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산자락 끝에 자리한 마을 사창리, 그 곳에 30여명의 대식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임락경(56, 시골교회 목사)목사를 찾아가 보았다. 늘 그 시대 가장 낮은 사람들과 살 부비며 살아온 그가 지금은 정신지체장애우와 함께 하루하루 시골살림을 꾸리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그 섭리를 거스르지 않으며 천상 농부로 살아가고픈 그의 낮고 투박하지만 삶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들어보자.
성큼 다가온 계절에 누구라도 옷깃을 여미는 11월, 굽이굽이 산길을 달려가는 버스의 큰 몸체에 멀미가 날 것 같다가도 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절로 기분이 상쾌해진다. 꼬박 산 하나를 넘어서야 내린 정류장 옆에는 야트마한 초등학교가 아담하다. 촌에 사는 사람이 도시에 오면 길을 헤매는 것처럼, 도시 사는 기자 또한 논밭 보이는 풍경이 익숙치 않아 두리번두리번이다. 일단 보이는 길로 가 보자고 들어선 길목에서 마음이 놓이지 않아 마당을 손질하는 아저씨께 길을 묻는다.
“저기, 시골교회라고….”
“저리 쪼매만 올라가면 있어.”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시원스레 나오는 대답에 속이다 뚫릴 것 같다.
왠지 서울바람보다 더 서늘하게 느껴지는 강원도의 바람을 맞으며 얼마간을 걷고, 폭이 그리 넓지 않은 작은 다리를 지나니 지붕아래 ‘시골교회’라고 돌로 새긴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따로 출입문이랄 것도 없는 교회로 들어서니 여기저기서 서울서 온 손님이냐며 기자를 반긴다. 안내를 받아 들어선 커다란 방, 점심식사를 마친 듯 몇 명의 식구가 모여 앉아 나누는 담소가 정겨워 보인다. 그들 중에 한 남자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청한다. 누군가 그가 목사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누구도 그가 목사라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처럼, 그렇게 있던 그가 바로 임락경(56) 목사였다.
시대의 가장 낮은 자리
“60년대에는 결핵이 불치병이었어, 그땐 그 병이 젤루 무서운 병이었지. 그때에는 결핵 환자들하구 살았구 70년대가 되니까 결핵환자들이 차츰 사라지고 실업자들이 하나둘 우리집에 오대. 그땐 실업자들하구 살았구, 80년대가 되서 경기가 좀 좋아지니까 몸 성한 사람들은 다 일터로 나가고 몸이 아파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만 남더라구, 그땐 그 사람들하구 살았지. 그러니까 내가 뭐 69년까지는 결핵 환자들하고만 살다가 70년에 들어서 실업자랑 살았다, 79년까지는 실업자랑 살다가 80년에는 아픈 사람이란 살았다, 뭐 그런 게 아니구 그렇게 그냥 그 때 그 때 마다 식구들이 오는 대로 그냥 그렇게 같이 살아 온 거지 뭐.”
그렇게 그 시대의 가장 낮은 사람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살아온 반평생, 시골교회는 그런 임 목사와 그의 식구들이 20여년 동안 정착하여 일군 삶의 터전이다. 지금은 정신지체장애우와 또 각기 다른 사연을 안고 시골교회의 식구가 된 30여명의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다.
30명 대식구 - 기자의 알량한 계산으로도 대체 어떻게 생활이 가능한 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시골교회의 수익이래야 오천 평 남짓 하는 농사일과 메주, 양봉 등에서 나오는 것이 전부일테니 말이다.
“그게 말이지, 신기한 게 다 먹고 살게는 되어 있더란 말이지. 내가 여기서 20년을 있으면서 한 번도 먼저 남한테 손벌려 본 적이 없어. 몇 년 전이었던가, 정말 쌀이 똑떨어지게 생긴거야. 딱 그날 저녁 해 먹으면 바닥이 나겠더라구. 어쩌나 어쩌나 하면서 외상이래두 져야겠다 생각하구 있었는데, 그때 마침 누가 임 목사님 쌀 좀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어려울 때면 또 다 어떻게 해결이 되, 허허.”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사는데 먹는 돈만 들어가랴,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기자의 질문에 임목사가 되물었다.
“우리 식구들 작년에 의료비가 얼마 들었을 거 같아?”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기자는 식구가 많으니 꽤 들었을거라고 어림짐작해 보았다.
“7천원 들었어, 허허. 그 7천원이 무슨 돈이었냐 하면 구충약 사먹은 돈이지, 허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사람이 아파서 갑자기 죽을 수 있는 경우가 딱 두 가지 인데 하나는 급체를 했을 때이고, 또 하나가 식중독에 걸렸을 때야. 그 외에는 다 살면서 천천히 치료할 수 있어. 급체를 했을 때는 물을 잔뜩 먹고 명치 아래께에 단단하게 뭉친 곳를 풀어주면 되고, 식중독에 안 걸리려면 그 음식이랑 같이 나오는 음식을 먹어주면 돼. 돼지고기 먹을 때는 새우젓을 같이 먹어준다든지 하는 식으루다가. 식중독이랑 급체, 요거 아니면 사람이 금방 죽는 일은 없는데, 이 두 가지 고치는데 내가 전문이거든, 그리구 나머지 병은 살면서 천천히 고치면 되고 그러니 병원비 들어갈 일이 없지.”
그럴 법도 하다. 제 땅에서 농사지은 귀한 음식으로 삼 시 세끼를 먹고, 땀흘려 일하며 맑은 공기와 함께 사는데, 게다가 급한 병일랑 척척 해결하는 든든한 의사선생님을 두었는데 시골교회 식구들은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그냥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다 자연에는 법칙이 있는 거야. 사람이 그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이 주는 먹거리를 자연이 주는 때에 먹고 살면 탈이 날 일이 없지. 여름에 나는 음식을 봐. 수박이니 오이니 하는 것들은 다 열을 밖으로 내보내는 성질을 가졌거든. 그래, 여름에는 그런 것들을 먹으면 되는 거야. 그럼 잣이니 호두니 땅콩이니 하는 것들은 열을 모으는 성질을 가졌으니, 겨울에는 그런 걸 먹으면 되고. 여름에 먹을 것 겨울에 먹고 겨울 먹을 것 여름에들 먹고 그러니 탈이 나지 안나?”
그러고 보니 그들의 의사선생님은 임 목사가 아니라 그 오묘한 자연의 섭리, 그리고 그것을 알고 받아들이는 그들의 마음가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임락경 목사의 이런 마음가짐의 밑자락에는 어렸을 적 고향 교회에서 어렸을 때 만난 몇몇 어르신과의 인연이 있다. 임 목사는 이현필 목사의 가르침을 받겠다는 생각으로 16세에 남원에 있던 동광원으로 들어간다. 기독교 수도공동체인 동광원은 전쟁으로 인해 헐벗은 민중들과 삶을 함께하는 곳으로 ‘제도교육을 받지 않는다’, ‘병원을 가지 않는다’,‘식량원조를 받지 않는다’와 같은 원칙이 있었다고 한다. 그 곳에서 임 목사는 농사와 양봉 등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저 살아가는 삶의 밑그림을 그려온 것이다.
“군대시절 3년을 빼놓고는 평생 농사를 거른 적이 없어. 어려서부터 농사를 천직으로 해야 겠다 생각했는데 어렸을 때지만 다른 직업은 없어도 되지만 농사짓는 사람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었던 거 같아.”
그렇게 임 목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농사를 지어 왔다. 농사를 지어 온 일이 당연한 것처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에서 나온 것들만을 사용하여 농사를 짓는 일도 그에게는 당연하다.
“21세기 대한민국의 화두? 그야 당연히 환경이지. 내가 20년 전에 유기농을 한다고 했을 때 다들 비웃었었지. 지금 때가 어느 때 인데,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무슨 환경이냐고 무슨 나를 배신자 취급했었거든. 근데 지금은 그 때 노동운동 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다 환경운동을 하고 있어. 그만큼 인식이 많이 바뀐 거지.”
종교란 그들과 함께 머무는 마음
사진을 찍자는 핑계로 교회 구경을 하러 나섰다. 입이 떡 벌어지게 큰 장독대들이나 천장 가득 메달아놓은 메주들까지 어느 것 하나 도회지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자를 놀라게 한 것은 미로를 찾아가듯 몇 개의 문을 지나 만난 임목사의 방이었다. 낮은 상과 이불장 하나. 소박하고 단촐하다 못해 훵해보이는 것이 수십 년 목회생활을 해 온 목사의 방이라고 보여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양반 상놈이 다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다른 양반들 다 없어졌어도 남아있는 양반이있어. 바로 목사들이지. 상투 틀고 갓 쓰는 대신 양복 입는 거만 바뀌었지 똑같아, 아주 똑같은 양반행세야. 양반이 유교를 망쳤다면 양반행세하는 목사가 기독교는 망치는 거야.”
그래서일까. 그는 누가봐도 우리가 보통으로 알고있는 목사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권위나 위엄을 찾아볼 데 없는 것은 물론 어떤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들의 예배 또한 남다르다. 주일이 되면 그저 예배당에 둥그렇게 모여 앉을 뿐이다. 목사라고 해서 따로 높은 자리에 앉는 것도 아니고, 목사만이 설교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교인 중 한 사람이 설교자가 되어 설교를 하면 그날 예배의 모든 순서 또한 설교자의 재량에 달려 있다. 주일예배를 제외하고는 수요예배도 금요철야도 없다. 예배의 형식이 중요한 사람들에게는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시골교회 식구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돈많은 사람들한테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봐. 그러면 당연히 그사람네들 눈치를 봐야 되. 물론 우리를 도와주는 분들은 많이 계시긴 하지만, 우리가 그걸 구걸하는 게 아니니까. 우리가 어떤 특정 교단의 도움으로 굴러가고 있다고 해도 그렇겠지. 그런데 우린 그렇지 않거든. 우리끼리 먹고 살 수 있으니까, 그냥 눈치 안보고 우리가 하고 싶은데로 우리끼리 그렇게 사는 거야. 허허”
그의 얼굴에서 묻어나는 웃음이 풍성한 가을바람을 잔뜩 머금은 듯 했다.
“겨울 날 준비하시느라 바쁘시겠어요?”
“바쁘긴 뭐,”
“그래도 대식구 월동 준비 하시려면 준비하실 일이 보통이 아니시겠는걸요”
“아니, 하나도 안 바뻐. 할 일이 많아도 스물 네 시간은 스물 네 시간이지. 바쁘다고 하루 스물 네 시간이 하루 스물 다섯 시간이 되나? 그냥 스물 네 시간 살면 되는 거지, 뭐.”
우문 현답이었다.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은 한가한 것을 두려워한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지면 휴식을 취하는 자연의 섭리로부터 멀어지면서부터, 계절이 바뀌면 씨앗을 뿌리고 또 한번 계절이 바뀌면 그 씨앗을 거두라는 조물주의 목소리를 흘려 들으면서부터, 우리는 거대한 기계에 갇힌 부속품처럼, 날마다 간을 쪼아먹히고도 또 새 간을 얻어 영원히 고통받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지독한 형벌을 받으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살면 되는 것을 어쩌면 우린 너무 많은 길을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골교회, 그곳에서 풍겨나오는 땀내음섞인 흙의 향기를 한줌 품고 오고 싶은 날이었다.
글·사진 박채란 객원기자(rhanai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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