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까지 칠한 사랑과 절망의 빛깔 > 함께 사는 세상


39까지 칠한 사랑과 절망의 빛깔

장애우의 고독과 비애 안고 80년대 민중미술 독특한 화법 선보인 화가 손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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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은 무거운 일을 할 수가 없고,3, 4일에 한 번 대변을 억지로왼쪽 다리 무릎 아래로 신경이 약하여,다리 발목부터 허벅지로 연결되는 찌리찌리 명산의 바위처럼 위용있게 돌출된 가슴뼈. 외봉 낙타처럼 생긴 등. 5척에도 못 미치는 키…’

전설로 남은 척추만곡증장애 화가 손상기(1949∼1988)는 생전 잡기장에서 자신을 낙타에 견준 바 있다. 남도의 고향 여수에서 전주로, 서울 화단으로 이어진 이 외로운 낙타의 발걸음 곳곳에 표적없는 장애우의 분노와 고독, 사랑이 있었고, 울화를 붓질로 다독거려준 그림들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그의 고달픈 여정은 80년대 암갈색 명작들을 쏟아냈지만 그 끝을 기다린 것은 심부전증과 39살의 죽음이었다.


요절한 손상기 씨 대규모 유작전으로 그의 천재성 확인


“구걸하면서, 굶으면서 그려온 그림들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생채기난 꿈을 실현시키려는 욕망에서다. 고독에 오한을 느끼며 아픔에 신음하는 내면의 언어를 추려내어 가혹하고 엄격한 훈련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어떤 것에서 헤어나기 위해 고함지르는 나의 모습인 것이다. ”

39세로 사망한 그를 추모하는 대규모 유작전 ‘요절한 문제작가 - 그 천재성의 확인’ 이 지난 8월 30일부터 9월 9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미술관에서 열렸다.

전시의 중심이 되는 유화는 정물화 ‘시들지 않는 꽃’ 연작 20점과 풍경화 ‘공작도시’ 연작 50점, 누드화 ‘사람내음’ 연작 30점 등 이며 98년 서울 샘터화랑의 10주기 추모전 이후 3년만의 행사지만 당시 공개된 유화는 40여점에 불과해 이번이 사후 최대 규모였다. 각각 1백점의 유화와 스케치 외에도 화집과 전기, 비디오, 유작시, 일기, 포스터, 유품 등을 통해 자칫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려는 작가의 모습을 조망했다.

손상기는 1949년 소금내 짙은 항구도시 여수 앞바다의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별탈없이 자라던 개구쟁이가 어느 날 늑목놀이를 하다가 떨여져 다친 허리가 이듬해 그를 척추만곡증이라는 장애를 가진 아이가 되게 했고, 다친 아이는 그 후 성장이 거의 멈춰버렸다. 그의 작품이자 한 평전의 제목처럼 ‘자라지 않는 나무’ 가 되었다.

밝고 찬란해야 할 미래는 어둠에 짓눌렸고, 열등의식과 소외감에 휩싸인 소년은 한없이 자신 속으로 추락해 들어갔다. 그러나 숱한 죽음의 유혹을 뿌리친 청년은 깊고 푸른 사념의 바다에서 문학적 감성을 건져 올리고, 세상을 향한 문명비판적 안목을 회화적으로 토로하는 방법을 키워 나갔다.

손상기는 그 이후의 삶을 그림과 글쓰기를 통해 응어리지고 폐쇄된 자신의 내부로부터 스스로 걸어나오는 기록의 시간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여수상고에 미술특기 장학생으로 입학한 그는 재학 중 ‘세계학생미술대전 특선’ ‘호남예술제 우수상’ ‘제1회원광대전국학생미전 우수상’ 등을 수상했다.

장애를 가지고 극한의 가난을 견디면서 6백여 점의 주옥 같은 작품을 남긴 서양화가 손상기(1949~88). 그는 어깨를 덮는 장발, 창백한 안색에 붉게 충혈된 눈, 1m40㎝를 겨우 넘는 키, 척추만곡증으로 튀어나온 등과 가슴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

78년 원광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상경한 그는 서울 아현동 달동네에 7평짜리 월세방을 얻었다. 부뚜막의 아궁이 앞에 화폭을 기대놓고 연탄가스 냄새를 맡으며 창작에 몰두했다.

아현동 굴레방 다리 부근에서 그가 운영했던 서울화실은 유명한 연작 <공작도시>와 <취녀>가 탄생한 태반이다. 지하철 공사 기계음에 흔들리는 골목길과 부근 맥주집 여자들의 나신에서 그는 창작혼이 숨쉴 곳을 찾았다. 칼로 계속 색깔을 벗기고 긁고 그려낸 음울한 캔버스에 절규하는 거리, 바닥생활의 슬픔을 뱉는 나무의 혼이 살아났고 그 결과 민중미술에 끌려 시대와 현실의 호흡 속으로 시점을 옮긴 것은 당연했다. ‘이 기구한 인생 무슨 말로 말하지요…’라고 읊조렸던 답답함은 궁핍과 신체장애와의 지난한 싸움을 통해 모더니즘과 현실을 아우르는 개성으로 만개하였다.

괴롭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자서전 같은 풍경화, 내면의 상처를 무겁게 가라앉힌 정물화, 생명과 성에 대한 갈망이 살아있는 누드화가 그를 미술사 속에서 살아있게 한다. 그는 그림의 제목과 내용을 미리 결정한 뒤에 단숨에 그려냈다. 그렇게 그려낸 작품들은 그의 내밀한 세계에서 빚어낸 이야기를 들려주며, 관람객들에게 독특한 서정성을 느끼게 했다.

‘자라지 않는 나무’ ‘시들지 않는 꽃’ 등 자연적 이미지를 통해 자전적 이야기를 직설적 또는 역설적으로 풀어 나가던 그는 ‘공작도시’ 연작에 이르러 마침내 사회.역사.주변의 아픔에까지 작품세계를 확산시켰다.

그는 83년 서울 동덕미술관에서 열린 제3회 개인전을 계기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김기창, 권옥연, 전혁림 등의 작가들이 앞다퉈 작품을 사갔고 그해 미술평론가들은 ‘올해의 주목할 만한 문제작가 9인’ 으로 그를 선정했다. 이후 해마다 샘터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어 매번 작품의 90%가 팔렸지만 돈을 벌지는 못했다. 어두운 색조의 무거운 그림들은 일반인들의 눈에는 덜 띄었던 데다, ‘그림값은 싸야 한다’ 는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명성이 높아지고, 한창 예술의 꽃망울이 부풀어 오를 무렵 병마는 그를 죽음 속으로 함몰시켜 버렸다. 아내의 가출, 굶주림 등으로 생활은 참담했고 반대급부로 미친 듯 밀어붙인 작업과 낡고 좁은 화실에서의 연탄가스와 흡연 습관이 겹쳐 마침내 폐렴이 그를 덮쳤다. 일반인의 3분의 1에 불과한 폐활량에 결핵 후유증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던 그는 88년 2월, 결국 폐울혈성 심부전증으로 고단했던 장애우로서의 삶과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우던 화가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글/ 이나라 기자(n2906@hanmail.net)

 

작성자이나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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