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30년을 한결 같은 어머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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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서른 한 해.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맞선 어머니, 그 결과 한 노동자의 어머니를 뛰어넘어 이 땅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가 된 이소선(72세) 여사.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과 보상법 등 열사의 삶이 재평가되는 시점에서 짧지 않은 싸움을 거쳐왔지만 여전히 세상을 향한 따뜻한 사랑을 간직한 그녀를 만나 보았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7가 평화시장. 제 몸에 불을 붙인 사람이 있었다. 이제는 열사가 된 사람. 그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외쳤다는 사실이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땐 그런 시대였다고, 모두 목숨을 걸고 저항하던 시대였다고 치부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왜 분신일까. 죽음을 각오하려면 목을 맬 수도 있고, 폼나게 권총 한 자루를 옆머리에 들이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신을 하는 사람이 각오하는 것은 죽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듯하다. 자신을 태우는 것, 인간과 세상이 최초로 마주하는 살갗을 태움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근본적인 삶의 조건을 부정하는 것, 죽음에 이르는 긴 고통의 과정을 스스로 선택하여 그 고통보다도 더 고달픈 생을 고발하는 것. 선택한 죽음에 뭐 그리 많은 의미를 부여하느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가까운 책상 위 라이터를 켜서 잠깐이라도 자신의 살갗을 그을려 보라. 과연 몇 초나 견뎌냈는가.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 위험과 공포에 대한 인간의 보호본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고 강렬하다. 그러나 전태일, 그는 그러한 본능마저도 초월할 만큼 약자의 생을 사랑했고 새로운 세상을 염원했다.
전태일을 몰랐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은 반성과 경고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죽음을 통해 절망을 보았고 그 절망 끝에서 다시 희망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미 그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그의 어머니 이소선 씨를 만나기 위해 유가협 사무실로 가는 내내 이런저런 물음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제 청계천은 30여 년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대형 의류할인매장이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올린 소비의 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로의 수선스러움을 한풀 접은 막다른 골목에는 <한울집>이라는 현판을 단 한옥 한 채가 거짓말처럼 서 있었고 그곳이 바로 열사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한많은 세월을 서로 보듬으며 지켜온 곳,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였다. 들어서자마자 미닫이 문 너머로 낯익은 그러나 한편으로는 낯선 한 사람의 옆모습을 마주했다. 갑작스런 전율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뭔가 망치로 얻어맞은 듯 잠시 멍해있던 기자는 시간이 좀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재평가되는 열사의 삶
가까이에 마주 앉아서 본 이소선 씨는 얼핏 봐도 너무 힘겨워 보였다. 온몸에는 군데군데 뜸 자국과 파스 자국이 선연하고 지쳐있는 표정이 역력해서 무언가를 묻기조차 난감했다. 머뭇거리는 기자에게 그녀가 먼저 말을 건냈다.
“물어 봐요. 물어 보면 다 얘기해 줄테니.”
전래동화라도 들려 줄 듯 푸근한 음성을 듣고 난 후에야 기자의 긴장된 마음이 좀 풀렸다. 지난 2000년도는 전태일 열사 30주기가 되던 해였다. 그리고 한 해가 더 지난 올해에 와서야 그의 죽음은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가 그를‘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한 것이 그것이다. 30년만에 아들의 죽음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것에 대해 그 어머니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뿌듯함이었까? 착잡함이었을까?
“신문이고 뭐고 다 민주화 유공자가 되었다고 떠드는데, 아직 유공자가 된 게 아니야. 명예만 회복시켜 준 거지. 우리가 의문사진상규명및명예회복특별법 제정을 하게 하려고 422일동안 한데서 잠을 자며 싸웠어. 태일이 하나 공 인정받자고 그런 게 아니야. 태일이가 명예회복을 한 것보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 못하는 게 문제인 게지. 우리 태일이가 그리고 여기 먼저 간 아들, 딸들이 저 하나 명예 얻자고 목숨까지 버렸겠나? 우리가 우리 아들, 딸들만 인정받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면 죽어서 자식놈들 얼굴도 못 봐. 그리고, 그게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야. 사람 목숨을 돈으로 매기고 조사를 하네 마네 시간만 끌고. 그래서야 어디 쓰겠어?”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호칭이 과연 빈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당신 아들이 30년만에 제 공로를 인정 받았으니 인정상 기뻐해도 좋을 법 한데, 그녀는 결코 사적인 감정을 앞세우지 않았다. 이번에 제정된 특별법에 의해 보상을 받게 되었을 때 전태일 열사의 가족에게 지급될 보상금은 820여 만원이 될 것이라고 한다.
호프만식 계산법은 열사가 살아 생전에 받았던 급여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전태일 열사의 유가족은 90년대에 목숨을 바친 열사의 1/10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에게 돈은 예민한 부분 중 하나가 아닌가. 이 이야기를 꺼내며 내심 조심스러우면서도 기자는 아들의 죽음을 그 정도의 값어치로만 환산하는 세상에 분노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800만원 그거 받아도 그만이고 안 받아도 그만이야. 더 줘도 그만이고 덜 줘도 그만이고. 내가 돈을 바라고 이 일을 했으면 벌써 그만뒀지. 나는 여태 세상을 돈을 가지고 살아온 게 아니야. 양심의 자유, 그거 하나 가지고 살아온거야. 사람이 모든 걸 다 가져도 양심의 자유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아. 태일이 그렇게 가고 난 직후에 정부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준다고 했었어. 돈으로 보상받겠다고 생각했다면 그 때 받았지. 하지만 별별 험한 꼴 다 봐가면서도 돈은 안 받았어. 암, 내가 돈 받으려면 그 때 받았지.”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30년 전 그 때로 되돌아 가 있었다.
어머니의 세월
우리 노동운동사에 불씨를 당긴 그 날, 대한민국은 한 명의 젊은 노동자를 잃었고, 한 어머니는 목숨보다 귀한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
“그 날 일이 엊그제 일처럼 눈에 선해. 어떻게 30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어. 정말 눈깜짝 할 새더라구. 그 때 태일이가 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새까맣게 타 가지고 벌써 손을 쓸 수가 없는 지경인거라. 하는 말이‘엄마가 나를 그렇게 키웠으니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거야. 엄마가 나한테 항상 자기 자신보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잖아요. 나는 엄마가 나한테 그렇게 가르쳐서 그대로 살았으니 엄마도 그렇게 해야 돼.’이러는 거라. 그러면서 자기가 못다 한 일을 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자길 볼 생각을 말라고… 몇 번이나 나한테 ‘꼭 , 꼭이야’하며 다짐을 받아두는데 목구멍이 타버려서 말할 때마다 목에서 피가 올라오는 거야. 나는 그거 보다가 그냥 그 자리에서 까무라쳤어. 그게 마지막이었지.”
기자의 수첩에는 그녀에게 할 다음 질문으로‘30년이란 세월 동안 어머님을 지탱해 준 힘은 무엇인가요?’ 라는 항목이 적혀 있었다. 누군들 그렇게 죽어가는 아들과의 약속을 쉽게 져 버릴 수 있었겠는가. 기자는 슬며시 그 질문을 지워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내가 여덟 가지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시신 인수를 안 하겠다 그랬거든. 근로조건 개선, 노조 결성 등등 해가지구 8개 요구 조건을 들어 달라고 했지. 처음에는 꿈쩍도 안하다가 언론에서 연일 보도하고, 또 그때 마침 태일이가 대학생 친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쓴 일기장이 텔레비전에 나면서 전국에서 대학생들이 서울로 몰려들었어. 정부에서 처음에는 나를 협박하고, 협박하다 안 되니까 돈으로 매수하려고 했지만 내가 거부하고, 여론은 자꾸 안 좋아져서 수세에 몰리니까 그 여덟 가지 요구조건을 들어주기로 약속을 했지. 그 약속을 받고 나서야 나는 시신을 인수 해왔지.”
당장은 여론에 밀려 여덟 가지 요구조건을 들어 주었지만 장례식이 끝나고 여론이 잠잠해지자 정부는 노골적으로 노조를 탄압했다. 청계노조를 지키기 위한 이소선 씨와 노조원들, 그리고 이를 탄압하려고 하는 정부의 줄다리기는 20여 년을 계속되었다. 청계노조 뿐만 아니라 웬만한 노동운동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달려간 덕분에 그녀는 당연히 경찰의 표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셀 수도 없이 잡혀가고, 두들겨 맞았지. 젊을 땐 몰랐는데 이젠 온몸이 다 아퍼. 젊어 옥살이 할 때는 좀 쉬는 셈치고 들어가 있고 그랬는데 지금 하라면 못 하겠어.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지.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했으니까. 오늘 죽어도 그만 내일 죽어도 그만이야. 나이 먹어 여기저기 고장나고 보니 요새 태일이 생각이 그렇게 날 수가 없어.”
그녀의 얼굴에 잠깐 스치는 쓸쓸함. 그래도 그 안에는 생의 험난한 굴곡을 지나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잔잔한 무게가 깃들어 있었다.
열사가 원한 세상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게 뭔지 알어?”
갑자기 던져진 질문에 잠시 쭈뼜대는 동안, 그녀가 내쳐 답까지 일러준다.
“바로 인간이야. 이제 세상을 더 살아보면 알겠지만 세상에서 제일 못 믿을 게 인간이거든.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인간을 위해 싸워 왔는데, 그걸 가로 막는 건 인간이더란 말이야.”
그렇다. 그녀는 인간을 위해 싸워 왔다. 인간을 위해, 인간에 대항하여 싸우느라, 그녀의 아들을 재가 되었고 그녀의 30여년 또한 평탄치 않았다. 그녀 뿐인가. 전태일 열사 분신 이후, 정말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살 만한 세상, 민주화된 세상을 염원하며 스러져갔다. 그렇다면 지금 열사가 그토록 염원하던 세상은 과연 찾아왔을까?
“세상이 좋아졌냐고? 30년을 싸워 왔어도 달라진 게 없어. 있긴 있지. 이젠 최루탄 안 쓰는 거. 그리고 이렇게 모여 있어도 잡아가지 않는다는 거. 옛날 같았어봐. 여기서 이러고 나가는 길에 바로 잡혀갔어. 그거 빼고는 달라진 게 없어. 못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못 살고 잘 사는 사람들만 잘 살고. 당장 최루탄은 안 쏘지만 교묘하고 눈에 안 보이는 폭력은 그대로 있는 거 같아.”
짧고 낮은 그녀의 한숨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불편한 몸으로 기자를 문 앞까지 배웅 나온 이소선 씨는 마치 할머니가 손녀딸을 집에 보내듯 ‘어여 가라’며, 더운 데 오느라 고생했다고 안쓰러워 했다. 사진을 한 장 찍자는 부탁에 흔쾌히 승낙한다. 더위가 가시려는 듯 한 두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고, 그녀는 유가협 현판 주변을 정리한 후 현판이 잘 나오게 찍어 달라며 그 옆에 가서 섰다. 마치 현판이 아들이라도,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선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유가협 사무실이 있는 골목을 빠져나가면서 올 때는 보지 못했던 불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땅바닥에 붙어 빼꼼히 창문만 내민, 그 창문에서 보면 지나가는 사람 발만 보일 것 같은 낮은 창. 그곳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었다. 그 곳, 작은 영세공장들에서는 여전히 기계들이 돌아가고 있고 열사의 형제들는 아직 이 곳에 있다. 그 숱한 기계소리들을 상상하고 있자니, 열사가 죽음을 결심한 순간에 일기장에 적은 짧은 글귀가 떠올랐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글 박채란 객원기자 / 사진 이수지 기자 (rhanai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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