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장애우일수록 농사지어야 돼요"
본문
내소원은 내가 여자친구한테 우산 받쳐주면서 걷는 거야.”
예전에 한 지체장애우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한다. 양손으로 목발을 짚는 그로서는 우산을 받칠 남은 손이 없어 비가 오면 흠뻑 젖은 채 걸어야 했던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인지 기자가 아는 거의 모든 지체장애우들은 비를 싫어했다.
이번 호 사람사는 이야기 주인공인 안철환(39) 씨를 찾아가기로 한 날, 오전부터 억센 비가 왔다. 양 목발을 한 그에게도 비는 분명 반갑지 않을 손님일 터이지만 그는 아마 기쁘게 그 비를 맞을 것이란 예감을 했다. 비가 오는데, 사진도 찍는다던데 인터뷰가 가능하겠냐고 그가 확인차 전화를 주기도 했지만 그냥 하겠다고 했다. 빗속에 찾아올 기자일행도 즐거워진 마음의 그가 조금 더 반갑게 맞아주지 않을까도 싶었기 때문이다.
남달리 비를 반가워할 까닭은 비록 사백평에 불과한 밭이지만 그는 그 밭을 일구는 엄연한 농군이기 때문이다. 그 비가 오랜 해갈 끝의 비였기 때문이다.
흙을 매만지다 되찾은 기억들
최근의 가뭄은 정말 기록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영동지역에서는 대단위 산불이 전례없이 큰 재앙으로, 말 그대로 천재지변이 되어 산야를, 사람을 덮쳤었다. 그러나 해갈 끝의 비가 이제 흙을, 그 속의 돌멩이를, 그 사이의 각종 씨앗과 작은 싹들을 변화시킬 차례다. 그리고 그 미세한 변화까지도 이제 그는 절대 놓치지 않게 됐을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순전히 ‘사꾸라’에 ‘나이롱’이라지만 그래도 그가 절반쯤은 ‘농군’이 됐을 것이기 때문에.
“저 앞의 산이 어제, 그제 비오기 전만 해도 저렇지 않았어요. 그런데 비가 한 번 오니까 파란 잎이 한꺼번에 저렇게 나서 산 전체가 저런 파란 빛이 돌아요. 저런 건 말로는 어떻게 설명을 못해요, 정말 감동적이에요.”
실은 그는 글을 쓴다. 출판쪽 밥을 몇 년째 먹고 있고, 책도 몇 권 냈다. 지금은 전국귀농운동본부의 출판기획실장이라는 명함을 갖고 있고(일주일에 하루 출근하고, 보수는 없는 조금은 이상한(?) 자리다), 또 들녘출판사에도 이름을 걸고 농업파트의 책을 기획하고 내면서 거기서 밥을 벌어먹고 있다. 그런 그도 자연이라고 하는 주위 것들이 시시각각 보여주는 놀라운 몸놀림에는 그저 말이란 것이 필요없게 느껴진단다. “말은 오십퍼센트가 거짓이고 글은 칠십퍼센트가 거짓”이라거나 “말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낄 때가 많다”고 인터뷰 도중 그가 털어놨다. 그의 말대로 세상살이에 굳이 말이 필요없는 일이 어쩌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흙을 매만지는 그를 보면서 말이다.
최근 몇 년 사이 그가 기획했거나 직접 쓴 책은 ‘귀농, 아름다운 삶을 찾아서’, ‘희망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 ‘21세기 희망은 농(農)에 있다’ 등이다. 그 책들 이름만 대도 눈치챘겠지만 주로 농사관련 책들이다. 그렇다고 그가 ‘전문’ 농군이라서 자신의 이론과 농사법을 알리기 위해 책을 내왔던 것은 아니다. 전국을 발로 뒤져 그야말로 희망을 농에서 찾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엮은 책들이다.
사실 모 월간지에서 〈희망의 밭…〉 내용을 간추려 놓은 듯한 내용을 조금 인상깊게 읽고 그 책소개를 또 다른 잡지에서 읽으면서 그 글을 쓴 사람이 양목발의 장애우인줄 알게 됐을 때 저윽이 놀랐다. 그 책에 소개된 사람들은 조금은 인적이 드문 곳에서 유기농등 나름의 농사법으로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살림새를 돌아보려면 목발이 쑥쑥 빠지는 퍽퍽한 땅이나 비탈길도 열심히 짚고 돌아다녀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필자가 안산 인근에서 직접 농사도 짓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을 때 더욱 호기심이 동하게 됐다.
사실 아이엠에프 직후 농사는 도시에서 안착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안적 생업으로 소개되곤 했다. 사회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몰렸을 때 남자든 여자든 몸을 팔게 된다고 하지만 장애우들은 그럴 때도 팔 몸뚱이가 변변치 않아 이내 삶의 나락 끝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농사일은 공사판 막일만큼이나 육체적으로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양목발의 장애우가 농사를?
그러나 그의 대답부터 들려주자면 “장애우일수록 농사를 지어야한다”는 것이다.
“기자님은 꿈에서 기어다녀요? 안 그러죠? 근데 저는 꿈꾸면 그래요. 벌써 목발을 짚는 것 자체가 인위적인 거죠, 기어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거고. 지금은 씨를 뿌릴 때라 그렇지, 조금 풀이 자라면 제가 저 사이를 기어다녀요. 오히려 목발이 거추장스러우니까. 그런데 제가 도시에서 기어다닌다면 에이, 저 놈 앵벌이하나 보다, 하겠지만 여기서는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으니까.”
자신의 자연스러운 상태와 가장 가까울 수 있는 환경, 그것이 농사와 같이 자연 속에 있음으로써 가능하다는 얘길까. 그래서 그는 ‘복지’라는 것도 도시문명적인 개념같고, 복지정책은 도시화를 합리화하는 것 같아 조금은 회의적인 입장이다. 친구가 들려준 인도 사회의 풍경처럼 장애우에 대한 어떠한 가치평가적인 시선이 섞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면서.
“근본적으로 생각하다 보니 장애우는 장애우답게 살아야지, 멀쩡한 사람들 흉내내려 하는 건 다 부질없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말이죠,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다들 몸에 지병이나 약한 부위 하나씩은 갖고 있죠. 그래서 건강에 이상이 올 때 가장 먼저 그 약한 부위부터 신호가 오는 거래요. 그렇지만 불교에서도 인간에게 질병이 없다면 교만해진다고 하잖아요. 장애우들은 그런 기회를 가진 거죠. 자신을 낮출 수 있는.”
“나에겐 기어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그의 농사경력은 올해로 삼 년째. 첫해엔 다섯 평, 그 다음엔 백 평, 그 다음 올해에서야 사백 평으로 늘어온 수준이다. 처음엔 주말농장으로 다섯 평을 분양받았는데 주인이 마음이 좋아 거의 열 평 면적이었고, 당시 가을이어서 무랑 배추를 거두는데 얼마나 재미났는지 모른단다. 그래 다음엔 백 평을 임대받아 지어봤는데 하다보니 백 평도 작아 보여 올해는 네 배로 늘린 것이다. 부인이 내집 마련을 위해 살뜰하게 저축해온 돈을 놓고 거의 일 년 동안 ‘내집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부인을 꼬셔서 산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흙을 만지는 동안 그에겐 잊혀진 듯 했던 여러 영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렸을 때 살던 달동네 빈터에 피어 있던 분꽃이나 다알리아의 씨를 받아 심었을 때 해마다 꽃색깔이 달라 신기해했던 기억, 열살 무렵 여름방학에 퇴계원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고모네 가서 한 달 동안 지내면서 낫에, 호미에 손을 베어가며 농사일을 거들었던 기억, 대학을 그만둔 뒤 풀무원농장에 들어가 공동체생활을 하던 선배를 찾아가 한 달 동안 같이 지내면서 그 선배에게 유기농, 생태주의에 대해 들었던 기억, 소나무출판사에 있을 때 두밀리에서 자연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채규철 박사의 ‘ET할아버지와 두밀리자연학교’라는 책을 내는 작업을 하면서 자연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던 자신의 삶이 헛산 듯 했던 생각들이 말이다.
그런 생각들이 바탕이 됐겠지만 처음 ‘희망의 밭을...’를 낼 때는 출판쟁이적 감각으로 아이엠에프 시기를 겨냥해 도시실직자를 위한 귀농안내서로 기획해 취재를 나선 면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지난 기억들이 바탕이 됐겠지만 시세에 맞춘 상업농만이 아니라 고집스럽게 유기농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더 관심이 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 사는 모습을 둘러보는데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싶어 그 하나 하나가 다 감동이었다는 것이다.
소식이 끊겼던 대학 후배가 귀농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을 때 온 가족이 아침에 세수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농약도, 비료도 안 뿌리고 농사를 지으면서 그저 자연 그대로 건강하게 사는 모습이 그랬고, 설악산 인근 조금 외진 진동리 내린천이란 곳에 전교생 여섯 명인 학교에 다니는 세 쌍동이네의 건강한 삶의 모습이 또 그랬다.
아무리 그들의 삶이 감동적이었다고 해도 막상 농사를 직접 짓겠다고 했을 때 ─ 물론 완전 귀농은 아니지만 ─ 주위 사람들이 말리지는 않았을까? 다행히(?) 가까운 가족들은 그가 장애우라는 생각을 안 하고 살기 때문인지 그다지 걱정하는 기색은 아니었다고 한다. ‘순전히 친구들 불러다 술먹고 놀려고 하는 짓 같다’는 구박은 좀 받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흙을 만지다보면 어렸을 때 느꼈던 영상, 소리, 이미지같은 것들이 그냥 다 떠오르는데 그 때 기분이 참 좋아요.”
형들이 번갈아 업어 통학했던 학창시절
그가 살아온 얘기를 들어보면 오히려 꿈에서와 같은 무의식에서나마 그렇게 장애우로서의 정체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의 주무대는 월곡동 달동네였다. 첫돌 무렵 걸린 소아마비로 일곱살 때부터 목발과 친해져야 했지만 야구, 축구 등 안 하는 운동도 없었단다.
그러다 보니 잘 넘어지기도 했던지라 새옷을 사면 곧 헌옷이 돼버렸다. 그러면 옷을 그렇게 막 입는다고 어머니께 혼나고... 새옷의 거추장스러움이 그렇게 오래 전부터 남아선지 지금도 그는 그냥 자기 편한대로 막 입는 옷만 좋아한다.
그런 옷차림 때문에 식당에 들어갈 때 구걸하러 오는 장애운줄 알고 주인들한테 물리침도 많이 당했다고 한다. 한 번은 부인이랑 같이 갔을 때도 그런 일을 당했다니 현직 고등학교 수학교사인 부인 앞에 그의 자존심도 적지 않게 상했을 터이지만 오히려 그의 부인이 그에게 옷문제만큼은 두손 두발 다 들었단다.
“ET할아버지와 두밀리 자연학교’라는 책의 주인공인 채규철 박사님도 찻집 들어가면 주인들이 백원주고 나가라고 한다고 자신을 ‘백원짜리 인생’이라고 하셨잖아요. 저도 그 분따라 도사인척 하자고 생각하면 ‘나를 내쫓는 저 식당주인이 내 스승이다’하고 생각하기도 해요. 나보고 더 낮추고 살라고 하는 거잖아요. 제가 최근에 취재한 임락경 목사님이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에게 자신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대요. 그 말을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얼마나 자신이 있으면 스스로 낮추겠어요. 자신에게 뭔가 비어있고 모자라는 면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그걸 감추려고 잘난 체를 하는 거라는 거죠. 근데 주변에 보는 사람들 다 잘난 체 하잖아요? 그러니 다 못난 놈들이죠”
아무튼 어머니는 장애우인 아들 앞에서 살면서 전혀 눈물바람을 비치지 않았고, 그의 형들도 그를 가만 지켜 보다가 정말 혼자 못할 것 같은 일들만 도와주었다고 한다. 늘 양목발과 함께 하지만 그가 충분히 자유스러운 영혼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배경이 있다. 그래도 어머니가 새벽같이 일을 나가느라 그를 학교에 업어 데려가지 못한 상황에서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아침 등교는 큰 형이 하교는 둘째 형이 책임지고 업어서 데려가고 데려오는 남다른 우애를 보여줬다고 한다. 그나마 고등학교땐 대학생이던 큰 형이 데모하다가 잡혀가는 바람에 더 이상 의지할 수 없게 되자, 그는 걷는데 힘을 빼게 하는 무거운 책가방을 아예 학교에 두고 도시락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했단다. 그래 학교에 있는 가방과 교과서, 노트가 남들보다 빨리 좀 엉망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서강대 물리학과에 들어갔으니 가족들에게 면목은 좀 선 셈인가.
자세하게 계기까지는 안했지만 팔일학번으로 학교에 들어간 그는 반으로 갈린 민족의 운명이나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대해 분노하며 운동써클에서도 활동을 했다.
그러나 대학은 조금 그에게 버거웠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강의시간표대로 쉬는 시간에 강의실을 옮겨 다니는 일도 힘겨웠고, 무엇보다 등록금을 마련하는 일도 어려웠다. 그래 끝지 마치지를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그곳에서 많이 만났고, 그 가운데 그의 부인도 있다.
남들이 무시하는 농사일을 장애우인 내가 한다
그러나 사회란 곳도 그리 녹록치는 않았다. 그는 통일맞이라는 민주운동단체에서 일하다가, 또 차량을 끌고 다니며 장사도 했다. 그러다 그나마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 앞서 말한 조합공동체 형식의 ‘소나무’라는 출판사였다. 그곳을 이런 저런 이유로 그만 두자 곧 아이엠에프가 터졌고, 취업하려고 두 군데의 출판사를 알아봤지만 씁쓸히 돌아서야 했다. 그러다 운명처럼 지인들을 우연히 만나 그들이 이끄는대로 현재의 자리에 오게 됐다고 한다.
“예전에 백수로 있을 때 할 일 없어서 공상을 하다가 마음이란 게 어디 있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게 저 목발 끝의 고무에도 있더라 이겁니다. 목발로 짚어 보면 밑에 돌이 있는지, 누가 오바이트(?)한 그 위를 걷고 있는지 다 알 수 있거든요. 그게 차에도 있어요. 차를 다른 사람 빌려줘보면 그 사람 성격이 그대로 차에 남아 있어요.”
그의 현재의 마음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흙 언저리에 조금 오래 머물고 있는 듯하다.
“아까 기자님이 농사짓는 체력 문제를 걱정하셨지만 그냥 그건 속도의 문제예요. 남들보다 느릴 수밖에 없지만 그러니까 그냥 일을 계획할 때 시간을 넉넉하게 잡으면 돼죠. 길게만 잡으면 저도 못할 일은 없어요. 제가 도봉산, 수락산, 용문산을 가봤는데 다들 한 시간이면 가는 거리를 저는 예닐곱 시간씩 걸렸죠. 그래도 다 오르긴 했어요. 길게 잡으면 돼요. 대신 길게 살면 되잖아요. 가만 보면 욕심 보다 집착을 끊어내는 일이 더 사람한테 어려운 것 같아요. 적절한 순간에 포기를 잘 해야죠. 어쩌면 그건 저 목발이 저한테 가르쳐 준 거죠.”
자라면서 귀에 딱지가 앉게 듣게 되는, ‘늘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말들도 사기같다고 그는 기자에게 말한다. 그래서 부인한테도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주문을 한단다. 그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출세욕구를 자극해 노동력을 더 내놓게 하려는 자본가들의 고단수 사기라는 그의 논리가 왠지 설득력있게 들려 가만 생각에 잠기게 된다.
─ 그런데 장애우들은 원래 느린 몸으로 태어났는데 그래서 남들보다 더 노력하지 않으면 더 뒤쳐지니 안 된다는 얘길 많이 들으면서 자라게 되잖아요?
“그럼 남들하고 경쟁 안하면 되잖아요? 장애우를 바라보는 세상사람들의 관점이 너무 구태의연한 것 같아요. 뭐, 신체적으로는 장애가 있지만 정신은 멀쩡하다느니, 장애는 극복할 수 있다느니 하는 말도 웃기는 거죠. 그냥 있는대로 살면 돼죠. 그리고 이어령 박사가 그랬어요. ‘이제는 넘버원이 아니라 온리원의 시대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라는 얘기죠. 제가 농사를 짓기로 한 데에는 장애우인데다가 술먹는 거나, 구라치는 거 외에 별다른 능력도 없는 몸으로 남들 다 하는 일에 달라 붙어봤자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없다는 판단도 있었어요. 남들이 다 안하려고 하는 데서 뭔가 찾아보자 했죠. 장애우가 남들 다 무시하는 농사를 한다?, 그렇지만 거기서도 뭔가 찾을 수 있잖아요?”
어찌보면 장난같기도 한 그의 농사일이지만 올해 작황에 은근히 관심을 갖고 있는 주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취재를 하면서 전국의 농사 고수들에게서 비법을 전수받았을 그가 아닌가?
“지금 이 홍화씨는 집사람을 위해서 심는 거예요. 이게 여성들한테 아주 좋거든요. 저야 그냥 저냥 주위 친척들 부식용으로만 짓는 거죠. 내다 팔 수준까지는 아직 멀었죠. 앞으로는 모르지만 아직까지 저는 솔직히 레져 수준이에요. 사실 도시를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주로 돈벌이는 거기서 하니까.”
귀농을 제대로 하려면 생활의 근거를 도시에서 완전히 떠나야 한다는 것이 귀농을 하는 사람들을 오랜 동안 지켜본 그의 지론이다.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교육비를 제외하고는 크게 돈 들 일이 없으니까 나머지는 안 쓰고 살 수 있을 거라는 거다. 그렇게 농사를 통해 일단 먹는 일은 해결하고 그게 기반이 닦이면 판매를 위해 노동직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시적인 생활을 바라보던 눈 그대로 귀농 이후의 생활을 바라보면 괴로울 수밖에 없으니까.
아이엠에프 직후 귀농했던 사람들은 그런 시각을 버리지 못해 거의 다시 탈농을 했지만 그래도 순수 귀농하는 사람들의 수는 꾸준히 늘고 있단다. 단적으로 귀농운동본부에서 실시하는 귀농학교의 신청자수가 꾸준하게 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거다. ‘21세기 희망은 농(農)에 있다’는 그의 책 제목처럼 그들에게서 이십일세기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저 마늘의 생명력을 보세요”
그가 올해 마련한 땅이 처음 개간하는 땅은 아니라 그렇게 힘들지는 않지만 땅을 캐면 유난히 돌이 많고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어렵게 쳐놨던 비닐하우스 지붕이 두 번이나 날아가 버렸단다. 장인장모님과 친구 한 사람이 그를 도와 사백 평 농사를 짓는다고는 하지만 그런 지형이라 조금 걱정스럽긴 했다. 그래도 돌이 많으면 가뭄이 들어도 돌이 품은 물기가 도움이 된다고 하고 여름에 시원할 것 같다고 했다.
그의 밭 앞에는 주말농장이 들어서 자로 잰 듯 줄로 구분된 땅의 구역마다에는 자그마한 푯말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조금 궂은 날이었지만 기다려온 비가 온 토요일이라서 그랬는지 자신들의 밭을 둘러보는 가족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였다.
아직은 대다수의 기성세대들에게 흙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그래서 그 향수 때문에 저런 주말농장도 번성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제 흙을 거의 다 덮어가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위에서만 자라난 도시의 세대들은 흙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게 될까.
지하철까지 기자일행을 배웅하며 그는 이런 얘길 했다.
“팔십년대 학번들은 특히 땅에 대한 향수가 많을 거예요. 아니 그 후세대들도 그렇지, 저기 저런 꽃들을 보고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저기 저 마늘이랑 시금치들이 정말 신기한게 한겨울에 꽁꽁 땅이 얼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사이로 파란 싹이 나요. 그래서 제일 먼저 저렇게 커요. 정말 과학에 물들여진 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요. 안산에 그래도 비교적 공원들이 많은데 주말이면 인근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특히 참 많이 쏟아져 나오는데요. 그게 다 콘크리트에서 살아서 그런 것 같아요. 콘크리트 정말 무서워요."
덧붙임 : 취재를 끝내고 다시 그의 명함을 들여다 보다가 "히힛" 웃었다. 그의 아이디는 "오족골뱅이천리안점넷"이었다. 다리 다섯?! 역시 그답다. 암튼 그도 분명 기자에게 "구라"를 쳤을 테니, 나머지 오십퍼센트의 진실을 찾기 위해 두 손을 다리삼아 밭 사이에 오가면서 일하고 있을 그를 만나러 어느 좋은 날 막걸리 사들고 처들어 가야겠다.
글 한혜영/사진 김락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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