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양성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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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이 신장되었다고들 하지만 아직 우리 나라에는 호주제라는 남녀 차별적이고 전근대적인 제도가 남아 있다. 남성만이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고 부계혈통의 정통성만을 인정하는 호주제로 인해 여아낙태와 성비불균형이라는 심각한 사회문제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합리한 모순을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호주제를 폐지하기 위해 수 년에 걸쳐 시민운동을 하고 있는 고은광순씨를 만나 호주제의 문제점과 한국사회의 여성문제의 현주소, 앞으로의 대책 등을 들어보았다.
세 계에서 호주제가 있는 나라는 어디어디가 있을까? 일본? 우리 나라 호주제라는 것도 일제가 심어 놓고 간 것이니 남아 있는 게 당연하다고? 삐-- 틀렸다. 일본은 1800년대 호주제를 실시하였고, 식민강점 이후 우리 나라에도 이를 이식하여 많은 효과를 보았으나 패망 후 1947년 남녀차별이란 이유로 자국의 호주제를 폐지하였다. 북한? 호주제가 생겨난 것이 일제강점기라면 북한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이같은 제도가 아직까지 남아있지 않겠냐고? 삐-- 틀렸다. 북한도 우리 나라에 앞서 이미 호주제를 폐지하였다. 그렇다. 전세계에서 호주제가 남아있는 나라는 단 한 곳,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대한민국 뿐이다. 그렇다면 전세계에서 단 한 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법, 이제 세계 어느 곳도 기억하지 않는 법, 이 땅의 사람들만이 폐지해야 한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법, 호주제란 과연 무엇일까?
민법 984조에 따르면 호주 사망 시 아들이 호주승계를 하고, 아들이 아버지인 호주보다 먼저 죽었다면 손자가 호주승계를 하며 아들, 손자가 없을 경우 비로소 결혼하지 않은 딸이 호주가 되고 미혼의 딸도 없을 경우 처가 호주가 된다. 즉 부인은 아들, 딸, 손자보다도 가정내 법적 지위가 낮다고 규정하는 것이 호주제이다. 예를 들어 지난 해 A씨는 갑작스런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두 딸과 함께 슬픔에 잠겨 있는 그녀에게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젊은 여인과 아홉 살 난 사내아이. 그 아이는 그녀 남편의 ‘혼인외자’로 출생신고가 되어 있었다. 민법에 의하면 30년을 남편과 함께 산 부인은 물론 두 딸도 아홉 살 배다른 동생에게 호주 자리를 내 주어야 한다. 이것이 호주제이다.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악법 - 호주제
“이 엽서를 보세요. 호주제가 우리의 전통인 양 이야기들 하는데 부가입적, 그러니까 여성이 남성의 집으로 시집을 가는 것도 조선 중기 이후에 이루어진 일이에요. 사실 조선시대 이전에는 남성이 여성의 집으로 장가를 드는 것이 고유의 풍습이었어요. 사실 호주라는 것은 가(家)단위 호적의 기준자를 뜻하는 건데 ‘집안의 주인’으로 오해되고 있죠. 지금의 호주제가 생겨난 것은 일제시대에요. 일제는 대다수의 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평민들에게 성을 갖도록 강요하고, 호적을 지니게 했죠. 그러면서 가족이라는 단위에 호주를 세우고 호주에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꾀했던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호주제에요. 이것을 과연 우리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터뷰를 위해 만난 고은광순(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46) 씨는 탁자 위에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에서 새로 만든 몇 가지 종류의 엽서들을 펼쳐 보였다. 여아낙태로 인해 짧아진 여자아이들의 줄, 사종지도를 강요하는 날카로운 가부장제의 손가락, 한국 사회에서 고대 이래로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일목요연하게 표현한 표까지, 알고는 있었지만 쉽게 지나쳐버리는 이야기들이 작은 엽서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아무리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해도 우리 나라에서 남자가 집안의 주인이라는 생각은 뿌리깊게 남아있는 것이 현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제가 92년도부터 한의원을 개원해서 운영했는데요, 무슨 한의원이 아들 낳는 병원도 아니고, 아들 낳는 처방을 원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찾아오는 거에요. 도대체 이런 일이 얼마나 일어나고 있는 건가 해서 한의사들을 대상으로 해서 설문조사를 했어요, 한의사 200명을 대상으로 해서 ‘아들 낳는 처방을 요구받은 것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했더니 90%가 ‘요구 받은 적이 있다’는 답을 하더군요. 그 중에는 20번 낙태를 한 여성을 만났다는 한의사부터 딸 넷을 낳고 신경질환에 시달린다는 여성을 만났다는 답변까지 사태가 너무 심각한 거에요. 도대체 이런 일이 왜 발생을 하는 걸까, 왜 해마다 3만 명씩의 여아가 살해되고, 왜 성비불균형이 일어나고, 여성들마저도 아들 낳는 처방을 원하게 된 걸까 곰곰이 생각을 해 봤어요.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인데 그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의 불합리를 제도적으로 묵인하는 것이 바로 호주제이더라구요. 일단 통신에서 만난 뜻이 맞는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호주제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구요, 97년 1월에 성비불균형에 관한 토론회를 개최하고, 97년 3.8 여성대회 때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선언을 했어요. 그리고서 98년 11월에 인터넷상에서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사이트를 열었어요.”
가부장제 문화가 아직 생활의 근간을 지배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이런 운동이 처음부터 수월했을 리는 없다. 소위 마초라고 불리는 남성우월주의자들과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미명하에 남성에게 주어진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보수세력, 무엇보다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호주제 폐지의 당위성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그러니까 98년에 가장 어려웠던 점은 호주제가 무엇인지, 그것을 왜 폐지해야 하는지 설명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대다수의 시민들이 호주제가 뭐가 문젠지 잘 모르셨거든요. 그때는 한 분, 한 분 일일이 설명을 해야 했어요. 그게 너무 힘들었죠. 지금은 언론에서도 많이 다루어 주고 있고, 호주제 폐지에 대해 여러 사람이 입을 모으고 있어서 이제는 호주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하면 무슨 내용인지 다들 아세요. 일부러 멀리서 와서 서명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구요. 나이드신 분들 중에서도 말씀 안 드려도 와서 서명해주시기도 하구요, 한 가족이 와서 다함께 서명해주시기도 합니다. 정말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어요.”
여권은 정말 높아졌는가.
그러나,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경제불황은 끝이 보이지 않고, 일각에서는 이로 인해 생기는 남성지위의 하락을 우려한다. 텔레비전은 직장을 잃고 가족에게조차 소외된 남성의 쓸쓸한 뒷모습을 카메라에 잡고,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상승한 양 우리의 시선을 잡아끈다. 실제로 여성의 대학진학율은 50% 정도이고 40% 이상의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고 있다. 남성들은 반문할 것이다.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이제 법까지 고치려 드냐고.
“맞아요. 여성 취업률은 과거에 비해 많이 늘었죠.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는 비율도 물론 늘었죠. 하지만 그 수치만으로 모든 걸 단정지을 수는 없어요. 여성 취업률은 늘었지만 대부분의 취업여성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에요. 안정된 고용 조건 속에 있는 게 아니거든. 여성이 물론 사회에 진출하죠. 하지만 사회에 진출하는 여성들이 여성들을 위한 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느냐, 사회에서 남성들과 나란히 여성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위치에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란 말이죠. 매년 유엔이 발표하는 인간개발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GEM(여성권한척도)이 70개국 중에서 63위, 거의 최하위 수준이라고 발표하고 있어요. 대학 진학률이 얼마다, 취업률이 얼마다 그것보다 실질적으로 여성이 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가 중요해요. 호주제는 그냥 상징적인 법일 뿐인데 그게 여성지위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들 하는데, 이 잘못된 그릇, 이 틀이 깨져야지만 내용이 변화를 하는 거에요. 이게 깨져야 인식이 변화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그래야 양성평등이 가능해지는 것 아니겠어요?”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은 불과 몇 명에서 시작되었지만 현재 회원이 3000여명을 넘어섰다. 지난해 제기한 헌법소송은 오는 10월쯤 나올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판결이 나온 후에도 심리를 하는데 만도 2~3여년이 걸리는 긴 싸움이다. 현재 호폐모가 제안하고 있는 대안은 1인 1적제이다. 이는 개개인이 자신의 호적을 갖는 방식으로 남녀차별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개개인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이상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물론 아직 넘어야 할 산은 많지만 고은광순씨의 눈에는 양성이 함께 평등하게 살 사회를 꿈꾸는 굳은 다짐이 엿보인다.
“사실 가정은 사회의 축소판이에요. 그런데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본적이고 뿌리깊은 차별을 법이 용인하고 있다면, 그건 사회에서의 차별과 불평등마저도 법이 용인을 하겠다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지금 한국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는것들이 무엇입니까? 학연, 지연, 혈연의 남성중심의 수직구조와 위계질서 아니겠어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호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촬영을 위해 인터뷰 다음날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이 매달 셋째주 일요일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을 찾았다. 놀랍게도 서명을 받고 전단을 나누어주고 홍보엽서를 배포하는 이들의 반 이상이 남성이었다. 그들의 반이 남성이라는 사실보다 호주제 폐지운동을 하는 건 당연히 여성들이겠거니 하고 생각한 기자 자신의 편견에 더 놀랐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쉽게 찾아오는 편견, 자신과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배타성, 늘상 있어왔던 것들이라는 이유로 현재를 바로 보지 않으려 하는 게으름, 이것들이야말로 무엇보다도 무서운 우리의 적이 아닐까? 호주제 -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존재하는 법이라고 해서 내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전에 너무 쉽게 단정짓지는 않았는지, 나의 일이 아니라고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리지는 않았는지. 높은 가을 하늘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햇살, 거리서명을 받는 그들의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에 문득 부끄러워지는 오후였다.
글·사진/ 박채란 객원기자(rhanai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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