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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진짜 소리꾼들이 다 사라져가요

국악인 이희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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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사는 외톨박이라는 제목의 기획기사가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에 연재된 바 있다. 단행본으로도 나온 그 기사들의 주인공들은 내시나 백정 등과 같이 전통 사회의 황혼에 선 사람들이라는 부제목에 걸맞는 인물들이다.

▲국악인이희완씨
국악인 64세 이희완 씨를 만나고 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자꾸만 그 제목이 입속을 맴돌았다. 숨어사는 외톨박이. 한국 역사에 한번도 떳떳하게 얼굴을 내밀 수 없었던 사람들, 규범 문화의 뒷전에서 천대받고 구박받으며 살아야했던 그 사람들이 바로 오늘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숨겨진 얼굴이라고 같은 이름의 단행본 서문에 쓰여있는데 이는 그의 삶에도 들어맞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외톨박이였으니까. 그래서 그의 얼굴은 바로 모든 장애우들의 얼굴이었다. 결코 낯설지 않은.

만인 앞에 나서는 것이 업이 되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그것도 우리 사회에서 비주류인 국악계에서 장애를 가졌다는 것이 삶의 궤적에 얼마만한 무게의 쓸쓸함을 던져주는지 그의 입을 빌지 않으면 누가 알 수 있을까.

 

이름난 만능 재주꾼이었던 조부, 이봉운


이희완 씨는 천구백삼십팔년도에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어천리에서 났다. 전주 이씨 십구대손이라는 점은 가슴 저 깊은 곳에 적지 않은 자부심을 남겨주었겠지만 그의 핏속에는 어쩔 수 없이 예인의 끼가 흐르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의 할아버지의 이력에서 드러난다.

그의 조부 고 이봉운 씨는 일제 때 민요, 가야금, 줄타기 등 만능 재주꾼으로 꼽힌 국악인이었다. 특히 장기였던 줄타기 솜씨로 널리 이름을 떨쳐 이웃 일본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또 할아버지뻘 되는 고 이봉업 씨는 경기민요 명창으로 서울 서대문에서 살면서 딸에게 소리를 가르치는 모습을 이희완 씨가 직접 목격하기도 했으며, 그의 종조부인 이영수 씨는 인천에서 삼현육각 악사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 외에도 친가와 외가의 멀고 가까운 친척 중에 이름난 국악의 예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이중식 씨만은 국악을 하는 게 싫어서인지 평범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인지 전쟁통에 사고로 눈을 잃은 열세살의 희완에게 노래는 유일한 낙이었다. 더욱이 한참 교육을 받아야 할 나이에 시력을 잃은 그가 찾아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었기에 앞날에 대해 다양한 희망을 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늘 노랫소리와 함께였다. 집안 농사일을 돕는 틈틈이 유성기음반이나 라디오를 통해 가요나 민요들을 곧잘 따라 부르곤 하던 그를 보고 재주가 할아버지 닮았다, 눈이 밝았으면 할아버지한테 줄타는 거랑 다 배웠을텐데. 하고 안타까워하는 주위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스승으로부터 제대로 된 수업을 받지 못한 그에게 소리는 본격적인 직업이 되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그의 시각장애가 걸림돌이 되어 아무도 그를 제대로 써주지 않은 것이다. 소리꾼들의 언저리에서 전국을 떠돌던, 세속적으로는 무능력할 수밖에 없었던 그를 오늘에 이르게 한 것이 그의 부인 제길용 씨다.

 

"제가 그때 악극단을 쫓아다니고 있었을 땐데 정월달에 한 친척집에 놀러갔다가 그 집에 놀러온 안사람을 만났는데 살빛에서 막 광채가 나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 잠시 혼란스러워 그때가 실명하기 전인지 다시 확인차 물었더니 부인 제길용 씨는 옆에서 짐작이 그랬다는 거죠. 원래 저렇게 자기 장애를 드러내지 않게끔 얘길 해요. 혼자 다니다가 넘어져서 많이 다치기도 하나본데 집에 와서는 내색을 전혀 안 할 정도니까라고 귀띔한다. 알고 보니 장애 때문에 많은 서러움을 당한 그인지라 자신의 장애를 숨기게 되는 습관이 몸에 배게 된 것이었다. 그 자세한 얘기는 알게 모르게 그 이후의 삶의 이야기에도 사이사이 풀어져 나왔다.

 

"아무튼 저 사람을 나 아니면 누가 거두어 줄까"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부인의 고운 마음씨와 결단으로 두 사람은 오십팔년 결혼했다. 똑똑한 사람은 나랑 살지도 않겠고, 미련한 사람과는 같이 살기 싫어 저 사람이 아니었으면 나는 혼자 살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이희완 씨는 저 사람이 아니었으면 나는 어디서 혼자 떠돌다가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지하철 매표소에서도 거스름돈을 더 많이 받게 되면 다시 돌려주는 부인을 보며 이런 사람이니까 나와 같이 살았다는 새삼스러운 발견을 하게 된다고 덧붙여 말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다행히 부인 제 씨가 미용기술이 있어 아들 삼형제를 둔 그의 가정의 생계문제는 그것으로 어렵게나마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평소 때는 공원등지에 나가 노래를 듣는 일로 소일하던 그였지만 수원지역에서는 한때 빼어난 상여소리꾼으로도 인정받았다.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니라 상여소리를 몇 번 들으니 이 대목에서는 이 소리, 저 대목에서는 저 소리, 하는 감이 생겼다고 그는 들려주지만 상여의 장강틀 마루에 올라가서 요령을 들고서 앞소리를 메기는 그의 소리는 별난 재주로 꼽힐 정도였다.

 

예전에는 곡비, 곡반이라고 해서 장례를 치를 때 소리꾼을 불렀는데 지금은 궁벽한 시골에서도 집에서 장례를 안 치르는 추세라 이러한 풍습이 많이 사라져버렸다. 그와 함께 그의 상여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사라져 버렸는데, 경기도 일대에서 상여소리를 기가 막히게 하는 이는 이제 이희완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며 주위에서는 안타까워한다.

 

타고난 목청으로 가요도 곧잘 불러 각종 노래자랑경연대회에서도 특등을 타곤 했다고 부인 제길용 씨는 귀띔한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는 이용복 씨처럼 가요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그렇게 어딜 가든 노래로는 못 한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않은 그이지만 그 자신은 어느 날부터인가 엉터리 소리를 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스승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받은 일없이 유성기음반이나 라디오를 통해 따라 부르며 배운 것이 못내 한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냥 뜬 구름이오"

 

팔십일년, 나이 사십을 넘어서 조금은 뒤늦어 보이는 그 때 그는 본격적으로 소리스승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 맨처음 찾아간 사람이 수원의 권재옥 여사였다. 인간문화재 이상의 실력가였던 권재옥 여사에게서 수개월 동안 경기민요를 두루 익혔지만 무언가 맞지 않음을 느끼고 그 문하를 나와 고심 끝에 김옥심 여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김옥심 여사는 이희완 씨의 소리를 듣고 칭찬하며 웬만한 사람한테 배워서는 안 되겠고, 기량이 높은 실력가에게 배워야겠는데 자신은 병으로 몸이 불편한 상태라서 가르쳐줄 수 없다며, 친구인 김정희 씨를 소개해주었다. 두 사람은 한성권번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는데 당시 김정희 여사는 활동을 안 하고 집에서 은거하고 있어서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나밖에 모르지만 너 하나 가르칠 정도는 된다며 김옥심 여사는 추천했다는 것이다.

 

"정말 소리를 하고 싶으냐?"

"예."

"그럼, 해봐라."

김정희 여사를 찾아갔을 때 이런 간단한 대화가 오고 간 이후 일 년여, 그는 비로소 소리스승으로 존경할 수 있는 김정희 여사에게서 경기민요들을 두루 배웠다.

아무래도 늦은 나이였고 그래서 기존의 어설픈 발성법에 휘둘려온 세월이 길었던지라 국악창법을 제대로 익히는 데 곱절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은 가요하다가 국악하기 어렵다는데 나는 그냥 되더라하는 걸 보면 그의 재능의 몫은 원래부터 국악 쪽이었던가 보다. 그 이후에 이동안, 방인근과 같은 경기지역의 예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들로부터 이런 저런 지적을 받고 이를 받아들여 소리를 다시 가다듬은 후 기량이 나날이 발전해 나갔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공연을 마치고 나자 한 사람이 물었다.

"아니, 내가 소리 한지 십 몇 년인데 여기 저기를 가봤어도 경기 민요 잘 하는 사람을 못 보다가 여기서 보네. 당신 어디 소속이요?"

"나, 소속 없는 뜬구름입니다."

"잉, 무슨 소린지 알겠구만."


무슨 얘긴지 알면 됐소.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소리공부를 마친 후에도 그의 삶은 그다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외톨이였다. 기존 국악계에서는 장애를 가진 그에게 함께 할 자리를 여간해서는 잘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입소문이 났는지 소리를 배우고자 몇몇 사람은 그를 찾아오곤 했다. 그러나 농담도 잘 하지 않고 엄격하게 대하는 스승 희완 씨를 견디지 못하고 두세 달만에 그만 도중 하차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편하고 쉽게만 배우려고 드는 것이다.

 

또 몇 달 동안 소리를 거의 다 배운 후에도 스승이 인정받지 못한 장애 국악인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그가 소리스승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다니는 제자도 있었다. 학원을 차렸다고 해서 인사차 갔다가 오히려 그를 모시고 간 사람에게 왜 데려왔느냐는 소리까지 했다는 얘길 나중에 전해 들었던 일도 있었는데, 그러한 일들로 이희완 씨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 속에서도 그는 올곧은 자존심 하나만은 꿋꿋이 지켜왔다. 부와 명예를 얻자고 자존심을 내팽개칠 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가 소리 배우려고 오는 제자들한테 그럽니다. 제발 허영들지 마라, 텔레비전 나오네, 안 나오네 하는 사람들의 잣대에 휘둘리지 말고 아, 참 소리 잘 한다, 하는 칭찬에만 주목해라, 라구요. 소리라는 게 굉장히 어려워요. 저도 사실 제가 소리 잘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한테 인정받으면 솔직히 기분이 좋지만 좀 한다고, 내가 문화재 되겠지, 하는 이런 허영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저, 이거 안 해도 밥 먹고 살거든요."

 

그러나 그런 그를 지켜보는 가족들은 안타까움이 큰 것이 사실이다. 지역에 문화예술단체가 설립되는 과정에 함께 힘을 실어주기 위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런 저런 험한 일도 마다 않고 했는데 정작 단체살림이 제 자리를 잡고 나니 연락도 없고, 행사 때는 서울서 이름난 소리꾼을 거액을 주고 모셔오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지역에서도 그는 외톨이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큰아들 이형식 씨는 그런 아버지를 지켜 봐왔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부나 명예 같은 걸 얻자고 수십년 동안 지켜오신 것을 하루아침에 꺾으시라고 할 수는 없죠. 그래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냥 취미생활로만 하시라고 말씀드립니다. 경기민요는 이렇게 하는 거다, 하는 걸 더 퍼뜨리시려고 하는 거지 개인적으로 명예 얻으려고 하시는 건 아니라는 제가 잘 아니까요.

 

"재주는 천 냥인데 이름 알려지긴 두 냥어치"

 

그래도 민속음악계의 숨은 명인들을 찾아다니는 이자균 씨가 그를 발견한 뒤 그를 알리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애를 썼다. 그래서 지난해 처음 그의 소리가 음반으로 담길 수 있었는데 여기서 그는 창부타령, 한강수타령, 청춘가 등 경기민요들을 숨은 기량을 맘껏 뽑아내 녹음을 마쳤다.

 

소리 가운데 도저히 여성들이 못 쫓아오는 소리의 톤이 있는데 그게 경기민요의 특징이란다. 그러니 경기 남자 명창이 드문 현실에서 호방하고 구성진 그의 소리는 값어치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 어떤 사람이 그를 두고 이희완 씨 돌아가시면 이런 멋들어진 소리는 이제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하고 안타까워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소리가 휙 던지는 거, 던지면서 참아서 올라가서 내리쳐가면서 쭉 뻗는 거라고 표현하며 몇 대목은 직접 들려주기도 했다. 기자의 필력으로는 그 소리의 맛을 표현하기가 좀 어렵지만 그가 들려준 음반의 소리에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은근한 기교가 녹아 있음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가 정작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의 소리를 알고, 자유 능란하게 내뻗는 그의 소리의 흐름을 알아서 적절하게 맞춰 들어오는 장구반주가 가능한 명인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사실이다. 그와 이십오년간 교류했고 지난 음반 녹음때 장구를 맡은 방인근 씨와 그 무리는 옛부터 광대들을 따라다니며 악기를 배웠기에 전통적인 갖은 기교를 익힌 사람들이다.

 

그런데 역시 그 같은 사람들의 맥이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웬만한 소리꾼이 아니면 은근히 놀리죠. 그런데 요새는 어설픈 실력으로 소리를 하면서도 그게 아니라고 지적해주면 오히려 자신이 맞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 그래, 참 잘한다, 하고 겉으로만 장단을 쳐주면서 속으로는 놀리는 거죠.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 분명하구나 하는 소리가사를 분명하다하고 잘라먹으면서도 자기가 맞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으니 국악의 앞날이 많이 걱정되죠."

농악도 경기지역의 맥이 끊기고 진정한 소리꾼들도 다 사라져 가는 오늘날, 특히 소리를 정말 잘하던 기생들도 다 사라진 사실에 대해 몹시 안타까워했다. "왜 그땐 녹음기도 없었는지....." 한숨 끝에 그가 이렇게 내뱉었다.

 

그런 그를 보며 기자 또한 안타까웠다. 한국민속연구소 이자균 씨는 그를 두고 이희완이 지닌 재주가 천 냥이라면 이름은 여기에 걸맞지 않게 두 냥에도 못 미치게 알려졌다고 한탄했듯이 그 또한 그렇게 이름없이 스러져갈 생각을 하니 말이다. 다행히 조만간 그의 음반작업이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한다. 많이 팔리기를 기대할 수 없지만 그의 소리를 그렇게나마 남겨놓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이다.

 

한이 녹아 있는 소리

 

가만있지를 못하고 나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누군가 학원자리를 그에게 내놓았지만 학원에서 가만히 오는 수강생을 기다리는 일을 마다하고 그는 소리 배우기를 청한 제자들을 직접 찾아다닌다. 두 명은 수원지역 사람이지만 한 명은 연신내쪽에 사는 데도 여행하는 기분으로 직접 찾아가 소리수업을 한다. 빛이 없이 산 것이 오십여년인데 흰지팡이나 안내인을 동반해 다니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그렇게 다닌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자식들은 지금이라도 눈수술을 하면 어떨까 하고 묻는데, 제가 나이 오십만 돼도 하겠지만 지금 해서 뭘 합니까. 저는 그냥 이대로가 좋아요.

 

지난 공연 사진을 골라달라는 기자의 부탁에 그는 자신이 손수 고르려고 했다. 장애로 인해 받은 설움은 일일이 다 얘기할 수도 없다고 했지만 위에 말한 정도만으로 입을 닫아버리는 그에게서 더 깊은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 자신의 장애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품새가 몸에 배인 그의 행동에서 그만의 아픔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었다.

그의 말끝에 "한이 없으면 노래는 안돼요" 하고 조용히 덧붙이기도 했다. 전국 여기 저기를 돌아다녀 봐도 노래를 썩 잘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하는 그의 말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말일까.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소리를 하는 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일부러 딸의 눈을 멀게 한 아버지의 비정을 담았던 영화 서편제의 대목들이 떠오른다. 우연찮게도 같은 눈이다. 그제서야 그가 말한 한의 실체가 조금 잡힐 듯 했다.

 

그리고 흔히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그나마 다양한 음악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각장애 특수학교에서도 국악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그 사례가 손에 꼽을 만 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친다. 그러한 교육 환경이 이희완 씨와 같은 이들을 더욱 외톨박이로 만드는 건 아닌지, 그가 양지로 나와 서는 데 시간이 이리 더디 걸리고 있는 이유는 아닌지.....

 

글 : 한혜영 객원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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