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클라리넷은 내 목소리 같아요”
본문
사실 클라리넷은 그리 대중적인 악기는 아니다. 목관악기 중에서 유일한 원통형의 폐관식 악기라거나 저음역에서 고음역에 이르기까지 음색의 차이가 크게 가장 나는 악기라는 등의 자료를 보면서도 그 악기소리를 머릿속에 정확히 되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지도 모른다.
“클라리넷은 일단 음색이 맑고 투명해요. 피아노처럼 소리가 크지도 않고 바이올린처럼 애잔하지도 않고 오보에나 플룻과 다르게 떨림도 없이 청아하고요. 호흡으로 하다보니 내 느낌이나 감정을 그대로 내 호흡에 실어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내 목소리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이렇게 클라리넷을 소개하는 이상재(34) 씨는 바로 그 매력에 이끌려 평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음악 명문 미국 피바디음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모교인 중앙대를 비롯해 총신대, 한세대, 숭실대 등에 출강하고 있다. 그의 프로필에는 독주회 십여회, 협연 삼십여회 등의 화려한 연주이력도 소개돼 있다.
그런데 이미 독자들은 예상했겠지만 그는 장애를 갖고 있고, 더욱이 시각장애우다.
악보가 있어야 가능한 연주생활, 그리고 박사학위를 따기까지 그가 겪어야했던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특히 박사논문을 집중해서 쓰던 마지막 육개월 동안의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 그거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것”이라고 웃으며 전하는 그의 얘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이 사람 이상재 씨에게는, 그러한 고난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만 맴돌고 있다.
“이삼년 후 실명할 겁니다”
만약 그에게 장애가 없었다고 해도, 음악의 길을 그가 걸었을까. 클라리넷과 만날 수 있었을까. 이런 부질없는 질문을 던져보는 까닭은 그가 음악과 처음 진지하게 만난 것이 바로 서울맹학교 밴드부에서였기 때문이다.
서울맹학교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그가 지금처럼 전맹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문제의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만 해도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는 건강하고 장난 좋아하는 아이였다. 해군 간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진해에 살던 일곱 살 무렵 어린 상재는 동네 형과 함께 집 앞 도로에서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쉴새없이 다니는 차들 앞에 무방비로 노출될 터였다. 아슬아슬한 상황인줄도 모르고 괜히 그 형을 치고 노는 데 열중해 있던 그를 기어이 한 승용차가 들이받았다.
그 사고로 온몸에 타박상을 입었고 불행히 한 쪽 다리 발목뼈는 거의 바스러져 버렸다. 상처나 뼈는 다행히 육 개월 정도 기브스를 한 후로 다 아물었는데 이상은 눈에서 왔다. 그의 어머니는 책 같은 것을 볼 때 이상할 정도로 점점 더 가까이 들여다 보는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그래서 병원에 가보니 의사는 가슴 철렁한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이삼년이 지나 눈이 완전히 실명하게 될 것”이며 “현재의 의학수준으로는 도리없다”는.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는 경우는 실제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그가 태어난 후 한 살 때 이미 백내장으로 수술을 받았을만큼 눈이 그리 건강한 편은 아니었는데 사고로 뇌신경이 손상된 것이었다. 의사는 지금 조금 시력이 남아있지만 곧 취학연령이 되는 그를 맹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부모님의 가슴을 찢은 그 말의 의미도 온전히 가닿지 않을 정도로 그는 철없는 아이였다. 부산맹학교에 입학해 기숙사생활을 시작했을 때 그는 다른 시각장애 형들의 양말색깔이나 제 짝을 찾아주는 일들을 기쁘게 했다. 그냥 그때는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불길한 변화에 다른 심리적 충격도 없이 “나는 그래도 이만큼은 보이는구나”했단다.
사고 후 한두 달마다 병원을 다니며 관리를 해도 의사말대로 서서히 시력은 나빠졌다. 물론 그 속도가 너무도 서서히 진행돼 삼학년 때 한 점의 빛도 보이지 않게 됐어도 그리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글쎄, 그가 새로운 상황에도 꽤 적응을 잘 하는 긍정적인 성격이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서울로 전근발령이 난 아버지를 따라 사학년 때는 서울로 와서 서울맹학교에 전학을 왔다. 그리고 앞서 말한대로 밴드부에 들어갔다. 그전 부산에 있을 때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지만 군인아버지의 얄팍한 월급으로는 그의 욕심대로 되기 어려웠는데 다행히 학교에 현악합주부가 있어 그곳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원래 남들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걸 즐겼다니 밴드부는 그의 적성에 딱 맞았다. 교내행사나 외부 손님이 오셨을 때 그는 단복을 입고 무대에 서는 일이 좋아 중학교 때도 밴드부를 계속했다.
그런데 중학교 일학년의 어느 날 다른 선배가 부는 맑고 투명한 악기소리가 들려 무슨 악기냐고 물으니 ‘클라리넷’이라고 했다. 당장 그 악기로 바꿔 하나씩 배워나갔다. 어느 덧 문학의 밤같은 행사에 불려 다니며 독주를 할만큼 실력이 늘었다.
그 때까지는 학교 악기로 계속 했으나 중학교 삼학년 무렵이 되니 그는 자기 것을 갖고 싶어졌다. 그래서 새로 사주십사 부모님에게 말씀드렸을 때 경제여건이 넉넉치 않았던 탓도 있지만 부모님은 그 요청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부도 상위권을 유지하던 그였던지라 앞으로는 공부에 더 전념해야 하는데 새 악기까지 뭐가 필요하냐, 정말 음악 계속 할 거냐고 질문하셨다. 그때까지 부모님은 그가 특수교육을 전공해 같은 장애우들을 가르치는 교사같은, 교육받은 시각장애우가 도달할 수 있는 평탄한 직업을 갖기를 원하셨던 차였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겠다고 딱 부러지게 말씀드릴 수 없었지만 아무튼 클라리넷이 좋고, ‘내것’을 갖고 싶다는 그의 고집을 부모님도 어쩔 수 없어 그는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진로를 결정해야 할 고등학교 시절, 음악을 계속 하고 싶다는 그의 뜻을 부모님은 예상대로 반대하셨다. 그러는 사이 공부에 전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레슨을 받지도 못한 채 시간은 흘러 이학년을 보내고 있었다. 결국 부모님도 그의 고집에 손들어 음대진학이 결정됐고 부랴부랴 레슨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앞으로의 그의 삶에 더 없이 밝은 빛이 되어준 서기영 씨(당시 숙대 강사)를 레슨선생님으로 만나게 되었다.
“제가 입학했던 팔십육년도가 대학입시 과목이 제일 많았던 것 아세요? 자그마치 열일곱과목이었어요. 암튼 당시에 레슨 시작해서 정신없는데 공부까지 그렇게 하려니까 정말 정신없었어요. 아시겠지만 시각장애학교는 침, 안마 같은 직업교육을 중심으로 하니까 저는 따로 공부를 해야했죠. 다행히 대학생 자원활동자들이 공부를 도와줬는데 저한테 온 대학생이 열명이 넘었어요.”
그 대학생들에게 계속 공부지도와 도움을 받아야 해서 방학 때도 진해 집에 내려가지 못하고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했을 정도였다. 입시가 세 달 앞으로 다가올 때부터는 잠도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게 전부였다.
꼬박 사십팔시간을 굶어야 했던 경험도
드디어 입학원서를 내고 면접을 볼 때 그가 지원한 중앙대의 교수들은 그가 지휘자를 보지 못해 전공필수 과목인 오케스트라강의에 참여할 수 없을 거 아니냐고, 그렇다면 수학하기가 곤란하다는 논지의 말을 해 그를 불안하게 했다. 그러나 다행히 결과는 합격이었다. 물론 학업을 수행해감에 있어서 학교에 어떠한 지원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학교 관계자 앞에서 해야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지난 십이년의 학창시절은 맹학교에서만 보낸 것이었고, 이제 다른 비장애우들과 나란히 수업을 듣고 기숙사생활을 하게 되니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는 것이 많아 긴장의 연속이었다. 쉽게 어울리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곧 몇몇 친구들을 사귀어 식당 갈 때 이런 저런 도움을 받았는데 그 친구들이 문무대라고 하는 당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군사교육 시설에 입소해 있는 동안에는 식당에 함께 갈 친구가 없어 꼬박 이틀간 굶었다고 한다. 그의 표현대로 “지금이야 얼굴도 많이 두꺼워지고 능구렁이가 돼서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는 굶으면 굶었지 그런 구차한 부탁을 하면서 식당에 가서 밥을 먹지 못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선생님이 칠판에 써진 것을 가리키며 가령 “여기에서 여기로 가면 되지?”하고 설명하면 그로서는 난감할 뿐이었다. 칠판에 잔뜩 써놓은 것을 친구들이 열심히 받아쓸 동안 멍하니 앉아있어야 할 때는 녹음기도 소용없었다. 그래서 친구에게 노트필기를 읽어달라 부탁해서 그걸 다시 점자로 찍는 과정을 되풀이해야 했다. 수업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예습도 필수였다. 숙제 낼 때 대필을 부탁하긴 했지만 화성분석같은 과목 시험에서 선생님이 불러준 선율을 점자로 받아 적었다가 화음을 달아 다시 선생님께 불러드려 평가받는 것을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시간에 요구받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도 한 학기 후 성적 결과가 과수석이었다고 하니 경탄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간혹 칠판 필기 부분에 대해 교수님이 설명하실 때 그가 잘못 넘겨짚어 웃음바다를 만든 적도 적지 않았지만 전액장학금도 받고 이후에도 계속 차석과 수석을 놓치지 않는 그를 보고 친구들은 먼저 다가와 시험문제에 대해 상의를 해오기도 했다.
거기에는 가족들의 지원도 컸다. 여전히 떨어져 생활하고 있었지만 다른 대학에 다니고 있던 동생은 교양과목등의 레포트 자료들을 찾아 녹음해서 보내줬고 어머니는 교재인 음악사책을 녹음해주셨다. 어머니는 글씨도 작은 음악사책을 하도 들여다보느라 눈이 다 짓물렀다고 농담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가족들이 책임지지 못하는 악보 부분은 여전히 서기영 선생님이 도움을 주셨다. 매주 한 번 있는 소중한 레슨시간을 위해 첫 시간에 곡목이 정해지면 다음 시간까지 그는 악보를 통째로 외워야 했고 거기에는 서 선생님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학기 내내 악보만 달랑 들고 다니면 되는 것을 그는 그렇게 몇곱절의 시간을 쏟아야 하는 벅찬 과제가 되었다.
게다가 역시나 오케스트라 과목이 문제였다. 출석만 하면 그래도 학점을 주겠다고 선생님은 배려해 주셨지만 “그럼 우린 뭐냐”는 비장애 친구들의 불만이 전해졌는지 그 과목 학점은 최악의 학점이 나왔다. 그런 과목 때문에 고전하긴 했지만 졸업 평점으로는 과수석이었단다. 여덟학기 중 단 두 번만 차석이고 모두 수석이었기 때문이다.
시각장애학생이 수석을 했다 하여 당시 일간지에 보도되는 등의 영광도 잠시, 이제 다시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 풍토로는 연주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학부만 졸업해서는 별다른 직업을 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도 외국유학을 결심했고 집안 사정을 고려해 볼 때 학비가 저렴한 유럽쪽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알아본 몇몇 학교에서는 “우리 학교는 시각장애학생이 다닐 만한 시설이 되어 있지 않으니 학업을 도와줄 사람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입학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거듭되는 실망스러운 이런 답변에 몇 개월 하던 독일어 공부를 그만 두고 미국 대학 쪽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오디오, 비디오 자료와 성적표 등을 보냈더니 몇 군데서 합격증이 왔고 그 중의 한 곳이 바로 피바디음대였다. 명성도 명성이지만 저명한 클라리넷 선생님이 그곳에 계셨기에 그는 망설임없이 피바디를 택했다.
“도우미, 네 마음대로 활용해라”
어머니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구십일년 구월이었다. 어머니는 이주 동안 인근 모텔에 묵으면서 상재 씨의 손을 잡고 강의실, 교내 행정사무실, 연습실, 세탁실 등을 차례로 돌며 위치와 세탁기 사용법 등을 가르쳐 주셨다. 그는 어머니마저 한국에 돌아가자 홀로 남겨진 후 첫 식사를 하면서 긴장과 그리움에 목이 메였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히 식당측에서 먼저 직원 중 당번을 정해 그가 식당문에 들어서기만 하면 필요한 지원을 다해주었고, 학장님은 공부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들을 도와줄 도우미를 아르바이트생으로 뽑아 그 비용은 학교측이 부담할테니 얼마든지 그 인력을 활용하라고 했다. 도우미를 하겠다고 나선 학생들이 자신이 어떻게 돕겠는지, 지원 이유, 경제적 상황을 써서 낸 것을 토대로 도우미가 선정됐다. 그리고 활동 후 상재 씨는 도우미가 일한 시간과 평점을 적어주는데 ‘나쁨’이 세 번이면 그 사람은 그야말로 ‘퇴출’이었다. 상재 씨에게 절실한 이런 저런 도움을 받으면서도 두 사람은 매우 명쾌하고 깔끔한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만나게 된 도우미 로라는 수업 시간 필기한 것을 그에게 불러주었고 그것을 다시 점역하고 녹음한 강의내용을 들어서 시간은 오래 걸렸어도 곱절로 공부가 됐다. 초기 문법책에서 배운 영어가 다였던 영어실력이었지만 로라와 얘기를 하다보니 저절로 영어도 늘었다. “그래도 내 돈 나가는 거 아니라고 여러 명 붙여 달라고 그럴 수 없었고 실제로 일주일에 네 시간만 도움을 받으면 됐다”고 그는 말한다.
팔백명 전교생 중의 유일한 시각장애우라는 소문이 났던지 선생님들은 첫 수업 후 그를 불러 자신이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는 칠판에 글씨를 쓸 때 말하면서 써달라는 주문만 했다.
그래도 역시나 문제는 점자악보였다. 물론 시각장애 인구가 많은 미국인지라 점자 악보는 조금 더 흔했지만 대부분 피아노나 바이올린용이었다. 자원활동자가 원하는 곡목을 점역해주는 서비스도 있었지만 여가를 활용하는 자원활동자들인지라 신청 후 손에 받기까지 팔주나 걸린다고 했다.
구원의 손길은 여전히 서기영 선생님에게서 왔다. 미국에 오기 전 서기영 선생님은 아예 점자악보를 찍는 법을 배워 이제 상재 씨가 전화로 곡목을 얘기하면 밤새 점자로 찍어 비행기 속달로 보내주었다. 육칠분이나 되는 긴 곡을 매주 세 곡 정도를 통째로 외워가야 하는 등 수업 부담은 더 커졌고 때로는 수업 전날에서야 악보가 도착해 밤을 새는 일도 많았다.
다행히 학장님은 시각장애우에게 오케스트라 과목을 요구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실내악으로 전공과목을 대신하도록 해주었다. 실내악은 지휘가 아닌 몇몇 단원들의 호흡만으로 진행이 되는 거라 그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계속 독주 연습만 하다가 여러 명이 호흡을 맞춰 연주를 하니 그 자신도 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낯선 환경에서 닥쳐오는 이런 저런 어려움은 긴장 속에 계속됐지만 첫 학기 성적이 또 올에이였다고 하니 그의 실력과 재능은 의심할 바가 없는 일일 게다.
그런 성적이 몇 학기 계속되니 이제 그는 학교 내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지금도 확실히 느끼는 거지만 시각장애우들은 어디 가서 나쁜 짓도 못해요. 눈에 잘 띄니까 사람들이 너무나도 잘 기억하거든요. 두 번째 간 가게에서 벌써 단골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피바디에서도 아마 공부를 잘 못했으면 공부 되게 못하는 시각장애 학생이라고 소문이 쫙 났을 거예요.(웃음)”
비록 적은 액수였지만 사학기 내내 장학금도 받았고 술 한 잔 함께 하러 나갈 친구들도 점점 느는 등 미국 유학생활은 점점 적응돼갔다. 그렇게 석사과정도 무사히 마치자 그는 박사과정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러나 피바디대 박사과정에 동양인이 입학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며 아예 시험도 보지 말라는 얘기를 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피바디대 내에 자자했던 그의 소문을 선생님들도 전해 들었는지 선생님들이 먼저 그를 아는 체 해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면접을 치렀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다른 대학도 있었지만 그는 계속 피바디에 남기로 했다.
구십삼년 구월, 박사과정의 첫 학기를 맞았다. 산 넘어 산이라고, 박사과정 공부는 또 엄청난 공부량을 요구했다. 영국, 독일에서 온 저명한 강사들과 토론식으로 진행되는 음악사관련 수업을 위해서는 사전에 몇 백 페이지의 자료를 읽어 녹음하고 다시 그것을 듣고 이해하는 데만 몇 시간씩 걸렸다. 학기말에는 레포트를 쓰느라 사흘 내내 씻지도 않고 시간 아낀다고 자리를 뜨지 않고 앉아 공부하면서 사발면만 먹어댔더니 친구가 와서 냄새난다고 방문을 열어놓고 갈 정도였단다. 그래도 역시 성적은 전부 에이였다.
국내 첫 클라리넷전공 박사가 되고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년간 수업을 마치고 이제 논문만 남았다. 주제를 프랑스 작곡가 작품들로 잡고 일년 반을 자료조사에 매달린 후 육 개월 예정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자꾸 친구들이 드나드는 기숙사 방이 번거로워 아예 아파트를 얻어 나와 논문 집필에만 열중하기도 했다. 일주일에 두 번, 지도교수를 만나 이런 저런 지적과 조언을 받으면 또 할 일이 산더미여서 밥도 일주일치를 해서 밥통머리에 서서 김치와 젓갈로 일분만에 후딱 먹어치웠고 잠은 늘 두 시간 정도였다. 잠을 쫓기 위해 논문을 쓰는 동안 먹은 홍차만도 천 잔이었다. 카페인중독으로 시커먼 얼굴에, 수면부족으로 나중에는 귀까지 멍멍해져 차소리를 못 듣고 사고가 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짧은 거리였지만 택시를 타고 다녀야할 정도였다.
그렇게 안간힘을 써서 구십칠년 사월 드디어 논문을 제출했다. 곧바로 그 동안 혹사한 위가 탈을 일으켜 일주일간 앓아 눕기도 했다. 어느 정도 회복된 후 친구들과 함께 볼티모어항구에 놀러갔던 순간을 그는 참으로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날씨도 좋고 아무 걱정 없고, 뭔가 이뤄냈다는 만족감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시는데 눈물이 날 정도였다. “아직까지 그때 논문을 넘긴 후 가졌던 이주간의 여유로운 시간만큼 행복했던 순간이 없”단다. 이십이년 동안의 기숙사 생활 끝에 그는 결국 피바디음대 사상 첫 시각장애우 박사, 국내 첫 클라리넷전공 박사가 됐다. 졸업식장에서는 성적 우수학생으로 상금도 받았다.
구십칠년 시월 곧바로 한국에 돌아와 가진 귀국 독주회도 성황리에 끝났고, 그동안 얼마나 공부하고 연주했나를 보여주는 일종의 시험대였던 그 무대 뒤에 오신 선생님들은 곧바로 중앙대에 출강을 제의해 다음 해 봄학기부터 강단에 서기 시작했다. 낯선 시각장애 강사로서 혹시 모를 학생들의 의혹에 답하기 위해 그는 공개 강의를 통해 수강신청을 받기도 했지만 낯선 곳에 놓일 때마다 적응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는데 평균 이년여의 시간이 걸렸던 것을 생각할 때 앞으로의 일이년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사람들의 인정을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지금 그의 일과는 연주하고 가르치는 비교적 단순한 일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요즈음은 시월 육일 독주회를 앞두고 연습에 한창이었다. 아, 빠진 얘기가 있다면 박사과정 일부를 마치고 잠시 귀국했을 때 만난 맘 고운 여인과 결혼을 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행운을 거머쥐기도 했다.
안정된 그의 일상을 보니 과거의 고난이 이제 넉넉히 그에게 소용돼 제 몫을 하고 있는 듯해 보기 좋았다. 그래도 왜 박사과정까지의 그 고생을 자청했는지 굳이 물었다.
“사실 박사과정 입학 당시는 전역한 후 대기업에 다니던 아버지도 퇴직을 하셔서 당장 학비도 적지 않게 부담이 됐죠. 그런 부모님 사정도 알고 박사과정 공부가 얼마나 힘들지 뻔히 예상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공부가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전 늦된 건지 거꾸로 나이가 들수록 음악에 대한 모든 공부가 재밌었어요. 박사과정에서 음악사등에 대해 깊이 파고 들어보니까 클래식 한곡 한곡이 당시 사회 인간들의 엄청난 양의 지식과 구조적이고 조직적인 아이디어의 결과예요. 저는 당장이라도 베토벤 교향곡 하나 가지고 하루에 열 시간씩 한 달 내내 얘기할 수 있어요. 그만큼 깊이가 있는 영역이죠. 그래서 지금도 여건만 되면 하바드쪽에 이삼년 음악사공부를 더 하러 갔으면 좋겠다고 가끔 생각해요.”
클라리넷도 이제까지 한 번도 연주하기 지겹다거나 하지 않았단다. 늘 좋아서 클라리넷과 함께 한다는 이상재 씨. 그를 만나고 나오면서 드는 단순한 생각 한 가지, ‘아, 나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그래서 그가 고마웠다.
글 한혜영 객원기자 | 사진 김학리 기자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