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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머리 위에 빵집 간판이 보이면, 어려운 장애우를 만나면 전화주세요!

7년째 ‘사랑의 빵’ 전달하는 보험설계사 이문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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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각박해지는 세상이지만, 그런 세상의 변화와는 다르게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껏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문호 씨도 그런 사람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로 좌반신마비라는 2급 장애를 갖게된 그는 10년의 재활과정을 거쳐 비로소 자신의 힘으로 설 수 있게 된 후, 7년째 사랑의 빵을 전달하고 있는 장애우다.

동양화재 청주영업소에서 팀장으로 일하는 문호 씨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청주시내 45개 제과점을 돌아다니며 그날 남은 빵을 수거해 장애우시설과 고아원 양로원 등에 전달하고 있는데 지금은 청주 지역 일대 시설에 이문호 씨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은 거의 없을 정도다. 그의 이런 빵 나눔운동이 알려져 지난 9월 7일 사회복지의 날에는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 점의 불빛도 내 것이 돼주지 않을 것 같은 날들

이문호 씨는 자신에게 있어 이십대 시절은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한 시간들이었다고 기억했다. 너무나 평범했던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84년 초여름, 문호 씨에게 닥친 갑작스런 교통사고는 그에게 세상을 향해 턱없는 객기를 부려보는 것도, 준비 없이 맞아들인 어른의 이름 앞에서 더럭 겁을 집어먹는 일도, 허락하지 않았다. 교통사고와 관련해 주변에서 일어났던 많은 일들은 그를 절망보다는 분노를 갖게 하였고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거나 좌절할 겨를도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날짜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84년 6월 9일이었는데 청주 우암산을 도는 순환도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트럭이 덮쳐 와서 도로 끝의 풀섶으로 피했어요. 그리고는 의식을 잃었는데 어머니 말로는 한달 닷새만에 깨어났다고 해요. 병원치료는 거의 못받았어요. 정치적으로 연루가 되어 있어서 저를 비롯한 가족들이 탄압도 많이 받고 어머니가 옥고도 치렀거든요.”

도대체 어떤 교통사고이기에 정치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건가 싶어 물었더니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문호 씨를 친 트럭기사가 충청북도 도지사를 몇 번 지냈고,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사람의 선거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한달 닷새만에 정신을 차려보니 모든 사고의 책임이 문호 씨에게 돌아와 있었다는 거였다.

당시 문호 씨와 함께 있었던 친구들이 분명히 확인한 바에 의하면 사고운전자는 무면허였음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다른 사람이 운전자라고 법정에 나섰고, 운전자라는 그 사람이 ‘자신이 운전을 하고 있는데 앞에 자전거를 탄 아이들이 있어서 피하려고 하는 순간 한 학생이 중앙선으로 뛰어들었다’고 진술을 한 것이다. 게다가 그 도로는 분명히 사고 당시 트럭이 들어갈 수 없는 통제구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의 서류에는 사고 후인 7월 16일에 트럭진입금지 표지판을 설치한 것으로 꾸며져 있었다. 문호 씨의 어머니는 발이 닳도록 시청과 국회의원 사무실, 하다못해 서울의 청와대까지 찾아다니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문호 씨 자신에게도 그러했을 터이지만 어머니에게는 더욱 기가 막힌 노릇이었을 것이다. 문호 씨가 네 살 되던 해, 남편의 심한 의처증 증세와 구타에 못 이겨 이혼을 결심한 어머니였다. 아들을 친정집에 맡겨 두고 10년을 객지 생활하면서 돈을 모아 겨우 친정 집터에 외양간 한 채와 부엌 달린 방한칸짜리 집을 마련하고 한숨 돌리자마자 아들이 사고를 당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까지 써야 했으니 말이다.

도무지 사건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억울함과 울분을 삭힐 수 없었던 그의 어머니는 85년 1월, 청주 시내 거리 곳곳에서 이런 억울함을 담은 호소 문을 거리 곳곳에 뿌렸고, 소도시이다 보니 입소문은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선거가 다가오는 시점에서 시내가 떠들썩해지자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사람이 그의 어머니를 명예훼손과 무고로 1월 14일 고소를 했고, 그의 어머니는 선거가 끝나던 2월 12일까지 한달 여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어머니가 구속된 후로 제야단체들이 개입하고 운동권단체에서 찾아오고 신문기자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한두줄 씩 신문에 나기 시작하니까 처음에는 치료도 못해준다고 하던 놈들이 보험공사에서 천 구십 만원을 보상금이 나왔으니 찾아가라고 하더군요. 그때 당시 저는 왼쪽 좌반신을 쓰지 못해 병원에 있었고, 어머니는 구속되어 있을 때였는데 저희 아버지를 불러들여 보상금을 타가라고 하기도 했어요.

결국 여러 가지 이유로 그 방법이 불가능해지니까 나중에 협상을 하자고 하더군요. 1억 5천이 넘게 보상을 해주고 어머니를 석방해주는 대신 형식적으로라도 재판의 절차를 밟는 민사소송을 하자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막상 재판에 들어가 보니 옛날에 조작해놓은 서류를 가지고 가해자들 증인을 세워 가지고 또 제 과실로 몰아가는 거예요. 그 당시 100% 노동력 상실로 해서 1억 6천만원 감정이 나왔는데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참질 못하고 가해자 쪽 증인의 멱살을 잡아 법정소란에 폭력으로 어머니 앞으로 벌금형이 4천만원이 나왔어요. 1억 6천 보상받은 중에 이것저것 제하고 어머니 벌금형 내고 나니 6천만원 남더군요. 이런 저런 억울한 마음과 어머니의 구속으로 정신차릴 틈도 없어서 제 인생을 비관하거나 좌절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아픔이 지금은 다 잊혀졌나 싶었는데, 그때 일을 말하는 그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린다.

사실 문호 씨라고 해서 왜 답답하지 않았겠는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인생의 겨울이 찾아왔고 얼음밭처럼 차가운 바닥에 누워, 단 한 점의 불빛도 자기 것이 돼주지 않을 것 같은 앞날에 절망했을 것이다. 단지 사고 이후 계속되는 재판과 투옥으로 쇠약해진 어머니 앞에서 그마저 나약해질 수 없을 터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의 유일한 버팀목이었으므로 그 버팀목의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일이 바로 문호 씨가 해야 할 일일지도 몰랐다.


자원활동 시작하면서 생활의 활기 되찾아

문호 씨가 소외된 이웃에게 눈을 돌리게 된 것은 94년 무렵이었다. 공부에 대한 미련으로 야학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해오던 그는 94년 2월 대입검정고시를 치른 후 곧바로 경실련 사무국에서 일하게 되었다. 교통사고 후 5년동안은 휠체어에 의지해, 또 5년 동안은 눈물나는 스스로의 재활 노력으로 비로소 자신의 힘으로 어렵게 설 수 있게 된 후였다.

“경실련에서 근무하면서 맹인협회 청주시지회라는 단체를 알게 돼 자원활동을 시작했거든요. 맹인들이나 그밖에 지체장애우들이 외출을 하실 때 차량운행 자원활동을 했어요. 이와 더불어서 맹인협회에 일주일에 한번씩 모임이 있었는데 그 분들이 저보고 차를 가지고 있으니까 빵집에 일주일에 한번씩 가서 그날 남은 빵들을 좀 거둬다 달라고 부탁을 하셔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처음엔 청주시내 제과점 중에 세곳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남은 빵을 거둬다가 맹인협회분들이 주말모임을 할 때 간식으로 가져다 드리기 시작한 거죠. 그런데 활동하면서 장애우들을 만나다보니 형편이 어려운 미신고시설 이야기들을 듣게 됐어요. 청주지역에는 장애우시설을 비롯한 여러 시설이 있어요. 대부분이 미신고시설인 그곳에서는 대부분이 고물상이나 버섯재배, 무공해비누 생산 등으로 살길을 열어 가고 있지만 대부분이 열악하기 짝이 없죠. 그래서 제가 열심히 새참이라도 잡수시라고 빵을 나르고는 있어요”

처음엔 그냥 맹인협회분들의 간식거리 마련하자는 생각으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차츰 시설들을 알게 되어 처음에는 한곳에 나눠주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마음이 가벼울 수 없었다. 그러나, 시설에 가서 집없는 아이들과 장애아동, 노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세 곳의 제과점으로 시작했던 것이 이제는 청주시내 45개 제과점으로 대상이 늘어났다. 95년도에 방송대 국문과에 입학하면서 경실련을 그만 둔 이후 서울 학교 본부에서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하느라 일주일에 몇번씩 서울에 올라오던 그 시절에도 한번도 자신이 약속한 요일에는 반드시 빵을 걷기 위해 청주로 내려와야 마음이 편한 그였다.

그런데 마침 사회복지협의회 푸드뱅크라는 곳에 연결하면 빵의 판매가의 60%를 분기마다 세금공제 영수증을 넣어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됐고, 문호 씨는 그런 점들을 활용한다면 더 많은 제과점을 개척해서 더 많은 시설에 빵을 가져다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더욱 바쁘게 청주 시내 제과점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청주 시내에 있는 거의 모든 제과점에서 빵을 나누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고통이던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 세월을 잊게 해준 그들에게 오히려 감사하지요. 문밖까지 나와 나를 기다려 주고, 맛있게 먹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는 보람을 느낍니다. 사실 많이 알려진 곳보다는 미인가시설에 더 애착이 갑니다, 알려지지 않은 만큼 정부의 지원이나 이웃들의 손길이 덜 미치는 곳이죠. 그런 곳일수록 한번이라도 더 가게되는 것 같아요.”

자원활동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마음에 활기를 되찾았다는 그다.

자원활동하기에 보험설계사만큼 좋은 직업도 없죠

95년 방송대에 입학하면서부터 문호 씨는 보험설계사라는 새로운 직업에 도전했다.

사람을 상대로 자신의 논리를 펼쳐 계약서에 서명을 하게 하기까지가 만만할 리 있을까 싶기도 하고 고객들이나 영업소 직원들이 장애우라는 편견을 가진 않는지 궁금해 물었더니 문호 씨는 기자의 걱정이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히려 자원활동을 하는데 보험설계사만큼 좋은 직업이 어디 있겠냐며 웃는다.

“장애우라서 영업소 동료들이나 고객들을 만나면서 불편하거나 어려운 점은 없어요. 여느 직장처럼 상사 눈치 봐가면서 근무하는 것도 아니고 아침에 출근하면 하루종일 내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니까 보험설계사라는 게 자원활동을 하기에 딱 좋더라 그 말씀입니다. 고객들께서 사고만 안 내신다면 많고 많은 게 시간 아닙니까. 소털같이 많은 시간 뒀다 뭐하겠어요?”

이제는 보험영업소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그의 빵나눔운동에 동참에 빵을 걷으러 다닐 때 함께 가기도 한다. 혼자 다니면 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그 일이 한두사람의 도움으로 절반 이상의 시간이 절약되기도 해 요즘은 그 남는 시간에 더 많은 장애우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한없이 기쁘다.

단지 불편한 것은 빵 걷으러 다닐 때 빵집이 대부분 버스정류장 옆에 있어서 차량 주차하기가 힘들다는 것, 그리고 눈비 올 땐 뒤뚱거리는 그의 걸음 때문에 우산을 써도 눈비는 꼬박 맞고서 다녀야 한다. 그러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의 빵나누는 일은 한결같다. 자신이 오기를 목을 빼고 기다릴 사람들의 간절한 눈빛을 생각하면 1분 1초라도 아끼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한다.

문호 씨가 이웃들과 나누는 것은 빵 뿐만이 아니다.

“신문지나 종이상자 또는 헌옷 같은 거 있으면 버리지 마시고 꼭꼭 모아 두셨다가 전화 한 통 때려 주시면 냅다 달려 가겠습니다. 또한 허양(주변)에 거동이 불편하거나 저 같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 계시면 연락처 적어 두셨다가 연결해 주시고요. 더불어 사는 세상 다만 같은 하늘 아래서 숨쉬고 그저 똑같은 땅 위에서 이불 덮자고 만들어 낸 말은 아니겄쥬?”


아들이 둘이나 있는 총각아빠로 살아가기

요즘 문호 씨의 생활은 전에 없이 빠듯하다. 하루가 다르게 커 가는 두 아이의 아빠 노릇을 해낸다는 게 만만치 않아 박봉을 쪼개가며 생활해야 하는 탓이다.

그가 결혼을 했느냐고? 물론 그는 법적으로는 분명한 대한민국 인증 총각이 분명하다. 그런데 웬 아들 타령이냐 싶겠지만 그는 분명 아홉살 난 두 아이의 아빠로 살아가고 있다.

세속의 잣대로는 문호 씨의 다섯 명의 식구가 한 가족을 이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좀체 이해하기 힘들다.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백일이 지난 후부터 줄곧 키워온 조카 한별이와 작년부터 함께 살게 된 친구의 아들 상훈이가 그 구성원이다. 몇 해 전만 해도 어머니와 조카, 문호 씨 이렇게 세명의 식구가 단출하게 살았지만 몇 해전 외할머니가 자식들과 함께 사실 수 없는 사정이 생겨 문호 씨네 집으로 모셔왔고 얼마 전에는 알콜 중독인 친구가 도저히 자신은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고아원에 버리겠다는 말을 듣고 그 길로 달려가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는 퇴근길에 자신의 귀가를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미 지나 온 세월이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나누고 쪼개며 살아가면 될 터라고 단순히 생각한다.

“지난 세월의 고통은 다 과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평생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일을 실천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요. 보험영업은 자원활동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니까 이 일도 열심히 해야지요. 저를 믿고 찾아오는 고객들이 생겼으니까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뛰어야죠. 큰 욕심 없이 더불어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욕심을 버리니 사업도 순조롭고 마음도 편하더군요. 아이들이요? 주위에선 아이들이 크면 돈이 많이 들텐데 그 감당을 어떻게 할거냐고 걱정들이시지만 전 별로 걱정 안해요. 열심히 영업해 고객 늘려서 월급 더 받으면 되지요. 문제는 제가 가는 길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게 더 급한 일이에요. 하하하”

그는 농담 삼아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것이 쑥스러웠던지 환하게 웃는다. 그의 얼굴  가득 가을볕이 따사롭게 쏟아지고 있다.

그 어디에도 마음을 둘 줄 몰라 방황하던 그 세월도 이제는 나눔을 함께 하는 이웃들과 함께라면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남은 인생은 부모 없는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따뜻한 그의 마음과 눈길에 이제는 평온함이 깃들여 있다.


글·사진/ 이나라 기자(n2906@hanmail.net)

 

작성자이나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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