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대구 장애우들의 대모 노재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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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1일부터 12일까지 1박 2일간 진행된 대구시장배 전국좌식배구대회에 참가한 지방 선수들은 다른 지역 대회와 다른 점 하나를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흡사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들처럼 정성이 가득 담긴 듯한 육개장, 비빔밥, 잡채밥 등 푸짐한 식사메뉴. 매끼 그런 맛난 음식들을 마주한 선수들은 이틀동안 집중해서 강행되는 경기로 인해 생긴 심신의 허기를 푸짐하게 채워갔다.
행사장인 대구장애인종합복지관의 그 식당 주방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바로 상록뇌성마비복지회 노재교(73) 회장이다. 회장님이 주방에? 언뜻 이해가 잘 안됐지만 이 특이한 회장님은 그렇게 대회 내내 주방을 지키고 있었다.
"대구에서는 장애계에서 무슨 행사를 했다 하면 대부분 저 분이 저렇게 나서서 푸짐하게 음식을 마련해 주세요.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전국지체장애대학생연합" 이라는 장애학생동아리에서 체육대회를 할 때도 저렇게 늘 정성스럽게 음식을 마련해 주셨죠. 그밖에 다른 문제들이 생겨도 제일 먼저 찾아가서 상의드리고 도움을 받기 때문에 대구지역 장애우들은 저 분을 다들 어머니라고 불러요." 대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헌규 실장의 말이다.
노재교 회장과 장애우와의 인연이 궁금해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장애우 부모이거나 한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특별한 사연은 없다고 했다. 그저 인자한 동네 아주머니 같은 저 분이 어떻게 장애우들과 인연을 맺게 됐을까, 궁금해졌다.
어느 날 접한 일본 잡지의 사회복지사업 관련 기사
노재교 씨는 삼십여 년 전까지 장애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평범한 주부였다. 경북 창녕의 부유한 지주의 딸로 태어나 초등학교 교육을 마치고 가정에서 엄격한 예의범절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요즘도 가끔 뒷걸음으로 물러나 문가로 가다가 문득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미쳤나, 시대가 어느 시댄데…"하며 웃는다니 조신하고 법도에 맞는 몸가짐은 그때 확실히 몸에 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중에는 한동안 남동생과 같이 글을 모르는 동네 사람들에게 글이나 양학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잡지에서 고아원이나 양로원 같은 사회복지시설이 있고 그들을 돌보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기사를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고 했다. "아, 나도 이런 일을 해보고 싶다"하는 생각에 잠시 잠기기도 했지만, 당시 사회적으로 아무런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던 상황이라 뭘 달리 해볼 수도 없었다.
그러다 집안 어른들의 소개로 열아홉의 나이에 김영달(78) 씨와 결혼했고, 결혼한 첫해 딸을 낳아 키우면서 분주하게 살아왔다. 자신의 삼남일녀의 자녀들만 키우려고 해도 여력이 없을 듯한데 결혼 칠년 후에 대구로 옮겨온 이후에는 그래도 공부는 대처에서 하는 것이 낫다며 친인척 자제들을 대구로 불러 자신의 집에서 먹이고 재우며 뒷바라지를 했다. 방 네 개 중에 세 개를 모두 그 친인척을에게 내줬다고 하니 그 뒷수발이 오죽했을까 싶은데 그런게 재미있었단다.
당시 남편은 대구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큰 이발관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여자 면도사를 두자 손님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매일 사과궤짝으로 돈이 한 상자씩 벌리는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런데 막내아들까지 스무살이 넘게 장성한 마흔 일곱의 나이가 되자 그는 더 이상 집안에서 크게 할 일이 없어졌음을 느꼈다. 그저 자식들 자라는 것 보고 자신의 손에 쥐어지는 돈을 이리 저리 쓰며 집안 살림에만 열중하기에는 또 너무 이른 나이인 것 같아 무료한 일상은 그를 다른 한편 조급하게도 했다.
그럴 즈음 어렸을 적 보았던 일본 잡지의 사회복지관련 기사들의 잔영 때문인지 결심한 바가 있어 물어물어 산격에서 열리고 있는 노인학교를 찾아갔다. 그곳에 노인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니 그 노인들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뭐라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갔더니 거기 회장이라는 사람이 그 어려움 속에서 노인학교를 일년 반 동안 운영해 봐도 여길 돕겠다고 찾아온 사람은 제가 처음이래요.(웃음) 암튼 그 회장이 가정상담실을 만들어서 저보고 맡아달라고 했는데 상담을 하다 보니 왜 그리 불쌍한 노인네들이 많은지, 제 주머니 돈을 털어서 연탄이랑 쌀을 사서 조금씩 도왔죠. 그런데 자꾸 그러다 보니 은근히 회장 눈치가 보이는 거예요. 나는 정말 아무 사심없이 한 건데 거기 체계상 내가 그러는게 회장한테는 좀 거북했는 모양이라. 암튼 그래서 아예 내 뜻에 맞는 봉사단체를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나이45세 이상만 가입할 수 있었던 상록봉사단
그래서 만든 것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상록봉사단" 이다. 그는 우선 창립자금으로 삼백만원을 내놓고 주위 사람 가운데 그의 활동취지에 동감을 표해온 아홉사람이 내놓은 백만원씩을 합해 일천이백만원을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작은 집 한 채도 살 수 있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리고 봉사단의 정관에서부터 설립취지문을 갖춰 대구 오봉예식장에서 성대한 창립총회도 열었다. 그 때가 팔십이년 사월 이일의 일이다.
그런데 이 봉사단에는 독특한 자격 요건이 있었다. 나이 사십오세 이상만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보니 그 전까지는 아이들 키우고 살림을 사느라 여유가 좀 부족할 나이"라는 것이 노재교 단장의 생각이었다.
그러한 자격요건에 부합되면서도 월 삼천원씩 내고 참여하는 회원들이 육십여명으로 늘어나자 그는 일선 군부대와 고아원, 양로원에 봉사활동을 나가기로 활동방향을 잡았다. 이런 그들을 대구시에서도 귀한 단체가 났다고 반가워하며 사회단체로 등록을 시켜줬다고 한다.
그들의 의미있는 출발을 지역신문에서도 관심을 갖고 보도했는데 그 보도가 나가고 며칠 지나지않아 몇몇 장애우들이 찾아왔다. 그것이 노 단장과 장애우들과의 첫대면이었다.
"서로 의지하면서 힘들게 걸어온 듯한 지체장애우 몇 명이 찾아와서 "우리는 해를 못 보고 그늘 속에 사는 장애우들입니다.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오", 해요. 그래, 바라는 것이 뭐냐고 물었더니 자기들은 멀리 바깥 구경을 좀 가고 싶다고 그래요. 그래서 처음으로 한 일이 그 사람들이 불러모은 장애우들이랑 버스 두 대를 빌려서 김밥이랑 맛있게 싸서 포항제철하고 현대자동차 공장을 견학한 일이에요. 현대자동차공장에 갔더니 편의시설 같은 것도 하나도 안돼 있어서 사실 걸어가기 좀 위험했는데도 좋아라고 가서 보고 그러더군요.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장애우들을 위한 사업을 더 본격적으로 해야겠구나 생각했어요. 그전에 생각을 못했던 건 그때까지 거리 같은데서 장애우들이 보이질 않았거든요."
또 나중에 상록봉사단의 큰 사업 중의 하나가 된 장애우 무료결혼식 행사도 아주 우연한 기회에 시작하게 됐다.
상록봉사단이 사무실을 마련한 빌딩 앞에서 군고구마 장사를 하는 장애우 남편과 비장애우 부인이 있었다. 조금은 우울한 낯빛으로 그러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 부부와 오며 가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그 부부가 아직 제대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대답이 기억에 크게 남아서 다른 장애우들에게 물어보니 그 부부처럼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생활형편상 피치 못하게 동거를 하는 장애우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봉사단에서는 곧바로 무료 예식 행사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식장은 처음엔 다른 기관의 사무실을 빌렸으나 좀 더 번듯한 무료예식장을 갖추기 위해 사무실도 더 넓은 곳으로 마련하려고 그이는 살던 집까지 팔아 사무실 마련비용을 댔다. 그 외에 상록봉사단원들의 손길을 거쳐 갖은 음식을 마련하고 주례를 해줄분까지 섭외했다. 그렇게 시작해 활동을 마칠 때까지 약 사천여쌍의 무료결혼식을 상록봉사단원들의 손으로 치러냈다.
그렇게 결혼식 행사를 준비해 나가면서 노재교 단장이 다원들에게 강조한 것 한 가지가 있다. "절대로 찾아오는 장애우들의 주눅들지 않게끔 언행에 조심하라고 했죠. 아무래도 여기와서 예식을 치르는 장애우들은 돈이 없어 남의 힘을 빌리는 상황이라 기가 죽어 들어 오는게 사실이죠. 그래, 저희 단원들한테 지나가는 말로라도 "여기 오면 공짜로 다 해주니 복만났지", 뭐 이런 동정어린 말은 절대 하지 말라고 강조했죠. "어서 오세요. 여기서 온갖 사람들 예식 많이 합니다" 하면서 편안하고 떳떳한 마음을 갖게끔 우리가 기살리기 운동을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를 했어요."
실제로 그의 아들들도 다른 장애우들과 똑같이 바로 그곳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내 자식들은 다른 곳에서 결혼시키고 없는 사람만 여기서 하는 거라고 생각하게 하면 안돼니까" 그랬다는 것이다. 그만큼 번듯한 결혼식을 보장하는 곳이었다는 얘기도 된다.
살림에는 일가견이 있는 주부들로 구성된 봉사단인만큼 그런 결혼식 행사에서나 장애우관련 행사에서 봉사단원들이 내놓는 음식은 정말 빛이 났다. 노 단장이 단원들에게 늘상 강조한 것 중에 가장 빈번했던 두 가지가 "남의 말 하지 마라"는 것과 "음식재료 아끼지 말고 정성껏 맛있게 만들어라"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이는 평소에 조용조용 하다가도 다른 단원들의 음식을 맛이 없게 만들어 놓은 걸 보게 되면 목소리가 커졌다. "왜 이렇게 맛이 없노, 참기름 좀 갖고 와라"하면서 잔소리를 했다. 그럼 젊은 단원은 "맛있게 하라, 맛있게 하라 하는데 우야면 맛있게 되나"하면서 곤혹스러워 하더란다. 그러나 "음식은 첫째 재료와 조미료를 아끼지 않고 듬뿍 쳐야 맛있다"는 노 단장의 지론은 누가 뭐래도 확고하다.
그렇게 지체장애대학생 동아리 "푸른샘"이나 다른 장애우단체들이 행사를 할 때 맛나고 풍성한 음식으로 후원을 하게 되면서 장애계에서 상록봉사단의 인지도는 커졌다. 그리고 노재교 회장을 어머니처럼 따르는 장애우들의 하나 둘씩 늘어났다.
뇌성마비복지회 위해 봉사단 해체하고
그러던 어느 날 뇌성마비장애우 몇 명이 자신들의 복지회를 좀 맡아달라며 찾아온 것이 지금의 상록뇌성마비복지회와의 인연의 시작이다.
"그 다음에 그 친구들 있는 사무실에 한 번 찾아가 봤더니 어느 허름한 빌딩의 옥상 가건물에 뇌성마비 장애우 몇 명이 컴퓨터 하나 갖다 놓고 일하고 있어요. 일단 제대로 된 사무실이나 좀 마련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데요."
그건 자연스럽게 복지회 회장직을 수락하는 과정이 됐다. 그러나 두 가지 활동을 병행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그는 상록봉사단을 해체했다.
"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제가 못하게 됐다고 했을 때 후임자를 못구했어요. 저는 그 때 딸이랑 며느리랑 용돈을 넉넉하게 줘서 후원금 외에 모자란 부분은 한 달에 백찰십만원씩 되는 제 용돈을 활동비로 돌려서 사업을 꾸려갔는데 막상 그럼 규모이 활동을 책임질 여력이 있는 회원들이 없으니까 다들 자신없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새로 들어오는 나이 젊은 회원은 별로 없어서 이십년 넘게 활동이 계속되다 보니 회원들 연령이 다들 좀 많아졌죠. 우리가 마흔 넘어 시작했잖아요. 그래도 옛날에 같이 활동하던 단원들이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모여서 우리 복지회를 꾸준히 후원하고 있어요."
일단 자신의 재산을 출자해 마련한 봉사단 사무실을 빼 그중 사천만원으로 우선 복지회 사무실을 마련하고 나머지 이천만원은 은행에 적립해 놓고 간사들 인건비등 운영비로 썼다. 일년쯤 지나니 그 돈도 다 떨어졌지만 다행히 여기 저기서 후원이 들어오면서 복지회 살림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그간 대구시로부터 뇌성마비 아동을 위한 주간보호센터도 위탁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다행히 대구시장 부인이 거액의 후원금을 지원해줘 소원하던 물리치료실도 갖추었다.
"여기 주간보호센터에 와서 물리치료랑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맨날 울던 애가 점점 웃기도 하고, 앉아만 있던 애가 서서 걷기도 하는 걸 보니 너무 좋아요. 대구에 장애우종합복지관이 하나 밖에 없어서 거기 물리치료실도 대기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치료받고 그러면 그렇게 좋아지잖아요. 그런 시설이 너무 없으니까 문제죠. 저희도 대기자가 많아요. 인건비만 마련되면 치료사를 더 늘렸으면 좋겠는데…."
올해 삼주년을 맞았지만 상록뇌성마비복지회는 다른 사업에 대해서는 대구시로부터 공식적인 사업비 지원을 받지 못했고, 아직 제대로 된 인건비를 간사들에게 못주고 있다. 그러나 살림의 안정 보다 우선해 노 회장이 밤낮으로 뛰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뇌성마비관을 짓는 일이다.
원래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단체의 자연적인 힘으로 할 수 없어 남의 손을 빌어야 한다면 애초에 일을 벌이지를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던 그도 뇌성마비복지관을 마련하는 일을 간절히 원했기에 평소에 안면이 있던, 대구지역에서 유지로 소문난 이육주 여사에게는 처음으로 아쉬운 소리를 했다고 한다. 복지관을 하나 짓고 싶은데 후원을 좀 해달라고.
그런데 이리 저리 혼자 재보던 이 여사도 노 회장만큼은 꼭 도와주라고 주위에서 다들 진심으로 충언해 한평당 싯가 삼백만원인 땅 이백평을 기증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그 땅을 팔고 더 넓은 건평이 나오는 곳에 땅을 사두었다.
"그렇게 어렵게 땅은 마련을 해놨는데, 앞으로도 일이 첩첩산중이에요. 그런 복지관 하나를 지으려면 대구시 예산만 가지고는 안돼고 국가예산도 보조가 나와야 한다고 하잖아요. 지금 대구시에서는 청각이랑 시각장애우복지관은 어떻게 지으려고 추진은 하고 있다는데 뇌성마비장애우들도 갈곳이 없어요. 아니 그런 복지관은 땅이 한평도 없대도 국가에서 지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면서 다소 안타까움과 흥분이 뒤섞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이내 "내가 나이가 많아서 활동할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래도 저걸 지어놓고 죽으면 좋겠는데, 못짓고 죽으믄 우짜지, 난 왜 이렇게 가진 게 없나, 싶어요"하고 걱정어린 얼굴이 된다.
복지관 하나 지어서 병원처럼 물리치료 뿐만 아니라 다른 치료도 다 해주고 교육장을 만들어서 컴퓨터도 다 가르치고 직업재활을 할 수 있는 작업장도 만들어야지, 땅이 마련된 그곳이 공단지역이어서 무량 얻기도 쉬울텐데, 하는 조바심과 안타까움으로 요즘 그는 가슴께가 더 묵직하다.
"촌년이 용감했는 모양이라"
자신의 지난 날을 내내 겸손한 몸가짐으로 들려줘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기자를 몸둘바 모르게 했던 그도 잠시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상록봉사단 출범 당시를 회상하면서는 이런 말을 툭 던지고 씩 웃는다.
"촌년이 배우지도 못하는데 똑똑했는 모양이라. 용감하고,그죠?"
그를 인터뷰하면서 한 가지 조금 궁금했던 건 가족들의 지원이 얼마만큼 그를 둿받침해주었을까 하는 점이다. 상록봉사단을 위해 한 차례 집을 팔고 평수가 훨씬 적은 집으로 옮겨가기까지 했는데 그런 아내를,엄마를 가족들은 어떻게 이해했을지.
"제가 원래 봉사활동 하기 전에는 맨날 아팠거든요. 그런데 활동 시작하고 나니 하나도 안 아프고 건강해진 거예요. 그 점만 신기하고 고마웠는지 남편은 내 활동에 대해서 일언반구 한 번도 이의를 달지 않았어요. 오히려 아이들 보고 "너희들 돈 많이 벌어서 엄마 많이 갖다 줘라. 나는 하나도 필요없다"하고 늘 말했어요. 그 말 때문인지 큰아들네는 유학을 가서 며느리가 수퍼나 다른 상점에서 어렵게 돈을 벌며 생활을 하면서도 꼭꼭 제 용돈에 보태쓰라고 돈을 보내줬어요. 그런데 그걸 저는 활동하느라고 다 써버려서 유학 마치고 돌아왔을 때도 집 한칸 마련해주지 못했네요."
가족 얘기가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그는 노태우 전대통령과 멀지 않은 친인척이 된다.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그 사실이 노 전대통령이 대구를 방문했을 때 우연히 알려졌지만 그는 그것을 가지고 무슨 일에 이용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했다. "그때 내가 그걸 무슨 권세라도 되는 것처럼 이용했으면 오늘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겠죠." 이 한 마디로 말을 닫는다.
현재 대구에는 또 하나의 상록봉사단이 있다. 이번엔 상록뇌성마비복지회의 이름을 땄지만 뿌리를 캐보면 원조 상록봉사단의 분신과 같은 조직이다.
"내가 복지쪽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경험은 많잖아요. 그래서 장애아들이 뭐가 답답한지는 금세 알 수 있거든요. 내가 부모라면, 저 아이가 내 자식이라면, 손자라면, 이런 생각을 하니까 제일 필요한 부분이 중증장애아들은 어릴 때 조기치료를 해야 하고 그것도 첫째 견문을 넓혀주어야 하는데 그런 일을 지속적으로 하려면 자원활동자들이 많이 있어야 되겠더라구요. 그래서 복지회 맡고 나서 제일 먼저 봉사단부터 만들었어요. 그 다음에 후원조직을 만들었구요."
이름처럼 늘 푸른 삶, 피가 흐르는 따뜻하고 푸근한 녹색세상을 만들어가는 상록봉사단, 이 이름을 가진 봉사단이 어떤 형태로 있든 그 중앙에는 언제나 노재교 회장이 있을 것이다.
글/한혜경 사진/김학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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