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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재현 씨의 운전면허취득기

사년만에 운전면허 따낸 양팔장애우 박재현 씨

본문

 

▲운전면허따낸양팔장애우박재현씨

예전에 한 선배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안고 이렇게 뽐내듯 말했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세상에는 말이야,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 운전면허가 있는 사람과 운전면허가 없는 사람." 자신이 최근에 운전면허를 땄다는 자랑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박재현 씨도 올해 일월 삼일 운전면허가 없던 사람에서, 있는 사람 편으로 살짝 선을 넘어왔다. 지난 해 십이월 이십팔일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팔십사점으로 합격, 다음 날인 이십구일 기능시험에 구십구점이라는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기록하며 당당히 합격했고 바로 며칠 후인 일월 삼일에는 도로주행시험까지 가볍게 통과해, 곧바로 면허증을 손에 쥐었으니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시험 그 자체 과정에서는 속전속결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쉬운 일이었는데, 이렇게 어찌 보면 "별 일 아닌 일"이었는데 그는 그 길을 너무 에둘러 와야만 했다. 재현 씨가 그 운전면허증에 매달려 온 시간이 자그마치 사년이다. 그가 다름아닌 양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우라는 것이 결코 짧지 않은 그 시간을 잡아먹은 유일한 까닭이다.

 

이미 지명만 입력하면 인공위성으로 조종해서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자동차가 스스로 운전해 간다거나 음성인식으로 내부장치가 작동돼 운전되는 차량 개발이 가능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터이니 앞으로 몇 년만 지나도 자동차공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지난 시기의 한 해프닝으로 웃어넘기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는 그 자동차면허증 하나 따려고 너무도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려야했다. 물론 덕분에 아직 대학생인 그가 사회를 철저히 알게 됐고, 그의 편에 서 줄 적지 않은 사람을 알게 됐다는 건 그 기간 동안 그나마 거두었던 열매다. "발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오너들의 모임" 회원들과 함께 여전한 세상의 편견과 싸워나갈 각오를 다지면서 운전을 통해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아가고 있는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었던 버스와 택시

 

그러니까 재현 씨가 처음 운전면허 취득과 관련해 문을 두드려본 것이 구십칠년 시월의 일이다. 구십육년 대구대학교 일어일문학과에 입학해 누구나 설레는 대학 신입생 시기를 맞게 됐을 때, 그 설레임만큼이나 부모님과 함께 그는 이런 저런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집에서 걸어서 오분 거리인 장애우 학교인 대구 보건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남들보다 조금 느리고 불안정한 걸음이나마 통학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대구대학교는 집에서 한 시간 반 거리였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처럼 재현 씨만을 위해 또 다시 온 가족이 이삿짐을 싸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사정을 뻔히 아는 가족들이 재현 씨에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라고 쉽게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두 팔이 부자유해 대소변이나 세면, 단추끼우기 등은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하는 재현 씨의 사정을 너무도 잘 아는 부모님인지라 기숙사나 자취 생활도 반대했다.

 

부랴부랴 그 즈음부터 아버지는 재현 씨의 통학을 위해 운전을 배우고 없는 살림에 승용차를 마련했다. 그러나 나이 육십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가슴 졸이는 초보운전을 바라봐야 하는 통학길, 그의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그리고 통학은 아버지의 운전으로 어떻게 해결한다 해도 드넓은 학교 캠퍼스를 강의 시간에 때맞춰 이동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원래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인지라 여름 즈음 도서관과 강의실을 다닐라치면 몸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됐다. 그리고 신입생이라 오라는 데도 많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은 일도 많은데 사정을 모르고 오신 아버지를 그냥 돌려보내기란 불가능해 아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할 때도 많았다. 어렵게 들어온 대학에서 놀려고만 한 것도 아니지만 그 자신이 그때 그때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기란 애시당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 자신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갔을 때를 상상해봤다. 취업을 해서도 지금과 같이 아버지에게 출퇴근을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버스나 택시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본 적도 있다. 그러나 요금을 제 때에 주머니나 지갑에서 꺼내어 낼 수 없고 특히 버스같은 경우 손잡이를 잡을 수 없어 안전한 자리에 앉지 않으면 급하게 서거나 출발할 때 손으로 어딜 붙잡을 수가 없는 그는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눈이나 비라도 올라치면 그는 그저 흠뻑 젖어야했다.

 

한 번은 버스를 탄 후 옆에 있던 아저씨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자신의 주머니의 돈을 꺼내 요금함에 버스비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재현 씨 몫의 버스비까지 자신이 함께 냈다. 택시를 탔을 때도 운전기사에게 주머니의 요금을 가져가 달라고 하자 그냥 내리라고만 했다. 왜 그러시느냐고, 돈 있다고, 여기 꺼내 가시라고 아무리 몸을 내밀어도 자신은 결국 입으로만 얘기할 뿐이고 그 기사가 직접 가져가지 않은 한 어찌 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신의 뜻과는 달리 "불쌍한 장애우" 취급을 하는 것이 황당하고 억울해서 그는 대중교통을 마음 편하게 탈수가 없다.

 

마침 중등부 시절 한 선생님이 보여준 비디오에서 스웨덴의 한 양팔장애우가 양발로 운전을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직접 운전을 하면 여러 가지 고민거리가 쉽게 해결되는 거지", 싶어 구십칠년 가을 무렵 처음으로 그는 면허시험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의사는 그를 한 번 쓱 보더니 본체 만체 다음 분을 외쳤다. 완벽한 무시였다. 애당초 장애우가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거쳐야 하는 운전능력측정검사 도구는 양손만으로 측정이 가능하도록 돼 있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됐다. "두 발로 운전을?"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이제까지 재현 씨 외에는 그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긴 했다.

 

국내 현실 개선하기 위해 자비로 일본 탐방도

 

그제서야 자신과 같은 양팔장애우의 면허취득을 가로막고 있는 국내 도로교통법의 규정들을 알게 됐다. 양 팔꿈치 관절 이상이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으면 안 된다는 거였다. 그러나 인터넷을 뒤져보니 스웨덴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이미 면허를 따고 운전을 하고 있는 그와 같은 양팔장애우가 있었다. 그는 직접 일본에 가서 그 장애우를 만나보고, 그리고 그 차를 타보고 자신의 운전가능성을 알아보고 싶었다. 전공인 일본어 실력을 활용해 자신이 찾아가 만날 양팔장애우와 자동차회사 담당자도 국제전화로 직접 섭외도 마쳤다.

처음에는 일본 동행을 망설이던 아버지도 서둘러 비디오캠코더를 사오셨다. 그래서 재현 씨가 만난 양팔장애여성이 운전을 하는 모습, 그 차에 재현 씨가 동승해 이런 저런 대화를 하는 모습 등을 사진과 함께 화면에 담았다.

 

재현 씨는 이 자료를 계속 눈여겨 봐왔던 엠비씨 "시사매거진이오팔공" 기자에게 집중적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의 믿음대로 그 기자에게서 일본의 현실과 국내 문제점을 함께 취재해보자는 연락이 곧이어 왔다. 방송사측에서는 이번에는 재현 씨와 똑같이 뇌성마비장애를 갖고 있는 다케시다 리츠꼬 씨까지 섭외를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재현 씨가 직접 시운전까지 해볼 수 있었고 처음 치고는 아주 잘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취재팀의 도움으로 재현 씨 발의 운동능력과 발과 뇌의 협응력이 보통 사람과 똑같다는 진단을 스포츠과학전문가로부터 비로소 받기도 했다.

 

그러한 내용이 담긴 방송이 나간 직후인 구십팔년 유월, 당시 이성재 의원을 비롯한 이십이명의 국회의원들은 양팔장애우의 운전면허 취득완화를 골자로 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경찰청과 면허시험장 관계자들은 "면허를 따봐야 현재로서는 운전할 수 있는 적합한 차량도 없지 않느냐"고 이런 저런 반대의견을 제시하며 미적미적 논의를 미뤄 그의 속을 태우다가 그해 십이월 결국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 동안 재현 씨는 경찰청의 지적을 뼈아프게 받아들여 또 나름대로 분주하게 양팔장애우용 차량개조작업에 들어갔다. 장애우차량 개조 전문가인 용성오토 고용성 사장에게 발로 운전할 수 있는 풋콘트롤러 제작을 제의했고, 고용성 사장은 이의 도안과 제작을 위해 일본에까지 가서 기술을 연구하고 돌아와 일차적으로 소나타투 차량에, 이차적으로는 이에프소나타 차량에 풋콘트롤러를 장착했다. 그렇게 해서 이호차의 차량 개조작업이 완성된 것이 구십팔년 팔월. 이후 이천년 일월까지 자체적으로 도로주행 테스트까지 마쳐 안전상의 결함이 없다는 확신도 얻었다.

 

그런데 그같은 구조변경 차량에 대한 기준 자체가 없기 때문이었는지 이번에는 관할구청과 자동차검사소에서 아직 안전성을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차량에 대한 승인을 내려주지 않았다. 서로 다른 기관에 책임을 미루며 차일피일 승인을 미루기만 하는 것이었다. 양팔장애우가 면허를 따려면 해당 양팔장애우의 신체조건에 맞게 적합하게 개조된 차량으로 시험을 본다는 단서조항이 붙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렵게 법 개정까지 이뤄내고도 면허시험을 보지 못하는 어이없는 시간이 속수무책으로 지나고 있었다.

 

이 차는 일본에서 많은 수의 양팔장애우들이 운전하고 있는 바로 그 차량들과 똑같다고 설명하고, 각 기관에 호소문을 보내기를 수 차례. 결국 지난 해인 이천년 십이월 일일에서야 드디어 승인이 떨어졌다. 그리고는 앞서 말했듯이 면허시험 원서 접수부터 도로주행 시험 통과까지가 열흘도 안 되는 동안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것이다. "면허증을 손에 쥔 순간,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했다고 할까요, 아무튼 지난 사년간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더군요." 머지 않은 미래에 자신의 수필집을 내고 싶다는 재현 씨는 이렇게 다소 문어체적인 표현으로 그 때의 감흥을 기억해냈다.

 

"편의시설 완비된 일본어학원 운영이 꿈"

 

그는 팔개월만에 태어난 조산아였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로 옮겨진 신세였는데 그 안의 산소조절이 잘못 됐는지 그는 뇌성마비 장애를 갖게 됐다. 부모님은 돌이 넘어서까지 기지도 앉지도 못하는 맏아들 재현 군이 이상해 병원에 갔다가 충격적인 진단을 받았다. 그래도 머리는 영특하여 서너살에 한글을 뗐던 재현 씨였지만 일반 학교에 보낼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한 친척이 장애우학교가 있다고 알려줘 대구 보건학교에 조금 늦은 아홉 살의 나이에 들어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대학 진학을 위해 일반 학교로 옮겨보려고 했지만 부모님이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만류해 특수학교에 계속 남았다. 그러나 지체장애 학생반에도 중복 장애 학생이 많아 수업 내용과 수준은 대입을 코 앞에 둔 그를 조바심나게 할 정도로 낮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대구대 일어일문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제가 일본에 대한 막연한 동경같은 게 있었습니다. 자라면서 일본은 장애우 천국이다, 일본에서는 나같은 장애우라도 아무 거리낌없이 생활할 수 있다, 하는 얘길 듣곤 했거든요. 그래서 더욱 일본어에 흥미가 생기더군요." 지금은 두 번째 휴학중이지만 이제 이학기에 복학하면 곧 졸업을 맞게 된다. 올해는 특히 여동생 둘까지 그의 집안에 대학생이 세 명이나 생겨 장남으로서 부모님이 지게 될 경제적 부담이 결코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다.

 

장래 계획을 묻자 그는 "다단계로 준비하고 있다"는 다부진 답변을 들려준다. 일단 장애우운전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담은 인터넷콘텐츠에 대한 구상을 마쳤기 때문에 이것을 자동차회사 관계자들과 만나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긍정적인 답변을 얻으면 일단 그것에 매달려보겠다고 했다. 기자는 재현 씨를 대구 집이 아닌 서울에서 만났는데 바로 그 콘텐츠화 논의를 위해 자동차회사 관계자를 만나러 온 길이었다. 그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일본어교사가 되기 위해 임용고시 준비에 들어갈 거라고 했다. 과에서 성적 상위 삼십퍼센트만이 딸 수 있는 교직을 그는 이미 이수해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다지게 되면 정작 하고 싶은 일은 "장애우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일본어학원을 운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자신 장애우라는 이유로 수강 자체를 거부당해 한 번도 학원을 다녀보지 못한 까닭이다. 다른 비장애 수강생들에게 불편을 준다는 것이 이유였다.

 

임용고시를 보고 합격한다 해도 이제까지 그래왔듯 사회가 그의 외형적 조건만을 들어 "칠판에 글씨는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등등의 이유로 면접에서 거부하면 어쩔까, 그의 얘기를 듣고 잠시 안쓰러운 마음이 밀려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낙관하지 않은 상황에서 혼자 힘으로 헤쳐가며 운전면허를 따냈듯 원하는 길을 갈 것이라는 믿음이 곧이어 생겼다.

 

컴퓨터게임을 하며 혼자 익혔던 일본어지만 고등학교 시절 이미 일본어능력시험 사급에 합격하고 일학년 때는 일본어 말하기대회에 입상, 중간고사에서 만점을 받기도 했고 삼학년때 일본어능력시험 이급에 합격했을 정도다. 다른 과 친구들처럼 학원에도 다닐 수 없는 처지였지만 그 자신, "독하게" 공부하며 그것들을 이뤄냈다. 길거리를 걸으며 눈에 보이는 간판, 생각나는 것들을 일본어로 바꿔 말하며 늘 중얼중얼거린 것이 나름의 공부방법이었다. 자신처럼 어렵게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에게 그간의 일본어 공부의 노하우를 가르쳐 주겠다는 작은 꿈을 안고 산다.

 

월드컴홍보 및 인식 개선을 위한 전국주일 계획 중

 

그가 면허취득을 하는 동안의 하나 하나의 과정들이 모두 국내 최초였기 때문에 그간 각 과정마다 언론의 주목을 받아왔다. 텔레비전에 보도된 것도 두어 차례, 그의 사연을 알게 되고 그가 손수 만든 홈페이지를 통해 그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나도 운전이 가능하겠느냐고, 한 번 가서 당신의 차를 볼 수 없겠느냐고, 직접 타볼 수는 없겠느냐고 하나 둘씩 연락을 해왔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손 한 쪽은 한 쪽 발과 같은 무게를 가질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두 손이 모두 불편하다는 건 말 그대로 두 손을 모두 묶인 것과 같은 상태다. 여지없이 사회적 무능력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실제 만나본 양팔 장애우 가운데는 재가 장애우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다 재현 씨와 그 차를 타보고 "운전만 하게 되면..." 이라며 이런 저런 획기적으로 다른 삶의 구상을 펼치는 양팔장애우들을 보며 그는 새삼 깨달은 게 있다. 그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거듭해서 들려주는 "운전에 대한 희망은 삶에 대한 희망"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양팔장애우들이 운전면허를 딴다는 것은 이에프소나타급의 중형차를 사서 (발로 운전하다 보니 발이 움직일 여유공간이 안전하게 마련되는 중형차급이어야 한다.) 또 자비로 개조까지 마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만큼의 경제능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전국 "면허시험장 중에 한 곳에라도 양팔장애우를 위한 운전시험차량을 마련해두었으면 합니다. 일반인들도 꼭 차를 몰려고 운전을 하는 게 아니라 운전능력을 갖기 위해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따는 경우도 많잖아요. 양팔장애우들도 그렇게 해줘야죠." 미국에서처럼 개조비용 지원까지 정부에서 해준다면 더 무얼 바랄까.

 

다행히 재현 씨에 이어 양팔장애우 운전면허취득 두 번째 주자도 탄생했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엄연히 있지만 발자모 열서너명의 회원들 가운데 올해 면허를 따낼 사람들이 속속 출현하리라고 그는 믿는다. 그러면 월드컵개최 홍보 겸 양팔장애우들도 안전하게 아주 평범하게 운전을 한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릴 겸 함께 전국 일주를 할 계획이다.

 

이제 꿈에 그리던 마지막 학창시절을

 

재현 씨는 마지막 남은 일년의 학창생활도 알차게 마무리한다는 생각도 잊지 않고 있다. 당장이라도 거리로 나서도 문제없이 운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지만 당분간은 아버지에게 운전을 완전하게 배워 아무 두려움 없이 도로에 나갈 수 있도록 하라는 주위의 충고대로 꾸준히 운전연습을 계속할 것이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마지막 학창생활을 잘 마무리지어야죠. 원하던 대로 대학 내의 건물과 건물 사이를 당당히 차로 옮겨다니면서 편하게 공부할 수 있게 됐으니까. 그리고 이제까지 신세진 친구들 집에 태워다 주기도 하고 그럴 겁니다. 사람은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가 돼야지, 받기만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하하 "그 모습이 하도 믿음직스러워 기자도 따라 웃었다. 아주 유쾌하게.

 

글 한혜영 객원기자/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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