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그 길고도 짧은이야기] "할무이하고 저는 한 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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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가족관계에서 가정 안에 장애우가 있을 때 가장 일차적인 조력자는 부모가 된다. 그러한 관계가 피치 못할 이유로 어그러졌구면? 그리고 그 장애 정도가 중증 이어서 매일 다른 사람의 손발을 빌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면?
정말 휘휘 둘러봐도 사고뭉치이어서 시설밖에는 갈 곳이 없는 사람을 뺀 대부분의 장애우들은 나머지 다른 가족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형 없으면 아우의, 언니 없으면 여동생의, 부모 없으면 조부모의 손을 붙잡을 수밖에.
조경호(35) 씨는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있다. 대구지역 장애계에서 이 사람을 모른다면 간첩으로 몰릴 소지가 있지 않을까 싶게 매우 분주하고 활발한 활동을 한다는 조경호 씨. 신의 축복처럼 그래도 온전한 신경을 가진 왼발을 가진 사람의 일대기가 담긴 "나의 왼발 "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이 누렸던 그 축복도 그는 허락 받지 못했다. 어느 한 쪽도 자유롭지 못한 팔과 다리. 그래서 식사나 화장실 처리, 세수 같은 일상사도 모두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야 한다.
물론 그는 스스로 막대기를 입에 물 수 있고, 그 막대기만 있으면 컴퓨터 통신, 전화통화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막대기를 찾아 그의 입 위치에 놓아줄, 수화기를 그의 귀에 대줄 손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대개는 그것이 할머니 백봉선(82) 씨의 손이 된다.
돌아가신 어머니, 재혼해 따로 계신 아버지
― 조경호 씨는 대단히 바쁘신 분이라고 대구지역에 소문이 났던데, 대략적인 일주일의 일과가 어떠세요?
"월요일은 격주로 저희 교회에서 실시하는 장애우와 함께 목욕하기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서 시내 목욕탕으로 가요.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고 오죠. 그리고 매주 화요일은 오후 2, 3시쯤에 출발해서 밀알선교단으로 갑니다. 저녁 7시에 예배를 본 다음에 함께 저녁을 먹고 밤에 돌아오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월요일날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목욕 프로그램과 겹쳤었는데 이젠 화요일로 옮겨 겹치는 일은 없어요. 그리고 토요일은 역시 교회에서 하는 "토요열린마당 " 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죠. 주일은 예배를 보러 가요. 제가 다니는 교회는 대구 남산교회 안에 "미문" 이라는 장애우들만의 모임이 따로 있어서 함께 모여서 독자적으로 예배도 봐요. 거긴 장애우들도 많죠. 요즘은 교회 안에 복지관도 생겨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많이 열고 있어요. 물론 차가 와서 태워 가고, 또 태워다 줘요."(조경호 씨는 언어장애가 있어 긴 답변을 그 자리에서 듣기는 여러모로 곤란했다. 몇몇 질문에 대한 답은 인터뷰 후 통신으로 받은 것임을 밝혀둔다.)
― 장애 때문에 학교는 못 다니셨나요. 검정고시를 몇 차례 보셨다면서요?
"뭐, 제가 장애가 너무 심해서 부모들도 학교 보낼 생각은 못하셨겠죠. 그래도 다행히 어머니가 글은 가르쳐 주셨어요. 그래서 언젠가부터 늦었지만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금 준비를 해서 중학교 입학시험을 봤죠. 의자에 제가 잘 앉을 수가 없으니까 교실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대필을 받아가며 어렵게 시험을 봤어요. 다행히도 합격했죠. 이어서 본 고입시험도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어요. 문제는 고졸 시험인데요. 영어 같은 건 좀 되는데 아무래도 수학 같은 과목은 혼자 공부하려니까 못 따라가겠어요. 고졸시험은 몇 과목이 과락이 돼서 완전히 합격은 못했어요."
― 지금 생활하고 계신 곳이 영구임대아파트인데, 생활비는 어떻게 생계보조수당 받은 것으로 조금씩 해결하고 계신가요?
"(할머니) 아유, 이렇게 가진 게 없어서 죽을 것 같은데 우리가 영세민이 안된다고 하잖아요. 얘네 아부지가 있다고. 애들 아부지는 자기 살기도 어려우니까 한 달에 10만원씩만 임대료 내라고 주고 가는 게 전분데. 그냥 내가 취로 좀 다니고. 얘가 글써서 조금씩 조금씩 돈 타오고 교회 같은 데서 돈 좀 보태주는 걸로 아껴갖고 살죠."
조경호 씨의 아버지는 오년여 전에 재혼을 해서 따로 나가 살고 있다. 경호 씨의 어머니가 저 세상으로 떠난 것은 10여년 전의 일, 경호 씨의 장애를 고쳐본다고 사방으로 다니다가 그런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장애라는 사실을 알고 맥을 놓고 있던 바로 몇 년 후 갑자기 경호 씨의 어머니가 갑자기 병이 나 자리에 눕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병원 신세를 오랜 동안 져야할 정도로 병의 상태가 중했다.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조금씩 세간을 줄여 나가야 했고, 한 동안 그의 아버지는 직장에도 사표를 내고 병간호에 전념한라 살림은 더 어려워지기만 했다.
그런 노력도 허사로 돌아가 결국 어머니가 운명한 후, 이들 가족에게 남겨진 것은 갚아 나가야 할 엄청난 액수의 병원빚이었다.
전해 듣기로는 경호 씨와 할머니 단 둘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조경호 씨에게는 밑으로 세 명의 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도 고등학교 졸업 후 자신만의 힘으로 홀로서야 했기 때문에 다들 힘겹게 생활을 꾸려 나가고 있고 그나마의 월급도 병원빚 때문에 원천적으로 얼마씩 차압되는 경우가 많아 이들 가정의 생계에 물질적인 도움은 주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주요소에서 일한다는 경호씨의 아버지도 새로운 가정을 꾸리느라 또 그도 자유롭지 못할 병원빚 때문에 자식들과 노모가 있는 집에는 그렇게 임대료만을 대주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아무튼 어머니의 병환으로 집안의 늘 어수선했기 때문에 더더욱 경호 씨는 가족들의 관심밖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거의 30여년을 바깥에도 나가보지 못하고 좁은 방안에서 라디오와 TV만을 벗삼아 지내야 했던 것이다. " 하도 답답해서 바깥구경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나 자신도 용기가 없었고,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고 그는 자신의 글에 적고 있다.
막대기 물고 타자기에서 컴퓨터로
― 그럼 처음으로 외출을 해보신 게 언제 였어요?
" 어머니 돌아가시고 여기 아파트로 왔을땐데 <내일은 푸른하늘>이라는 라디오프로그램을 오랜 동안 들으면서 이런 저런 정보는 주워 듣고 있었죠. 서울에 뇌성마비 복지회가 있다는 것도 알았고 라디오에서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길래 기억하고 있다가 한 번 전화를 걸었어요. 그래서 소식지를 받아보게 됐는데 어느 날은 봤더니 오뚜기여름캠프라는 걸 연다고 참가할 의사가 있으면 신청을 하래요. 이번엔 나도 꼭 가보고 싶어서 신청을 했고, 그래서 처음으로 공항에서 비행기표를 사서 서울로 갔어요. 그런데 그 전에 항공사에서 내 장애가 심하다고 표를 못 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표를 달라, 못 준다 하는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표를 받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저 혼자 여행을 하게 된 거죠."
행사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의 사연을 듣고는 다들 잘 왔다고 했고 그 자신도 꿈결 같은 2박3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 후로는 그 동안 방안에서만 지내야 했던 나날들을 스스로에게 보상받기라도 하듯 그는 그렇게 자꾸만 또 나가고 싶어졌다.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면서 그가 얼마나 즐거웠을지 다른 사람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럴 즈음 할머니를 졸라 타자기를 마련해 그는 타자연습을 했다. 손도 맘대로 못쓰는데 무슨 수로 타자를 칠 수 있냐며 반대하시던 할머니에게 칠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막상 할머니가 큰 결단을 내려 타자기를 사주셨는데 손으로 치려니 안되는 일이었다.
타자기를 앞에 놓고 궁리만 하던 어느 날 책을 읽다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어느 장애우가 입에 막대기를 물고 타이핑을 해서 글을 쓴다는 얘기를 읽게 됐다. 그래서 그도 나무 젓가락을 짧게 부러뜨려 그것으로 글쇠를 눌러보았는데 신기하게도 잘 됐다는 것이다. 몇 줄 쓰다보면 부러지고 찢어진 나무들이 입안에 가득 찼지만 얼마 후 상록뇌성마비복지회 간사가 도장을 만드는 막대기를 잘라 써 보라고 했다 그 덕분에 조금씩 타자를 치는 속도가 빠르고 정확해졌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제 타자기가 아니라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는지, 컴퓨터로는 글도 쓰고 통신을 해서 친구도 사귈 수 있고, 암튼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은 글만 쓸 수 있는 타자기에 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정말 간절하게 컴퓨터를 원했지만 그걸 살 돈은 없었다.
결국 그는 서울뇌성마비복지회에 장문의 편지를 썼다. 집안 형편 때문에 컴퓨터를 살수가 없으니 지원을 해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는데 다행히 몇 개월 후 컴퓨터를 지원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기쁘게 컴퓨터를 받아 한글 프로그램으로 기본적인 문서작성도 익히면서 어느 정도 타이핑에 자신이 붙자 컴퓨터통신도 하게 됐다. 장애우통신동호회에서 친구들도 사귀었고, 이런 저런 정보도 더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대구 남산교회내 장애우모임인 " 미문선교회 " 도 알게 됐고 그 모임이 마련한 통신방에서 대표격인 시삽을 맡는 등 매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통신을 하면 전화요금이 많이 나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첫달에 전화요금 고지서를 받아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그렇게 많이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당연히 할머니가 통신하지 말라고 매일 야단이셨죠. 그렇치 않아도 없는 살림에 전화요금 대기도 버겁다고요. 하지만 제가 수필이나 수기를 써서 얼마씩 상금으로 받기도 하고 통신으로 알게 된 분들이 다달이 전화요금 내라고 저한테 좀 보태주세요. 그래서 이제는 당당히 통신을 하죠." 세상이 그에게 열어준 또 하나의 문이었던 통신을 통해 직접 사람과 만나는 일이 가능해지면서 또 방송이나 언론에서 접한 정보들에다 자신의 글솜씨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만 해왔던 일들을 경험해가기 시작했다. 모 출판사의 편지공모에서 1등, 밀알선교회의 글모집에서 뽑히고, 대구방송의 창사 특집 편지쇼에서는 본선에 들어 할머니도 라디오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지리산, 그리고 백두산과 필리핀까지 다녀왔다. 그의 백두산등정기는 대구 장애우 재활수기공모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조경호씨가 일상 생활뿐만 아니라 외출할 때 특히 할머니의 손을 빌어야 할 때가 많지만 이렇게 그는 이제 독립된 자신만의 세계와 활동영역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서로의 키를 키워가는 할머니와 손자
외출이 잦아진 손자 덕분에 할머니도 덩달아 분주해졌다. 통신에 올라온 글에 담긴 경호 씨의 일상사를 통해 늘 그와 함께 하는 할머니와의 사연을 알게 되고 만남에 동행하는 직접 만나 정을 쌓아가면서 사람들은 이제 그보다 할머니의 안부를 먼저 묻기도 한다. 경호 씨가 혼자 외출할 때면 모두 할머니가 어디 편찮으셔서 못오신 건 아닌가 다들 걱정하더란다.
"몇 해 전 과로를 하셨던지 급환으로 할머니가 거의 사경을 헤매신 적이 있어요. 갑지가 코에 혈관이 모두 터져서 코로, 입으로 피를 많이 쏟으시면서 급히 병원으로 실려 가셨는데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요. 제가 통신 게시판에다 할머니를 위해 기도 좀 해달라고 글을 올렸더니 정말 많은 분들이 치료비와 입원비를 도와주셨어요."
이 모두는 남들 보다 훨씬 늦게 세상을 향한 날개짓을 하고 있는 경호 씨에게 할머니가 어떤 존재인지, 다들 헤아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경호 너하고 할머니는 한 몸으로 생각하지."
대구 상록뇌성마비복지회는 경호 씨의 할머니에게 자랑스런 할머니라며 상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다른 한 편으로 손자와 할머니는 조금씩 함께 키를 키워가고 있는 중이다.
― 여기 저기 모임에 나가려면 기본적인 용돈도 들고 신경 쓰이시는 게 적지 않을 텐데 할머니가 그냥 집에 있으라고 간혹 싫은 소리는 안하세요?
"아뇨, 안 그러세요. 오히려 할머니가 저랑 어디 나가는 걸 더 좋아하실 때도 많아요."
조경호 씨는 가수 조용필 씨의 정말 열렬한 팬이다. 그의 CD장에는 조용필의 음반이 1집부터 최신 것까지 빼곡히 꽂혀 있었다. 조용필 씨가 창원에서 콘서트를 한다고 했을 때 할머니와 주위 친구들과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콘서트장에 가는 일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다."
왜 콘서트에만 가면 내가 흥분이 돼고 기분이 좋아지는지 모르겠어요. 완전히 나를 잊고 크게 노래를 따라 부르고 몸을 흔들면 춤을 추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 열광하는 가운데 가슴 저 밑바닥까지 완전히 뚫리는 후련함을 맛본답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곳보다도 콘서트장에 있는걸 좋아하나 봅니다"라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한 번은 조용필콘서트에 갔다가 무대 뒤로 가서 조용필 씨를 만나 악수를 나누기도 했는데 만나고 돌아온 후 "조용필(이랑 악수를 했는데)손이 조그마해 가지고, 참 곱대 "하는 말을 할머니는 지금도 계속 하신다.
― 주위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경호 씨는 어떻게 될 지 걱정 많이 하시던데요. 그런데 경호 씨는 형제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세요?
"저희 형제들에 대해서 별로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내가 살아 있고, 또 동생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 탈없이 무난히 지내고 싶어요. 또 할머니 사후엔 글쎄, 요즘 부쩍 장애우 그룹홈이 많이 생기고 있다고 하는데 저도 그룹홈 같은 곳에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희망사항이죠."
"나를 지켜봐 주세요"
조경호 씨는 인터뷰 후 보내온 글에 "전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여기 저기 많이 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제가 좋아하는 것, 갖고 싶은 것을 한 가지씩 갖게 해주시거든요. 그런 면에선 요즘 전 어느 때보다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의 "행복한 날들"이 이어 질 수 있는 환경을 할머니 사후에도 계속 허락받을 수 있을 지는 솔직히 자신할 수가 없어진다. 만약 대개의 그룹홈에서 입소 자격요건으로 삼곤 하는 "신변자립" 이나 "취업" 등의 조항을 그가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해도 입소가 가능한 그룹홈이 생겨날지는 현재로서는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방 두칸인 그이 집에서 기자는 조경호 씨의 두 동생과 마주치기는 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무거운 병원빚, 재혼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아버지, 그리고 계속 손을 대줘야 하는 장애우인 오빠(형), 이런 가족이 서로의 삶에 오랜 동안 질곡이 되어 왔는지 이들은 생기없이 무표정하고 조금은 무심한 낯빛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 속에서도 조경호 씨는 굉장히 밝은 모습이었다. 자신이 번 돈으로 갓 들여 놓은 듯한 컴퓨터와 오디오기기를 매만지는 그의 얼굴은 더욱 그러했다. 통신에 올린 그의 글들도 훑어보았는데 경쾌한 것이 특징인 통신 언어지만 그 자신은 기쁨으로 충만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 이상으로 노력을 하며 생을 살아가리라고 다짐해 본다.
지금까지 나의 모든 그림자가 되어 주고 계신 할머니에게 늘 감사 하면서…", "사람들이여, 내게 힘과 용기를 주소서. 나를 지켜봐 주소서." 경호 씨는 자신의 글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그이기에 앞으로도 좋은 일이 있겠지, 하는 조금은 무심한 낙관을 해볼 수밖에…
글/한혜영 사진/김학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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