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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람들] 사진으로 단절된 우리 역사 이어가는 조여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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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주 수요일이면 안국동 일본대사관 앞에는 머리가 하얀 할머니 십여 명이 집회를 연다. 일제시대 때 일본군의 성 노예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이 일본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며 벌써 5년째 수요집회를 열어오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21일 오후 12시, 아주 무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들은 어김없이 일본 대사관 앞에 모여서 현수막을 들고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혹시 쓰러지지는 않을까 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생기는데 만성이 됐는지 일본대사관측에서는 내다보는 사람 하나 없다. 근처 상점 주인들도 더 이상 고개도 내밀지 않는다. 이 길을 가끔 지나가는 행인만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다가 다시 발길을 돌릴 뿐이다.
  그런 수요집회에 벌써 4년째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메고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언론사 기자도 아니면서 늘 카메라를 가지고 나타나 할머니들의 사진을 찍는 이 사나이는 누구인가? 사진작가라는 말을 싫어하니까 "사진활동가 조여권"이라고 하자. 그이가 카메라를 할머니 얼굴 가까이 갖다대도 할머니들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할머니들은 그이의 카메라에 만성이 되었나 보다.

 

―언제부터 할머니 사진을 찍었어요?
 "4년 전부터요"

―사진은 언제부터 하셨는데요?
 "대학 다닐 때 사진 동아리 활동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동아리를 뭘 들까 하고 동아리방을 왔다 갔다 하는데 사진동아리방에 걸려있던 한 작품을 보고 남다른 느낌을 받았어요. 게 한 마리가 모래 집 안에 숨어서 모래를 둥굴둥굴 말아 바깥에 버리는 사진이었는데 버린 모래의 형태가 다 제각각인게 그 때의 제 심정과 비슷했던 것 같아요. 사진이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 매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죠.

―졸업 후 바로 할머니 사진을 찍었어요?
 "아니요, 졸업 후 디자인 회사에 들어가서 1년 정도 일하면서 틈틈이 전남 화순에 있는 운주사에 내려가서 사진을 찍었어요. 그러다 회사가 문을 닫고 나서 인사동에 "사진공방"이라는 사진 강습소를 열었죠. 전공인 금속공예 디자인도 하면서요."

―그 다음에는요?
 "그 다음엔 백령도를 찍었어요. 백령도는 북방한계선에 가장 근접한 섬이고 이데올로기 문제와 맞물려 있어서 찍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역사와 관계가 있는 사람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장기수 분들을 찾아갔죠. 그런데 사진하는 사람들이 필요할 때만 그분들을 찾고 작업이 끝나고는 떠나버리면서 어르신들에게 상처를 남겼더라구요. 그래서 장기수분들 사진을 생각만 하고 찍지 못했어요. 그 다음에 찍은 게 할머니 사진이에요."

―나눔의 집 할머니를 찍을 때도 그런 어려움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제가 전문 사진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머니들이 한없이 인자하시고 역사의식도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일반 할머니들과 같아요. 아니 일반 할머니보다 심한 부분도 있어요. 오랜 동안 혼자서 고민을 숨기고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시기도 하죠. 중요한 건 할머니를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거예요. 저는 할머니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눔의 집에 있는 혜진 스님이 "조여권 씨 는 오래 있으면서 사진도 못 찍는다"고 하셔도 개의치 않고 계속 사진을 찍는 거죠."

-사진을 잘 찍고 못 찍는 기준이 뭔데요? 
 " 사진에 할머니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걸 잘 못 잡아내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할머니들한테 어떻게 해달라고 요구를 안 하니까요."

―그건 자연스러운 사진을 찍기 위해서인가요?
 "아니요. 카메라가 들어가면 완전히 자연스러운 거란 있을 수 없죠. 단지 할머니에게 요구하기가 쑥스럽기도 하고 할머니를 대상으로 생각해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얘기하는 게 싫은 거죠. 사진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격도 없어요. 그러니까 오래 찍어도 좋은 사진이 안 나오죠."

―그래서 할머니들 찍은 필름을 나눔의 집에 모두 기증하신건가요?
 "네, 처음부터 기증하기로 마음먹었어요. 필요한 부분에 써야죠."

―그 동안 할머니 사진전도 하셨어요?
 "국내하고 일본에서 몇 차례 했는데 정확히 몇 번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전시장에서 정식으로 한 게 아니라 할머니들이 강연할 때 증언내용을 보충하기 위한 전시였으니까."

―조여권 씨 사진을 본 분들이 느낌이 어떻대요?
 "사진이 좋다 안 좋다라는 얘기보다 할머니들의 생활에 가까이 간 것 같다고 얘기해요.

―찍은 사진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어떤 거예요?
 "할머니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요"

―할머니들 손하고 발도 찍었잖아요. 그 사진 보면 어느 분 손이고 발인지 알아요?
 "알죠, 근데 할머니들은 그 사진, 칙칙하다고 안 좋아하세요."

―그런데도 찍은 의도는 뭐예요?
 "우리 신체 중에서 그 사람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게 얼굴 다음에 손이잖아요. 할머니들이 일본군 성 노예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전에는 그 분들은 평범한 우리 할머니였거나 옆집 할머니였잖아요. 그렇게 평범한 분들의 손은 우리 모두의 손이고 우리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건 할머니들의 운명이고 할머니 문제라고 생각해요. 우리 문제로 보지 않죠. 그 분들의 손바닥에 있는 손금을 보면 누구 못지 않게 평탄하게 살 손금인데 사람들이 운명 탓을 하는 게 싫었어요.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대처할 방법도 나오는데 운명에 순응하는 자세로는 그런 상황에 다시 처한다고 해도 아무런 발전이 없겠죠."

―나눔의 집에 계시는 할머니를 "정신대" 혹은 "군 위안부"라고 부르는데 그런 건 일본군 입장에서 붙여진 게 아닌가요?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학계나 언론에서는 "군위 안부"로 단어를 규정했죠. 그렇지만 운동적 관점에서 군 위안부의 본질을 생각하면 일본군에 끌려가서  학대를 받고 착취를 당하고 여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겼기 때문에 "성 노예"라고 칭하는 것이 맞죠. 그러나 그 표현은 할머니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시기를 두고 사용해야 할 것 같아요. "성 노예"라는 말을 확보할 수 있는 운동도 필요하죠.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 전이라도 그 말을 쓸 준비가 되면 사용 해야죠. 지금도 일부 학자들 중에는 "성 노예"라는 표현이 타당하다고 그렇게 쓰는 분들도 있어요."

―조선적에 대한 사진도 찍고 있다고 들었는데, "조선적"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조선적은 재일 동포의 역사를 알아야 설명이 돼요. 한일합방이 되기 전 우리 국호는 "조선"이었잖아요. 그 때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은 국적이 모두 "조선"이었죠. 그런데 한일합방이 되고 다시 해방이 되고 남한과 북한에 각각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쪽도 북쪽도 택하지 않고 그렇다고 일본국적을 갖지도 않은 사람들을 "조선적"이라고 부르죠. 그런 분이 일본에 약 10만 명 가량 살고 계세요."

―조선적에 대한 사진 작업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1년 반쯤 전부터 다큐멘터리 형태로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동안 쭉 준비를 해오다 실제로 작업을 시작한 건 올 1월부터예요.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일본에 여자친구가 있어요. 작년에 ‘낮은목소리2’를 상영하려 일본에 갔을 때 알게 된 친구예요. 처음에는 조선적인줄 몰랐어요. 나중에 그 친구가 모국방문단으로 한국에 왔을 때 얘기하다 보니 자신이 조선적이라고 하더라구요. 조선적은 모국방문단을 끼고만 국내에 들어올 수 있대요. 전부터 조선적 문제에 관심이 있었으니까 처음엔 그 친구만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그 친구를 통해서 조선적과 관련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됐죠."

―조선적을 가진 분들은 일본에서 어떤 생활을 하죠?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이 받는 차별이 심한데 그중 조선적은 외국인도 아닌 난민취급을 받고 있어요. 여권이 없으니까 외국에 나갈 때는 재입국 허가증을 받아야 하고 일본에서 우리역사와 언어를 배우려고 민족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곳을 나와도 일본 정부에서는 학력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일본에서 공식적인 일을 하려면 검정고시를 보거나 일본학교에 재입학해야 돼요. 조선적을 북한 사람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북한은 일본의 적성 국가이기 때문에 남한사람보다 더 심한 차별을 받죠.
  우리 정부도 그들을 차별하기는 마찬가지예요. 같은 해외동포인데도 미주 쪽에 사는 잘사는 동포는 우리 국민으로 인정하기 위해 최근 "재외동포의 출입국 및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서 지난 6월 국회에서 통과시켰어요. 그렇지만 그 법에서도 조선적, 재중동포, 사할린에 사는 못 사는 동포들은 예외로 하고 있어요. 당연히 입국도 자유롭지 못하죠. 이들이 전체 재외동포 5백40만 가운데 절반이상이나 돼요."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조선적이라는 국적을 지키려는 이유는 뭘까요?
 "그냥 나 자신을 보더라도 대한민국에 태어났으니까 한국인이라고 불리고 싶은 거랑 같은 거죠.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그걸 버리기 싫은 거죠. 또 커가면서 신념에 대한 문제도 작용하는 거고 자기가 생각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잖아요."

―특별한 감정이 있는 분인데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으니까 힘들겠어요.
 "보고 싶죠, 처음엔 상당히 힘들었어요. 그래서 맨날 전화만 했는데 전화요금이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지금은 서로가 기다릴 줄 알아요."

―이런 일을 하시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적 없어요?
 "다른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왔으니까 괜찮겠죠. "입국금지"라는 조선적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은 박성희 감독한테 안기부에서 전화가 왔대요. 조총련에서 어떤 일로 박 감독한테 전화를 했는데 그 날 바로 전화가 온 거죠. 한국에서는 조총련쪽 신호망이 있어서 조총련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면 자동으로 추적장치가 되는 거예요. 조심해야죠."

―근데 이런 일만 하면 돈이 안 되잖아요. 생계유지를 어떻게 해요.?
 "생계유지는 되는데 작업을 할 자금이 부족하죠. 그래서 주위사람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아요. 일본에 한 번 갔다 올 때마다 백만 원 정도가 들거든요."

―생계 문제 때문에 도중에 그만둬야겠다는 생각한 적 없어요?
"많죠. 그런데 위기가 올 때마다 또 그때 그때 도와주는 분들이 생겨요. 지난 겨울에도 많이 어려웠는데 혜진 스님이 도와주셨어요. 너무 어려우면 나눔의 집에 아주 들어가 살면서 작업할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작업하는 거 재밌어요?
 "저 자신한테는 희망을 못 찾는데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희망을 발견해요. 일종의 길을 찾아가는 거죠. 일하고 나서 같이 술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그런 게 즐겁죠. 사람들 때문에 사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할머니도 그렇고 조선적도 그렇고 자기가 택한 사상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생활하는 모습이 굉장히 아름다울 때가 많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 분들의 생각을 잘못 취급하고 한쪽으로만 모는 경향이 있어요. 그분들의 생각이 잘못 드러나지 않게 서로가 노력할 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죠."

―8월에 그 동안 찍은 조선적 사진전을 한다면서요?
 "네, 이번에도 전시관에서 하는 게 아니라 거리에서 할 것 같아요. 8월 4일부터 9일까지 재미교포들이 국내 8개 도시를 돌면서 재외동포관련법의 올바른 개정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는데 저도 포스터와 스티커를 만들어서 함께 할 거예요. 그래서 그 기금마련을 위한 사진엽서도 제작했어요."

―사진이 모두 흑백사진이네요?
 "슬라이드 작업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돈도 없고 흑백 필름이 값도 싸고 내가 직접 작업을 할 수 있는 흑백사진을 찍은 거죠. 또 흑백사진이 주는 은유법 같은 느낌도 좋고 색이 많이 들어가면 색을 표현하기가 어렵고 조면작업도 까다롭고 해서요."

―필름 값이 얼마나 더 싼데요?
 "흑백필름은 100피트짜리를 팔아요. 3만 5천원에서 4만5천원 정도 하는데 그걸 말면 36컷짜리 21롤이 나와요. 그걸 사서 말아서 쓰면 현상이랑 인화도 직접 하면 돈이 많이 안들죠."

―당분간은 조선적 사진전에만 집중하시겠네요?
 "네, 오는 9월에 있는 임시국회에서 법안 개정작업을 하도록 싸워야죠. 만약에 개정되지 않는다 해도 할머니들이 수요집회 때 일본 정부한테 사죄와 조상을 요구하듯이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일본 뿐 아니라 8월말에는 중국 조선적 마을에 가서 인터뷰도 하고 사진도 찍고 또 사할린에서 영구 귀국하신 할머니들이 사는 대구 공동체도 찾아가 사진 작업을 하려구요. 이제는 조선적 뿐만 아니라 조선적 재소동포 등 재외동포특별법에 제외된 동포들 작업을 하려구요. 중국갈 때 자금이 모자라면 노 기자가 좀 꿔주세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다른 사람 사진은 많이 찍어주지만 정작  자기 사진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조여권 씨도 마찬가지였다. 그이는 가족 사진도 거의 없다. 할머니들 사진은 손바닥 발바닥은 물론 5년째 계속하는 수요집회를 거의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찍으면서 왜 정작 가족 사진이 없냐고 묻자 어려서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쭉 혼자 살아 왔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눔의 집 할머니와 조선적 사진 작업을 하면서 그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씩 회복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 가장 찍고 싶은 사진은 올해 칠십을 넘기신 늙은 아버지의 사진이라고 한다.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가족이 다시 함께 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사진으로도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조여권 씨에게 있어서 사진은 헤어진 가족과 머리 떨어져 있는 동포, 그리고 단절된 우리 역사를 잇는 실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실을 움직이는 바늘은 조여권 씨가 만나는 사람들 가슴 안에 있는 희망이다.


글/ 노윤미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노윤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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