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우리는 완전한 이인삼각의 동행인이죠” > 함께 사는 세상


[사람사는 이야기] “우리는 완전한 이인삼각의 동행인이죠”

실업의 고통을 함께 해쳐가는 이해붕 강선옥씨 부부

본문

 옷깃으로 파고드는 쌀쌀한 바람이 아니더라도 이제 십일월,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따뜻한 호빵과 군고구마가 생각나고, 누구나 조금은 설레는 기분에 휩싸이게 하는 눈과 크리스마스가 있고 새로운 해를 맞으면서 이제까지의 자신을 잠사 돌아보게 만드는 겨울이라는 공간, 삶의 마디에 쉼표 하나 찍게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추운 날씨와 미끄러운 눈을 참아야 하는 겨울은 장애우들에게 결코 반갑지 않은 존재이기는 하다. 그런데 경기도 김포에 사는 이해붕(46) 강선옥(42) 씨 부부는 아예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동면하러 들어갔으면 한단다.
  "직장이라도 있으면 겨울에 대한 부담이나 중압감이 없을텐데 벌써 몇 년째 일없이 놀고 있거든요. 날이라도 덜 추우면 여기저기 나가서 알아보러 다닐 수도 있는데 길 미끄럽고 추우면 그리기도 힘들고, 집에만 있자니 그것도 못할 일이고, 겨울잠을 자면 또 생활비도 안들 거잖아요."
  누구나 "나도 왕년에..."하는 때는 있지만 백삼십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받는 기술자였던 이해붕 씨이기에 이와 같은 실업의 시기가 더 못 견딜 일이다. 게다가 이제는 어딜 가나 나이가 많다고 취업거부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이 마음은 조급하기만 하다.
  그와 부인 강선옥 씨의 사십여해, 그들이 걸어온 그 짧지 않은 시간들을 과연 다른 사람들은 대강이라도 들여다 보고나 그렇게 쉽게 고개를 젓는 것일까? 기자는 기꺼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고자 한다.

 


겨울엔 차라리 동면을 했으면

 

  이해붕 씨의 장애는 어린 시절 결핵균이 척추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됐다. 그것을 치료하자면 뼈에 백금을 붙여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만 듣고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선 그의 부모는 일찌감치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급기야 허리부분에 자리를 틀은 고름이 어깨까지 올라오고 수술 끝에 이천씨씨나 되는 그름을 빼냈다는 믿기지 않은 얘기도 들려준다.
  그 지경이 되어서야 병원을 찾았을 때 척추부위를 절개해서 결핵균을 씻어내기만 하면 되는, 맹장보다도 더 간단한 병이었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부모의 무지로 인해 망가진 자신이 삶이 한스러웠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병원에서는 치료가 너무 늦어 후유증으로 하반신마비장애가 올 것이라고 경고했고, 다행히 그 상황만큼은 피할 수 있었지만 암담하기만 한 삶은 그대로였다. 그 때 그는 자살을 생각했었단다.
  "앞날을 생각하니 정말 너무 깝깝했어요. 그래서 죽으려고 마음을 먹고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데 이제까지 살아왔던 순간들이 퀵모션으로 돌아가더라구요. 정말 그렇게 잠시 잠깐 사이에 삶은 날들을 돌아보니까 억울해서도 이대로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데요. 어차피 죽을 거라면 딱 일년만 더 살아보고 죽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냐 싶어서 생각을 바꿨죠."
  이년 간격으로 재발하는 병마에 자신이 스스로 개발한 치료법을 병행하고 혼자 주사까지 놔가며 병을 다스렸던 그 스물다섯 해까지 그는 집에서 시간만 죽이며 지냈다. 그러다 조금씩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된 어느 날, 그는 혁신과도 같은 변화를 꾀하게 됐다.
  "사춘기를 보내고 스물 다섯 때까지는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되니까 남들한테 창피해서 집밖으로 안나가게 되더라구요. 그 때 살던데가 김포라고 해도 시골이라 라디오도, 신문도 없어서 뭐 주워들을 것도 없었죠. 그렇게 죽은 듯이 살다가 어느 날은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서 무조건 버스를 탔어요. 오백원 들고 버스타고 나가서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그 버스타고 집에오고 그랬죠."
  그렇게 눈으로 길을 익히고 기억하는 법을 알게된 그는 어딜가나 길 찾는 데는 선수라나. 예전에 중국 북경에 갔을 때도 혼자 나가 새벽 세 시까지 술을 마시고 아무 탈 없이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니까? 아무튼 그것이 세상으로의 외출, 그 시작이었다.
  그 와중에 그를 성원해주던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곧이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완전히 혼자였다.
  다행히 일하고자 했을 때 일자리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머리회전이나 손이 빠른 그는 어딜가나 칭찬받는, 공장 내에서 귀한 존재가 됐다.
  "칠년 전에는 형광등 공장에 다녔어요, 처음엔 사십만원도 받았는데 육개월 내에 육십만원으로 오르고 공장장 자리가 떨어지더라구요. 한 달에 정해진 액수 받을래, 한만큼 대가를 받는 걸로 할래 하면 저는 대번 한만큼 가져가는 식으로 하겠다고 해요. 완전히 자본주의식으로 하면 저도 자신 있어요, 손이 빨라서 비장애우들보다 월급을 더 받았다구요."
  그렇게 안산, 포천의 공장지대에도 돌아다녔다. 그가 한 곳에 정착을 못하고 이 공장 저 공장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장애우이기 때문에 받는 임금차별을 참지 못한 때문이었다.
  "한 번은 볼공장 기계실에 있는데 제가 손을 떼면 윗사람 육십명이 놀아야 할 정도로 비중있는 자리였고, 실력도 인정받았죠. 그런데 남들 이십오만원 받을 때 저는 십칠만오천원만 주는 거예요. 남들 이백개도 채 못할 때 저는 사백오십개까지 물량을 하고 그랬거든요.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만큼만 달라고 몇 번이나 요구했는데도 안 들어요. 그래서 한 번 연락도 없이 안나가 버렸는데 높은 사람들까지 찾아와서 저를 달래더군요. 그 때 제 요구를 펴기도 했는데 제 앞에서만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아듣는 척했지 근본적으로는 안 달라지더라구요. 너는 장애우라 적게 주더라도 결국 여기밖에 있을 데가 없지 않느냐는 식이었죠."
  그러다 옮겨 다니게 된 패각단추공장은 당시 패각단추가 인기가 좋아 월 백삼십만원도 받았다. 그러나 부모님도 형제도 외가 친척도 없는 홀홀단신인 외로움도 질기게 따라 붙는 싸움의 대상이었다 .아버지의 주벽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어머니의 삶을 생각하고 애시당초 결혼을 거부했던 그었지만 술로라도 그 허한 가슴을 달래보느라 또 매일 술이었다. 한들 월급을 다 술에 쏟아 부어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러다 그도 남들처럼 결혼이란 걸 해보기로 했다. 한 달에 오만원으로 생활비를 전부 해결할 정도로 지독하게 돈을 모았더니, 돈 이천만원이 금방 모였다. 그러면서 꿈꾸는 배우자는 같은 아픔을 가진, 바란다면 자신 보다 조금만 장애가 가벼운 여성이었다.
  "부부라는 게 인생길을 같이 가는 거잖아요. 이십리 삼십리를 가는데 걷는 속도가 비슷해야지 한쪽만 훌쩍 가버리면 안되죠. 인생의 동행인인데."
  그 때가 삼십대 중반을 넘어섰을 때니 또 "오바" 된 나이가 문제였다. 두어 번 선을 봤지만 일이 잘 안되자 한 장애관련 결혼 벤트업체가 추진한 조선족 여성교포들과의 미팅을 위한 행사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목적지인 연길에 도착했을 때 "남한은 장애우들도 이렇게 비행기 타고 여행을 다니고 그것도 다른 것도 아니라 중국 여성교포랑 결혼하려고 올 정도"라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한 북한 공안당국측의 방해로 연길 처녀들은 만나보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아무튼 이제까지의 과정은 지금의 배우자 강선옥 씨를 만나기 위해 예정된 길이었으니 뭐 아무래도 상관없을 듯 하다.

 


"만나는 순간 점찍었어요"

 

  부인 강선옥 씨는 사진에서 보듯 척추장애를 갖고 있다. 그래도  집안이 먹고 살 걱정을 해야하는 정도는 아니었고, 몸도 건강한 편이었던 선옥씨는 고향인 진주에서 여고까지 마쳤다. 그러나 내성적인 성격에다 취업을 위한 별다른 기술을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던 그이는 삼십대 중반을 넘길 때 까지도 집안에서 가사일만 도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루종일 그렇게 집안만 맴을 도는 그이가 안타까웠는지 주위에서 이제 운전이라도 배워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신체검사를 보러 갔더니 면허취득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주위에 조금 알던 장애우 친구들이 흥분을 하며 서울로 가면 문제도 없이 되는 일이라고 했고, 집안에서도 그 일만큼은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줘 진주에서 올라와 일산에 있는 이모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운전면허에 도전해갔다.
  그 때 만난 사람이 바로 해붕 씨의 친구. 운전을 배우는 선옥씨의 참한 성품을 자꾸 대하다 보니 결혼하겠다고 중국까지 갔지만 일이 성사가 안돼 " 난 아무튼 안 되는 사람인 모양이야"라며 낙심하고 있던 해붕 씨가 생각났을까. 그 친구는 해붕씨와 선옥 씨의 자연스러운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것이 오년 전이다.
  "처음 만났는데 그 때 벌써 속으로 "넌 내꺼" 그랬죠" 이제까지 조금 비장하게 지난 얘기를 할 때와는 다르게 이해붕씨가 싱글벙글 웃으며 들려주는 첫 대면의 순간이다. 그렇게 하루 이틀 만나다가 해붕 씨의 적극적인 구애공세로 육개월만에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갔다.
  진주에 있는 선옥 씨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선옥씨 어머니는 잠시 반대를 했지만 위암으로 병석에 있던 아버님은 조금 마음을 놓는 기색이었다.
 "아마 이 사람 저랑 살면서 돌아다닌 거리가 삼십몇년 동안 돌아다닌 거리의 몇 십배는 될거예요. 그래서 저한테 꼭 붙어 다니려고 해요."
  아닌게 아니라 선옥 씨는 무릎 아래 힘이 없어져 남편에 몸을 살짝 기대야 제대로 편하게 걸을 수가 있다고 한다. 해붕 씨도 선옥 씨를 받쳐 주면서 또 선옥 씨에게 몸을 기대기도 하는, 그렇게  묘한 조화를 이루며 이곳 저곳 함께 다니기를 즐긴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이 채  깨기도 전에 해붕 씨의 일자리가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들어온 근로자들 때문에 임금이 조금씩 떨어지더니 얼마 안 있어 중국에서 수입되는 패각단추로 가격이 완전히 덤핑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될 줄은 모르고 그 전에 해붕 씨는 공장을 그만 둔 후 의욕을 갖고 조금만 패각단추공장을 차렸다. 종업원이래야 부인 선옥 씨와 달랑 둘이었지만 동업자로 나선 사람이 판로를 책임진다고 해서 잘만 되면 칠팔천만원을 손에 쥘 수도 있을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그러나 워낙 투자할 수 있는 밑천이 없었던 그로서는 자꾸 추가 해야하는 설비들이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업자는 약속한 몫의 일을 다하지 않으면서 자꾸 허황 된 얘기만 했다. 그래서 결국 금쪽같은 오백만원만 까먹은 채 걷어치우고 말았다. 이 때가 IMF 직전의 일이다.
   IMF 이후 쏟아져 나온 수많은 실직자들과 함께 그리고 장애우취업박람회나 구직알선기관에 가면 마주치게 되는 장애우들같이 그는 또 다시 실업자 대열에 섰다. 그래서 지역신문이나 각종 구직 정보지를 뒤적이는 것이 하루의 중요한 일과가 된지도 오래다.
  "저는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 장애우 일세대라고  봐요. 암튼 재활협회 다니다가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 생겨서 공단을 드나든지 십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그곳을 통해서 취업이 된 적이 없어요. 저나 집사람이 앉아서는 얼마든지 일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이 정도니 중증 뇌성마비 장애우같은 사람들은 어떨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한 번은 재활협회에서 장애우들이 취업 이전에 필요한 정신교육을 받는 오박육일 프로그램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거기서 만난 백육십명에 이르는 실업장애우들을 보니까 대부분 시게수리나 도장, 목공예 자격증 하나씩은 갖고 있는 것이었다. 예전에 해붕 씨 보고도 그런 기술을 배우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고집스레 그는 안 배웠단다. 그런 업체들 대부분이 영세한데다 장애우 왔다 갔다 하면 보기 싫다고 채용을 안한다는 사실을 그는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돈이 있어 가게 하난 차릴 형편이 되면 아무 걱정 없겠지만" 하고 덧붙이는 그의 말을 기자도 절감하고 있는 터이다.
  또 하나 그이가 이해할 수 없고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는 일은 단지 장애우라고 해서 다른 비장애우들에 비해 급여를 무조건 깎아대는 업주들의 행태다.
  "요즘도 장애우들 임금은 대부분 삼사십만원, 사십만원이 채 안되는 곳이 많습니다. 그런데 장애우들 고용하면 기업에다가 보조금 십여만원씩 주잖아요. 그러면 장애우들 고용해 놓고 그 업체에서는 월급이라고 십여만원 밖에 안주는 거예요. 그런 착취가 어딨어요. 그 월급 받으면 교통비 빼고 국민연금이니 의료보험이니 해서 이것저것 빼고 나면 남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기업에 그 돈주지 말고 차라리 취업하러 다니는 사람들한테나 좀 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장애우들은 자기 몸이 부실하기 때문에, 불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만드는 물건만큼은 최고로 만들어서 내놓고 싶은 마음을 다들 갖고 있어요. 제가 장애우들하고도 일을 많이 해봐서 잘 알아요. 실제로 그런 걸 알기 때문에 장애우를 고용해본 사람들은 장애우만 고용한다구요. 이걸 아는 사람이 하루 빨리 더 많아져야 되요."

 


"우리도 세금내면서 살고 싶죠"

 

  이제 까지  살아온 중에 요즈음이 이해봉 씨는 몸 상태가 가장 좋은 때라고 한다 그래서 기회만 되면 하루라도 빨리 일을 하고 싶다. 부인 강선옥 씨와 함께 열심히 일을 다녀서 둘이 합해한 달에 팔십만원 정도만 받는다면 불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또 서울과 거리가 있는 김포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여기 저기서 거부당하는 설움을 당하고 있다.
  "노점이라도 하지 그러느냐고 그러는데 제가 오래 서 있을 수도 없고 붕어빵 장사라도 할래도 반죽이나 리어커 같이 뭐 좀 무거운 걸 들거나 밀수가 없어요, 집사람도 마찬가지고요. 하체가 부실해서 잘 넘어지고요 그래서 못하죠 그렇다고 앵벌이는 절대로 안 할 겁니다. 장애우라고 해서 자존심까지 버리면 그건 완전히 무녀져 버리는 거예요. 더 이상 장애우들이 동정에 기대서 살아서는 안돼요. 정부에서 생활안정자금이라도 지원해 주든지 일자리를 달라 이겁니다. 이도 조도 아니면, 그러면 가만 앉아서 굶어 죽으란 말입니까. 저도 정말 남의 도움에 기대지 않고 남 도우면서, 그리고 당당하게 세금 내면서 살고 싶어요."
  그는 공장에 다닐 때 자신의 뒤를 이어 들어올 후배 장애우들을 위해 더 이를 악 물고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과연 후배들은 그가 닦아 놓은 터에서 자유롭게 일하고 있는지 그는 자신할 수가 없다.
  오랜 동안 실업 상태를 겪다 보니 낙천적인 그의 성격도 가끔씩 한없는 우울에 빠질 때가 있다. 자신의 아이큐가 전 국민의 오퍼센트에 드는 수준이라는 자부도, 공부를 더 했으면 멋진 시나리오를 하나 세상에 내보였을 거라는 자기자랑섞인 아쉬움도 삶의 무게에 저만치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저는 예전에 일년만 더 살아보자며 자살을 미뤘던 것에 대해서도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안든단다.
  "언제 기회가 되면 기자님이 취업박람회 뒤편으로 가서 한숨만 쉬고 있는 나이 많은 장애우들을  만나서 얘기를 좀 들어보세요. 기가 막힐 겁니다."
거길 가면 또 얼마나 암담한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글/한혜영   사진/김학리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