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사람] "장애우 삶의 질 향상은 비장애우의 관심도와 정비례합니다"
본문
서울맹학교 교사로 교직에 입문한 이래 교직생활 30년 동안 맹인복지와 맹인들의 경제적 자립이라는 명목을 두고 심혈을 기울여온 대전맹학교 송권 교장을 만났다. 그는 살아오면서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그런 시련들이 자신을 성장시켰다고 여기고 있다.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보다는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로 인해 더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교장은 장애우의 삶의 질 향상은 자신의 노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지만 주위 사람들의 관심도에 정비례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송권 교장은 목소리가 우렁차면서도 정감이 있고, 말이 빠르지만 정확하고 단호함이 느껴지는 천상 교사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내년 2월 퇴임을 앞두고 있는 그의 교직생활이야기와 맹인으로서 살아오면서 겪었던 삶의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맑은 개울가에 튼실한 돌을 놓아 물길을 건널 수 있게 하는 징검다리. 누군가가 한번만 힘들여 돌멩이를 옮겨다 놓으면 뒤에 오는 이들은 어렵지 않게, 발에 물을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다. 아직은 우리나라 전반적으로 장애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그들의 자립생활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송권 교장은 맹인들의 이미지 개선과 그들이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대전맹학교를 찾았을 때 주인을 닮아 편안한 방에서 떠날 채비를 하는 송교장과 마주앉았다. 별 이야기 없이 마주 앉기만 해도 덩달아 온화한 마음을 전염시키는 그에게 30년 교직생활이야기와 맹인으로서 살아오면서 겪었던 삶에 대해 편안히 대화를 나눴다.
대전맹학교가 우리나라의 시각장애교육의
구심점이 되고자 전력 쏟아
▲대전맹학교송권교장 |
- 지난 87년부터 대전맹학교가 대명학교라는 명칭을 쓰다가 송권 교장선생님이 부임하신 후 95년에 다시 대전맹학교로 교명을 환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요새 이름 바꾸는 것에 대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것이 특수교육계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추진된 일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들리던데요.
"저는 거기에 반대하니까 바꿔놨지요. 요즘 은광, 세광이다 해서 학교명을 바꾸는데 제 생각에는 그것이 맹학교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밖에 나가서 자신들이 특수학교에서 근무하는 것을 감추고자하는 방편으로밖에 생각되질 않아요. 지금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리맹학교, 동경맹학교, 퍼키슨맹학교 등도 맹학교라는 교명을 그대로 쓰고 있지 달리 부르는 곳이 하나도 없어요.
교명을 그렇게 바꾸게 된 배경에는 85년경에 아시아게임과 올림픽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맹학교" 라는 이름을 그대로 두면 안 좋다는얘기가 있어서 그 당시 공립 시각장애인학교인 서울,대전,부산맹학교 세 학교가 "대명학교"라고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을 했어요. 그런데 졸업생들이 극력 반대에 부딪히자 교육부에서도 그러면 교명을 바꾸는 것은 학교장의 자율에 맡기겠다고 해서 서울과 부산은 그대로 이름을 맹학교로 두었고, 그 당시 대전만 대명학교로 바꾸었다가 제가 부임하면서 교육감에게 진언해서 대전맹학교라는 이름으로 환원해 놓았습니다. 대전맹학교 하면 우선 이름에서부터 시각장애교육기관임을 홍보하는 게 되는데 왜 이름을 바꾸는지 모르겠어요."
- 그런데 요즘 장애인 복지법 명칭 역시 맹인복지연합을 시각장애인연합으로 바꾸는 움직임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다 시대적인 문제예요. 우리나라의 장애우에 대한 호칭만 모아도 우리 민족이 그 동안 얼마나 장애우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고 그들을 천시했는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어요. 우리나라 장애우의 호칭 끝을 보면은 반드시 "보"자 아니면 "리"자가 붙었습니다. 예를 들면 벙어리, 바보, 먹보, 키다리, 난쟁이 등이 그런 예지요. 맹인도 이런 호칭을 썼다면 눈멀이 정도가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나 유독 시각장애우의 경우는 맹인이라고 해왔어요. 왜 그런가 하면 맹인들이 고려시대부터 벼슬을 해왔기 때문이지요. 관현명이라고 해서 궁중연주를 하기도 했고, 능을 지키는 맹인은 참봉, 정치하는 맹인은 소경 등의 이름을 썼기 때문에 맹인들에게는 "보"자나 "리"자를 붙일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나는 맹인이라는 호칭이 시각장애우을 비하하거나 낮추는 호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각장애우라는 말을 원치 않아요. 왜냐면 시각장애우는 눈이 사시이거나 약간의 문제만 있어도 이를 모두 포함해서 부르는 말이예요. 맹인하면 전맹, 준맹, 약시 세 가지로 나눠지거든요. 맹인들 자체는 시각장애우라는 용어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군요. 91년부터 대전맹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셨는데 그 당시 공립학교에 맹인 교장선생님이 계셨나요?
"그 당시에는 없었죠. 그렇지만 60년대에는 맹인 교장이 있었어요. 교장이야 자격가지고 하는 거니까 맹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반드시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교감자격증이 없는 사람이예요. 대학졸업하고 30년간 교직에 몸담긴 해왔지만 교장으로 부임하려면 교감이라는 단계를 밟아야 하는데 밟을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문교부 법전을 갖다 놓고 사람을 동원해서 이 부분을 내가 뚫고 나갈 길이 있는가 없는가 보기 위해서 하루 저녁 내내 뒤졌지요. 그랬더니 부관설정에 관한 규정에 특수학교에서 9년 이상 근무한 자, 교육대학원을 나오고 석사학위를 소지한지 3년 이상 경과된 자 등은 교육부장관의 추천검정에 의해서 교장을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더라구요. 서울맹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나의 모교인 대전맹학교에 정성을 쏟은 탓인지 1991년 제1대 교장이 정년퇴임을 하게 되자 대전맹학교 졸업생들이 대전 교육청에 청원하고 교육부의 추천검정을 받아서 교장으로 부임하게 됐지요."
- 대전맹학교에 처음 오셨을 때 학교 환경이라던지 아이들의 태도라던지 학교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 89년에 저희 연구소에 대전맹학교 학생들의 편지가 왔어요. 그 당시 공주사대 입학원서를 냈는데 학교에서 입학거부를 했다는 거죠. 그래서 창간된 지 얼마 안된 한겨레신문 기자들과 함께 공주사대 학장을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대전맹학교에도 들렀었는데 학교 환경을 둘러보면서 "학생들이 여기서 어떻게 공부를 하나 "그런 생각을 가졌었거든요.
"맞아요. 나도 서울맹학교에서 근무하다가 대전맹학교 교장으로 와서 보니까 교육환경이 정말 애들 장난하는 것 같더라구요. 처음 부임해서 보니까 일반학교에는 대부분 보급되어 있는 컴퓨터 한 대가 없고, 앞을 보지도 못하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실에 왕겨탄난방을 하고 있더라구요. 게다가 아이들이 왕겨탄 하나를 더 얻기 위해서 아침이면 아저씨들한테 담배를 사주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부임하면서 교실난방을 중앙난방식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고, 업무용으로 쓰는 컴퓨터만이라도 올해 안으로 마련해주겠다고 얘기했더니 모두들 아무리 서울에서 왔다고 하지만은 꿈도 야무지다고 얘기하더라구요. 하지만 약속한대로 1년만에 교실을 모두 중앙난방식으로 바꾸어놨고, 컴퓨터가 한 대도 없던 학교에 지금은 586컴퓨터만도 30대 이상 구비되어 있구요. 교무실에만 있던 전화가 지금은 교실과 기숙사 각 방마다 모두 전화와 인터폰, 인터넷 광케이블이 설치되어 학교 내외와의 연락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요.
2000년대 우리나라 시각장애학생 교육은 대전에서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소신을 가지고 현재는 한남대와 공동연구를 해서 우리 학교 안에 정보지원센터도 만들어져 있어요. 작년에는 2층으로 되어 있는 교실을 3층으로 증축을 했구요. 그런데 막상 부딪혀보니 이런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투자가 교육청 지원만으로는 불가능하더라구요. 우리 학교에 처음 부임해 왔을 때 교육청에서 우리학교에 1년 동안 지원하는 예산이 1억 800만원이였어요. 그것 가지고는 아이들 교육시설을 제대로 갖추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해요. 그래서 교육청의 지원은 물론 한국타이어 지원도 받았고, LG전자 지원도 받았어요. 지금 우리학교 1년 예산이 5-6억 가까이 됩니다."
현재 시행중인 초등부와 중등부 과정의 통합교육이 해답 얻으면 고등부도 시행할 계획
-그럼 대전맹학교는 초등부에서부터 고등부까지 있는 건가요?
"초등부부터 전공부까지 있습니다. 대한민국 맹학교 가운데 전공부 인가 받아서 학점은행제를 하고 있는 곳은 서울맹학교와 대전맹학교 두곳 뿐이예요. 우리 학교에서는 학생이 원한다면 학사학위까지 받아서 나갈 수 있지요."
-요새 아이들이 전맹은 조금 줄어들었잖아요. 그래서 시력이 약하고 그런 학생들도 맹학교로 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학생들은 일반학교에서 통합교육을 하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우리 학교도 작년부터 일반학생과 시각장애학생의 통합교육을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초등학교는 중앙초등학교에서 하고, 중학교는 가오중학교에서 하고 있습니다."
-일반학교와의 통합교육 교류문제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지요?
"우리 학생들이 일반학교에 가서 일반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합니다. 특수교사가 함께 가서 보조교사 역할을 하면서 그런 교육과정에서 시정할 점과 통합교육을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연구해서 보고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죠.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통합교육을 하는 10개 학교를 놓고서 교육부에서 보고대회를 했는데 우리학교가 단연 1등을 했어요. 뿐만 아니라 작년 10월에는 우리학교가 통합교육성과와 여러 가지 종합적인 학교발전을 위한 노력으로 인해 "제19회 세종문화상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습니다."
-그럼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통합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고등학교는 통합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요?
"고등학교는 안마와 침술 같은 직업교육 때문에 통합교육을 하지 못해요. 통합교육을 하려면 그런 직업교육을 포기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통합교육의 문제점이 바로 그거예요. 현실적으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장애우들에게는 졸업 후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서 직업교육이 필요한 실정이거든요."
-그럼 차라리 고등학교 과정까지는 일반학교와 통합교육을 하고, 전공부를 더 강화해서 교육하시는 것은 생각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우선 지금은 시작단계니까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에서 통합교육의 해답이 얻어지면 그때 그 부분을 시행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맹학교 졸업한 아이들이 대학진학을 많이 하죠. 이 아이들이 시각장애우 대학생 연합회도 만들고 활발한 활동을 하거든요. 이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대학을 진학한 것은 안마사나 침술사보다는 그것 말고 다른 일들을 해보고자 해서였는데 결국은 졸업할 때가 되면 취업의 문이 좁기 때문에 갈등이 아주 심하다고 하더군요.
"물론 맹인학생들에게 대학 졸업 후 취업문이 좁은 것도 사실이겠지만 지금도 특수교육과나 사회복지과를 나온 아이들은 취직이 거의 다 되거든요. 그러니까 대학을 진학하되 아무렇게나 가지 말고 시각장애우들이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분야의 과를 택하라는 겁니다."
대학 측의 반대에 부딪혀 차선책으로 선택한 철학전공이 너무 힘에 붙여 수없이 낙심하기도
-원래 어릴 적 꿈은 뭐셨어요?
"열여섯살 때까지는 학교도 못 다니고 집에서 말썽만 피웠으니까 꿈이라는 걸 가져보지도 못했지요. 꿈도 없고 잠도 없었던 거죠. 그런데 열세살 되는 해였나, 1951년 날짜도 잊어버려지지가 않아요. 여름날이었는데 맹인아저씨 한사람이 밥을 얻어먹으려고 우리 동네에 찾아들었더라구요. 그런데 그 사람이 길을 잘못 찾아들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밥을 주기는커녕, 길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는 그 아저씨를 동네 아이들이 안내해 주려고 하자 오히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길 안내를 못하게 하는 거예요.
맹인이 된 것은 전생에서 죄를 많이 지은 탓이고, 그 죄값으로 세상에 맹인으로 태어나 고생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더라구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이 동네에서 유지였으니까 나한테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까 나도 사회에 나가면 저런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고민을 하게 됐지요. 그런데 어느 날 우리동네에 교회가 들어왔어요.
식구들이 내가 집에서 매일 비실비실 놀면서 고민하는 게 안되보였던지 교회라도 나가서 취미를 붙였으면 했죠. 그래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1954년 봄에 교회에서 대전에 맹학교가 있다는데 거기 가서 공부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하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여서 그해 봄에 바로 충남맹인학원(현, 대전맹학교)에 입학하게 됐지요. 그때부터 세상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계획하고 실천하기 시작했지 그 전에는 암흑이었어요."
-교장선생님은 학교는 어딜 나오셨나요?
"초등은 대전맹학교를 다녔구요. 중고등은 서울맹학교 다녔고, 대학은 충남대학교, 대학원은 단국대학교에서 마쳤습니다."
- 맹인계에서는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밞으셨군요. 그럼 전공은?
"대학에서는 철학을 했고, 대학원에서는 국민윤리를 했습니다.
- 맹학교 졸업 후 보통은 안마나 침술사로 나가지 않습니까?
"저도 선생이나 교장이 되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는 한양안마원이라는 곳에서 일했었는데 고등학교 진학할 때 교장선생님이 안마원을 그만두지 않으면 진학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요. 대학교 들어가서도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새벽 두세시까지 여관 골목을 누비면서 안마피리(70년대를 전후해서는 밤중에 안마사들이 피리를 불고 다니면서 안마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를 불고 안마를 하면서 부족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고 그랬지요."
- 그랬다면 안마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셨을 것 같은데, 대학에선 철학을 전공하시지 않았습니까?
" 철학과는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예요. 난 1963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때가 우리나라에 대학입학예비고사가 생긴지 2년째 되는 해였어요. 8만 4천명이 응시해서 1만 6천명 정도가 합격했는데 나도 합격자 대열에 끼어 있었지요. 그래서 가정형편을 고려해서 등록금이 싼 국립대학에 입학하기로 마음먹고 충남대학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입학원서를 내자 맹인이라 받아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12일간이나 총장실을 찾아다니며 싸웠지요.
그랬더니 대학에서 어느 과를 원하냐면서 타진을 해왔어요. 나는 법과대를 원한다고 했더니 학교에서는 법과는 정상인들을 받아야 하니 안되고 사학과나 국문과, 영문과 중에서 선택을 하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사학과로 정정을 해서 원서를 냈는데 이번에는 단과대학에서 또 걸리는 거야. 사학과 과장이 자기네 과는 고전답사니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다고 못받아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떡하라는 얘기냐 했더니 당시 문리대학 교무과장 내가 철학과 과장인데 자꾸 힘들게 그러지 말고 철학과에 입학하면 어떻겠냐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당시 충남대학교의 경우 입학정원이 1200명이었는데 지원자는 100명 정도밖에 되질 않았어요. 시험점수로 따지면 법과대가 아니라 어느 과에 가든 입학하는데 문제가 없었던 거죠. 다만 내가 장애우라고 해서 이렇게 입학하는 과정에서 내가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는데 어려움을 겼었던 겁니다."
-대학공부를 하는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입학을 하고 보니 이건 내가 할 공부가 아니더라구요. 동양철학 같은 경우에는 한자가 너무 많고, 더군다나 한자는 점자로 표기가 불가능해서 공부를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 남들이 불러주는대로 무조건 책을 외워서 하려니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더라구요. 동양철학은 학점도 잘 나오질 못했어요. 그나마 같은과에 이조일이라는 친구가 내가 너무나도 어렵게 공부하는 것이 안되었던지 스스로 자진해서 학교에서는 강의실을 옮겨다닐 때마다 동행해 주었고, 수업이 끝난 후에는 4년동안 내내 자기 집에서 자전거로 30분이나 걸리는 내 숙소까지 찾아와 내가 학교에서 못받아적은 수업 내용을 적을 수 있도록 불러주었고 시험 때가 되면 책을 읽어서 함께 공부하는 등 마음 깊은 우정을 보여주었지요. 그래도 학점이 잘 나오질 않아서 실의에도 많이 빠지고 재시험도 보면서 졸업도 못할 뻔하고 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어렵게 공부는 했지만 결국 기반을 닦은 것은 안마와 침이었어요."
퇴임 후에는 더욱 더 활발하게 맹인 권익보호 위해 일하고 싶다
-송교장 선생님이 10년간 대전맹학교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굉장히 많이 발전시키셨기 때문에 이제는 주변에서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 이런 중요한 자리를 맡겨도 아무 문제될 게 없다는 평가가 나오게 될 것 같아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기 어렵다는 얘기들을 하는데 그건 맡겨봐 주지도 않고 하는 소리들이죠. 제가 교장으로 일하면서 느낀 게 있다면 교장은 학교에 가만히 앉아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세일즈 하듯이 학교를 경영하는 행동들이 필요합니다. 저도 그 동안 다른 학교들도 많이 다니고 비교하면서 학교의 어떤 부분들을 더 보완하고 발전시켜야 하는지 고민을 거듭해 왔거든요."
-그럼 정년퇴임은 언제 하시게 되나요?
"내년 2월입니다."
-내년에 퇴임하신 후에는 어떤 계획들을 가지고 계신가요?
"첫번째 목표는 비례대표로 대전시 시의원활동을 하는 겁니다. 현재 부산하고, 경북에 맹인이 비례대표제에 의해서 시의원을 하고 있는데 아주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한가지는 지금까지 쭉 해왔던 일들이지만 맹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연구소를 이제 본격적으로 문패 걸어 놓고 하고 싶습니다."
-정년퇴임하시면 시의원으로서의 활동과 맹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일들을 계획하고 계시는군요. 퇴임하신 후에 교장선생님으로 있으실 때보다 더 활발해지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맹인권익연구소를 내기 위해서 제가 3년 전부터 한달에 100만원씩 적금을 넣고 있어요. 사무실 얻으려구요. 올 12월이면 끝납니다. 그래도 막상 10년 이상 몸담았던 학교를 떠나려고 하니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함께걸음 독자들 중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있고 비장애우들도 있거든요. 또 여러 기관에서 많은 분들이 일고 계신데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장애우는 제 아무리 똑똑해도 혼자서는 일어서기가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우의 성공은 일반인들의 관심도에 정비례한다고 생각해요. 독자여러분 모두가 장애우는 관심을 가져주고 마음을 여는 만큼 발전하고 세상 속으로 동화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터뷰 말미에 송교장에게 어쩌면 그렇게 얼굴이 맑으냐고 감탄하자 그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감격이고 축복 아니냐. 더군다나 내가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쓰임새가 있으니 그처럼 기쁜 일이 없다"고 말한다. 송권 교장은 학교를 떠난 뒤에 할 일이 더 많아질 것 같다면서 이제는 장애우들의 생활 속을 파고들어 일을 하고 싶다며 청순하게 웃는다. 그가 야망이 많은 사람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어느 것 하나 개인의 욕심과 관계되어 있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송권 교장의 삶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꿈꾸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는 꿈꾸는 만큼 노력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담 김정열 편집주간/ 정리 이나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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